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 그 손 치워 (49/154)


  • #49 그 손 치워
    2021.12.16.


    리엘라를 따라 황실 서고에 들어간 이엘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웅장한 실내에 낮은 숨을 삼켰다.

    황실 서고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도 컸다. 재질에 따라 책을 알맞게 보관하기 위해 빛이 드는 곳과 그늘진 곳의 구역이 나뉘어 있었고 그 구역 안에도 주제별, 저자별, 연도별로 온갖 서적이 정갈하게 분류되어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 심호흡하자, 쌉쌀한 책 냄새가 들숨에 섞여 이엘의 코끝을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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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뭐라고.’

    별것도 아닌 것에 괜히 울컥해져서 곤란하다 싶을 때쯤, 옆 책장을 돌던 리엘라가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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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엘 경. 책 다 가져왔어요.”

    리엘라는 제 눈앞을 가릴 정도로 많은 책을 품 안에 한가득 안고서 낑낑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엘은 그 모습이 웃기고 어이없어서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그가 책을 반절 이상 덜어내 들어주니 그제야 시야가 트인 리엘라가 말갛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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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찾는 책이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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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뇨. 그냥 구경하던 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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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엘 경은 황성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했죠? 거기에도 여기처럼 큰 도서관이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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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뭐…….”

    이엘은 말끝을 흐렸다.

    리엘라의 말이 맞았다. 그가 졸업한 황성 아카데미에는 황실 서고 못지않은 도서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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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었나. 있었지. 아마도.’

    사실은 기억이 흐릿했다.

    황성 아카데미에서의 날들은 온통 끔찍한 기억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수학했지만 그의 가문을 향한 지저분한 꼬리표와 동료들의 눈총만이 따라붙던 시절이었다.

    그는 도서관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었다. 처음 몇 번은 눈치를 무시하고 들어가도 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출입증을 압수당했다.

    이엘은 출세엔 관심이 없었다. 단지 책이 좋아서. 그런데 몰락한 집안엔 책 한 권을 살 여유도 없어서. 그래서 간신히 얻어낸 장학금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뿐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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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어릴 적 보물 1호는 ‘엔리와 안’이었어요.”

    별로 유쾌하지 않은 기억에 이엘의 속이 갑갑해지려는 때에, 뜬금없이 묻지도 않은 얘기로 그의 관심을 돌린 건 리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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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리와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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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을 날고 힘도 세고 입에서 불도 뿜는 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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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엔리는 안이랑 같이 있으면 더 강해지거든요. 대단하죠?”

    애틋한 추억에 젖은 그녀는 꼭 작은 동화책 하나를 보물 1호로 아끼던 아이 때로 돌아간 것처럼 순수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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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리오타 왕국에 있을 때 용병이었단 얘기, 들으셨나요?”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데마다, 만나는 이마다 모두 이 여자에 관한 얘기를 하는데 당연히 모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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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가난한 용병단이었거든요. 끼니도 거를 때가 많았으니까. 책은 당연히 살 수도 없었어요. 정말 우연히 갖게 된 그 책도 낱장이 다 뜯어지도록 읽고 또 읽었죠. 하도 본 걸 또 보니까 아무리 소중히 다뤄도 책이 다 망가지더라고요. 그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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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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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세상에서 제일 큰 서고를 가지게 된 거 있죠. 참 신기하고 감사하게도.”

    그 순간 누구를 떠올리는 것인지 리엘라의 눈동자 안에 아득한 행복이 일렁거렸다.

    이엘이 그런 리엘라를 물끄러미 보자, 리엘라는 뒤늦게 상념을 떨치며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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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엘 경은 다른 큰 도서관도 많이 가보셨겠지만요. 저한테는 여기가 마냥 보물창고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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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당신과 거의 비슷합니다.’

    이엘은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그가 바라보고 있던 책장 어딘가에 꽂힌 낡은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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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있네요. 대사님의 보물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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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이엘은 자신이 꺼낸 책을 리엘라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리엘라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책 제목을 훑었다.

    [엔릴과 안투 신화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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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사님이 보셨던 건 어린이용 동화로 각색된 판본이었을 겁니다. 원전은 바로 그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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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하늘도 날고 힘도 세고 입에서 불도 뿜는 엔리 이야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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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요. 하늘도 날고, 그거. 정확히는 세상을 흔들었던 신들에 관한 이야기죠.”

    이엘은 웃지 않으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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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여긴 진짜 보물창고였네요!”

