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 다시 해볼까요? (36/154)


#36 다시 해볼까요?
2021.10.31.


리엘라는 뒤척거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이불이 흘러내리자 몸 안으로 찬 기운이 들었다. 땀이 밴 맨살에 닿는 공기는 제법 서늘했다.

살짝 으슬으슬한 느낌에 리엘라가 몸을 웅크리기 시작할 때쯤 누군가가 흘러내린 이불을 리엘라의 어깨까지 추켜올려주었다.

다시 따뜻해져서 리엘라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곤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달콤한 살 냄새가 나는 곳으로 파고들었다. 아기새가 어미의 품을 찾듯이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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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

그것에 누군가가 헛웃음을 터트린 것 같기도 하지만.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 아니면 덜 깬 꿈이거나. 어느 쪽이든 리엘라는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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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하는군.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너무 아늑하고 포근한 걸 어떡해.

리엘라는 자신이 누구를 향해 사과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잠결에 빙긋 웃었다.

그러자 또다시 기가 찬 듯한 숨소리가 한번 들리더니, 뜨겁고 단단한 것이 리엘라의 허리를 휘감았다.

리엘라는 반사적으로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자신을 강하게 끌어안은 건 누군가의 단단한 팔뚝이었다. 마찬가지로, 참 다디단 살 냄새가 나는.

뭘까, 이 느낌은. 분명히 익숙한데.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기. 등 뒤에서 자신을 단단히 지탱해주는 몸. 또 거기서 느껴지는 열기.

리엘라는 문득 잠을 떨치고 자기 등에 닿아 있는 몸의 굴곡을 하나하나 의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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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순간, 사방을 은은하게 감돌던 열기가 갑자기 거센 화염처럼 리엘라의 머릿속으로 훅 뻗쳐왔다. 리엘라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정신이 들었기에 움직이지 못했다.

뒷덜미가 뻐근했다.

리엘라의 귓가 바로 뒤에선 느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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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뭐가 움찔했는데.”

아뇨. 기분 탓일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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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숨도 안 쉬는 것 같고.”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든 숨을 제대로 못 쉬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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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나.”

차라리 그 편이 나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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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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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일부러 어제의 기억을 일깨우기라도 하려는 듯한 능글거리는 말에 리엘라는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늑함과 평화는 이제 옛말이었다.

리엘라의 얼굴이 터질 듯이 화끈거렸다. 안 그래도 정신이 얼얼한데 어젯밤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는 통에 더 아찔했다.

그러는 동안 리엘라의 허리를 휘감은 팔은 계속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조금씩 더 밀착되어오는 몸은 꼭 리엘라를 놀리는 듯했다. 이래도 일어나지 않을 거냐, 이래도 계속 그렇게 눈을 감고 자는 척만 할 거냐,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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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좋은…… 아침입니다. 폐하…….”

리엘라는 결국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은 상태로 그대로 입만 겨우 열었다. 물론 뒤는 돌아보지도 못했고, 악어의 입에 물린 먹잇감 마냥 헤르한의 품에 내어준 몸도 어쩌지 못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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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이라는 것 치곤 상당히 곤란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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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차마 뒷말을 완성하지 못하는 리엘라를 두고 헤르한이 나른하게 웃었다.

그 웃음만큼 등 뒤에 맞닿은 그의 가슴이 꿀렁거렸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가슴이었다.

문제는 호흡에 따라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너무 생생하고 자극적이어서 리엘라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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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혼이 다 빠지겠다 싶어서, 리엘라는 크게 결심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생각 없이 일어났다가, 이불이 흘러내린 자리에 자기 맨살이 훤히 드러나 버려서 또 당황했다가, 그걸 가린답시고 이불을 닥치는 대로 잡고 끌어당겼다가, 덕분에 이번엔 헤르한 쪽의 나신이 훤히 드러나 버려서 그냥 다 관두고 얼굴을 베개 위에 파묻고 엎어져 버리기까지.

헤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리엘라를 빤히 보기만 했다.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어서 얼굴을 파묻고 누워버렸는데도 그랬다. 리엘라는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헤르한의 노골적인 시선을 뒤통수로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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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그러고 있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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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가 가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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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내 방인데 내가 가긴 어딜 가.”

그럼 그냥 이대로 계속 얼굴 처박고 죽어 버릴까 봐요.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도 부끄러워서 그런 대꾸조차도 못 하고 그저 쌕쌕거리는데, 그런 리엘라에게 헤르한이 또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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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로는 죽지도 않으니 그만 포기하고 고개 들어.”

