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너는 날 배신해도 모를 테니까 (38/154)


  • #38 너는 날 배신해도 모를 테니까
    2021.11.07.



    16549425770006.jpg

    “계속 걸어야 하는 게 고역이었어요. 그땐 어렸으니 체력도 좋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어른들에게 말이나 수레를 태워달라고 하기엔 눈치가 보였거든요.”

    내궁 응접실. 뜬금없이 갖게 된 한낮의 나른한 티타임에, 리엘라는 나긋한 목소리로 어린 시절의 제 이야기를 이어갔다.

    16549425770006.jpg

    “행크 아저씨도 참 독해요. 저는 그때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짐수레 한쪽에 태워주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요?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그런 인간이니 널 버렸지.

    헤르한은 그렇게 토를 달려다가 말았다. 리엘라의 말소리 자체가 꼭 감미로운 음악 같아서 그 선율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16549425770006.jpg

    “강하게 키워야 빨리 써먹을 수 있다면서. 아무도 끝끝내 저를 태워주진 않았어요. 그날 밤 자려고 누웠을 땐 제 발이 곰 발바닥처럼 퉁퉁 부어 있더라고요. 너무 아프고, 서러웠어요. 그때 파비안이 저를 달래겠다고 사탕 하나를 훔쳐 왔는데.”

    16549425770025.jpg

    “그 웃긴 남자 말이지.”

    16549425770006.jpg

    “네. 맞아요. 그 웃긴 파비안.”

    헤르한이 눈을 흘기며 면박을 주는 것에도 리엘라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 가벼운 웃음만큼이나 ‘파비안’이라는 이름도 가볍게 흘러갔다. 행크나 수레, 사탕, 곰 발바닥 같은 말과 같이. 평범하게.
    어느덧 그 이름은 이제 리엘라의 마음을 흔들지 못하는 이름이 된 것이다.

    16549425770006.jpg

    “절대 화를 풀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실은 그날 밤 어른들 몰래 도망칠까 생각도 했거든요. 그런데 사탕이 달더라고요.”

    참 실없는 얘기라고 생각하면서 헤르한은 피식 웃었다.

    그리곤 리엘라가 내민 타르트의 한 귀퉁이를 잘라 입에 넣었다.

    어린 날 리엘라가 먹었다는 그 사탕처럼, 참 실없이도 단맛.

    16549425770037.jpg

     

    16549425770006.jpg

    “파비안이 그러는 거예요. 내일도 잘 참고 따라오면 사탕을 또 주겠다고. 웃기죠? 자기도 나랑 똑같이 열두 살이면서 사탕으로 저를 회유하더라니까요. 그런데 거기에 넘어간 저도 웃겨요. 그 사탕 먹으려고 결국 내일도 걷고. 또 그다음 날도 걸었으니까.”

    16549425770025.jpg

    “그래서 옛 남자 얘기를 하시려고 굳이 날 여기 앉혀놓았겠다.”

    16549425770006.jpg

    “옛 남자 얘기가 아니라 사탕 얘기인데…….”

    리엘라는 뜨끔해서 눈치를 보다가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제가 폐하를 많이 걱정했다고, 별거 아닌 빵 한 조각을 먹으면서도 폐하가 생각이 났다고, 이 달콤한 맛이 어쩌면 폐하에게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어린 날 내게도 그랬던 것처럼.

    리엘라는 그렇게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미 너무 많이 조잘거린 탓일까. 헤르한이 선수를 쳤다.

    16549425770025.jpg

    “말이 원래 그렇게 많은 편이었나?”

    질책인가 했지만 타르트의 다른 한쪽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황제의 얼굴이 그리 언짢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리엘라는 솔직해져 보기로 했다.

    어차피 사탕을 물고 용병단 아저씨들을 따라다니던 얘기까지도 다 했겠다, 망설일 건 없었다.

    16549425770006.jpg

    “조바심이 나서요.”

    16549425770025.jpg

    “조바심?”

    16549425770006.jpg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다 들으시는데 저만 못 듣는다고 하시니까. 전이랑 다르게……. 왠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어요.”

    16549425770025.jpg

    “…….”

    16549425770006.jpg

    “그래서 앞으로는 이것저것 얘기를 많이 해보려고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노력해야죠, 하고 반은 농담 삼아 말을 덧붙였는데 헤르한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타르트를 툭툭 건들던 포크를 내려놓고, 턱을 괴고선 자신을 빤히 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꼭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을까?’ 하고 신기해하는 것 같은 눈길이라 리엘라는 머쓱해졌다.

    황제에게 너무 격의 없이 굴었나, 역시 얌전히 예의를 지키는 쪽이 좋았을까, 그런 후회까지 들 때쯤 헤르한은 입을 열었다.

