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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어쩌면 좋은 사람 (28/154)


  • #28 어쩌면 좋은 사람
    2021.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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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합니다. 폐하.”

    리엘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헤르한 앞에 손을 모으고 서서 얼굴을 들어 보였다.

    황제가 대놓고 서운하다고까지 말하는 상황에 더 고개만 숙이고 침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헤르한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가늘게 눈을 흘겨 뜨고 리엘라를 장난스럽게 나무라듯 했다.

    그 눈길에 리엘라는 도톰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건 질책인데. 어디 감히 황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혼내는 것인데.

    리엘라는 뜨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울컥했다. 꼭 네가 처한 상황을 다 안다는 것 같아서. 오해 같은 건 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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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은 잘 풀었는지 확인하러 왔다. 어젠 회의로 바빠서. 그런데.”

    일단 리엘라가 잘 자고 일어난 것을 확인한 헤르한은 두 번째로 방안을, 세 번째로 방안을 가득 메운 시녀들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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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손이 여기 이렇게 많이 배정된 줄은 몰랐는데?”

    헤르한이 그의 등 뒤로 늘어선 수행인들 쪽에 묻자 비서관 한 명이 멋쩍은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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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께서 순방으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지원하여 오신 분들입니다. 전부 평판이 좋은 귀족가의 영애들이고 다방면에 배움도 깊어 리엘라 양이 생활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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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되묻는 헤르한의 목소리에 어쩐지 탐탁지 않은 빛이 묻어 있다는 건 누구든 눈치챌 수 있었다.

    비서관도 거기에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급하게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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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모두 테셀 백작 부인께 허가를 받고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입궁하였습니다.”

    테셀 백작 부인은 서궁의 시녀장을 맡은 사람이었다.

    시녀나 시종을 고용하고 배치하는 건 본래 상부의 특별한 지시가 있지 않고서는 대부분 시녀장이나 시종장 선에서 처리하는 일이었다.

    하물며 본궁도 아니고, 귀빈이나 대사들이 묵어가는 별장 개념인 서궁의 경우엔 더 그런 일이 잦았다. 이곳에선 황제에게 일일이 결재 서류를 올리지 않고 담당관이 자체적으로 잡다한 일을 끝내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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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군. 서궁 시녀장이 직접 임명한 거라면 믿을 만하겠지.”

    다행히 새 황제 역시 황실의 그런 관습을 잘 받아들이는 듯했다.

    거기에 비서관이 가슴을 쓸어내렸고, 내내 긴장했던 시녀들도 하나둘 고개를 들더니 황제 앞에 나아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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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엄한 폐하를 뵙습니다. 로리엘 이그드니스입니다. 저는 선대에 이곳 황실에서 공보관으로 근무하셨던 이그드니스 백작의 차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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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엄한 폐하를 뵙습니다. 저는 르덴 상단주이신 리암 티오의 사촌으로, 어르신께서 꼭 폐하의 안부를 여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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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를 뵈어 영광입니다. 혹시 기억하실까요? 저희 모친께서 선대부터 황실에 꽃을 납품하셨는데 어린 시절부터 폐하께서 저희 모친의 튤립을 그렇게 좋아하셨다고…….”

    그렇게 한동안 영애들의 자기소개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시녀로서 인사드린다기보다는 제 가문의 이름 한 줄, 제 아비의 이름 한 줄을 더 황제에게 들려주는 데 혈안이 된 모습들이었다.

    대놓고 속이 보이는 그녀들의 태도에 황제의 수행인들은 전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시온은 아예 눈까지 감고서 꾸벅꾸벅 조는 얼굴을 했다.

    그런데 황제는 달랐다.

    그는 본격적으로 줄까지 길게 늘어선 영애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다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마지막 순서의, 사촌 이모님이 한때 황실 식당에서 디저트 담당으로 일했으며 그분에게 물려받은 레시피로 황제 폐하께 꼭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어느 당찬 영애의 인사까지 다 듣고 난 후에, 황제는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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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일부러 이곳에 지원해주었다니 고맙군. 그대들의 이름은 다 기억하겠다. 리엘라 블리니테는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야. 그러니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앞으로 많은 도움을 주길 바라.”

    뻔뻔하다면 뻔뻔한. 그래서 더욱 낭만적이라면 낭만적일 황제의 말에 영애들이 전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었다.

    물론 겉으로는 수줍은 웃음이었지만 그중엔 음흉한 속내를 꾹 감추는 이들도 많았다.

