소설리스트

51 이렇게 연약해서 어떻게 해? (51/154)


#51 이렇게 연약해서 어떻게 해?
2021.12.23.


이른 아침, 연구실.

어제처럼 헤르한의 검사 준비를 하며 이 책 저 책을 들추던 제스는 문득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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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블리니테는 왜 그 책을 보고 있던 거지?’

그 책, 엔릴과 안투 신화 연구.

리엘라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고서의 제목을 떠올리면서 제스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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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보물이라니. 알쏭달쏭한 대답만 하고 말이야.’

엔릴과 안투 신화는 헤르한과 같은 ‘능력자들’의 기원을 담은 이야기였다.

많은 이들이 그저 신비로운 전설에 불과하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실체가 명백한 이야기.

아니, 명백하다 못해, 한때 세상에 전쟁을 일으키고 오늘날까지도 헤르한과 같은 이들이 정체를 숨기고 살 수밖에 없게끔 만든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에 리엘라가 갑자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과연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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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그 여자는 폐하가 능력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 책 좀 읽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문제는 ‘그 여자’가 아니라 그 여자 곁에 있는 ‘그 남자’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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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릴과 안투 신화 연구 말입니까? 아. 예. 맞습니다. 리오타 대사님의 대출 목록 중에 있습니다. 아까 보좌관님과 함께 오셔서 대출해가셨지요. 왜 그러십니까?”

 
리엘라의 보좌관, ‘이엘 바이스’.

제스는 이상하게 그가 신경 쓰였다. 단지 이엘이 자신에게 조금 거만하게 굴어서나, 학자의 자존심 때문에 견제되어서가 아니었다.

제스는 자신의 책상 서랍 안쪽에 넣어둔 문서를 꺼냈다.

이엘 바이스의 신상을 자세히 조사한 것으로, 헤르한이 명령해서 검토하는 중이었으나 아직 보고로 올라가지는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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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스 가문. 평민인 어머니의 성씨를 따른 거고, 아래로 딸린 누이가 둘이나 있는 가난한 집안. 부친에 대한 정보는 알 수도 없고.’

이런 경우는 으레 둘 중 하나였다. 부친을 일찍이 여의었거나, 어느 어중간한 집안의 사생아쯤 되거나.

제스는 복잡한 얼굴로 눈살에 힘을 주었다.

그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대단한 학업을 이루어 낸 수재를 깎아내리고 싶은 게 아니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다른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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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집안에서는 황성 아카데미 입학 추천서는 고사하고 학비도 제대로 댈 수 없었을 거야. 그러면 분명 후견인이 따로 있었다는 건데, 거기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단 말이지.’

그건 리엘라 블리니테의 곁에, 나아가 주군의 곁에 둘 사람의 배경치곤 확실히 찝찝한 구석이었다.

게다가 그런 남자가 ‘엔릴과 안투 신화’ 같은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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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하루 날 잡아서 아카데미 학장이라도 직접 만나봐야…….’

그때였다.

제스의 연구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작은 체구의 시녀 하나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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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야!? 노크도 없이?”

시녀 아이는 숨넘어갈 듯한 와중에 목소리를 쥐어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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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 죄송합니다. 그, 급해서……. 폐하께서……. 빨리 제스 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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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폐하가?”

제스의 표정이 단번에 험해졌다. 가슴도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한두 번도 아닌 긴급호출이건만 매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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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다. 곧장 가. 폐하 상태는? 의식은 있으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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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게……. 폐하가 편찮으신 게 아니라…….”

어물쩍거리는 대답에 다급하게 가방을 챙기던 제스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제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시녀 아이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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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너. 리엘라의 시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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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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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진 분명히 의식이 있었다. 아. 생각해보니 그때도 살짝 제정신이 아니긴 했어. 하지만 말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땀은 많이 흘렸고. 밤엔 열도 꽤 높았는데 아침엔 괜찮았어. 어젯밤 몸살 때문에 감기약을 먹었다던데 혹시 그 영향도 있을까?”

구겨진 블라우스 한 장만 겨우 걸친 헤르한은 전쟁이라도 난 양 긴박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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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뭘 하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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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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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여기서, 대체 뭘 하셨냐고요. 지금 내실에서 격리 중이셔야 할 분이?”

