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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증명은 내가 해 (33/154)


  • #33 증명은 내가 해
    202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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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거품이 발견돼?’

    리엘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눈을 부릅떴다. 헤르한 역시 눈에 힘을 주고 아시온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 가까이 발을 내디딘 아시온의 얼굴엔 괴로움이 한껏 묻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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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양. 폐하에게서 떨어져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제부터 제가 모시겠습니다.”

    짐짓 부드럽고 예의 바른 말투. 하지만 그건 체포령이라는 것을 리엘라는 너무나 잘 알았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아시온 대장이, 제스 경이 저렇게 단호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데.

    내내 굳건하던 황제도 충격으로 굳어버려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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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거품이란 것이 무엇이냐.”

    황제는 오랜 침묵 끝에 물었다.

    아시온은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아직 황제가 벌써 리엘라에게 상황을 전달했다는 것은 알지 못했으니까. 리엘라가 듣는 앞에서 첩자 얘기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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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첩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리엘라가 대뜸 주장한 말에 아시온은 입을 턱 벌렸다.

    아시온 옆에 선 제스도 실소를 내뱉었다. 주군이 어떻게든 진상을 확인하시겠다더니 결국은 저 여자에게 사실을 다 털어놓으셨군, 하고.

    리엘라는 상관없었다.

    무례하다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그 증거품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고 섣불리 나서는 거라고 해도.

    리엘라가 해야 할 말은 단 하나였다. 할 수 있는 말도 그것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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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첩자가 아니에요. 절대로. 절대로 아니에요. 전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폐하께 접근한 게 절대……. 폐하를 해치려는 속셈 같은 건 절대로……!”

    아시온 대장은 리엘라에겐 늘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이렇게 악을 지르며 미운 목소리를 내게 될 줄이야.

    그것도 심지어, 폐하가 바로 뒤에서 듣고 있는 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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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전 아니에요. 저는…….”

    내가 왜 이런 호소를 해야 하는 거지?

    나는 또 왜 이렇게 궁지에 몰려서, 내가 마음을 준 사람들에게서 싸늘한 눈길을 받아야만 하는 거지?

    문득 그런 억울함과 서러움에 끓어오른 울음으로 목이 막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리엘라는 제 목을 세게 쥐고 힘을 주며 결백을 외쳤다.

    왕궁에선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단지 그레타의 독을 먹어서 뿐만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싸울 의지를 갖지 못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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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가 대답해달라고 했어.’

    나는 너를 선택하였으니, 이제는 네가 대답해달라고.

    분명히 헤르한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리엘라는 대답해야 했다.

    이런 꼴이 우습고 한심해 보이더라도. 어린 애가 떼쓰는 것처럼 진저리나게 들린다고 해도. 몇 번이고 대답할 것이었다. 자신의 진심이 전해질 때까지.

    아니에요. 저는 첩자가 아니에요. 저는 정말 아니에요.

    넓은 만찬장에는 그렇게 한동안 여리고도 간절한 울부짖음만이 외롭게 울려 퍼졌다.

    들어설 때부터 참담해 보였던 아시온도, 끝까지 리엘라를 의심하던 제스도. 이제는 아무런 말 없이 리엘라의 울음이 사그라질 때까지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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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간부로 리엘라 블리니테를 격리하겠다.”

    숨 막히는 시간 끝에 담담하게 입을 연 것은 헤르한이었다.

    그 순간 리엘라는 자기는 첩자가 아니라고 흐느끼던 것을 멈추고 입술을 피나도록 깨물었다.

    황제는 자신의 바로 등 뒤에 있는데도 그를 쳐다보기가 두렵고,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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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차마 안타까움을 떨치지 못하는 표정으로 아시온이 다가올 때, 헤르한은 리엘라의 손목을 잡아 제 옆으로 끌었다.

    말로는 리엘라를 잡아가라면서 행동은 꼭 리엘라를 감추듯 하는 것이었다.

    리엘라를 포박하려 다가오던 아시온은 동작을 멈추고 주군에게 혼란스러운 얼굴을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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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침실에 격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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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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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아시온과 제스가 거의 동시에 기겁해 대답했다.

    리엘라는 그때야 고개를 들었다. 겨우 헤르한의 표정을 눈에 담은 순간, 여태껏 꾹꾹 참아왔던 울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커다란 감정의 파도가 휘몰아쳤다.

