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 그레타의 편지 (44/154)


  • #44 그레타의 편지
    202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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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타. 진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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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진정해요? 우릴 허수아비 바보 취급이나 하는 이깟 서신 앞에서 어떻게 진정할 수가 있죠? 전 전하가 이해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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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질머리하고는! 그 서신이 뭐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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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가 어떻냐고요?”

    정말 아무 문제를 못 느끼는 건가. 아니면 뻔히 알면서도 비굴하게 모르는 척하는 건가.

    그레타는 파들파들 떨며 이를 악물었다.

    서신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리엘라 블리니테를 리오타 왕국을 대표하는 대사로 임명해야겠으니 그에 맞는 성명서와 공식 임명장을 알아서 작성해 보내라는 것이었다.

    양국 간 원수가 주고받는 서신이라면 형식적으로나마 갖추어야 할 안부 문장 따위는 눈에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명령문으로 시작해 명령문으로 끝나는 굴욕적인 통보.

    게다가 다른 걸 다 떠나서 리엘라를 왕국 대사로 앉히겠다니!

    그레타는 화가 끓다 못해 기절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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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이제 같잖은 정치질이라도 해보겠다는 거야? 몸으로 황제를 꾀어서 꼬리에 따라붙었으면 네 주제에 맞게 황제의 발닦개 노릇이나 잘할 것이지! 웃기지도 않게, 뭐? 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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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께서 이 김에 우리와 수교도 확장하고, 우리 공사관까지 지어주겠다고 하지 않느냐? 엘슈바이크 제국 황궁 내에 공관을 따로 가지기가 어디 쉬운 줄 아느냐? 서로 좋은 일이다. 나는 당장 도장을 찍어야겠으니 어서 그 종이를 이리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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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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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타!”

    그레타는 부왕에게서 빼앗아 든 서신과 임명장을 들고 집무실을 뛰쳐나왔다.

    그렇게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그레타가 향한 곳은 자신의 동궁 안, 파비안이 누워 있는 침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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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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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파비안.”

    파비안은 하루가 다르게 몰골이 처참해져 갔다.

    왕국에서 가장 유능하다는 의사를 불러 상태를 보게 했는데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나날이 기력을 잃어가기만 했다.

    언젠가 한 번 환각과 구토까지 겪으며 유달리 힘들어했던 날엔, 파비안은 그게 자신이 리엘라를 배반한 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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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리엘라란 이름 꺼내면 그땐 널 죽여버리든지 내가 죽어버리든지 할 거야.”

     
    그레타는 그렇게 말했고 그 뒤로 파비안은 두 번 다시는 리엘라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레타는 그게 더 치욕스러운 일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자기 앞에선 억지로 괜찮은 척, 밝은 척하면서 사실 속으로는 내내 리엘라를 그리워하고 있는 파비안이, 그레타는 정말 사무치게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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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보여? 엘슈바이크의 황제로부터 편지가 왔어. 리엘라는 잘 지낸대. 심하게 잘 지내서 문제라고 해야 하나. 왕국 대사를 맡기겠다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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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제국에서 리엘라……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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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황제에게 불행하게 납치라도 당한 줄 알았던 리엘라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냥
    리엘라라는 이름을 들어서 그런 것인지.

    파비안의 눈이 파르르 흔들렸다. 그 와중에 며칠 내내 멍하던 눈에 푸른 생기가 돋아 있어서 그레타는 또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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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랐어? 하긴. 리엘라가 황제와 살림이라도 차릴 줄 알았는데 공직을 맡게 됐다니. 좀 의외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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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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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비안 너도 정신 차려. 리엘라는 저기서 저렇게 번듯하게 지내는데 너는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언제까지 날…….”

    감정을 삭이지 못해 물기까지 조금 차오른 그레타의 눈엔 독기가 바짝 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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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비참하게 만들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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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합니다. 왕녀님.”

    파비안은 그 와중에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레타는 그런 파비안을 노려보다가 그가 앉은 침대 위로 올라 그의 멱살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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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내게 키스해.”

    파비안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잘 조련된 짐승처럼 그레타의 말을 따랐다.

    열병을 지병처럼 앓는 파비안의 입술은 뜨거웠다.

    그레타는 파비안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가느다란 손가락을 집어넣고 그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하지만 아무리 깊게 입을 맞추어도, 그레타는 자신이 파비안을 영영 가지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에 초조했다.

