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몸을 기댈 아주 작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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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몸을 기댈 아주 작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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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몸을 기댈 아주 작은 뭔가
2021.11.04.
제스는 물끄러미 제 주군을 바라보다가 스스로 자기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활짝 문이 열렸는데도 헤르한은 한동안 눈을 감고 그 자리에 반듯하게 서 있었다.
그가 그러고 서 있는 동안의 침묵은 숨 막힐 듯했다. 어린 시절부터 늘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던 헤르한과 제스, 아시온. 세 사람에겐 참 어렵기만 한 침묵이었다.
뚜벅뚜벅.
이윽고 헤르한이 마른 구둣발 소리를 내며 안으로 앞장섰다.
“제가 리엘라 양을 조금 싫어하긴 합니다. 나의 폐하 앞에 티끌처럼 알짱대는 여자니까. 네. 술주정도 좀 했고요. 폐하 돌아가시면 박제로 만들 용액도 다 준비하긴 했는데요. 그렇다고 제가…….”
제가 첩자는 아닙니다.
그렇게 말을 하려다가 말고 제스는 그냥 어깨에 힘을 빼고 쓴웃음을 터트렸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알리바이가 어떻고, 논리가 어떻고를 따질 일이 아니었다. 제 주군에게 이런 항변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목이 잘리는 것보다 더한 모멸이었다.
“무슨 개소리야! 제스. 폐하께서 널 의심하실 리 없잖아. 밤새 술에 절어 있더니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렸냐?”
오히려 다급하게 언성을 높이는 건 아시온 쪽이었다.
괜히 제스의 등을 한 대 ‘퍽’ 치고 난 후에, 아시온은 절박하게 헤르한을 쳐다보았다. 황실의 용맹한 사자, 황제의 근위대 대장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애처롭고 절박한 눈으로.
아니죠? 아니라고 말씀해주세요, 제발.
아시온이 헤르한에게 소리 없이 사정했다.
“……그래. 넘겨짚지 마라. 제스.”
그래서 헤르한이 제 말에 동조를 해주었을 때, 아시온은 그야말로 십년감수했다며 울음까지 터트릴 지경이었다.
“그러면 여기는 왜…….”
“여기가 아니라, 정확히는 저기다.”
제스의 물음에 헤르한이 가리킨 것은 연구실 안쪽이었다.
제스의 연구실은 높은 책장으로 빼곡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 벽에 붙은 무거운 책장을 옆으로 밀면 나오는 비밀의 문 너머엔 작은 밀실이 있었다. 헤르한이 먹을 약을 제스가 직접 조제하고 연구하는 비밀 공간이었다.
“폐하. 농담을 하시는 거죠? 밀실의 존재를 아는 건 저희뿐인데.”
“정확히, 우리뿐은 아니지.”
헤르한의 대답에 제스의 얼굴이 곧 창백해졌다.
헤르한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챘는지 제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며 제스는 자신이 늘 밀실의 열쇠를 숨겨두던 책상 서랍을 열었다. 하지만 제스의 흰 손끝은 텅 빈 서랍 안에서 갈 데를 잃고 덜덜 떨기만 했다.
“첩자가 저 안에 있어. 네 열쇠를 훔쳐 들어가서, 지금 열심히 증거 인멸 중이다.”
“대체……. 증거 인멸이라니…….”
제스가 덜덜 떠는 동안 아시온이 이를 꽉 물고 검을 쥔 채 먼저 움직였다. 아시온이 책상을 옆으로 밀어젖히니 밀실로 통하는 문이 열린 채 드러났다.
제스는 믿기지 않았다.
여긴 어제만 해도 자신이 틀어박혀 주군의 상태를 연구하던 곳이었는데.
그 좁고 아늑한 공간이 이젠 사내 넷이 서로에게 쏘아대는 위압감과 불안함으로 터질 듯이 빠듯했다.
“야……. 이건 아니잖아.”
그렇게 무거운 공기에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이 짓눌리면서도 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밀실 안에선 푸른 약병을 든 카넬이 아시온에게 붙들린 채였다. 테이블 아래는 이미 그가 내용물을 다 쏟아버린 약병들로 어지러웠다.
“……카넬. 네가. 거기서 뭐 하는 건데?”
카넬은 제스의 물음에도 답이 없이 침묵했다.
헤르한의 입술은 참 느린 말을 빚어냈다. 카넬을, 끌어내라, 라고.
*
“카넬 경. 대답하십시오! 아까 그건 제스가 성분 분석 중이던 가짜 약이었습니다. 카넬 경도 잘 알고 있었잖아요. 그건 첩자를 잡는 데 필요한 아주 중요한 증거품이란 거. 그런데 왜 증거를 없애려 했습니까? 설마 정말 모두 카넬 경이 한 짓이었습니까? 당장 대답하십시오!”
