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 약의 정체 (46/154)


#46 약의 정체
2021.12.05.


얼떨떨하게 리엘라의 등을 쓸어주던 헤르한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자신을 달래주던 손길이 멎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절로 감정이 북받쳐서 그런 것인지, 리엘라는 아예 흐느끼면서 두서없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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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마세요. 폐하. 저만 두고 그냥 떠나버리시면 안 돼요. 그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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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헤르한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몸을 꼭 끌어안고 떠는 리엘라는 필사적이었다.

절대로, 어디로도 헤르한을 보낼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붙잡은 리엘라의 팔이 단단하고 굳셌다.

헤르한은 당황스러웠다. 이렇게나 힘주어서 먼저 안겨 온 적은 없던 여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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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제가 뭘 해드려야 할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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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진정해. 난 괜찮아.”

목에 맨 크라바트가 너무 갑갑해서 그랬던 거라고 사실을 해명했는데도 리엘라는 쉽게 진정하질 못했다.

헤르한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리엘라의 등을 토닥여주기 시작했다.

쉬이, 그래, 옳지 하며 어린아이 달래듯 오래도록 상냥하게 어르는 목소리에 리엘라의 떨림이 차차 멎어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에 겨우 헤르한에게서 팔을 풀고 고개를 든 리엘라는 엉망이었다. 종일 물먹은 꽃처럼 방긋방긋 웃던 얼굴이 그새 수심에 젖어 애처로웠다.

헤르한은 그제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리엘라가 그동안 무엇을 참고 있었는지. 자기 앞에선 있는 힘껏 행복하게 웃으면서, 대체 무얼 그리 혼자 삭이고 있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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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서웠나? 내가 갑자기 죽을까 봐.”

꾸중이라기엔 너무나 다정다감한 말에 다시 서러움이 치밀었는지 리엘라가 입술을 꾹 물었다.

헤르한의 시선은 흘러내린 옷자락 덕에 훤히 드러난 리엘라의 새하얀 등허리에 닿았다.

얼마나 놀랐길래, 부끄러움도 많은 여자가 이렇게 한달음에 뛰쳐나왔나.

헤르한은 자신의 재킷을 벗어 리엘라에게 둘러주었다. 그때야 리엘라는 자신의 부끄러운 차림을 상기하고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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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가 널 겁준 모양이군. 그래서 그동안 몰래 마음고생 하고 있던 건가? 내가 어느 날 네 앞에서 사라질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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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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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해라. 다시 듣고 싶다.”

리엘라는 헤르한을 원망하듯 바라보았다.

기껏 자신을 달래줘 놓고 왜 또 울리려는 것인지 황제의 심보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리엘라는 아직 울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곤 오롯이 자신만을 담은 채 불타는 푸른 불꽃을 향해,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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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무서워요.”

사실은 내내. 당신 앞에서 밝게 행동했던 그 모든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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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무서웠어요. 폐하를 잃고 싶지 않아요. 폐하가 계속 절 봐주셨으면 좋겠고, 제 이름을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폐하가 사라진다는 건 생각도 하기 싫어요. 폐하가 계속 곁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폐하가…….”

폐하가 좋아요.

봇물 터진 듯 쌓였던 감정을 마구 쏟아내던 리엘라는 마지막 말 앞에야 번뜩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절대 폐하 앞에서 먼저 무너지지 말라던 제스의 경고는, 바로 이런 상황을 염려해서 한 말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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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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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그런데 헤르한은 고개 숙인 리엘라에게 도리어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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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내가 널 이리 슬프게 만들었는데 난 그런 네가 예쁘기만 해서.”

그 말에 놀란 리엘라가 고개를 들자 헤르한이 리엘라의 볼을 감싸고 허리를 숙였다.

서서히 다가오는 헤르한의 얼굴에 리엘라는 동그랗게 떴던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러자 눈망울 가득 그렁그렁 매달려 있던 눈물이 둥근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눈물이 입가에 배었을 때쯤 헤르한의 입술이 리엘라의 입술 위에 포개어졌다.

두 입술은 촉촉하게 눈물을 함께 머금은 채 서로를 탐했다.

애틋한 입맞춤이 이어지는 동안 리엘라는 헤르한을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왠지, 헤르한이 절대 자신을 두고 떠나버리지 못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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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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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흠. 다 끝나셨습니까?”