    자신을 의심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배반당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미워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황제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견고했다. 처음부터 줄곧 그랬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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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의 혐의를 빨리 벗기기 위해서라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보단 당장 여기서 신병을 격리하는 것이 더 좋겠지. 리엘라는 이미 내 여자란 소문이 궁내에 파다하니 며칠 내 침실에 둔다고 해서 의혹을 살 일도 없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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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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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는 지금 빈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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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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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령 칼자루를 쥐었다고 해도 내게 휘두를 수도 없는 상태라는 건 너희 눈에 더 잘 보일 거다.”

    뭐야, 나 비실비실하다고 또 얕잡아 보였잖아.

    리엘라는 그렇게 풋 웃으면서도,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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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종들의 출입을 금하고 문 앞에 필을 보초로 세워. 심문할 일이 있으면 아시온 네가 직접 내 침실로 와서 진행해라. 황명이다.”

    황명이었다.

    제스나 아시온이 자신들의 오랜 우정이나 진심 어린 걱정을 내세운다고 해서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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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겠습니다. 폐하.”

    아시온과 제스는 결국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는 만찬장 문밖으로 물러났다.

    엉망이 되어버리고 만 만찬장 안에, 이제는 다시 리엘라와 헤르한 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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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대답은 잘 들었다. 리엘라 블리니테.”

    리엘라의 턱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고 엄지를 쓸어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면서, 헤르한은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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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답하더라도 안에서 조금만 기다려라. 원하면 내 욕조에서 거품 목욕을 하고 있어도 되고.”

    그걸 또 농담이라고.

    농담을 할 거면 제대로 웃으면서 말해주기나 하든가.

    아무리 닦아내고 닦아내도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을 가득 매달고, 리엘라는 떠나는 황제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황제는 ‘리엘라의 혐의를 벗기기 위해서’라고 말했었다. ‘리엘라가 범인임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거면 됐다. 그거면 황제의 침실이 아니라 볕이 들지 않는 골방에 백일을 갇혀 있어도 상관없다고, 리엘라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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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헤르한의 옷자락을 움켜쥔 리엘라의 손이 떨렸다.

    헤르한은 그 작고 하얀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 손 위에 제 커다란 손을 포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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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 마. 네가 내 선택에 답한 이상, 증명은 내가 할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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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양은 폐하의 침실에 데려다주었습니다. 시종에게 간단한 먹을거리와 옷 몇 벌을 문 앞에 가져다 두라 하였고, 보초는 명하신 대로 필에게 당부해두었습니다.”

    아시온의 보고에 헤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옆에서 제스의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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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저도 여자로 태어날 걸 그랬습니다. 그러면 폐하께 이렇게나 사랑받을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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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위기 좀 보고 덤벼. 넌 여자로 태어나도 안 되니까 닥치라고, 자식아.”

    아시온은 당장 도끼눈을 뜨고서 제스의 멱살을 쥐었다.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냐, 하고 다시 덤벼드는 제스 덕에 둘 사이엔 또 몇 번 헛발질이 오갔지만 헤르한은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철없는 두 부관이 다투는 동안 헤르한이 맹렬하게 바라보는 건 책상 위에 놓인 문서 한 부와 손바닥만 한 유리병에 든 푸른 물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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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 흠. 보시다시피.”

    조금 뒤. 아시온에게 충분히 쥐어뜯기고서야 항복을 선언한 제스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황제의 곁으로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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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의 건강 기록부입니다. 리오타 왕국에 계실 동안의 기록이고 당시 담당의였던 카넬의 필체도 확실합니다.”

    문서의 검은 벨벳 커버 위엔 황금색 사자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기밀문서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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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 물약은 바로 폐하가 그동안 드셨던 가짜 약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직 더 꼼꼼하게 성분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몇 가지 시약에 대한 검사 반응이 같았습니다.”

    헤르한이 손끝으로 유리병을 톡톡 치자 병 안의 푸른 물약이 찰랑찰랑 춤추었다. 늦은 저녁, 집무실 촛대의 불빛을 그대로 튕겨내는 것이 제법 영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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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처럼 잘 만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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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빛깔이나 점성은 진짜와 거의 똑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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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어디에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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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궁, 리엘라 양의 침실 안 옷장 서랍 속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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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둘이 리엘라의 침실을 뒤졌다, 라.”