아시온이 카넬의 멱살을 잡았다.
제스는 싸늘한 눈으로 아시온과 그 손에 틀어 잡힌 카넬을 번갈아 보다가 아시온의 손길을 쳐냈다.
“카넬은 내가 가르쳤고 내가 발탁한 놈이야. 그러니 추궁하는 것도 나고 책임을 지는 것도 나다. 카넬. 말해봐. 왜 날 배반했어? 왜 폐하를 배반했지? 네가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독기를 띤 말과는 달리 제스는 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장에서 붙잡은 첩자 앞에 흥분한 아시온도, 믿었던 부관의 배신에 괴로워하는 제스도, 카넬만큼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카넬!”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 멍청아! 그런 말로는 수습하지 못해. 모른다고 잡아떼서 될 일이 아니야!”
“정말입니다. 아무것도……. 아무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이번엔 제스가 카넬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그대로 카넬의 안면에 꽂으려 움켜쥔 주먹은 끝까지 뻗어가질 못하고 허공에서 부들거렸다.
“제가 어찌 감히 제스 경을 배반하겠습니까? 제가 어찌 감히 황실을……. 어찌 감히 폐하를 배반합니까?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여주십시오!”
카넬이 고통스럽게 뱉어내는 말은 누가 보더라도 진심 같았다.
“어젯밤 서궁에서 폐하를 긴급하게 진료하고 침실까지 모셔드린 뒤 물러났습니다. 폐하께 또 응급 상황이 발생할지 몰라 일부러 숙소로 귀가하지 않고 의국 당직실에서 대기했습니다. 거기서 잠이 든 것 같은데……. 제 기억은 거기까지입니다. 어째서 지금 제가 제스 경의 밀실에 들어와 있었는지, 거기서 무얼 한 것인지, 저는 정말……!”
“자각 없이 한 행동이라고?”
“예. 아시온 대장께 붙잡히고 난 후에야 번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폐하의 힘을 알잖아. 거짓말은 통하지 않아. 카넬.”
“알고 있습니다.”
눈가가 벌게진 카넬은 곧장 헤르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꺼이, 자신의 진심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뜻이었다.
헤르한은 카넬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의 목덜미 위에 천천히 손을 얹었다.
모두의 시선이 헤르한에게로 향했다.
또다시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모두가 간절한 마음으로 헤르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알 수가 없군.”
헤르한의 대답은 절망스럽기만 했다.
“새벽 내내 카넬의 ‘목소리’를 들었다. 제스의 밀실로 들어가 증거를 없앨 계획을 세우는 소리였다. 카넬의 목소리가 분명했고, 계획한 대로 행동하는 걸 방금 우리 눈으로 확인도 했지. 그런데.”
“…….”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목소리도, 조금 전의 기억도 읽히지 않는군. 당직실에서 잠들었다는 증언대로 카넬의 기억은 거기까지다.”
“카넬이 한 일이 분명한데 기억과 의식은 없다니, 그건 대체…….”
아시온의 탄식을 끝으로 연구실 안엔 다시 적막이 감돌았다.
그 적막의 사이사이로 무릎 꿇은 카넬의 분하고 억울한 흐느낌이 흘렀다.
비참한 그의 흐느낌은 거친 사슬이 되어 모두의 목을 괴롭게 졸랐다.
카넬의 진심을 믿어주고 싶은 모두의 마음과 그를 의심해야만 하는 상황이 쓰라리게 상충했다.
“폐하. 카넬의 신병을 제게 맡겨주십시오.”
도무지 답이 나지 않는 상황에 뼈아픈 결단을 내린 것은 제스였다.
“이놈이 다시는 어떤 짓도 못 하게 가둬놓고, 손톱을 뽑든 매질을 하든, 제가 책임지고 진실을 밝혀내겠습니다.”
그건 네가 혼자 짊어지기엔 너무 큰 짐이라고.
헤르한은 그렇게 말하며 제스의 청을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헤르한이 뜻을 보이기도 전에 제스가 먼저 주군의 팔을 잡고 간절하게 속으로 애원했다. 제발, 제발 그렇게 하게 해주십시오, 안 그러면 제가 먼저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폐하 제발.
훤히 들리는 제스의 생각을, 헤르한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라.”
*
“오늘 일정은 모두 취소하라고 전했습니다. 폐하.”
다시 본궁 내실로 돌아온 헤르한은 기진맥진해서 아시온의 보고에도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집권 1년 차도 되지 않은 황실의 새 주인이 어디 일을 팽개치겠냐만, 오늘 같은 날은 예외였다. 오늘처럼 믿기지 않는 배신을 목도하고, 사랑하는 제 사람을 스스로 내치게 되는 날은.
