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여름밤, 5초 (35/154)


  • #35 여름밤, 5초
    202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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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

    목소리에도 온도가 있다면, 지금 헤르한의 이 물음은 펄펄 끓는 고온이리라.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리엘라의 머리가 타버릴 듯했으니까.

    그런데다가 간도 크게 몸까지 마주 댔으니 리엘라도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황제의 물음에 야무지게 대답은 했다. 리엘라는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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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는 속마음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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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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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히 소수이지만, 이 세상엔 그런 부류들이 있습니다. 특별한 능력을 갖는 대신 그 대가로 고통이 따르는 짧은 수명을 갖죠. 제가 알기로는, 통상적으로 청소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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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갑자기……. 그건 첩자에 관한 말씀이신가요?”

     
    리엘라가 황제의 침실로 격리된 직후. 갑자기 침실 안으로 쳐들어온 제스의 말이 리엘라는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제스에게선 언뜻 술 냄새가 풍겼다.

    그새 술을 드셨나. 그만큼 괴로우신 건가. 그래서 내게 알쏭달쏭한 말씀이라도 주절주절하시는 건가.

    하지만 단순한 술주정이라고 하기엔 제스의 말은 너무나 놀랍고도 깊은 진실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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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폐하는 아직 죽지 않았죠. 왜냐? 내가 있으니까. 내가 평생을 바쳐서 그분의 숨결 하나, 땀 한 방울까지 다 분석하고 연구했으니까. 나 같은 의사를 만나지 못한 능력자들은 다 죽어서 이 세상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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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 님. 대체 무슨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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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나처럼 잘난 의사도 폐하를 완전히 살리진 못합니다. 아. 그 고집을 어떻게 꺾습니까? 자기가 나서서 죽겠다는데. 이젠 나도 모르겠습니다. 죽어버리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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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 님. 폐하가 정말 마음을 읽으신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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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내가 당신을 욕하는 것도 다 듣고, 당신이 폐하를 욕하는 것도 다 듣고. 아. 아니다. 당신은 못 듣습니다. 당신 속만 안 들리신대요. 참 이상하죠?”

     
    리엘라는 혼란스러웠다.

    황제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듣는다고? 그런 일이 세상에 가능한 것인가?

    그러다가 문득, 기억 깊숙한 곳에서 잠자고 있던 몇몇 잔상들이 리엘라의 멍한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치 왕녀와 자신 사이의 일들을 다 알고 있듯 저를 위로하고 보호해 주었던 황제의 모습. 설명한 적이 없는데도 파비안을 알고 있던 황제의 모습. 또 그런 황제를 졸졸 쫓아다니며 제발 힘을 그만 쓰시라 애원하던 아시온의 말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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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폐하가 정말로 사람의 속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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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 뭘 감추고 있는 겁니까?”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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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 뭘 감추고 있길래, 나의 폐하를 저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만드느냐고요.”

     
    그런 와중에 황제는 자신의 마음만은 듣지 못한다고 한다.

    리엘라는 그제야 황제의 여러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언젠가 네가 궁금하다고, 알고 싶다고, 그러니 알아야겠다고 했던 말도.

    오늘 빨래터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간절하게 숨을 고르던 행동도.

    전부 다, 마음이 들리지 않는 자신을 필사적으로 ‘읽기 위한’ 시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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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폐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존재라니.’

    그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이었다.

    특히 황궁에 첩자가 나타나 황제에게 결백을 증명해야만 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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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폐하께 감추는 게 없어요. 뭐든지 보여드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스 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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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요. 내가 확실하지도 않은 방법을 알려줄 것 같습니까?”

     
    제스는 끝끝내 답을 말해주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제스가 백 번을 버티면 리엘라는 백한 번을 매달렸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얻어낸 대답이었다.

    그러니 리엘라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게 황제에게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는 방법이라면. 황제가 떠안고 있는 짐을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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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를 안아주세요.”

    리엘라가 황제의 품에 제 이마를 파묻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리엘라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그대로 황제의 가슴팍을 적셨다.

    그 뜨겁고도 축축한 느낌에 헤르한이 몸을 떠는 사이 리엘라는 다시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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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도 아니잖아요.”

    애써 농담인 척, 애써 태연한 척 리엘라가 웃었다.

    열심히 울어서 빨갛게 부어오른 눈두덩이가 헤르한의 조바심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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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사실은 처음이야.’

    헤르한은 고민했다. 그렇게 대답한다면 리엘라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제라도 무서워서 도망을 치려나?

    사실 헤르한은 리엘라가 두려워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해주면 될 일이었다. 네가 이렇게 애를 쓰면서 결백을 주장하지 않아도 나는 너를 믿는다고, 내가 너를 버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하지만 헤르한의 입술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리엘라를 안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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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될……까요?”

