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 눈부신 곳에, 눈부신 사람 (30/154)


#30 눈부신 곳에, 눈부신 사람
2021.10.10.


아침에 황제가 다녀간 뒤로 리엘라의 관심을 얻으려는 시녀들의 행동은 한결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덕분에 리엘라는 종일 시녀들의 아부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루는 계속 보이지 않았다.

시녀들에게 몇 번 루의 행방을 물어봐도 모른다는 무성의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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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님. 한번 자세히 보세요. 이게 바로 요즘 바하보르덴에서 제일 잘 나가는 드레스 숍의 카탈로그인데…….”

리엘라는 또 자신 앞에 온갖 책자를 늘어놓는 시녀의 모습에 한숨을 푹 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 태도를 확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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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레스 참 예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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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이게 마음에 드세요? 신상을 바로 알아보시다니 리엘라 님의 안목이 역시 좋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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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직접 입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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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리엘라 님은 허리도 가늘어서 직접 입으시면 더욱 아름다울 거예요! 제가 예약할까요? 사실 여긴 저희 숙모님이 운영하시는 곳이라 리엘라 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구해다 드릴 수 있거든요!”

그러면 그렇지.

리엘라는 헛웃음이 차오르는 걸 꾹 참고 애써 들뜬 척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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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고마워요. 니아 양은 바하보르덴 출신이라 그런지 아는 것도 많고 인맥도 좋으시네요. 루는 왕국에서 와서 그런지 이런 건 잘 모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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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그런 애랑 제가 비교가 되나요? 그 시골뜨기 아이는 계속 세탁실에서 빨래나 하게 두시고요. 앞으로 필요한 건 다 제게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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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루는 세탁실에 있는 거였군요.”

리엘라는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억지로 상냥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것도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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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리엘라 님. 제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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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루를 세탁실로 보낸 건가요?”

니아라는 이름의 시녀는 곧장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수습하려 했지만 리엘라의 되물음에 본전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리엘라도 그쯤에서 추궁을 멈추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시녀들과 싸움이나 벌이려고 한 말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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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산책 좀 하고 올게요.”

누가 봐도 리엘라는 산책하려는 게 아니라 루를 찾으러 세탁실로 가려는 것이었지만.

조금 전이었다면 함께 나가겠다며 진득하게 달라붙었을 시녀들은 전부 입을 다문 채 고개만 푹 숙였다. 어쩐지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면서. 또 말실수해 버린 니아를 흘겨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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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리엘라가 혼자 나와 헤매는 서궁은 아름답지만 낯선 곳이었다.

호화스러운 샹들리에가 늘어선 복도를 지나 바깥으로 나가니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볕이 제법 따가웠다.

정원의 무성한 신록은 저마다 햇빛을 튕겨내며 반짝이는데 주변을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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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오긴 했지만 세탁실이 어디인지 모르겠네. 물어볼 사람도 없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시녀들에게 부탁해야 하나.

그런 생각에 망설일 때 저 멀리 담장을 돌아 다가오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리엘라는 그를 알아보고 빙긋 웃었다.

카넬. 황제가 왕국에 와서 머물 때 제스 대신 임시 주치의를 맡았던 남자.

황제의 의사라고는 하지만 정작 자신의 몸을 살펴주느라 더 많은 시간을 쓴 사람이기에, 리엘라에게는 민망할 만큼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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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넬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카넬이 근처로 다가왔을 때, 리엘라는 루에게 급하게 배운 예법대로 치맛자락을 살짝 들며 살갑게 인사했다.

그러고 보니 국경지에서 기절해 황제의 마차에서 잤던 날, 밤새 제 몸을 살펴주었던 것에 대한 감사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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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넬 경. 잘 지내셨나요? 그렇지 않아도 꼭 인사를 전하고 싶었…….”

하지만 감사를 전하려던, 그리고 나아가서 세탁실까지 가는 길도 한번 여쭈어보려던 리엘라의 포부는 거기서 그치고 말았다.

카넬이 리엘라를 본 체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린 탓이었다.

살짝 눈짓이라도 해주었다면 당장 말 못 할 바쁜 사정이라도 있겠거니 할 텐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카넬은 어깨를 스칠 정도로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리엘라가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양 눈도 마주쳐주지 않았다.

리엘라는 그대로 쌀쌀맞게 멀어진 카넬의 뒤에 휑뎅그렁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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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무시하시는 건가…….’

모두가 내게 다정하게 굴어줄 이유는 없지, 생각은 했지만 그런 씁쓸함과는 별개로 의문이 들기는 했다.