    아시온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대답에 무슨 문제가 있나를 한참 생각하다가 뒤늦게야 주군이 질책하는 바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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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게! 저 녀석이 침실을 수색하자고 우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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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습니다. 제가 우겨서 찾아냈습니다. 저 잘했죠?”

    책임을 떠넘기는 아시온과, 그게 책임인지 공로인지도 모르고 뻔뻔히 거들먹거리는 제스의 2차전이 시작될 찰나.

    헤르한은 아무런 동요도 없는 얼굴로 일어서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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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가 정말 첩자여서 기밀문서를 훔쳐내고 내게 의문의 약을 먹였다면 그 단서를 옷장 같은 데에 엉성하게 숨겼을 리가 없다. 이건 누군가가 리엘라에게 혐의를 덮어씌우려는 시도로 봐야 해.”

    헤르한의 진중한 판단에 아시온과 제스는 다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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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시온이 대답했다. 제스가 또 뚱한 목소리로 ‘난 아닌데’ 하고 꿍얼거리기 전에 그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제스는 웁웁, 소리를 내며 억울한 듯 발버둥 쳤지만 사실 그 역시 아시온이나 헤르한과 같은 결론을 내리긴 마찬가지였다.

    제스가 리엘라를 즉결 처분하거나 바로 심문하자고 주장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였고, 주군이 그 여자를 제 침실에 밀어 넣는 것을 얌전히 지켜만 본 것도 그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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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그 여자가 그런 얼굴을 보여서 그런 건 절대 아니라니까.’

    자신은 절대 첩자가 아니라면서, 제발 믿어달라면서 서글프게 울던 얼굴.

    그 눈빛. 그 목소리.

    찝찝할 정도로 머릿속을 맴도는 그런 것들을 제스가 열심히 몰아내는 동안 헤르한은 재킷을 갖추어 입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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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궁으로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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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말씀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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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우리가 황궁에 도착한 이후로 리엘라와 접촉한 적이 있는 이들 모두를 불러와. 서궁에 오간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자들은 전부 포함이다.”

    그 말에 제스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주군의 앞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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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설마 능력을 쓰시려는 것입니까? 그 많은 자에게, 전부?”

    그럼 별다른 수가 없지 않나. 리엘라의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으니 리엘라와 부딪친 모든 이의 속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헤르한은 대답하는 대신 제 앞을 가로막은 제스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제스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겠다는 듯이, 그러므로 절대로 주군을 보낼 수 없다는 듯이 이맛살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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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 안 됩니다. 장난치는 거 아닙니다. 폐하의 주치의로서 말씀드립니다. 오늘은 더 이상의 능력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이상 증세가 가라앉은 지 아직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힘을 더 쓰셨다간 정말 위험합니다!”

    헤르한이 제스의 팔을 한 번 툭, 잡았다.

    주군은 늘 이런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제 살을 깎아 먹으며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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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툭, 소리가 났다.

    고고하고 오만하기로는 헤르한을 제외하고 이 제국 땅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제스가 제 주군 앞에 무릎을 꿇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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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드립니다. 제게 다른 방법을 찾아볼 시간을 주십시오.”

    글쎄.

    기어이 제 앞에 무릎까지 꿇은 오랜 친구의 모습에 헤르한의 마음 어딘가가 묵직하게 요동쳤지만. 그것도 헤르한의 가슴속에 한 방향으로 휘몰아치는 폭풍을 잠재우기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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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오래 살아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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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살아봤자. 일 년 더 사는 거나, 하루 더 사는 거나.”

    헤르한이 쓰게 웃었다.

    그는 제스의 어깨를 몇 번 쓸어주다가 일으켜주었다. 미안하지만, 너의 애원은 받아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헤르한은 얼마 남지 않은 제 목숨에는 미련이 없었다.

    이 순간 자꾸만 미련이 생기는 건 다른 쪽이었다.

    바로 집무실 맞은편, 두꺼운 문 뒤의 어느 방 안에서 혼자 두려워하면서, 하지만 자신이 어서 돌아 와주길 기다리면서, 이 순간을 의연하게 견뎌내고 있을 어떤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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