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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폐하가 사라지실까 봐 무서워요 (45/154)


  • #45 폐하가 사라지실까 봐 무서워요
    2021.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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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아암.”

    여느 날처럼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우다가 그대로 엎드려 잠들었던 제스는 찢어지듯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졸린 눈을 마구 비벼 억지로 잠을 쫓아낸 그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은 곳에는 수십 개의 플라스크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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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아. 시약 반응이 그러니까…….”

    밤새 변화를 보인 몇 개의 플라스크와 그 옆에 놓인 일지를 비교해보던 제스의 눈이 금방 휘둥그레졌다.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르던 잠기운은 단번에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그새 창백한 얼굴이 되어버린 제스는 몇 번이나 일지를 보고 또 보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카넬의 조사 기록과, ‘가짜 약’을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의 모든 기록을 전부 꺼내어 대조하고서야 그는 마침내 ‘가짜 약’의 정체에 대한 심증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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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그래도. 그러면 이게, 앞뒤가 안 맞는데…….’

    한참 멍하니 천장만 보며 한숨을 쉬던 제스는 결국 주먹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헤르한에게로 향했다. 말이 되는 결과든, 안 되는 결과든 일단 주군에게 전하기 위함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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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 가십니까? 왜 외출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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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제스.”

    아, 제스, 까지만 얘기하고 뒷말을 잇지 않는 헤르한을 대신해서 대답한 건 아시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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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 시찰을 나가신단다. 아. 그게 아니고 데이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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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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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리엘라 양과 함께.”

    제스는 그제야 주군이 평소답지 않게 기운찬 것을 깨닫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면 최근의 헤르한은 줄곧 그랬다. 국정이 골치 아픈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은데도 불구하고 최근엔 늘 기분이 좋고 가뿐해 보였다. 다, 리엘라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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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의 평화가 되어드리겠다더니. 제법…….’

    과연 그 여자의 수가 통할까 반신반의했던 제스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제스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헤르한을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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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컨디션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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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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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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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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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 약은 드셨고요? 최근 두통이나 환각 증세는……?”

    헤르한은 그쯤에서야 제스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목에 매던 크라바트를 신경질적으로 비틀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하고 소리 없이 노려보는 주군의 눈빛에 제스는 넉살 좋은 웃음으로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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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하. 늘 하던 문진인 건데 뭐가 어때서 그러십니까? 아무튼 멀쩡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우리 폐하의 황성 나들이, 마음 놓고 보낼 수 있겠어요. 잘 다녀오시고요. 저보다 멋진 사내가 사탕 준다고 해도 따라가시면 안 됩니다. 아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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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 다물어라. 제스.”

    결국 헤르한은 제스를 조금 노려보다가 말았다.

    오늘의 헤르한은 제스의 농담 안에 깃든 미묘한 불안감을 알아차리기엔 다소 들떠 있는 탓이었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크라바트를 맸다가 풀었다가를 수십 번 반복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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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심히 다녀와. 특히 폐하를 잘 살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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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잔소리 안 해도 내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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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짜 약의 정체를 드디어 알아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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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뭔데? 많이 위험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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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조금 그래. 지금 이 분위기에 얘기하긴 좀. 저녁에 돌아오시면 그때 보고할게. 그러니까 부디 폐하 좀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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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걱정 마라. 돌아와서 봐.”

    아무리 옷매무새를 다듬어 봐도 끝내 만족스럽지가 않았던지 헤르한은 결국 시종을 불렀다.

    그 사이에 제스와 아시온은 심각한 얼굴로 결의를 다졌다. 나들이를 준비하는 주군에 비해 그들은 꼭 전장에 나설 이들처럼 비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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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님! 오늘 정말 아름다우세요!”

    양산을 든 루가 폴짝폴짝 뛰며 말하는 통에 리엘라의 시야가 자꾸만 가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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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 진정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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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흡. 죄송해요. 오늘이 두 분의 첫 데이트라고 생각하니 너무 신나서 그만!”

    루의 말이 맞았다.

    명분은 공무 겸 시정을 살피러 나가자는 것이었지만 사실 황제가 제안한 것은 ‘데이트’라는 걸 리엘라도 뻔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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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와 데이트라니.’