    겁도 없이 황제의 품에 먼저 파고 들어와 놓고 뒤늦게 떨고 있는 저 모습이 너무 당돌하면서도 욕정을 끓게 만들어서.

    결국 헤르한은 그저 다른 것을 더 생각하기를 멈추고, 고개를 숙여 리엘라의 입술을 덥석 물었다.

    서궁의 시녀들은 참 웃긴 데가 있었다.

    리엘라를 구워삶아서 이런 관능적인 드레스를 입혀놓다니. 꼭 오늘 밤 이런 일이 벌어지리란 걸 미리 알기라도 한 양.

    리엘라가 입은 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얇은 드레스였기 때문에, 그저 몸을 밀착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서로의 굴곡을 모두 느꼈다.

    헤르한은 리엘라의 부드럽고 말캉한 몸을.

    리엘라는 헤르한의 뜨겁고 성난 몸을.

    여름밤의 침실 안은 꽤 더웠다.

    르 데르의 강가나 빨래터의 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열기가 바깥으로 뿜어져 나가지 못하고 두 사람 주변을 휘돌았다.

    두 사람의 입맞춤은 길고도 농염했다.

    사이사이마다, 헤르한은 입술을 떼고 리엘라의 귓불을 깨물거나 목덜미에 더운 흔적을 남겼다.

    짜릿한 촉감에 리엘라가 입을 틀어막고 신음을 뱉었다. 그러자 헤르한은 굴하지 않고 리엘라의 쇄골에 끈질기게 입 맞추면서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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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 쉬어. 또 기절하면 안 되니까.”

    리엘라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파르르 뒤로 젖히며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 정도 숨을 쉬었다고 생각했을 때, 헤르한은 다시 리엘라의 입술을 탐닉했다.

    중간중간 헤르한은 계속 그렇게 리엘라에게 숨 쉴 틈을 주었다.

    가쁜 숨을 한 번씩 몰아쉴 때마다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헤르한의 팔을 꼬집듯이 꼭 붙들었다. 그러면 헤르한은 리엘라의 귓가에 이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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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옳지.”

    꼭 상대를 조련하는 것만 같은 행동이었지만 사실 그건 헤르한에겐 또 다른 불상사를 만들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리엘라는 전에도 입맞춤만으로 기절해버린 전적이 있었으니까.

    조심스럽기는 리엘라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기절할까 봐 무서운 것을 떠나서도 모든 감각이 너무 강렬했기에, 리엘라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헤르한의 지도에 따랐다.

    그가 숨을 쉬라면 쉬고, 고개를 들라면 들었다.

    뒤를 돌라기에 돌았고, 팔을 뻗으라기에 뻗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불편하던 드레스가 헤르한의 손에 의해 어깨끈이 풀려 리엘라의 다리 밑으로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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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문득 정신이 들어 놀란 리엘라가 가릴 새도 없이 그녀의 몸이 붕 떠올랐다.

    리엘라를 가뿐하게 안아 올린 헤르한의 종착지는 물론, 푹신한 침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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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이야. 5초 줄 테니 그만두고 싶으면 지금 말해. 오.”

    헤르한의 체취가 가득 밴 침대 위에서, 리엘라는 자신을 위에서 강렬하게 내려다보는 헤르한과 진득하니 눈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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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그 5초도 가만히 기다리기가 힘들었는지 헤르한은 리엘라의 입술을 뺀 모든 곳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보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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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 이…….”

    다시 리엘라의 눈높이로 돌아온 헤르한은 그녀의 몸을 강하게 짓눌렀다.

    그는 이대로 리엘라가 산산이 으스러져 제 살갗 하나하나에 배어들도록 리엘라를 품을 작정이었다.

    리엘라는 그런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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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그렇다고 긍정의 대답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터질 듯이 달아오른 헤르한의 몸 아래, 리엘라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리엘라의 볼을 어루만지려던 헤르한은 그대로 멈칫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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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당황한 헤르한의 부름에도 리엘라는 답하지 않았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네가 먼저 달려들어서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안아달라고 울고, 웃고, 애원했으면서, 이제 와서 또 이래 버리는 건, 이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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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 리엘라. 리엘라……!”

    헤르한은 차마 믿기지 않는 얼굴로 인상을 쓰면서 리엘라의 어깨를 흔들었다.

    불과 5초였다. 5초 전만 해도 리엘라는 불꽃처럼 뜨겁게 타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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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르한은 턱이 빠질 듯 어금니를 세게 깨물면서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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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날 괴롭히러 온 게 확실하네. 그냥 지금 바로 너를 첩자로 고발해버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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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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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 차려라. 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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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아아아. 으아아아. 나의 폐하. 나의 헤르하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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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쫌!”