제스의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황제의 기를 죽일 수 있는 거였다면 좋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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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했는지 대답해줘? 정말 몰라서 묻는 거면 대답하고.”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황제의 대답에 옆에 있던 죄 없는 루가 얼굴을 붉히고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제스는 한숨을 쉬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기어이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주군이 미워서 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 떨어진 베개. 침대 주위에 널브러진 옷가지. 뿌리까지 타다 못해 테이블 아래로 흘러내린 촛농까지.

구석구석,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정황 증거들에 차마 눈길을 둘 곳이 없어서였다.

심지어 리엘라는 새하얀 목덜미를 훤히 드러낸 채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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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봐? 눈 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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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진료하라면서요?”

헤르한은 그래도 못마땅한 시선으로 제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간 시녀 루가 한참 낑낑거리며 리엘라에게 옷을 다 입힌 후에야 제스는 리엘라를 진찰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아시온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헤르한은 아시온이 소리를 지르기 전에 곧장 그의 입을 틀어막고 협박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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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는 이따 듣지. 무슨 말 하려는지 아는데. 지금은 보다시피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덤벼봤자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아시온.”

주군에게 삿대질이라도 할 기세였던 아시온은 금방 눈알을 몇 번 굴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비밀 결사라도 된 양 침실 앞을 지키는 루. 침대에 누워 있는 리엘라. 또 그 곁에 경직된 표정의 제스와 자신을 내려다보는 섬뜩한 표정의 주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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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웁……. 웁. 웁.”

아시온은 대충 알겠다는 표정을 한껏 지어 보이며 백기를 들었다.

한참 리엘라의 상태를 살피던 제스가 고개를 갸웃거린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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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도 느꼈지만 검사 반응이 좀 이상하단 말이지. 분명 외상도 없고 내상도 없는데 피로도가 너무 높아. 이 정도 피로도면 진작 피 정도는 토했어야 정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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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피를 토할 정도라고?”

아시온의 얼굴이 파래질 정도로 꽉 붙잡고 있던 헤르한은, 대뜸 그를 놓고 제스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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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의 상태가 그 정도인가? 그냥 단순한 기절 반응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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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기엔 피로도 수치가 너무 높습니다. 다른 징후를 동반하기도 전에 일시적으로 수치가 폭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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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건. 그러니까…….”

제스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달려들었던 헤르한은 다음 말을 잇기까지 한참의 망설임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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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내가 너무, 심하게 몰아붙여서 그럴 수도……, 있는 건가?”

그렇게 헤르한이 힘겹게 물은 것은 애매하게 목적어를 생략한 말이었지만, 제스를 황당무계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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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얼마나 어떻게 심하게 몰아붙였는데, 이 인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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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심하게 그랬다는 게 아니라. 리엘라 입장에선 무리였을 수도 있지 않았겠냐는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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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예. 뭐. 그럴 수도 있겠…….”

어쩐지 이런 대화는 영 질색이라. 제스는 대충 대꾸하고 넘기려다 말고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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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그런데 지금 뭡니까? 제 속마음이 들리십니까? 제게 손을 대지도 않으셨는데요. 설마 또 이상증세가 온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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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는 그 와중에도 침묵한 채로 리엘라만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헤르한이 정말 못마땅해 죽을 지경이었다.

제 몸이 축나는 것도 모르고. 아니. 일부러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주치의인 자신에게 이 여자나 맡기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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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 난 괜찮다. 네가 걱정하는 것과는 달라. 내 몸 상태는 내가 잘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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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릅니다. 이젠 저도 못 참습니다. 지금 당장 폐하를 정밀검진 하겠습니다. 그전까진 리엘라 블리니테도 보지 않을 겁니다. 제 말을 따르시든지, 아니면 리엘라 블리니테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시든지요.”

단단히 결심을 굳힌 제스가 헤르한을 노려보았다.

헤르한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제 관자놀이를 짓누르다가, 조용히 몸을 숙여 리엘라가 덮은 이불을 매만져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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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오셨던 것 맞지? 맞지? 응? 제스 경과 아시온 근위대장님까지 오시고! 아침에 한바탕 난리였잖아.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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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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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아니긴! 루,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해 봐 봐. 응? 정말 어젯밤 폐하께서 리엘라 님 침상에 드신 거야? 정말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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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런 게 아니라!”

루는 제 주변에 잔뜩 몰려든 호수궁 시녀들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헤쳐 나가야 했다.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리엘라를 책임지고 잘 살피라는 황제 폐하의 특명을 받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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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는 급한 업무 때문에 아침 일찍 잠깐 들르셨던 거예요! 그리고 리엘라 님은 감기가 너무 심하셔서요. 앞으로 며칠은 침실에서만 푹 쉬셔야 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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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정말이야? 그러면 지금 영양식이라도 챙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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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 돼요! 전염성이 높은 독감이라서요! 제스 경께서 절대 침실에 아무나 들이지 말라고 하셨어요!”