    낯간지럽지만, 그만큼 들뜨고 설레는 것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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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가 그러니까 나까지 더 긴장되잖아요. 어때요, 나 괜찮아요? 어색해 보이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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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휴, 어색하긴요.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이러고 밖에 나가시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쳐다보겠는데요? 아이참……. 곤란해서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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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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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그래도 폐하께서 리엘라 님을 예뻐라 하시는데 여기서 더 반하시면 어떻게 해요?”

    루의 수선을 뭐라 받아치지도 못하고 리엘라가 쑥스럽게 얼굴만 붉힐 때쯤 저쪽에서 황제가 다가왔다.

    헤르한은 언제나 근사했지만 오늘은 더 특별했다.

    늘 보던 제복 차림이 아니어서인가.

    가벼운 프록코트에 호박색 브로치, 검은 가죽 장갑까지 갖추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그는 꼭 리엘라가 용병단 시절 어디선가 마주친 적이 있을 법한 오만한 귀족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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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오만하다는 건 빼야 하나.’

    리엘라는 긴장감을 떨치려고 일부러 농담 같은 생각을 하며 한발 나아갔다.

    헤르한은 리엘라가 나아가는 것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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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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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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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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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갑자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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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트를 시작할 땐 이런 말을 꼭 해야 하는 거라고 저놈이 하도 잔소리를 해대서.”

    헤르한의 눈총에 몇 발 뒤에서 따라오던 아시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리엘라가 그런 아시온과 즐거운 눈빛을 주고받는 사이, 훌쩍 다가온 헤르한이 리엘라의 손등에 입 맞추며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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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그렇다고 마음에 없는 말 한 건 아니고. 진심이야. 진심으로, 아름다워.”

    리엘라는 부끄러워 픽 웃었다.

    아름답다는 말. 준비를 도와준 시녀들과 루에게서 수십 번은 들은 말인데도 왜 헤르한의 목소리로 듣는 것은 이렇게도 다른지.

    손등 위에 닿는 말캉한 느낌. 부드러운 미소. 나른한 목소리. 그리고 그런 모든 간지러운 감각을 눈부시게 비추는 여름 햇살.

    모든 것이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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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이쯤이면 나도 멋지다, 한마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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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는……. 음. 평소랑 같으신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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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고?”

    어쩐지 요새 말을 너무 잘 듣는다고 했다며 헤르한이 리엘라에게 눈을 흘겼다.

    리엘라는 그의 앞에서 짓궂고도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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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와 같기를. 당신의 오늘과 내일이 어제와 같기를. 어제 내 곁에 있어 주었던 것처럼, 오늘도 그렇게 나와 함께해주시길. 평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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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어서 가요. 폐하.”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언제나 먼저 손을 내밀던 헤르한 대신, 오늘 먼저 손을 잡아끈 것은 리엘라였다.

    *

    잠행 아닌 잠행이었다.

    황제는 직접 거리를 시찰 나올 거란 사실을 황성에 미리 알리지 않았고, 꽁무니에 우르르 따라붙는 비서관의 행렬이나 떠들썩한 의장대도 따로 갖추지 않았다. 게다가 차림도 여느 귀족과 같았다.

    덕분에 헤르한과 리엘라는 꽤 자유롭게 황성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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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하보르덴이 이렇게 활기찬 곳인지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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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게.”

    리엘라는 헤르한의 대답을 듣고 깨달았다. 이렇게 번잡하고 번화한 거리를 걷는 것은 헤르한에게도 낯설고 설레는 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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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로 가 볼까요? 재밌게 생긴 장난감을 팔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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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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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사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구경하자는 거죠!”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으로 다니면서 상점가를 구경하는 건 오히려 황제보다 리엘라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드디어 나도 폐하께 한 수 가르쳐 줄 것이 생겼구나.

    리엘라는 그런 흐뭇한 마음에 열심히 헤르한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혹시 리엘라가 다치진 않을까 하면서 주변을 경계하던 헤르한도 어느새 리엘라를 따라 웃으며 여유를 즐겼다.

    가구점을 발견했을 때는 헤르한이 먼저 안을 구경하자며 나서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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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걸 사시려고요? 똑같은 침대를 세 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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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게 필요할 것 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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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제 침실엔 이미 침대가 있는걸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엘라 앞에, 헤르한은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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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도 자고 저기서도 자면 좋잖아. 방마다 침대를 하나씩 놓아줄게. 너는 어디서 갑자기 기절할지 모르니까 늘 만반의 준비를 해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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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아니, 그건……!”

    리엘라가 잔뜩 얼굴을 붉히자 진지했던 헤르한의 눈이 한껏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휘어졌다.