    황제가 이 여자에게 푹 빠졌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고, 그래서 어떻게든 연줄을 대보고자 이딴 천한 것의 시중도 자처했지만, 그게 이 정도로 순순히 풀릴 줄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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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굳이 이렇게까지…….’

    그런 영애들의 틈에서 황제의 의도를 몰라 혼란스러운 건 리엘라뿐이었다.

    생각해보면 황궁에 도착한 이후부터 그랬다. 황제는 원래도 줄곧 저를 배려해주긴 했지만, 황궁에 도착한 후부터는 더 보란 듯이 과장되게 자신을 감싸고 편애했다.

    꼭…….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연극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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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아니나 다를까, 그때 황제가 리엘라에게 다가왔다.

    그저 가까이 다가오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정하게 시선을 내리깔고,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주고, 아예 입술을 리엘라의 귀 가까이 까지 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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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해도 서른 명은 보고 있는데……!’

    보는 눈이 많아서.

    그래서 황제를 뿌리쳐야 하는지. 아니면 그래서 황제를 뿌리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끝내 답을 찾지 못한 리엘라가 버둥거리는 동안, 귓바퀴에 간지럽게 닿을 듯 입술을 갖다 댄 헤르한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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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시녀들의 이름은 전부 다 외웠으니,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언제든 콕 집어서 얘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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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한의 숨결이 닿은 귓가에서부터 리엘라의 얼굴에 화르륵 열꽃이 피었다.

    대체 뭘까, 이건.

    황제에게도 분명 무슨 속셈이 있어서 이러는 거라는 건 뻔히 아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는 귓속말로까지 이런 말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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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여독이 심할 테니 더 쉬어라. 난 오늘도 일정이 바쁠 듯해. 대신 제스가 여기 남아서 널 살필 거다.”

    다시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말하는 헤르한의 입꼬리에 언뜻, 아주 짓궂고 악랄한 웃음이 스쳐 갔다.

    혹시 복수인가? 당신의 총애 같은 거 산 적 없다고 모두의 앞에서 화내버린 것에 대한?

    여전히 황제를 향해 의문 가득한 표정을 풀지 못하는 리엘라에게로 또 다른 남자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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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안녕하세요. 제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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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어제 말씀드린 검사를 바로 진행할까 하는데.”

    오늘도 어제와 같이. 아니, 어제보다 더 딱딱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제스의 얼굴에 리엘라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는 동안 황제는 먼저 떠났고, 방안에 그득하던 시녀들마저 황제를 배웅한답시고 모두 바깥으로 몰려나갔다.

    졸지에 제스와 둘만 남게 된 방 안.

    아침부터 온갖 일이 휘몰아치는 오늘에, 리엘라는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눈을 몇 번이나 질끈 감았다가 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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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로도는 꽤 높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닙니다. 지금으로서는 큰 이상이 보이지 않는군요. 혹시 전에도 이런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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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요. 기절한 적은 몇 번 있지만 이렇게 기억까지 까맣게 잃은 적은 작년이 처음이에요.”

    리엘라의 방 안.

    리엘라와 제스는 시녀들이 공격적으로 차려준 다과를 옆으로 밀어놓고 마주 앉아 몇 가지 검사를 마무리했다.

    결과는 제국까지 오는 길에 카넬이 살펴봐 주었을 때와 같았다. 피로도가 높고 체력도 약한 편이라고 하지만 까무룩 의식을 잃고 쓰러질 정도로 심각한 몸의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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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꾀병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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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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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인차 묻는 겁니다. 작년에 폐하와 첫 동침을 하셨을 때도 기억을 잃으셨다기에, 혹시 회피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마다 상습적으로 써먹는 핑계는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제스는 딱히 의미심장하게 눈을 번뜩이지도 않았다. 그다지 심혈을 기울인 공격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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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닙니다.”

    그래도 리엘라는 발끈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스가 자신에게 내보이는 적의가 순수하리만치 너무 명백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고작 단 하루 만에 그의 무성의함에 적응하기라도 한 걸까.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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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걸로 검진은 마치지요.”

    굳이 더 캐묻거나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건 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몇 가지 서류의 항목들을 체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과는 자신이 따로 정리해서 황제에게 전달하겠다며.

    리엘라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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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왕 여기까지 와주셨으니 이것 좀 드시고 가세요.”

    리엘라가 가리킨 것은 옆에 밀어둔 다과였다.