“혹시 몽유병 같은 거 아닐까요?”
그때 얌전히 물러나나 싶던 아시온이 굳이 다시 다가와 물었다.
“그렇게 쳐주기엔 지금까지 저지른 일들이 너무 치밀하지.”
카넬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황제 곁에 머물면서 꾸준히 약을 바꿔치기하고, 그 죄를 리엘라 블리니테에게 덮어씌웠다. 또 모두가 리엘라에게 관심이 쏠린 틈을 타서 남은 증거까지 인멸하려 했다.
단지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기엔 악의가 명백한 행동들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어디서 최면이라도 걸려 와서…….”
아시온은 심각한 얼굴로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 망상이 지나쳤습니다.”
“아니야. 망상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건 나도 같은 심정이니까.”
“……뭔가 사정이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러길 바라야지.”
헤르한의 능력이 저주가 되는 순간.
모르고 지나가면 적어도 상처는 받지 않을 것을. 이런 때마다 헤르한은 늘 자신을 향한 타인들의 미운 감정을 날것으로 받아 삼켜야만 했다.
“쉬십시오.”
그건 저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아픔이었으므로.
아시온은 그저 조용히 물러났다. 지금 주군에게 필요한 것은 늘 그렇듯이 고통을 삭일 ‘시간’일 테니까.
아시온이 돌아서자마자 헤르한은 고개를 끄덕일 새도 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갑자기 셔츠의 옷깃이 목을 조르는 것처럼 갑갑했다. 단추를 끌러버리려고 했지만, 아까부터 손이 미세하게 떨려서인지 둥근 단추가 계속 미끄러져 집히지 않았다.
헤르한은 몇 번 더 단추를 만지다가 결국 신경질적으로 옷깃을 비틀어 당겼다.
투둑.
작은 단추가 침대 아래로 떨어져 또르륵 바닥을 구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헤르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첩자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고 그래서 줄곧 마음도 단단히 먹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숨을 못 쉬겠어.’
병증은 아닌데. 비상약의 부작용도 없었는데.
제대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데도 세상이 흔들리는 듯 어지럽고 토악질이 올라왔다.
뭔가가 필요하다, 라고 헤르한은 절실하게 생각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라면 그냥 죽을 것만 같다고. 죽지 않기 위해서는 몸을 기댈 만한 아주 작은 뭔가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아시온을 불러야 하나. 좀 우습게 보이더라도 오늘은 내 옆에 있으라 해야 하나.
헤르한은 진지하게 망설였고 그 망설임 끝에 손을 들었다.
그 손을 누군가가 맞잡았다.
작지만 아주 따뜻하고 보드라운 누군가의 손이.
“……옆 침실에 가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까부터 저기 있었는데……. 밖으로 나올 타이밍을 못 잡았어요. 폐하와 아시온 대장님이 너무 심각해 보여서요.”
그래서 여태 구석에 숨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길 엿봤다는 건가.
헤르한은 리엘라의 손을 잡고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끙챠, 힘을 주어 자신을 일으키는 리엘라의 모습에 헤르한은 작게 피식 웃었다. 자신에게 그렇게 웃을 힘이 남아있는 줄은 그조차도 몰랐다.
“저, 아침에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했습니다.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편하게 앉아서 쉬었고요. 시종들이 가져다준 음식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고요.”
“잘했네.”
헤르한은 쉼 없는 리엘라의 보고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차분하면서도 나긋한 재잘거림을 듣고 있자니 복잡하던 머릿속이 점차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계속 손을 맞잡은 채였다.
“폐하는 식사하셨나요? 배고프지 않으세요? 타르트 드실래요? 한 조각 남겨두었는데.”
무슨 일이냐고, 무슨 일로 그렇게 괴롭고 지친 것이냐고 리엘라는 묻지 않았다.
대신 제스나 아시온조차도 정신없어서 챙기지 못한 황제의 식사를 챙겨 물었다.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 여자의 눈빛이 이렇게 맑고 따스했던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며.”
“너무 맛있더라고요.”
“맛있으면 다 먹었어야지.”
“폐하께서도 참 좋아하실 텐데, 하고 계속 생각이 나서요.”
미련한 행동이었다. 굳이 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남겨둘 필요는 없었다. 황제는 원하면 언제든 무엇이든 가질 수 있으니까. 그깟 타르트야, 새로 구워 내오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의 미련함이 감사했다.
이 순간 자신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어쩌면 바로 그것이었을지도.
“그럼 가져와. 같이 들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