별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아시온은 옷매무새가 살짝 흐트러진 채 나오는 두 사람을 뻔히 보고도 못 본 척 허공을 향해 헛기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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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새 폐하께서 황성 시찰을 나오셨다는 사실이 퍼진 모양입니다. 이곳 직원들은 제 선에서 막았습니다만, 가게 바깥으로 황성 시민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아시온의 말대로 창밖으로 보이는 가게 바깥 거리가 인산인해였다.

젊은 새 황제를 보기 위해, 또 황제가 친히 데리고 나왔다는 묘령의 여자를 보기 위해, 목을 길게 뺀 시민들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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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돌아가요.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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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 않겠어?”

아쉬울 건 없었다. 황성이든 궁 안이든, 헤르한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리엘라는 그런 속을 내비치는 대신 어리광을 부리는 쪽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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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또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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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다음에 또. 언제든 네가 원할 때.”

헤르한이 리엘라의 손을 꼭 잡았다.

아시온은 두 사람을 후문에 대기시켜놓은 마차로 안내했다.

헤르한과 리엘라가 나란히 탄 마차는 황궁 성벽을 넘어 호수궁까지 직행했다.

호수궁 앞에는 루를 비롯한 몇몇 시녀들이 나와 있었다. 곧 리엘라가 도착하리란 연통을 받고 마중 나와 있던 그녀들은 황제가 리엘라와 같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뒤를 돌아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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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가봐야 해.”

마차 아래로 내려선 헤르한은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궁으로 돌아가자마자 제스와 함께 의논할 것이 있다는 건 이미 아시온이 설명한 바였으므로 리엘라는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주저하는 건 헤르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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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하는데 발이 안 떨어지네. 또 내가 사라졌다고 네가 울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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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폐하!”

리엘라는 지켜보는 시선조차 잊고 헤르한에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헤르한은 그제야 경직되어 있던 얼굴을 풀고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리엘라는 한숨을 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가뜩이나 여러모로 놀림당하고 있는데, 이렇게 또 놀림거리를 추가해버리고 말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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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때문이잖아요. 그러게 왜 넥타이를 그렇게 꽉 매셔서……. 전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그랬던 건데, 그걸 그렇게 놀리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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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래. 알았다. 다 내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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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다는 게 아니라…….”

헤르한은 리엘라의 항변조차 간지럽다는 듯이 웃어버리고는, 제 옷깃을 만지던 손으로 이번엔 리엘라의 머리칼을 매만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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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걱정 안 하게 빨리 다녀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손끝에 감은 붉은 머리카락에 헤르한이 입을 맞추었다.

머리카락에 신경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보드랍고 간지러울 건 뭐람.

살짝 고개를 숙인 리엘라의 볼이 예쁜 장밋빛으로 물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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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님께서 확인해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푸른 정복을 입은 사무관 하나가 호수궁으로 찾아온 건 몇 시간 뒤였다.

리엘라는 얼떨떨하게 그가 내미는 것을 받았다. 푸른 실크로 짜인 주머니 안에 든 것은 빳빳한 종이의 서신이었다.

서신을 굳게 봉한 붉은 밀랍 인장을 보았을 때만 해도 리엘라는 이걸 자기더러 어쩌라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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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뜯어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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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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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외교 서신을 확인하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외무대신의 업무였으나, 리오타 대사께서 취임하셨으니 앞으로 리오타 왕국과의 외교 사무는 리오타 대사이신 리엘라 님께 이관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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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지. 내가 리오타 대사지.’

리엘라는 사무관의 설명을 차근차근 듣고서야 서신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붉은 밀랍 인장의 모양이 낯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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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게 리오타 왕국에서 보내온 서신이란 말씀이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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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내용을 확인하신 뒤 답신 및 전달사항을 정리해 보고해주십시오.”

사무관이 물러난 뒤로도 한참 동안 리엘라는 리오타 국왕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물끄러미 보았다.

참 지긋지긋한 인연이었다.

한때는 그들에게 쫓기던 도망자 신세였던 자신이, 이제는 대사가 되어 그들의 밀랍 인장을 제일 먼저 뜯어내는 사람이 되다니.

결연하게 숨을 고른 리엘라는 반질반질 윤이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왕국의 서신을 열었다. ‘리오타 왕국 대사’로서의 첫 업무였다.

서신 봉투 안에는 여러 장의 문서가 들어 있었다.

‘리엘라 블리니테’라는 이름이 적힌 왕국 대사 공식 임명장.