    무려 황제의 주치의께서 오셨다면서 시녀들이 한 사람당 한 메뉴씩 가져다 놓은 통에 마실 것만 해도 네 종류가 넘는 푸짐한 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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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많아서요. 저 혼자는 다 못 먹는데 버릴 수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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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불편하실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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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편하지 않아요.”

    듣기 불편한 아부만 늘어놓는 시녀들에 비하면, 상대를 대함에 있어 투명한 건 오히려 제스 쪽이었다.

    적어도 그는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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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불편해서 싫습니다.”

    그래. 바로 이런 것처럼.

    리엘라는 너무나 뻔한 반응이 반가워서 하마터면 웃음까지 터트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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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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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례 맞습니다. 그러니까 묻지 마십시오.”

    그가 궁금하고 아쉬운 마음과 별개로 리엘라는 돌아서는 제스를 더 붙잡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자신이 불편하다는 사람을 붙잡는 것도 예의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런 고분고분한 반응이 제스에겐 쥐약이었던 모양이었다.

    떠나는 듯하던 그는 리엘라 앞에 제 발로 돌아와 섰다. 그것도, 상당히 언짢은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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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당신을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리엘라는 가만히 제스를 올려다보면서 굳이 말뜻을 묻지 않았다.

    다만 침착하게 기다리자, 이번에도 역시 제스가 먼저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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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의 시녀들은 당신에게 아부를 떠느라 정신이 없죠. 당신이 폐하의 여자라고 소문이 났으니까. 당신에게 잘 보이는 게 자신들의 처세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서 그럴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리엘라 역시 그 점은 눈치채고 있었고, 그래서 시녀들의 노골적인 호의가 줄곧 불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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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반대로, 어떤 대신들은 당신을 폐하로부터 내치려고 벌써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힘들게 새 황제의 인맥을 다 파악하고 연줄을 잡아놨는데 갑자기 정체 모를 측근이 나타났으니 말이에요. 당신이 자신들의 앞길을 막는다고 판단한 겁니다.”

    아.

    리엘라는 어제부터 종종 마주치는 이들이 저를 쏘아보던 눈길이, 단순히 낯선 이방인을 향한 호기심과 경계심에서 비롯된 것인 줄만 알았다.

    황제 주변의 정치적인 상황에 자신의 등장이 미치는 영향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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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나는 아직 당신을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학자입니다. 뭐든지 확실히 알아야 마음이 놓이지요. 내가 알지 못하는 건 불편합니다. 그래서 난 당신이 불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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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제스 님을 귀찮게 하거나 앞길을 막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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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심 없습니다. 당신이 날 귀찮게 하든, 어디서 무슨 짓을 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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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이상하지 않은가.

    자신을 아직 판단하지 못해서 거리를 두는 거라면서.

    그러니 판단해야 한다면서, 왜 관심이 없다고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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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판단 기준은 그런 게 아닙니다. 당신이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그런 것도 상관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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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제스 님은 저를 무슨 기준으로 판단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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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쯤에서 제스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지만 리엘라는 침묵하는 그의 입술을 통해. 저를 강단 있게 내려다보는 눈을 통해. 또 자신의 검진 서류 밑에 두툼하게 깔린 온갖 책과 문서를 통해, 답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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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는 존재가 폐하께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이 남자가 사람을 분류하는 기준은 바로 그거였구나.

    리엘라의 눈이 다정스레 테이블에 놓인 서류로 향했다.

    제일 위에 놓인 것은 자신의 검진표였지만 그 아래의 뭉텅이는 전부 헤르한에 관한 것이었다. 왕국에 머물 때 임시 주치의였던 카넬이 같은 커버의 문서에 황제의 건강 기록들을 정리하던 것을 보아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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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봅니까. 이건 극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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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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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웃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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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요.”

    리엘라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제스를 올려다보았다.

    어제만 해도 눈을 마주치고 있기 힘들 만큼 사나운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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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폐하의 곁에는 참 좋은 분들이 많다는 생각이 드네요.”

    리엘라의 의미심장한 말에 제스가 헛웃음을 뱉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럽니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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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얌전히 기다릴게요. 그러니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저를 어떻게 대하실지. 제스 님의 판단이 서시면, 제게도 꼭 알려주세요.”

    내가 폐하에게 득이 될 사람인지 실이 될 사람인지 그건 누구보다도 제가 가장 알고 싶으니까요.

    리엘라는 그 말은 따로 덧붙이지 않았다.

    제스가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그의 기준을 꿰뚫어 보았던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진심을 꿰뚫어 봐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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