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폐하께 마음 주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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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폐하께 마음 주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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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폐하께 마음 주지 마세요.
2021.11.21.
그날 밤 리엘라는 잠을 설치고 하염없이 창밖의 하늘만 바라보았으나 루를 비롯한 서궁의 시녀들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모두 리엘라가 호수궁으로 이사 갈 생각에 들뜬 줄로만 알고 있을 때, 사실 리엘라의 관심은 ‘호수궁’이나 ‘황후’ 같은 것에 있지 않았다.
‘……죽을 준비. 당신이 떠나고 난 뒤에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서…….’
리엘라는 밤새 헤르한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병을 앓고 있단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다지도 죽음에 가까이 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다음날, 리엘라는 여느 날처럼 일찍 채비를 하고 서궁을 나섰다.
어차피 곧 황후궁으로 자리를 옮기면 폐하를 자주 뵐 텐데 그새를 못 참고 폐하를 뵈러 가시나 다들 중얼거렸지만, 모두의 기대와 다르게 리엘라의 발길이 향한 곳은 제스의 연구실이었다.
“뭐 하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격리실로 바로 오시지.”
앉아서 책을 보던 제스는 벌써 카넬을 조사할 시간이 다 되었나 하고 일어나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다.
리엘라는 그런 제스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폐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사시나요?”
“예?”
제스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리엘라를 외면하며 모르쇠를 취했다.
“뭐요. 아침부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시는지.”
“제스 경은 아시잖아요. 전하는 위험한 불치병을 계속 앓아오셨다고. 오래 더 버티지 못할 거라고. 말한 적 있잖아요.”
아. 그런 말까지 했었나. 제길. 술이 원수지.
제스는 눈을 질끈 감고 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아무리 리엘라가 밉고, 또 아무리 술주정이었다고 해도 할 말 안 할 말이 따로 있는 건데.
“제스 경. 말해주세요. 당신, 의사잖아요.”
“정확히는 폐하의 주치의죠.”
“그래요. 폐하의 주치의라면서 여태 폐하의 병도 못 고쳤어요?”
“뭐라고요? 당신이 뭘 안다고 나한테……!”
리엘라는 더한 말도 쏟아낼 수 있다는 듯이 제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말로는 분명 화를 내고 있는데, 붉은 눈동자 안엔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 그렇지 않아도 바빠 죽겠는데.’
제스는 신경질적으로 자기 머리칼을 흩트렸다.
이런 여자와 괜히 말다툼이나 해서 무엇 할까.
제스는 리엘라에게 맞서서 언성을 높이려다가 말고, 그냥 리엘라를 빨리 떨쳐내는 쪽을 택했다.
“지금 살아 계신 것이 기적입니다.”
“그 말씀은…….”
“평생 폐하의 몸만 연구한 의사로서 제가 예상한 폐하의 수명은 작년까지였습니다.”
건조하기만 한 제스의 설명에 리엘라는 말문을 잃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걸까. 이들은 그만큼이나 오랫동안 폐하의 죽음을 준비해왔나.
“사실 황위를 되찾을 수나 있을지도 의문이었습니다. 특히 작년 가을엔 전부가 지칠 대로 지쳐서 포기 직전이었는데, 심지어 그때 웬 용병단이 귀찮게 얼쩡대기까지 하고.”
제스는 스스럼없이 말하다가 아차 싶었다. 리엘라 블리니테가 바로 그 ‘웬 용병단’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순간 잊었던 것이다.
아, 가뜩이나 힘들어하는 여자에게 죄책감까지 떠안겨버리다니, 진짜 환장하겠네.
제스는 그답지 않게 리엘라의 눈치를 보며 재빠르게 말을 돌렸다.
“어쨌든 이렇게 버텨 오신 것도 벌써 반년이 넘었습니다. 거기에 요새 부쩍 무리하신 데다가 정체 모를 가짜 약까지 드셔서.”
“…….”
“당장 내일 눈을 못 뜨신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네. 그렇군요.”
리엘라는 더 꼬치꼬치 캐묻진 않았다.
제스의 연구실로 달음박질을 칠 때까지만 해도 이것저것 질문할 거리가 끝없이 떠올랐는데 지금 당장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은 딱 하나뿐이었다.
‘어쩌면 내일 당장 이별이 올 수도 있다는 건가…….’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리엘라는 이제야 다시 사랑하게 된 이 세상에 또 배신감을 느꼈다.
꼭 예상치도 못한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는 것 같았다.
참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분명 자신에게 있어 헤르한은 르 데르의 강물처럼 늘 잔잔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때때로 온몸을 내던져 안기고 싶을 만큼.
이제 나가라고 내쫓지도 않았는데 리엘라가 멍하니 돌아섰다.
그제야, 제스는 자신에게 등을 보인 그 작은 몸이 너무나 작아 보였다. 제스는 입술을 깨물고 잠깐 망설이다가 리엘라를 붙잡았다.
“리엘라 양. 나도 충고 하나 하죠. 폐하께 너무 마음 주지 마십시오.”
리엘라가 뒤를 돌아보자, 사납기만 하던 제스의 눈빛이 이제야 비로소 자신만큼이나 괴로워 보였다. 지금까지 감정이 메마른 듯 보이던 것은 사실 잘 꾸며진 모습이었다는 것처럼.
“우리는 이미 틀렸습니다. 이젠 발도 못 빼요. 저도 그렇고 아시온도. 아시온은 아마 폐하께서 돌아가시면 기꺼이 순장으로 같이 묻히려고 할 테고.”
웃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울라고 하는 소리인지 리엘라는 알 수 없었다.