    16549425770025.jpg

    “네 마음이 들리지 않아서. 그래서 내가 널 계속 내 곁에 두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날 배신해도 내가 모를 테니까.”

    예상치 못한 말이 리엘라에겐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16549425770025.jpg

    “리엘라 블리니테. 미리 부탁 하나를 해도 될까.”

    16549425770006.jpg

    “말씀하세요.”

    16549425770025.jpg

    “훗날 어떤 식으로든 내가 밉고 싫어지면, 너만은 내게 티 내지 말고 말없이 조용히 떠나주어라. 끝내 내가 알지 못하게.”

    제가 폐하를 배반하는 일은 없어요, 라고 리엘라는 말하지 못했다.

    오늘 그를 배신했다는 한 충복 역시 한때는 같은 맹세를 했을 테지. 하지만 그는 변심했고 결국 헤르한을 상처 입혔다.

    사람은 모든 약속을 다 지킬 수는 없다. 그건 그 사람이 처음부터 악해서가 아니라, 그저, 인생을 살다 보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오기 때문일 것이다.

    리엘라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때는 달콤한 사탕을 입에 물려주며 저를 위로해주었던 파비안이 어느 날은 자신을 몹시 아프게 하기도 했던 것처럼.

    16549425770006.jpg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16549425770025.jpg

    “그래. 고맙다.”

    무감한 표정으로 말을 마친 헤르한은 마지막 타르트 조각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

    티타임 이후 헤르한은 침실로 되돌아갔다. 심적으로 또 체력적으로 많이 고단했던지 그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헤르한이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것을, 리엘라는 아시온을 통해 들었다.

    16549425770006.jpg

    “혹시 저 때문에……?”

    16549425825473.jpg

    “음. 리엘라 양께서 아주 큰 역할을 하시긴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고요.”

    다시 응접실에, 리엘라와 마주 앉은 아시온은 조금 난감한 기색으로 머뭇거렸다.

    리엘라 블리니테에게 어디까지 얘기를 해도 좋은 걸까.

    생각하던 아시온은 그게 참 주제넘은 고민이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사이에 주군의 식사를 챙겨 먹이고, 주군의 마음을 풀어주고, 또 잠시라도 편안히 눈을 붙일 수 있게 침대로 끌고 가 이불까지 덮어주고 나온 것이 리엘라인데.

    거기에다가 리엘라는 첩자라고 억울하게 누명을 쓴 피해자이기도 했다.

    16549425825473.jpg

    “밤사이 이상 증세를 겪으신 모양입니다. 지금은 진정되었지만요.”

    16549425770006.jpg

    “이상 증세? 예전의 그 ‘발작’ 같은 건가요?”

    16549425825473.jpg

    “그건 아닙니다. 저희도 아직 다는 알지 못합니다. 제스가 연구 중이에요. 어쨌든 그 덕분에 카넬을 현장에서 잡긴 했는데…….”

    16549425770006.jpg

    “네? 카넬 경을 현장에서 잡아요? 무슨 현장…….”

    리엘라는 아시온의 말을 곰곰이 되뇌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첩자가 카넬 경이었다는 건가?

    전말을 깨달은 순간, 그러지 않아도 무겁게 다가오던 황제의 고통이 리엘라의 심장을 더 아프게 짓눌러왔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나 허탈했을까?

    어떻게, 폐하는, 울지 않고 그걸 버텨냈지?

    16549425825473.jpg

    “그런데 좀 이상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카넬이 현장에서의 일을 기억 못 하거든요. 폐하께서도 기억을 읽지 못하시고. 카넬 본인은 어제 낮에도 종일 집무실에서 잠만 잤다고 하고요.”

    16549425770006.jpg

    “그건 좀 이상한데요.”

    16549425825473.jpg

    “그렇죠. 이상합니다. 폐하께서 기억을 못 읽다니…….”

    16549425770006.jpg

    “그게 아니라요. 종일 잠만 잤다고 한 부분이요. 전 어제 서궁에서 카넬 경을 봤거든요.”

    16549425825473.jpg

    “예?”

    아시온이 크게 되물으며 벌떡 일어났기에 리엘라는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인가 싶어 깜짝 놀라 대답했다.

    16549425770006.jpg

    “루를 찾아 세탁실로 가던 길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카넬 경이 평소랑 좀 달랐어요. 저를 알아보지 못했거든요. 인사도 먼저 했는데 듣지도 않고 그냥 가셨고요. 저는 제가 그냥 카넬 경께 밉보인 줄로만 알고…….”

    아시온의 표정이 창백했다.

    더 무슨 설명을 하진 않았지만, 리엘라는 그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상황의 흐름을 눈치챌 수 있었다.

    16549425770006.jpg

    “그때 카넬 경이 제 옷장 안에 증거를 넣어두신 거로군요.”