    꼭 영역 표시라도 하듯이 제 보드라운 몸을 파비안의 맨살에 맞대고 일부러 비벼봐도 마찬가지였다. 파비안은 사내의 본능으로 흥분은 할지언정 그레타가 명령하기 전까지 절대로 그녀의 몸에 먼저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게 미워서 그레타는 자신이 애절하게 탐하던 파비안의 아랫입술을 콱 깨물어버렸다.

    곧 입안에 쌉싸래한 피 맛이 감돌았지만 그때조차도 파비안은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꼭 목석을 끌어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레타는 파비안을 밀쳐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파비안은 손등으로 제 입술 위에 반들반들하게 배어난 핏물을 훔쳐낼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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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기 전에 소원 하나 이루어줄까? 리엘라를 보러 가게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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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와, 왕녀님……?”

    또. ‘리엘라’란 이름을 들려줄 때야, 파비안은 눈을 맞추었다.

    그레타는 그 애절한 눈빛을 한참 야속하게 노려본 후에야 침실을 나와 다시 국왕의 앞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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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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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황제가 원하는 대로 리엘라를 대사로 임명하고 성명서를 써서 보내세요. 이건 많이 구겨졌으니 새로 예쁘게 쓰시든가요.”

    그레타는 자신이 잔뜩 구겨버린 서신과 임명장 따위를 국왕의 책상 위로 던졌다.

    그 안엔 그레타가 새로 적어서 접어놓은 짧은 서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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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성명서와 임명장을 보내실 때 제 서신도 꼭 함께 전달해주세요.”

    또 저것이 황제에게 무슨 패악을 부리려고 그러는 건가.

    국왕은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그레타의 서신을 열어보았다.

    [대륙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께. 리오타 왕국의 왕녀 그레타 페오도르나입니다. 곧 국혼을 앞두고 있어 지고하신 폐하의 앞에 허락과 축복을 구하고자 합니다. 이른 시일 안에 약혼자와 함께 엘슈바이크의 황실로 찾아뵙겠습니다.]

    ***

    황제 헤르한의 집무실.

    이른 아침부터 소집되어 온 헤르한의 참모진들은 지칠 대로 지친 기색이었지만 상석에 앉은 헤르한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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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그냥 아무나…….”

    그때 누군가 기진맥진해 저도 모르게 던진 말에 헤르한의 눈이 서늘한 이채를 띠었다.

    헤르한이 쏜 화살을 맞은 충신은 곧장 일어나 테이블에 머리를 박을 듯이 용서를 구했다. 송구합니다, 실언했습니다, 리엘라 양의 보좌관을 절대로 아무나 앉힐 수는 없죠, 하고.

    그 말에 헤르한은 눈을 더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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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일부러 비꼬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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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아닙니다. 절대로……!”

    많은 이들이 뜨끔했는지 눈알을 굴렸다. 실제로 리오타 왕국 대사관의 일꾼 하나 뽑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생각하며 슬쩍슬쩍 졸던 이들이었다.

    대외적으로 보나 국내 상황을 보나, 리오타 왕국은 현재 엘슈바이크 제국에 있어 그리 중요한 외교 상대가 아니었다.

    워낙 소국인 데다가 수교를 맺은 것 자체도 얼마 되지 않아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다. 당연히, 대사관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리엘라 블리니테가 뜬금없이 대사직을 맡게 되면서 상황이 급반전되었다.

    주둔 대사라고 해도 사실은 별 볼 일 없는 자리인데, 호수궁을 통째로 공관으로 내준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그녀의 보좌관 하나를 고용하는 데 제국의 온 인력이 총동원된 것이었다.

    심지어 헤르한이 직접 내건 조건은 엄청 까다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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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테로 공작의 차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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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자는 리엘라의 스승으로 삼기에 학식이 볼품없어서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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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무 대신의 사촌인 베릴 백작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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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세 욕망 때문에 리엘라를 귀찮게 할 자다. 세력가는 전부 제외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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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그렇다면 이 자가 딱입니다! 유학파로 배움이 깊은 데다가 변방 귀족 출신이라 큰 야욕도 없고 말입니다.”

    오오, 드디어 찾았나, 하고 모두의 안색이 밝아졌다.

