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첩자 (29/154)


  • #29 첩자
    2021.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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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그러면 이걸로 급한 안건은 다 논의된 것 같군요.”

    긴 회의의 끝을 알리는 대신의 말에 긴 테이블에 앉아서 야금야금 졸던 대신들이 눈을 떴다.

    헤르한이 즉위하기 전. 그러니까 선대 황제 때는 정무 회의라는 것 자체가 자주 없었다.

    사무적인 일로 황제를 알현하는 것은 건국제 같이 아주 중요한 행사 때가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웅장한 접견장에서 왕좌에 앉은 황제에게 몇 개의 보고를 올리는 것이 끝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 황제는 어찌나 의욕이 충만하고 피가 끓는지.

    허구한 날 회의가 소집되었고 그때마다 정책에 대한 매서운 질의응답이 오갔다.

    아무리 국정을 쇄신한다지만 선황제가 벌여놓은 일들을 사사건건 물어뜯고 전부 고쳐놓는 통에 대신들은 귀찮은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만을 표출할 수는 없었다.

    새 황제가 집권하면서 정계에는 이미 큰 칼바람이 한 번 불었다.

    단순하게 선황제의 인맥을 제거하고 새 사람을 앉히는 거라기엔 의문점이 많은 인사였다.

    선황제와 밀접한 파벌의 자가 살아남기도 하고, 누가 봐도 새 황제에게 충성해 온 인물이 추방되기도 했다. 대를 이어 요직을 맡아온 집안이든, 떠오르는 신진 세력이든 그에 따른 기준도 없었다.

    말 그대로 대중없이 누구는 살아남고 누구는 잘려 나가는 판국.

    항간에는 황제가 항아리에 이름을 적은 쪽지를 넣고 무작위로 뽑아서 사람을 쓴다는 소문까지 도는데, 이런 상황에 어찌 감히 황제의 눈 밖에 들 짓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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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논의할 것은 없습니까?”

    사실 모든 이들의 관심은 ‘리엘라 블리니테’에게 있으면서, 누구도 함부로 그 이름을 꺼내지 못하는 것 역시 그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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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없으면 오늘은 여기까지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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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가지만 짧게 얘기하고자 한다. 지금 서궁에서 머무는 리엘라 블리니테에 관한 것인데.”

    그랬기에 더더욱.

    황제가 먼저 그 이름을 꺼내 들었을 땐, 지루함만 가득하던 대회의장에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꾸벅꾸벅 졸던 이들의 눈에 곧장 총기가 도는 것을 보고 헤르한은 황당한 웃음을 뱉었다.

    그렇게도 궁금할까.

    하긴. 소문만 무성하지, 정작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그녀가 리오타 왕국 출신이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으니.

    헤르한은 한숨을 삼켰다.

    리엘라에 대해 한 번은 공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 건 오늘 아침, 시녀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리엘라를 본 때였다.

    애매하게 시간을 끌수록 리엘라를 이용하려는 이들은 더 많아지겠지.

    그래서 헤르한은 고심했다. 리엘라에게 어떤 명분을 줄까. 어떤 명분을 주어야 그녀를 제 시야 안에 두면서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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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모두 들어서 알고 있을 테지. 나와 리엘라 블리니테와의 염문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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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한은 에둘러 말하지 않고 가려운 곳을 '탁' 치고 들어갔다.

    덕분에 대회의장의 이들은 전부 움찔거리면서 가만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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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염문은…….”

    사실이다. 혹은 사실이 아니다.

    헤르한이 답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사실이라고 대답한다면 리엘라는 황제의 여자가 되는 것이고 더 많은 유혹과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헤르한에게 그녀를 가까이에 두고 지킬 명분이 생긴다. 그가 제대로 마음만 먹는다면 리엘라를 제 옆에 두고 완벽하게 지키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리엘라는 당장 그녀를 귀찮게 하는 많은 위험과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궁에서 살고 싶다면 궁에서, 밖으로 나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줄 수도 있었다. 그저 헤르한이 그녀를 쉽게 만나지 못하게 될 뿐이다.

    어떤 쪽을 택해야 할까.

    사실 헤르한은 회의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마음을 굳혔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제 모두의 앞에서 발표하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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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염문은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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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데! 설마 진짜라는 건가? 정말 그 천한 것과 폐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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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일 리가 없지. 아무리 황제가 거지꼴로 숨어 지낸 시간이 길더라도 여자 고르는 입맛까지 그렇게 천박해졌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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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이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설마 이러다 그 여자가 황후까지 되는 건 아니겠지? 이런! 지금부터 연줄을 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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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 누구길래. 난 아직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그렇게 예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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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로제타는 나가리군.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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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봤자 결혼 상대는 절대 안 되지. 그냥 흥밋거리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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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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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대체 무슨……!’

    갑자기 헤르한의 머리로 온갖 목소리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숨을 헉 들이쉬고 눈을 부릅떠 봤지만 헤르한의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은 여전했다. 적막한 대회의실. 한 자리도 비우지 않고 빼곡하게 앉아 침묵 속에 황제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수십 명의 대신.

    그들 중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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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야? 왜 아무 말도 안 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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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참. 무진장 시간 끄네. 궁금해 죽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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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쁘냐고!’