그 말에 리엘라는 고개를 들었다.

헤르한이 명령해서가 아니라, 놀라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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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이 들리시는 걸 보니 어제 우리 시도가 성공했나 봐요?”

뭐라고? 뭐가 어쩌고 어째? ‘우리 시도’? ‘성공’을 해? 대체 무얼?

헤르한은 그새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리엘라가 기가 막히고 억울해 말문이 막혔다.

리엘라는 헤르한의 시선에 깃든 황당함을 그새 알아채곤 목을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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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닌가요? 실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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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기억이 안 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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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설마 제가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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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넌 원래 흥분하면 기절하는 타입인가?”

질책 어린 물음이었지만 그걸로 대답은 충분했다.

리엘라는 입을 턱 벌리고 기겁했다.

내가 또 기절했다고? 분명 입맞춤까진, 그리고 옷이 벗겨질 때까지도 잘 버텼는데.

헤르한을 만나기 전엔 전례 없는 일이었으니 믿기지 않다가도, 또 막상 어젯밤 침대에 누운 이후의 기억이 깜깜한 걸 보면 그가 틀린 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리엘라는 그제야 마냥 부끄러웠던 마음을 떨쳐내고 몸을 일으켜 헤르한과 눈을 맞추었다.

아주 미워죽겠다는 듯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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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뭐 하러 저를 여기서 재우셨……. 그냥 깨워서 내쫓으시지…….”

민망함과 미안함을 어찌할 길이 없어 대충 뱉은 말에 헤르한의 흘김이 더 거세어졌다. ‘내가 너를 깨우지 않았을 것 같냐’라고 따져 묻기라도 하는 듯이.

리엘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참담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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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저도 제가 왜 그러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분명 제스 님은 제게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지금 다시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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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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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자고 일어났으니 이젠 괜찮을지 몰라요. 이번엔 정신 똑바로 차려보겠습니다. 자, 잠깐. 물 좀 마시고요.”

리엘라는 열심히 팔을 뻗어 침대 아래 어딘가를 더듬거리면서 아무 옷가지나 하나 손에 집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간신히 건져 올린 것은 황제의 로브가운이었다. 제 덩치엔 큰옷이었지만 쉽게 입을 수 있으니 오히려 잘 됐다고 리엘라는 생각했다.

이불 안에서 꼼지락꼼지락, 황제의 눈치를 보며 가운을 갖추어 입은 리엘라가 침대 밖으로 나와 휘휘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몹시 쑥스러워 어쩔 줄 모르면서도 나름대로 꽤 열심히였다.

대체 무얼 하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잠자코 있던 헤르한은 곧 리엘라가 거사를 앞두고 진지하게 ‘준비운동’을 하는 거란 것을 깨달았다.

어깨를 돌리고 허리도 한번 돌리고. 야무지게 저쪽 테이블에 놓인 물도 꼴깍꼴깍 마시고는, 차근차근 심호흡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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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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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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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다 됐습니다. 폐하.”

그렇게 제 발로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와 헤르한 앞에 다소곳이 앉는 리엘라의 표정은 짐짓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젯밤 리엘라가 기절해버렸을 때도. 또 그런 리엘라가 새벽녘 내내 제 품 안으로 파고들며 쌔근거리며 잘 때도.

헤르한은 당황스러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대체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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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꼭 제 결백한 마음을 보여드릴게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천천히……. 부탁드려요.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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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제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첩자는 찾았으니까.’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그냥 안아버려?

영문도 모르고 마냥 순수한 리엘라 앞에서 헤르한의 단전 밑은 속절없이 펄펄 끓었다.

하필 그때 또 ‘목소리’가 들렸다.

헤르한은 이번엔 리엘라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이를 악물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

철옹성 같은 침실 문이 열리자 밤새 바깥쪽 응접실에서 초조하게 앉아 있던 제스와 아시온이 약속이나 한 듯 벌떡 일어났다.

헤르한은 가운을 걸친 채로 유유히 걸어 나왔다.

문틈으로 언뜻 보이는 침실 안쪽엔 얼굴이 빨개진 리엘라가 보자기에 쌓인 아기처럼 이불에 둘려 앉혀 있었다.

대체 무슨 사연인지.

제스는 안쪽의 사정을 궁금해하다가도 이내 모르는 게 약이다 싶어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는 동안 헤르한은 어느새 가운을 벗고 새 의복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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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는 어떠십니까?”

제스는 그런 주군에게 입술을 삐죽 내밀고 물었다.