또 앞으로도 뭐든 헤르한 황제 폐하의 제안을 따를 테니 양국 간 활발한 수교를 부탁드린다는 국왕의 비굴한 아부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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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날 대사로 임명하신 건 폐하의 뜻이었네.’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봉투 안에서 마지막 서신을 꺼낸 리엘라의 눈이 커졌다.

마지막 서신은 약혼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그레타의 전언이었다. 그 약혼자와 함께 곧 제국을 방문하겠다는 말까지 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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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자. 파비안.’

리엘라는 손끝으로 가만히 글씨를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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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말 결혼을 하려나 보구나. 하긴. 예전 사건도 이젠 다 마무리되었으니 파비안도 더 숨어 있을 필요는 없겠지.’

이상했다. 이가 갈리거나 가슴이 아릴 줄 알았는데 별로 아프지 않았다. 약혼자, 라는 글씨를 훑는 손끝도 아무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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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님은 참 여전하세요. 제가 미울 때마다, 당신이 쥐고 흔드는 무기는 늘 그 사람이네요.’

그레타의 필체는 반듯했으나 꾹꾹 눌러쓴 듯 종이가 패여 있었다.

리엘라는 그 편지를 빤히 보다가 펜과 종이를 들어 답신을 적었다.

리엘라의 필체는 한 글자마다 분노를 품고 움푹 팬 그레타의 것과는 달리 아무런 미련 없이 가볍고 경쾌했다.

[대사 리엘라 블리니테입니다. 왕실의 임명장 및 왕녀 저하의 서신 잘 수령 했습니다. 왕실의 뜻을 제국 황실에 잘 전달하고, 왕녀 저하와]

유려하게 글을 써 내려가던 리엘라의 손이 거기서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크게 숨을 고를 것도 없이, 리엘라는 푸른 만년필을 꼭 쥐고 다시 거침없이 문장을 이어나갔다.

[약혼자님의 방문 역시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 무렵 헤르한은 아시온과 함께 제스의 연구실 안에 있었다.

처음 제스 앞에 마주 앉을 때만 해도 헤르한은 그를 따갑게 질책할 생각이었다. 어째서 리엘라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부추겼느냐고. 너 때문에 리엘라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아느냐고.

그런데 제스가 다짜고짜 터트린 발언에 그럴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궁으로 돌아오는 즉시 아주 중요한 할 말이 있다더니, 확실히 제스가 전한 소식은 꽤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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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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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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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약의 정체 말입니다. 색과 농도만 진짜처럼 그럴듯하게 꾸민, 아무 효능도 없는 그냥 맹물이었습니다.”

잠시간의 정적 후에, 아시온이 황당하다는 듯 배를 잡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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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누군지는 몰라도 진짜 멍청한 거 아니야? 기껏 카넬까지 세뇌해서 저지른다는 짓이 폐하께 맹물을 먹이는 거였다고? 뭐. 불행 중 다행이네. 폐하께서 이상한 독극물을 드신 건 아니란 거잖아.”

아시온이 자신의 추리에 만족하며 어깨를 반듯하게 폈다. 그런 아시온을 향하는 제스의 눈길엔 한심함만이 가득 담겨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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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칼만 잡은 놈은 이렇게 멍청해서 안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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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너 지금 말 다 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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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안 했어.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 봐라. 아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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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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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선 리오타 왕국에 가서 다시 제국으로 오기까지 거의 한 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그냥 ‘맹물’만 드신 거라고.”

당장 일어나 제스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 으르렁거리던 아시온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의 빛으로 물들어갔다.

그들 가운데서 헤르한은 팔짱을 낀 채 침묵했다.

아시온이 무던해 빨리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매일 꼬박꼬박 억제제를 먹어야만 하루를 근근이 버틸 수 있는 헤르한이 한 달 가까이 약을 먹지 못했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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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는 왕국에서 그대로 송장이 되었어야 맞습니다.”

사망 선고를 하듯 제스가 말했다.

당사자인 헤르한 역시 같은 생각에 이르렀는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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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야……! 그건 이상하잖아. 제스. 지금 폐하는 이렇게 강녕하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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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 말이 그거야.”

안색이 잿빛이 된 아시온이 제스를 다그쳤지만, 제스는 아시온에게 대답하는 대신 헤르한을 향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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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왜 아직도 살아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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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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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떻게 살아계신 거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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