    아시온은 성질을 내면서 고민했다. 이 자식을 그냥 이대로 바닥에 팽개쳐버릴까, 하고. 하지만 그건 역시 너무한 것 같았다.

    제스는 한밤중에 행방불명이 됐다.

    가뜩이나 주군에 대한 걱정으로 힘들어하던 아시온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제스를 찾아 헤매야 했다. 그러다가 제스를 발견한 곳은 황궁 지하의 술 창고였다.

    혼자서 밤새 와인을 세 병이나 비우고 쓰러져버린 제스를 둘러업으면서 아시온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잔소리를 꾹 눌러 참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은 달랐지만 새카맣게 탄 속이야, 자기나 저 인간이나 같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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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죽었어?”

    아시온에게 업힌 채로, 겨우 정신을 차린 제스가 처음 어눌하게 물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아시온은 헛웃음을 몇 번 뱉고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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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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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죽어가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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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아마 그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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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첩자는 아직 못 찾았지?”

    아시온의 묵묵부답에 제스가 업혀 있는 자세 그대로 제 다리를 몇 번 통통 튕겼다. 이젠 혼자서 걸을 수 있으니 내려달란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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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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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딜?”

    그렇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나마 땅을 딛자마자 제스는 앞장서서 걸었다.

    어딜 가느냐고 물었지만,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아시온은 제스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를 알았다. 당연히, 황제가 있을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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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주치의 때려치운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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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치의 안 하고 장의사 하려고 그런다.”

    살벌하게 말하는 것 치고 제스의 걸음은 다급했다. 이기지도 못할 술기운에 힘들어했으면서, 막상 헤르한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아시온은 그런 제스를 붙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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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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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에 계십니다.”

    그렇게 한달음에 침실 앞에 도착했고, 또 황제가 안에 있다는 것도 확인했지만.

    제스는 쉽게 문을 밀고 들어가지 못했다.

    폐하는 과연 알까. 늘 당신이 죽으면 박제를 만드니 어찌하니 하면서 태연한 척 농담을 했지만, 당신의 수명이 하루하루 깎여 나갈 때마다 당신의 손발인 내 수명 역시 함께 깎여 나가는 것만 같다는 걸.

    어느덧 술기운을 다 떨친 제스는 아직도 어젯밤의 헤르한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만일, 이 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하는 헤르한이 몹시도 괴로운 몰골을 하고 있다면 그를 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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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을 거다. 무리하셨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어. 돌아와서 비상약도 충분히 드셨고.”

    그런 제스의 속내를 알아챈 아시온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제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한참 후에야 결심이 선 듯 침실 문을 열었다.

    완전히 침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에 제스는 차마 황제의 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

    비상약은 말 그대로 비상약일 뿐. 헤르한의 상태가 아주 위중할 때만 급하게 마시는 약으로, 약이라기엔 너무 독해서 오히려 헤르한을 늘 곤죽으로 만들곤 했다.

    그러니 헤르한은 당장 시체가 된 건 아니더라도, 시체와 거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누워 있을 것이 뻔한데.

    그런 모습을 자신이 어떻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볼 수 있을까?

    제스는 두려웠다. 이러나저러나 주치의로서 실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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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

    그래. 실격이야. 그러니 난 그냥 나가야…….

    혼자 자괴감에 시달리던 제스는 반사적으로 긍정하다가 그 명령의 주인이 헤르한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을 확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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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

    제스가 소리를 지르려 하자 헤르한이 곧장 검지를 들어 ‘쉿’ 하는 동작을 했다.

    헤르한이 팔을 들어 올리자 그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자연스럽게 허리까지 흘러내렸다. 이불이 벗겨진 자리에 드러난 건 탄탄한 헤르한의 몸,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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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아니! 거, 거기,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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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히 하라니까.”

    헤르한의 가슴에 폭 안겨 곤히 잠든 리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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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제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비상사태를 맞이한 제스의 뇌는 술을 언제 마셨냐는 듯이 핑핑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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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가 왜 저리 멀쩡하지? 비상약을 드셨다면서?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잘못된 건가? 혈색은 왜 저리 좋지? 저 여자는 저기서 뭘 하는 거야? 잠깐, 저 여자도 옷 벗은 거야? 살색이 왜 이리 많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떠오르는 질문이 너무 많아서 무얼 먼저 꺼낼지도 모르고 헤매는데, 대뜸 헤르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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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은 잘 먹었고, 난 멀쩡하고, 리엘라는 자는 중이고, 보다시피 온통 살색이다. 그런데도 계속 보고 있을 거냐? 나가라고.”

    제스는 아직도 마냥 얼떨떨해서, 자신이 소리 내서 묻지도 않은 것을 헤르한이 대답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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