많이 지치고, 많이 원망하나, 그 이상의 걱정이 녹아 있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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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끝내 자기 결백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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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 여자 심정 같은 것 말고요. 폐하는 어떠시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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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대로야.”

정말 ‘보이는 대로’ 멀쩡해서 제스는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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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떻게? 며칠은 정신을 못 차리실 거라 생각했는데.’

이것 또한 ‘가짜 약’의 부작용일까? 그렇게 무리해서 급하게 비상약까지 먹은 주군이, 이렇게 백 일은 푹 잔 것 같은 개운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는 것이? 이쯤 되면 그 가짜 약은 가짜 약이 아니라 보약 아닌가?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그건 죽을 징조라고 했다.

폐하도 어쩌면 죽을 날이 다 와서 이상해져 버린 게 아닐까.

오늘따라 유달리 생명력이 넘쳐 보이는 주군 앞에서 제스가 평소보다 더 초조한 이유는 사실 그것 말고 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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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들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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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새벽보단 흐려졌지만 여전해.”

새벽녘에 헤르한이 또, ‘이상 증세’를 겪은 것이다.

잠든 리엘라를 안고서 축객령을 내린 주군은 그 사실을 제스와 아시온이 막 침실 밖으로 나가기 직전에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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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들린다. 여기서도 너희의 생각이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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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또, 낮에 겪으셨던 그 이상 증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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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보다 더 심해. 서궁 시종들의 생각이 들린다. 서고 당직관의 생각도 들리고, 정문 문지기의 생각도 들려. 지금 이 시각 황궁에 깨어 움직이는 자들의 마음이 전부 들린다. 그리고……. 아니야. 됐어.”

 
헤르한은 거기에서 말을 아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품에 고이 잠든 리엘라가 신경 쓰여서. 또 제 앞에 다 죽어가는 꼴로 비틀대고 있는 제스의 상태가 신경 쓰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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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잠시 눈을 붙이면서 대기해라. 리엘라가 깨어나면 나가서 설명하겠다. 통증은 전혀 없으니 그 걱정은 하지 말고.”

 
헤르한은 그렇게 미뤄두었던 ‘해야 할 말’을 지금 다시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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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첩자로 추정되는 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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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정말이십니까? 그러면 왜 아까 바로 말씀해주시지 않고!”

아시온이 단번에 화색을 띠며 되물었다.

주군의 건강에 대한 걱정, 주군과 리엘라 양과의 앞날에 대한 걱정, 거기에 첩자 문제까지. 온갖 고민으로 눈 밑이 새까매졌던 아시온에겐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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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확인을 하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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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대체 누굽니까? 어딥니까? 당장 잡아 오겠습니다.”

무겁던 어깨가 한결 홀가분해진 것 같아 아시온은 마냥 기뻤다.

바로 그 탓에, 아시온은 주군의 안색이 리엘라 얘기를 할 때와는 달리 어둡게 그늘졌다는 것도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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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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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바로 채비하겠습니다.”

아시온이 의자 팔걸이에 걸쳐두었던 검집을 다시 허리에 맸다.

헤르한도 재킷을 걸치고 단추를 채웠다.

제스는 아직 입을 쀼루퉁하게 내밀고 문이 굳게 닫힌 침실과 헤르한을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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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리엘라 양의 상태를 살핀 뒤에 뒤 따라 가겠습니다. 아니면 연구실에 가 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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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제스. 너도 따라와.”

그런데 주군의 대답이 의외였다. 당연히 첩자고 나발이고, 어젯밤 또 기절했다는 리엘라의 몸을 살피라고 할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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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 네가, 꼭 곁에 있어야 할 것 같다.”

헤르한이 같은 말을 다시 힘주어 반복했다.

제스와 아시온은 그제야 헤르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된 것을 알아채고는 서로 눈치를 주고 받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

첩자를 체포하는 일인데도 헤르한은 아시온과 제스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게 했다.

아시온은 몇 번이나 첩자가 누구인지 물었으나, 헤르한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말을 아꼈다.

주군의 침묵이 길어지고 걸음이 느려질수록 아시온과 제스의 불안감도 더 짙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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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자가 못해도 장관급은 된다’에 내 5년짜리 연구 논문 건다. 그게 아니고선 폐하께서 저렇게 심각하실 리가 없어.”

긴장감을 떨치기 위해서인지 제스는 일부러 더 가벼운 말투로 아시온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정작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제스는 헤르한이나 아시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하얗게 질려서 제대로 말문을 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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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폐하……. 여긴 왜……. 첩자가 있는 곳으로 가신다면서요.”

제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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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제 연구실이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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