     
    헤르한의 머릿속에 밀려드는 목소리들은 잠시라도 소란을 그칠 줄을 몰랐다.

    헤르한은 현기증을 느끼며 제 이마를 짚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그의 능력은 상대와 직접 살을 맞대야만 통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제어할 수 없이 모두의 생각들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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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의 상태가 이상한데. 제길. 또 발작인가?’

     
    기어이 초조해진 아시온의 목소리까지.

    헤르한은 창백한 얼굴로, 자신과는 머리 털끝도 닿지 않는 거리에 서 있는 아시온을 바라보았다.

    아시온은 당황한 속마음과는 달리 최대한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테이블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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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앗! 엄청나게 급한 일정이 있었는데 제가 깜빡했지 뭡니까?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시지요. 폐하.”

    한창 흥미진진한 시점에 얘기가 끊겼으니 대신들은 당연히 노발대발했다.

    그런 그들에 대고 아시온은 되려 역정을 냈다. 북부에서 벌어진 도적 떼 토벌에 관한 소식이다, 때를 놓쳐서 그 도적 떼가 여기까지 밀고 들어오면 대신이 직접 나가 싸우겠느냐 하며.

    아시온은 그렇게 대신들의 원성을 잠재우고 급히 헤르한을 내실까지 끌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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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괜찮으십니까? 발작입니까? 제가 보이십니까?”

    몹시 잘 보였다.

    멀쩡하게 걸을 수도 있었고, 가슴을 옥죄거나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도 없었다.

    그래서 헤르한은 더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이전과 같은 발작이었다면 고통스럽긴 해도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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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제스를 불러오겠습니다.”

    아시온은 그런 헤르한의 상태를 알 리가 없었다. 그는 헤르한을 침대에 눕혀놓고는 쏜살같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시종들도 전부 물리고 홀로 방에 누우니 헤르한에게도 고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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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히 발작은 아니야.’

    헤르한은 스스로 몸을 추슬러 일어나 앉고서 자신에게 찾아온 이 당황스러운 경험을 돌이켜 정리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건 지금껏 겪었던 발작은 아니지만, 어쩌면 또 다른 죽음의 전조증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끝을 잘 ‘준비’해야겠지. 황위는 되찾았지만, 아직, 죽어도 될 만큼 모든 걸 정리한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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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괜찮으십니까?”

    사색이 된 표정으로 제스와 아시온이 침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것은 얼마 뒤였다.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 둘의 마음속 목소리도 다시 헤르한에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직 이 알 수 없는 증상은 진정이 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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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또 발작이라니.”

    제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걱정스레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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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기랄. 이대로 헤르한이 죽어버리면 통째로 박제를 만드는 한이 있어도 내 연구를 끝마칠 거야.’

     
    ……저 변태 자식.

    헤르한은 괜찮다고 제스를 안심시키려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역시 속마음은 가능한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관계에 이로운 법이라는 걸, 헤르한은 오늘 또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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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해라. 난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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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은 가능하시군요! 다행입니다. 시야는 언제 회복되었습니까?”

    언제 회복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시야가 먼 적이 없었다고. 너희가 걱정하는 것과 달리 이건 아무래도 발작이 아닌 것 같다고.

    헤르한이 그렇게 말하려는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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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 이것도 첩자의 소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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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첩자가 바꿔치기 한 약은 진작 되돌려놨는데. 설마 다시 약이 바뀐 건 아닐 테고. 대체 뭐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아시온과 제스의 깊은 고뇌가 나란히 전해져 온 것이었다.

    정작 둘은 자신들의 생각이 헤르한에게 들린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체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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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첩자라고?”

    헤르한은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그 말에 헤르한을 이리저리 살피던 제스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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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아, 아니 폐하.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상하다, 분명 손 안 닿았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아셨지? 하고 당황한 아시온의 속내가 또 그대로 헤르한에게까지 들려왔다.

    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을 끔뻑끔뻑하면서 자신이 장갑을 잘 끼고 있는지를 새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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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첩자의 소행이냐고 했잖아. 그가 약을 바꿔치기했다고. 다 들려. 네 녀석들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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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살 안 닿게 엄청나게 조심했는데 대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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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박제로 만들겠단 네 놈 포부도 잘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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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제가 폐하를 너무 사랑하니까.”

    어쩔 줄 모르는 아시온. 차라리 대놓고 뻔뻔하게 나오는 제스.

    헤르한은 그 두 녀석을 노려보았다. 이것들이 감히 나 몰래 비밀을 품다니 많이 컸군, 하고.

    하지만 그 죗값은 나중에 천천히 치르게 하면 될 것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바로 그 ‘첩자’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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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해봐. 누군가 내 약을 바꿔치기했나? 내부에 첩자가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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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속이나 한 듯이 둘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헤르한은 전혀 초조하지 않았다. 저들이 암만 입을 다물어봤자 저절로 새어 나오는 생각까지 막지는 못할 테니까.

    대체 무슨 신의 조화인지 모르겠지만, 헤르한은 때마침 이렇게 능력이 확장된 것이 참 편리하고 좋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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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몰래 작당을 할 정도라면 이미 둘이서 어느 정도는 용의 선상을 좁혔을 거 아냐? 얘기해라. 그게 누구인지.”

    하지만 다음 순간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이 편리한 능력은 사실 ‘저주’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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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블리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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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블리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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