    하지만 대신에게서 이력서를 건네받은 헤르한은 묘한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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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생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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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깊은 학식답게 외모 또한 수려해서 요새 황성의 영애들 사이에서 아주 명망이 드높습니다. 분명 리엘라 양도 좋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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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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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왜요, 아니,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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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기각. 다른 후보를 찾아.”

    참모진의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헤르한은 이도 저도 영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턱을 괸 채 한숨만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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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혹시……. 이 자는 어떠십니까?”

    그때 참모진 중 하나가 내민 것은 마지막 중에서도 마지막, 최후의 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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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엘 바이스.’

    헤르한은 건네받은 이력서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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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황성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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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기억나는군.”

    당해 최고의 수재임에도 불구하고 황실 대신으로의 임용을 거절하고 학자의 길을 걷겠다며 집안에 들어앉았다는 자.

    별 볼 일 없는 가문 출신에 줄줄이 먹여 살릴 가족도 천지인 청년 가장 주제에, 제발 얼굴 한 번만 보자는 요청도 죄다 무시한다며 제스가 진절머리를 치던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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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자의 초상화는 안 붙어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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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그 이력서도 본인이 쓴 게 아니라 아카데미 학장이 대신 써서 낸 것이랍니다. 하도 세간에 나다니질 않아서 유명세에 비해선 알려진 바가 별로 없긴 한데. 학장에게 들은 바로는 꽤 음침한 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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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침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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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성격도 그렇고. 외모도.”

    이엘 바이스. 이엘 바이스.

    그의 이름을 읊조리는 헤르한의 얼굴이 마침내 피어나기 시작했다.

    보좌관은 리엘라와 종일을 붙어 다닐 자였다. 아시온처럼 사교적이고 넉살 좋은 자가 오기라도 하면 분명 헤실헤실 웃으며 둘이 아주 돈독한 친교를 쌓을 테지. 그것도 자신이 보지 못하는 데서.

    리엘라에게 보좌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꼴만은 절대로 보기 싫어 고민하던 헤르한에겐 이보다 더 알맞은 인재가 있을 수가 없었다.

    능력 있고 소신 있되, 야욕은 없으면서, 외모와 성격 또한 음침하여 리엘라와 적당한 거리감을 잘 유지할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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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자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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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마침내 떨어진 황제의 최종 승인에 참모진들은 아이처럼 환호성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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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자가 순순히 따를까요? 더 막중한 요직도 미련 없이 거절한 자라, 리오타 왕국 대사의 보좌관 같은 자리에 응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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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엘 바이스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맞춰줘. 그래도 거절한다면 내가 직접 만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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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알겠습니다.”

    헤르한의 대답을 끝으로 참모들은 저들끼리 기대에 찬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면 회의는 드디어 이것으로 끝인가, 하고.
    그 기대가 무색하게 헤르한이 ‘그럼 다음 안건은…….’ 하고 말할 때 바깥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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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회의이니 분명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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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리엘라 양인데 돌려보낼까요?”

    방해받아 미간을 한껏 찌푸렸던 헤르한이 잠시 그 상태로 정지했다.

    참모진은 숨을 죽이면서 슬그머니 짐을 쌌다. 그들 모두는 이 순간 집무실의 문을 두드려 준 리엘라 블리니테가 자신들을 해방해 줄 ‘자유의 여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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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의는 다음에 이어서.”

    야호. 여신님. 감사합니다.

    참모진들은 하나같이 싱글벙글 웃으며 문 앞에 선 리엘라에게 고갯짓을 하고 쏜살같이 물러났다.

    리엘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의 인사에 화답하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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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일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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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아무 일도 없었다. 리엘라, 네 보좌관 자리에 어울릴 적임자를 찾았어. 그리고 공관 집무실 인테리어는 오늘 중으로 마칠 것이다. 또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하기 전에 네가 직접 황성을 둘러보고 제국 시정을 파악해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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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천천히요. 제게 업무는 안 시키실 거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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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것치곤 네가 너무 열심히 공부하잖아. 어때? 원한다면 시찰에 함께 나가줄 수 있는데.”

    앉으라고 황제가 명하기도 전에 리엘라는 당연하게 황제의 옆자리의 의자를 빼냈고, 또 그런 리엘라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헤르한은 수다스러운 말을 이어갔다.

    어느새 둘은 원래 한 조각이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맞물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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