황제가 시킨 말 그대로 시녀들을 진정시켜놓은 뒤에 다음으로 루가 향한 곳은 리엘라의 집무실이었다.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서니 구석에서 혼자 조용하게 서류를 보던 이엘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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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합니다. 저……. 폐하께서 이것을 전하라고 하셔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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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요?”

적막한 집무실 안에 이엘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혼자 지키고 앉아 있는 집무실은 넓다 못해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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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님이 함께 계실 땐 꽤 시끌벅적하고 꽉 찬 것처럼 보였는데.’

루는 조용히 생각하며 이엘의 눈치를 살폈다.

황제가 직접 써준 교지에는 리엘라가 병가를 내게 되었으니 당분간 보좌관 선에서 업무를 대행해 처리하라는 명령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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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님이 많이 편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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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 아니요. 그냥 가벼운 감기에 걸리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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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 아직도 다 떨어지지 않은 겁니까? 다른 증상은요? 의사는 왔다 갔습니까?”

루는 이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리엘라가 평소 이엘을 많이 믿고 의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루였다. 그러니 이엘에게라면 사실을 알려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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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 그럼 저는 이만!”

그래도 황제 폐하의 명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

그날 저녁, 비밀 통로의 존재를 몰랐던 루는 리엘라의 침대 옆에서 깜빡깜빡 졸다가, 난데없이 나타난 황제를 보고 꺅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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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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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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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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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종일 주무셔요. 제스 님 말씀이, 그래도 아침보단 피로도 수치가 많이 떨어졌다고, 섣불리 다른 약을 쓰면 더 위험할 수 있으니 이대로 경과를 좀 더 지켜보자고…….”

루의 설명에 헤르한은 어이없는 웃음을 삼켰다.

제게는 리엘라를 내다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협박해대더니 그새 다시 와서 리엘라를 살피고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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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저는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루가 헤르한에게 리엘라의 곁을 내주고 씩씩하게 물러나는 동안, 헤르한은 아직도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인형처럼 잠든 리엘라를 물끄러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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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리엘라는 네, 폐하, 하고 당장이라도 다정하게 대답할 것처럼 평화로웠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한입에 머금고 싶도록 붉고 탐스러운 입술도 다소곳이 다물려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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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연약해서 어떻게 해?”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의 옆에 누워, 그녀를 품듯이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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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여리고 약해서, 이제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하나.”

봄날에 처음 피어난 꽃잎을 어르는 것처럼 아주 소중하고 정성스럽게 대했다고, 딴에는 생각했는데.

그것조차도 리엘라에겐 감당하기 버거웠으리라 생각하니 헤르한은 죄책감에 아찔했다.

힘들면 얘기를 했어야지.

아닌가. 얘기했더라도 이성을 놓아버린 그때 제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으려나.

결국, 다 자기 탓이라는 생각에 헤르한은 괴로웠다. 무릎을 꿇고 빌어서 리엘라가 일어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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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보아라. 응? 리엘라.”

투정인 듯. 애원인 듯. 헤르한은 리엘라를 보챘다.

그래도 리엘라가 대답이 없자 리엘라의 눈에 애틋하게 입을 맞추었다. 이 입맞춤이 네 잠든 눈꺼풀을 깨우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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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했으니까. 앞으로는 널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길 테니까. 그만 일어나서 나를 좀 봐.”

아이처럼 떼를 써도 미동하지 않는 리엘라의 모습에 헤르한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무렵, 문밖에서 루가 헤르한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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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송구합니다만. 보좌관께서 찾아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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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 시간에?”

리엘라를 품은 헤르한의 팔 한쪽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루는 안을 보지 않고도 용케 분위기를 눈치채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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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아서 둘러대겠습니다.”

헤르한은 한참 언짢음이 가시질 않아 인상을 쓰고 있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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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문을 열어라.”

루는 당황한 듯했지만 곧 알겠다고 대답했다.

헤르한은 문 앞으로 나아가면서 일부러 제 옷깃을 파헤쳐서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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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님. 늦은 시간에 실례인 줄 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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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엘.”

이윽고 열린 문. 헤르한은 문간에 기대서서 자신을 휘둥그레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를 색정적으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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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는 조금 전에 잠들었는데. 무슨 용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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