    또 날 놀리는 거잖아!

    분한 마음에 리엘라가 주먹을 꼭 쥐고 휙 돌아서자 곧바로 헤르한이 뒤에서 몸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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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딜 가. 또 기절할 땐 하더라도 내 옆에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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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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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라고 네 거처도 내 침실과 가까운 호수궁으로 일부러 옮긴 건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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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그만! 폐하!”

    헤르한의 품 안에서 리엘라가 버둥거렸다. 헤르한은 그제야 너털웃음을 지어내며 리엘라를 놓아주었다.

    다행히 그는 리엘라의 저항을 수용했고, 정말로 침대를 사진 않았다.

    하지만 침대를 양보한 대신 그 이외의 것은 마음껏 사겠다기에 리엘라는 잠깐 고민하다가 협상안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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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손에 들 수 있는 거라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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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 그렇게 하지.”

    리엘라의 실수였다. 부담 없는 선물이라면 좋겠다는 뜻이었는데 오히려 헤르한에게 정당한 빌미를 제공해버린 꼴이 된 것이었다.

    리엘라는 매대를 다 비울 작정으로 보석상을 휩쓰는 헤르한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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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많이는 말고요! 딱 하나만요. 그래야 더 소중히 아낄 수 있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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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말이 효과가 있었던지, 폭주하듯 내달리던 헤르한이 움찔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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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만요. 대신 제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으로 폐하께서 직접 골라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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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히 어려운 부탁을 하는군. 다 잘 어울리는데.”

    헤르한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태껏 본 것 중 가장 신중한 얼굴로 물건을 고르기 시작했다.

    턱 끝을 매만지고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진지하게 고심하는 그의 모습이 리엘라는 애틋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쿡쿡 웃고 있을 때, 헤르한의 손이 리엘라의 한쪽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헤르한의 손길이 지나간 곳엔 그가 고민 끝에 골라낸 머리핀이 꽂혀 있었다. 꽃잎 모양으로 세공된 보석이 섬세하게 반짝이는 머리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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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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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예쁘네.”

    헤르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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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정말로요. 너무 예쁜 머리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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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머리핀 얘기한 거 아닌데.”

    리엘라의 귓가로 헤르한의 낮은 웃음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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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약속은 꼭 지켜. 아주 소중하게, 평생 간직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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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간직하기로.’

    그 말에 내내 미소를 띠던 리엘라가 살짝 멈칫했다. 왜일까. 분에 넘치게 행복한 이때, 갑자기 제스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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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로 폐하 앞에서 먼저 무너지면 안 됩니다. 절대로요.’

     
    리엘라는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맑게 웃었다.

    그래, 이렇게 행복한데, 더군다나 폐하도 저렇게 강건하신데, 일부러 부정적인 생각을 할 필요는 없지.

    그런데 위기는 의외의 순간에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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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안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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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머리핀을 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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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그 머리핀에 어울리는 딱 어울리는 드레스라서 그렇다. 네가 입으면 정말로 예쁠 텐데.”

    무릎만 안 꿇었다 뿐이지, 제발 저 옷을 한 번만 입어봐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헤르한의 부탁에 리엘라는 하는 수 없이 의상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황제와 편하게 있자고 직원들을 다 물리친 것이 화근이었다.

    탈의실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혼자서는 아무리 손을 뻗어 봐도 등 쪽의 단추가 닿질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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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이걸 폐하께 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리엘라는 직원이라도 다시 부를 생각에 탈의실 커튼을 살짝 젖히고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바로 그때. 대기실 소파에 앉아서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는 헤르한의 모습이 리엘라의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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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무슨 일이에요? 괜찮으세요?”

    리엘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헤르한은 리엘라의 부름을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계속 자기 목을 감싸 쥔 채 거칠게 호흡했다. 종일 미소로 평화로웠던 얼굴은 잔뜩 찌푸린 채로.

    그 모습에 리엘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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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리엘라는 자신이 미처 옷을 다 여미지 못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은 채 헤르한에게 내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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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 리엘라?”

    갑자기 리엘라가 튀어나오자 놀란 헤르한이 물었지만 리엘라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리엘라는 그저 절박하게 헤르한을 꼭 끌어안고 바들바들 떨었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생각하며 지금까지 열심히 버텼던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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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갑자기 왜 그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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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가 죽는 게 싫어요. 폐하가 갑자기 사라지실까 봐 무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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