제국에 도착해 처음 만난 사람이라면 모를까, 카넬은 리오타 왕국에서부터 여기 오기까지 줄곧 친절했던 사람이니까.

리엘라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마침 건물에서 시종 하나가 나왔다.

리엘라는 왠지 모를 찝찝함에 카넬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상념을 떨쳐내고 마지못해 시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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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지만, 바쁘지 않다면 세탁실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

세탁실은 서궁에서부터 꽤 먼 황궁 북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인적 없이 고요했던 서궁에 비해 세탁실은 활기 넘치고 분주했다. 작업복을 입은 하인들이 빨래 바구니를 들고 바쁘게 오갔고, 오른쪽 샘에선 소매를 걷어붙인 이들이 빨랫감과 씨름하고 있었다.

루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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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해요,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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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으아악!”

제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 리엘라임을 알아챈 루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폭삭 주저앉아버렸다.

다른 하인들이 입은 편한 작업복과는 달리, 치렁치렁한 루의 치맛자락은 무겁도록 푹 젖어 있었다. 햇살이 좋은 날인데도 샘물은 꽤 시렸던지, 루의 손끝도 빨갛게 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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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저는……. 서궁엔 똑똑하고 기품 있는 시녀들이 많으시니까……. 제가 있으면 방해만 될 것 같고……. 또 마침 어느 분이 빨래터에 일손이 필요할 거라고 가보라고 하셔서…….”

루는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울상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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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리엘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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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죄송해요. 나 루 혼내는 거 아닌데.”

그렇게 옹송그린 루의 작은 어깨를 바라보니 리엘라의 가슴속 한편이 먹먹해졌다.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이었고, 더 설명해주지 않아도 훤히 알 것 같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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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크 아저씨, 칼 아저씨! 빨랫감은 전부 제게 주세요. 제가 다 해놓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이런 거 잘하거든요. 또 앞으로는 우리 용병단 식사 준비도 제가 다 할 테니까……. 그러니까 버리지 말아 주세요. 저도 같이 데려가 주세요. 네?”

 
조금이라도 폐가 되면 버려질까 봐 몸을 웅크리면서도, 어떻게든 나의 쓸모를 필사적으로 증명하려 했던 나날들.

고단했지만, 고단함에 흐르는 눈물마저도 감추어야 했던 나날들이 분명 자신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도 결국에는 다 흘러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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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손 아프죠? 그만하고 일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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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녜요. 리엘라 님. 이 빨래는 다 마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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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가 도와줄게요. 그러니까 내 손 잡고 일어나요.”

리엘라는 손을 내밀어 루의 작고 차가운 손을 맞잡았다.

분명 자신은 아직 많이 나약하고, 이곳 제국에선 루와 마찬가지로 모든 게 낯설기만 한 이방인이지만.

그래도 이 작은 아이를 잡아 일으켜줄 수 있을 만큼은,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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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시간을 주시면 저희가 면밀히 조사하겠습니다.”

자신을 바짝 뒤쫓는 아시온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무척 어두웠지만, 그래도 헤르한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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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약을 바꿔치기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실수로 약이 바뀐 것인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시온의 말은 거의 애걸에 가까웠다.

이 사태는 자신들이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 주군께서는 제발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건강을 보전하시라, 하는.

침실을 뛰쳐나올 때쯤 헤르한의 이상 증세는 다 가라앉았다. 그래서 더는 아시온의 마음이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헤르한은 자신을 걱정하는 제 부관의 마음을 알았다.

바로 그래서. 그 걱정이 얼마나 진심 어린 것인지 알았기 때문에.

헤르한은 더 심기가 어지러웠다. 아시온과 제스가 이토록 조심스럽게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리엘라가 첩자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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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드시던 약이 가짜였습니다. 저도 폐하께서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신 후에야 알았습니다.”

 
헤르한이 첩자에 관해 물었을 때 제스는 그렇게 대답했다.

황제의 사절단이 제국을 떠날 때, 급한 연구로 제국에 남아야 했던 제스는 왕국으로 떠나는 마차에 헤르한의 약을 확실히 챙겨서 실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약은 진짜였다.

그런데 리오타 왕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점검해보니 헤르한의 약이 바뀌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형태와 빛깔이 완전히 같은 ‘가짜 약’이었다.

교묘한 바꿔치기였다. 당연히 실수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벌인 짓이었다.

문제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헤르한이 중병을 앓고 있으며 그로 인해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헤르한의 측근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심지어 측근들은 모두 헤르한이 직접 ‘검증’한 자들.