    하지만 그 낡고 지루한 책 한 권이 뭐라고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어버리는 리엘라를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을 따라 무방비하게 헛웃음을 터트려버리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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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이엘은 여느 날처럼 일찍 공관으로 출근해 그날의 일정을 정리했다.

    리엘라가 편히 업무를 볼 수 있도록 미리 서류를 다 확인하던 그는 리엘라의 책상 한구석에 ‘엔릴과 안투 신화 연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어젯밤 업무를 다 마치고도 계속 책상에 앉아 사부작거리더니 이 책을 보고 있던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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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양은 아직입니까?”

    그때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 번, 자신이 모시는 대사님을 ‘리엘라 양’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말에 또 한 번, 이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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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대사님은 곧 오실 겁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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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의 주치의인 제스라고 합니다. 그쪽이 그 ‘이엘 바이스’?”

    악수를 나누는 게 자연스러울 상황이었지만, 제스와 이엘은 서로를 빤히 보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제스’와 그 ‘이엘 바이스’.

    직접 대면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둘은 꽤 전부터 서로의 명성을 익히 들었고, 어느 정도의 간접적인 인연도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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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리엘라 양의 보좌관 명패를 달고 만나는군요. 내 연구실로 스카우트 제의를 할 때는 그렇게 들은 체도 안 하시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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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합니다. 죄송합니다. 숫자 놀음은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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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지루한 문관 타입이시다? 과학의 아름다움을 모른다니, 딱해서 이를 어쩌나.”

    검은 머리카락이 눈썹을 가리는 이엘과 은발을 깔끔히 빗어 넘긴 제스 사이에 불꽃 튀는 신경전이 이어졌다.

    그들의 때 아닌 대치 상황은 리엘라가 활기차게 등장하고서야 겨우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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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엘 경. 오늘도 좋은 아침이에요! 어라……. 제스 경은 웬일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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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사님을 뵈러 오셨답니다. 두 분, 편히 대화 나누십시오.”

    상대에게서 먼저 시선을 거두고 자리를 피해준 것은 이엘이었다.

    제스는 집무실을 나가는 그를 끝까지 집요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리엘라에게 눈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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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건 아니고 폐하에 관해서 확인할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폐하께서 정밀검진을 앞두고 있단 얘기는 들으셨을 테고…….”

    제스는 리엘라에게 몇 가지를 질문했다. 리오타 왕국에서 헤르한이 발작을 일으켰을 때의 상황이나 그 뒤에 헤르한과 함께 있으면서 보고 겪은 징후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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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알겠습니다. 검진에 잘 참고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리엘라의 대답을 다 듣고 메모하기를 마친 제스는 그대로 돌아서려다가 말고 질문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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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당신 보좌관에게 쓸데없는 얘길 한 건 아니겠죠? 폐하의 능력이나 병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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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아니요. 전혀요!”

    리엘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엘을 믿고 따르는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폐하에 대한 기밀까지 실없이 얘기할 사람으로 보였나.

    서운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제스는 대체 언제쯤 자신을 믿어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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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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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면 됐습니다.”

    성의 없이 이어진 말은 더 얄미웠다.

    의심한 것에 대한 사과는 한마디도 없이 ‘아니면 됐다!’ 하고 의뭉스럽게만 굴면 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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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책은 뭡니까? 엔릴과 안투 신화 연구. 왜 갑자기 저런 걸 보십니까?”

    그때 제스가 또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리엘라는 그에게 맞서듯 똑같이 눈을 가늘게 뜨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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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보물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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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요,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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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모르시면 됐어요.”

    리엘라는 흥, 하고 제스에게서 돌아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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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일찍 잘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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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그러면 바로 수면제를 가져오겠습니다.”

    아시온은 후다닥 가져온 약을 주군에게 건넸다.

    그 수면제는 제스가 헤르한의 몸 상태에 맞추어 만든 특제 약으로, 검진을 준비하는 동안 헤르한이 꼭 챙겨 먹어야 할 약 중 하나였다.

    헤르한이 보란 듯이 그 약을 한입에 털어 넣자 아시온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아시온의 오늘 일과는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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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폐하.”

    아시온은 상냥한 굿나잇 인사를 끝으로 물러났다.

    헤르한이 혓바닥 아래 머금고 있던 알약을 퉤- 하고 뱉어낸 건 아시온이 나간 문이 완전히 닫힌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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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신 안정. 그래. 심신 안정이 중요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는 헤르한의 동작엔 일말의 지체가 없었다.

    옷을 갈아입을 여유는 없었다. 그는 잠깐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칼과 옷깃 정도만을 급한 대로 매만진 뒤에 침대 옆, 벽에 붙은 수납장을 열었다.