만약 제 정신이 조금만 더 온전했다면 저 말을 넉살 좋게 받아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리엘라 양은 아직 폐하께 뒤돌아설 수 있잖습니까? 배신하라는 게 아닙니다. 더 다가가지만 마세요. 그게 당신의 평화를 위해 좋습니다.”
“제스 경. 변하셨네요.”
“뭐가요?”
“언제는 제가 폐하께 해가 될까 봐 걱정하시더니, 이제는 저를 걱정해주시는군요.”
“그거야 당신이…….”
거기에 그러고 서서 우리랑 같은 표정을 짓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제스는 뒷말을 소리 없이 속으로 삼켰고, 리엘라는 듣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스 경의 말씀은 잘 알아들었어요.”
*
“그래서, 기어이 리엘라 블리니테에게 호수궁을 내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대신들 사이에선 불편한 한숨만 나왔다.
소식을 접하고 황제에게 긴급 알현을 요청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황제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런데 헤르한의 태도는 생각 외였다.
사랑놀이에 빠져 감정을 제어 못 하는 것도 아니었고 여인의 치마폭에 쌓여 판단이 흐려진 것도 아니었다.
“리엘라 블리니테를 황후로 앉히기라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호수궁을 내어주겠다고만 했지, 황후로 앉히겠다는 적은 없는데?”
“하, 하지만 호수궁은 역대 황후께서 별실로 쓰던 공간으로…….”
“그래. 별실로 쓰던 공간이지. 엄밀히는 3대 황제께서 호수 경치를 즐기기 위해 본궁 가까이 지으신 별궁이고. 당시는 황제의 집무 공간으로도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호수궁을 황후만 쓰란 법은 없지.”
“하오나 현재 관례라는 것이…….”
“그럼 리엘라 블리니테를 황후로 책봉할까? 대신들만 허락한다면 난 좋은데.”
여유만만한 헤르한의 웃음에 ‘황후’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덤비던 대신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다음 주자로 나선 것은 조금 더 온건한 설득파였다.
“그냥 서궁에 계속 두셔도 되지 않습니까? 굳이 호수궁이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궁의 빈방에라도…….”
“리엘라 블리니테에게 집무 공간이 필요하다. 서궁은 좁고 국빈들이 계속 드나드니 곤란해. 다른 곳도 마찬가지고.”
“집무 공간……이요? 그 여자에게 무슨 집무 공간이 필요합니까?”
“리오타 왕국 대사로서 양국 외교에 관한 공무를 처리할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네!?”
대신들의 되물음이 우렁찼다. 온건파라고 해서 황당함에 되묻는 목소리까지 온건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리엘라 블리니테가 리오타 왕국 대사로 임명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언제부터요?”
“어제 왕국 측이 입장문을 보내왔습니다. 곧 공식 성명과 함께 임명장도 보내겠다고 합니다.”
왕국의 인장이 찍힌 서신 봉투를 흔들며 대답한 건 아시온이었다.
헤르한은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대사를 임명하는 건 그 국가의 권한이야. 리오타 왕국의 왕실에서 그렇게 하겠다는데 어쩔 수 없지 않나? 난 파견 온 외교관을 대접해 주어야 하는 처지일 뿐이니 다들 이해 바라.”
“아니, 리오타 왕국 측은 왜 갑자기……. 그런 짓을…….”
“따라서 호수궁 일부를 리엘라에게 내주고 리오타 왕국 대사관 공관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차라리 여인으로서 리엘라를 곁에 두겠다고 꼬장을 부리는 것이었다면 충언이랍시고 따끔한 말씀이라도 하나 올렸을 텐데.
대신들은 꼭 눈 뜨고 있는데 코가 베인 기분이었다.
“그러면 확실히 정리해주십시오. 폐하.”
그때, 그나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던 대신 하나가 입을 열었다.
“리엘라 블리니테는 리오타 왕국 측에서 파견한 주재 외교관으로서 호수궁에서 지내며 근무하는 것입니다. 공적으로 말입니다. 맞습니까?”
그래, 그거지,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그 여자가 정리되는 거라고 봐야지, 하고 대신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황제의 여자로서는 인정하지 않겠다, 그거로군?”
헤르한은 역시 그 질문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미안한데 그건 약속 못 하겠다. 왕국이 리엘라를 대사로 임명한 것보다 내가 그 여자를 품은 게 먼저라서 말이야. 또, 황제가 외교관과 연애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나?”
회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결국 바라는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한 대신들이 넋 나간 얼굴로 회의장을 빠져나갈 때, 헤르한은 그들 중 한 명과 손등이 스쳐 속마음을 읽었다.
‘어쩜 원하는 건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려는지. 살다 살다 저렇게 욕심 많은 분은 또 처음 보는군.’
헤르한은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아시온이 자신을 두고 ‘한 번쯤은 폐하 본인을 위한 선택을 해보시라’ 일침을 가하곤 했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그런데 이제는 욕심 많은 황제로 비쳤다니. 많이 발전한 건가.’
그렇게 홀로 앉아 있는 헤르한에게로 아시온이 다가왔다.
무슨 재밌는 거라도 건지셨습니까, 묻는 아시온에게 헤르한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찾았는데. 재미있는 거. 알려드릴까요?”
또 무슨 싱거운 농담을 하려는 거냐고 고개를 든 헤르한 앞에서 아시온은 입을 여는 대신 회의장의 문을 열었다.
“난데없이 출세하게 된 소식은 폐하께서 직접 전하십시오.”
아시온의 속삭임을 뒤로하고 수줍게 안으로 들어선 것은 리엘라였다.
예상하지 못한 등장에 헤르한이 눈을 크게 부릅뜨자, 리엘라가 작고 도톰한 입술로 ‘폐하’ 하고 다정한 인기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