    16549425825473.jpg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답이 긍정인 것에 비해 아시온의 얼굴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16549425825473.jpg

    “리엘라 양. 괜찮으시다면, 카넬을 함께 만나주시겠습니까?”

    하지만 그게 끝내 보답 받지 못할 미련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사형 선고를 받는 것이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시온을 따라 일어섰다.

    *


    16549425853829.jpg

    “하……. 파장이 너무 안정적이야. 아무래도 수면 장애 쪽은 아닌 것 같아.”

    16549425853833.jpg

    “제스 경…….”

    16549425853829.jpg

    “제길. 그러면 약물 쪽인가? 그런 약이 있던가? 정신을 지배하는 약이? 아니야. 의식을 흐리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그렇게까지 계획적으로 조종할 수는 없어. 그럼 뭐지? 아시온 말대로 설마 최면 쪽인가?”

    16549425853833.jpg

    “제스 경, 이제 그만……. 어쩌면 제가 정말 그런 짓을 한 걸 수도…….”

    16549425853829.jpg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쉽게 인정하지 마.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제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태연한 척을 할 정신조차 없었다. 제스는 자신이 느끼는 모든 초조함과 불안함과 속상함을 카넬에게 전부 처절하게 쏟아냈다.

    16549425853829.jpg

    “널 이 자리에 앉힌 건 나야! 번거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죄다 너에게 떠맡긴 것도 나고, 내 대타로 널 왕국 수행단으로 보냈던 것도 나라고! 전부 내가 한 짓인데. 내가 어떻게, 뭘 그만해? 무죄를 입증하든 유죄를 입증하든, 그건 내가 해. 내가 해낼 거야.”

    제스는 두꺼운 책을 탁 덮고 돌아섰다.

    무죄든 유죄든 입증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건 거짓말이었다. 제스는 어떻게든 카넬의 결백을 밝힐 생각에 필사적이었다.

    하긴. ‘결백’이란 말은 우스울지도. 카넬은 현장에서 잡혔으니까.

    하지만 약을 먹었든 최면에 속았든, 본인 의지에서 비롯해 한 짓이 아니란 것만이라도 밝혀낼 수 있다면…….

    16549425853829.jpg

    “협조해주지 않을 거면 됐어. 나 혼자서도 충분히 밝힐 수 있으니까. 넌 거기 그러고 가만히나 있어.”

    제스는 카넬을 연구실 옆 당직실에 가두고 밖으로 나왔다.

    자신의 그런 필사적인 모습이 카넬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단 건 알았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심각한 표정의 아시온이 리엘라를 데리고 등장한 건 바로 그때였다.

    16549425825473.jpg

    “뭐 좀 알아냈어?”

    16549425853829.jpg

    “아니. 아직. 약물 쪽으로 조사해보려고. 그런데 저 여자는 왜?”

    리엘라는 제스가 자신을 경계하는 것을 느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누굴 향해서든 예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특히 제스는 더더욱, 누구보다 카넬을 믿고 아낀 사람이니까.

    16549425770006.jpg

    “카넬 경과 직접 얘기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괜찮을까요?”

    16549425853829.jpg

    “무슨 얘기 말씀이십니까?”

    16549425770006.jpg

    “그건……. 나와서 말씀드릴게요.”

    제스는 영 못 미더운 듯했지만 그렇다고 리엘라의 조심스러운 요청을 차마 대놓고 뿌리치지도 못했다.

    아시온이 리엘라에게 눈짓을 했다.

    카넬을 격리해두었다는 당직실 앞에서 리엘라는 한참 호흡을 골랐다.

    이제부터 카넬을 추궁해야 하는데. 그의 거짓말을 밝혀내야 하는데.

    리엘라는 겁이 났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시온의 말대로라면 그날 서궁에서 카넬을 본 목격자는 자신뿐이라고 했다.

    16549425770006.jpg

    “카넬 경. 리엘라 블리니테입니다. 안에 계신가요?”

    방 안에선 기척이 없었다.

    아마 많이 지쳐 있을 테지. 그가 진짜 첩자이건, 억울하게 몰린 것이건.

    16549425770006.jpg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다시 노크했지만 조용했다.

    왠지 좋지 않은 예감에 리엘라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꼭 나쁜 예감은 잘 맞아떨어지던데.

    리엘라는 조심스럽게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안에서 열고 나올 수 없도록 제스가 걸어둔 걸쇠도 풀었다. 살짝 문을 열어 카넬이 안에 잘 있는지만 확인해 볼 요량으로.

    16549425770006.jpg

    “카넬 경……. 실례지만 잠깐 나눌 얘기가…….”

    하지만 그렇게 들여다본 방 안, 카넬은 리엘라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16549425770006.jpg

    “헉! 카넬 경! 안 돼요!”

     

    16549425912698.jpg

    1654942591270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