헤르한에게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진심과, 내일의 충심까지를 모두 내보이고서 그에게 목숨을 바칠 자격을 얻은 자들이었다. 그들 중에 첩자가 섞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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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순방 동안 만난 자들 가운데서, 내 병에 대해 알고, 약을 바꿔치기할 수 있을 만큼 내 곁에 가까이 접근할 수도 있었으면서, 내가 그 의도를 읽을 수 없는 사람.’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헤르한은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리엘라 블리니테.

이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 이다지도 괴롭고 싫은 순간이 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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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믿을 수 없는 여자입니다. 그 여자를 멀리하셔야 합니다. 폐하.”

 
제스가 냉정하게 말했을 때, 헤르한은 눈을 들어 아시온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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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아시온.”

 
아시온은 헤르한만큼이나 괴로워 보였다.

헤르한이 리엘라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시온이었다.

그는 늘 벼랑 끝에서 처절한 싸움만을 해오던 제 주군이 리엘라로 하여금 실소나마 머금는 것이 좋았다.

주군이 어울리지 않게 덤벙대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았고, 비로소 ‘옳은 것’이 아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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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리엘라 양이 부디 첩자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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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더욱 확실히 확인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온은 그렇게 대답했다.

거기까지 듣고서 헤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 서궁을 향해 온 것이었다.

자신들에게 맡겨두시면 알아서 조사하겠다는 아시온의 만류도 먹혀들지 않았다.

헤르한의 머릿속에는 당장 리엘라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정작 그녀를 만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찾아간다고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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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서궁이 텅 비어 있습니다. 하인들 말을 들으니 리엘라 양이 혼자 나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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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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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알지 못하고 궁 북쪽 어딘가라고 하는데요.”

북쪽은 어째서? 산책로라면 서궁 앞의 정원 길로도 충분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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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북쪽의 병영이나 서고로 갔을까요?”

아시온의 흐릿한 물음이 헤르한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병영이든, 서고든 탐탁지 않았다. 황궁 북쪽은 궁 내부인들의 영역이라 리엘라가 관심을 가질만한 부분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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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째서. 너는 왜.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대체 무엇을 하느라고.’

헤르한의 마음이 달았다.

아시온의 얼굴도 핏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근처의 기사들을 시켜 당장 북쪽 어딘가에 있을 리엘라를 찾으라 명했다.

영문 모를 명령에 기사들이 뛰는 사이 헤르한도 딱딱하게 굳은 걸음을 북쪽을 향해 옮겼다.

빨리 리엘라의 거취를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째선지 걸음은 자꾸만 느려졌다. 어느덧 북궁의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을 땐,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인지 뒤로 뒷걸음질 치고 싶은 것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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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님. 리엘라 양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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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디에 있지? 무엇을 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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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기사는 대답하기를 머뭇거리며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헤르한은 그 눈길이 꼭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어서 보고하라, 아시온의 재촉에 기사는 겨우 입을 열었다.

빨래터에 계십니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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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라고? 리엘라 양이 빨래터에는 왜…….”

아시온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지만 기사는 이번에도 황제 앞에서 대답하기가 난감하단 표정이었다.

헤르한은 굳이 설명을 기다릴 것 없이 곧장 북측 축사 옆의 빨래터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확실히 무슨 소동이 벌어진 듯했다.

일꾼들이 전부 제 자리를 이탈해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것이었다. 대단한 구경이라도 난 듯이 둥글게 선 그들 가운데서 헤르한은 마침내 리엘라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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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리엘라 님! 이리 나오세요. 그건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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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는 손도 다치고 넘어져서 무릎도 아프잖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괜찮아요. 나, 이거 얼마나 잘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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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모여든 구경꾼들 가운데. 반짝이는 여름 햇살이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곳 샘 앞에서.

제 치맛자락을 한 움큼 올려 잡은 리엘라가 맨발로 빨래를 밟으며 물방울을 튀기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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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다가 폐하께 들키기라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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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안 들켜요. 또 들키면 뭐 어때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시녀 아이와 그런 아이를 보며 저 샘물보다도 더 맑게 웃고 있는 리엘라.

그 모습을 본 헤르한은 맥이 탁 풀렸다.

가슴을 뻐근하게 채우던 기운이 허탈하게 빠져나가면서, 어쩐지 또 다른 의미로, 헤르한은 리엘라가 너무나 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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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헤르한이 겨우 뱉어낸 부름엔 말로 다 담지 못할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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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폐하.”

하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헤르한을 알아본 리엘라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순수할 뿐이었다.

리엘라는 헤르한에게 웃어 보였다.

들키면 안 될 것을 들켜버렸다는 듯이 멋쩍은 얼굴로. 하지만 그를 향한 반가움이 잔뜩 녹아 있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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