    수납장 안에는 몇 벌의 실내복과 가운 등이 걸려 있었다.

    헤르한은 한번 뒤를 돌아 살폈다가 수납장 안으로 팔을 쑥 뻗었다. 그대로 힘을 주어 밀자 수납장 안쪽이 밀리며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

    헤르한은 결연한 표정으로 그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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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하게 됐다. 아시온. 네가 눈치챌 틈도 없이 금방 돌아올게.’

    아시온은 어째서 호수궁이 황후궁으로 쓰였는지, 또 어째서 헤르한이 무리해가면서까지 리엘라를 호수궁으로 옮긴 것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의 침실에서 호수궁의 침실로 이어지는 은밀한 통로의 존재를 아는 건 역대 황후와 황제뿐이었다. 헤르한도 그 사실을 아주 어릴 적, 어머니의 호수궁에서 뛰놀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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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신이 평화로워야 검진 결과도 제대로 나온다잖아.’

    헤르한은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음을 안정시키자고 리엘라를 떼어놓은 덕택에 오히려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으니까.

    음침하게 생겼다던 보좌관은 알고 보니 절세미남이고, 리엘라는 그런 남자와 온종일을 함께 지내며 정이 두텁다지 않은가. 심지어 그녀의 옛 연인이었던 사내마저 황실을 향해 오고 있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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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이라도 잠깐 봐야 이 심신이 안정되겠어.’

    헤르한은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호수궁, 리엘라의 침실까지는 이 걸음으로 10분 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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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까지는 괜찮았어요. 정말이에요. 얼굴이 뜨거운 것도 날이 더워서 그런 줄 알았죠.”

    침대에 누운 리엘라가 오물오물 억울한 항변을 하는 동안 이엘은 리엘라의 입에 물린 체온계를 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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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도. 미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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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 부르지 말아요. 특히 제스는 절대 부르지 마세요. 분명 잔소리만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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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그 사람 부를 생각은 저도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그쪽으로는 생각이 통해서.

    리엘라가 안심하며 웃자 이엘이 그런 리엘라를 걱정스레 흘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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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불편한 곳은 정말로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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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그냥 조금 어지럽고 으슬으슬하고. 그게 다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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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하시네요. 한여름의 몸살감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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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하. 갑자기 안 하던 공부를 한다고 그랬을까요?”

    리엘라는 꼭 남 얘기를 하듯이 태평하게 웃었지만 이엘은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리오타 왕국에서 있었던 일. 왕녀와의 악연. 그 왕녀가 이번에 데리고 온다는 약혼자의 정체. 그 기구하고 다사다난한 사연들을.

    씩씩한 척해도 이따금 마음이 힘들 것을 알았기에 이엘은 리엘라를 더 다그쳤었다. 일부러 정신없이 일감을 몰아주고 공부를 시켰던 건 그 때문이었다. 리엘라가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도록.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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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가 대사님을 너무 무리시켰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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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무슨 말씀이 그래요. 몸 관리 못 한 제 잘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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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뇨. 제 잘못이 맞을 겁니다. 보통 문제가 생기면 다 제 탓이었으니까.”

    리엘라는 미열에 어지러운 가운데 가만히 이엘을 응시했다.

    강한 척하지만 때때로 그늘진 남자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맞았다.

    매정하게 휘몰아칠 땐 언제고, 그새 짙은 자책으로 어두워진 이엘이 안쓰러웠다. 그 어두운 모습이 꼭 한때의 자신 같아 익숙해서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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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때는 잘 모르겠는데, 지금은 아녜요. 저는 좋았어요. 이엘 경이 엄격한 스승이라서.”

    그 말에 이엘이 죄책감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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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내일도 오늘처럼 많이 도와주세요. 오늘 밤은 푹 쉬고 꼭 잘 나을 테니까요.”

    이엘은 자신을 보는 리엘라의 시선이 참 더웠다.

    후덥지근한 여름밤이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리엘라의 붉은 눈동자가 온기를 가득 담고 있어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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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겠습니다.”

    다시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이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리엘라의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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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열제랑 영양제를 몇 개 챙겨두겠습니다. 시녀들에게 말해둘 테니 꼭 드십시오. 지금은 열이 그렇게 높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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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손 치워.”

    그때였다.

    사람이 나올 턱이 없는 방 한구석에서 검은 실루엣이 튀어나왔다.

    리엘라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제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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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손 치우라고 했다.”

    검은 실루엣이 다시 한번 섬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어둠을 뚫고 서서히 다가오는 그에게서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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