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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괴짜 의사 (26/154)


#26 괴짜 의사
2021.09.26.


리엘라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옮겼다.

황제의 옆까지는 고작 몇 걸음인데도 외줄을 타는 것처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처음에 리엘라는 그게 보는 눈이 많기 때문인 줄 알았다. 다들 아닌 척 고개를 숙이면서도 황제의 부름에 응하는 자신을 훑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 제법 정숙한 실내에 들어섰는데도 마구 뛰는 가슴은 진정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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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동안 잠은 좀 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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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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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냐고. 뭘 그리 놀라?”

그러게. 이 정도는 전에도 주고받던 일상적인 안부일 뿐인데.

거기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리엘라는 새삼스럽게 알아챘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건 이 사람이 가까이 있어서였구나,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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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는 편히 왔습니다.”

일단 대답을 하고 나서 리엘라는 조금 뭉그적거렸다.

헤르한은 평소보다 천천히 걷고 있었다.

내 속도에 맞춰주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쩐지 심장이 빨리 뛰면서 걸음이 다급해졌다. 헤르한이 물어주는 것만큼, 저 또한 그를 묻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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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는 무사히 잘 지내셨…….”

리엘라가 어색하고 멋쩍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원로로 보이는 누군가가 다급히 다가와 리엘라의 말을 가로챈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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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여기 계셨군요. 이번 순방의 결과 보고회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모두 대회의실에 집결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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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순간 헤르한의 눈에 곤혹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이리저리 뻗는 폼이 귀찮은 일을 떠맡길만한 누군가를 찾는 모양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헤르한에게 파도처럼 밀려드는 건 더 많은 일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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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결과 보고회 뒤엔 곧바로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의 국정 보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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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타리엔 공작의 탄원서가 도착했습니다. 답장은 언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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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그 전에 수행인단에게 상여금을 지급하실 여부를 미리 말씀해주시면 차후 안건에 포함할…….”

황제의 등장만을 기다렸던지, 달려드는 이들은 전부 열성적이었다.

공격적인 그들의 진격에 리엘라는 당연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맨 구석으로 밀려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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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여기서 대답하지.”

그때 헤르한이 한숨 섞인 말을 뱉었다. 급하게 뛰어온 비서관은 곧장 펜을 빼 들고 황제의 명령을 받아 적을 준비를 했다.

헤르한의 대답은 막힘없이 술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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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잠시 대기. 국정 보고는 급한 안건만 추려서 저녁까지 문서로 올려. 타리엔에게 답장은 하지 않는다. 수행인단에게 상여금은 지급하고, 리엘라 블리니테, 너는 이쪽으로.”

회의는 대기하고, 서류를 올리고, 상여금은 지급하고, 리엘라 블리니테는…….

황제의 말을 중얼중얼 따라 읊으며 메모를 적어나가던 비서관이 우뚝 손을 멈추었다.

휘둥그레진 비서관의 눈에 비친 건 저 멀리까지 밀려난 누군가를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흘겨보고 있는 황제의 얼굴이었다.

덕분에 저마다 서류며 도장이며 온갖 것을 흔들고 야단법석이던 대신들도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황제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돌아보았다. 저 뒤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여자에게로.

리엘라 블리니테.

굳이 입 밖으로 소리를 내는 자는 없었지만 모두는 황제가 말한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유명세는 황제의 수행단보다도 더 빨리 이곳에 도착해 황궁을 뒤흔들고 있었으니까.

리오타 왕국의 암살자. 처형이 예정되어 있던 죄인.

그런데 대체 어떤 수를 쓴 것인지 제대로 황제의 환심을 사서 죄를 사면받고, 기어이 황실에까지 입성할 예정이라는, 그 무성한 소문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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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바로 그 여자라고?’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을 샅샅이 탐색하는 눈길들에 리엘라는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대로 자신도 모르게 두 번째 걸음을 뒤로 내빼려다가 멈추었다.

황제가 아직 저쪽에 있으니까. 그가 저더러 이리 오라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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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합니다.”

그래서 리엘라는 도망치기를 택하는 대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를 택했다. 제 앞을 가로막은 이에게는 길을 비켜달라고 대놓고 정중하게 부탁까지 했다.

그 결연한 걸음에, 앞을 빼곡히 막고 있던 대신들이 저도 모르게 옆으로 길을 텄다.

마침내 제 옆자리로 돌아온 리엘라를 바라보는 헤르한의 눈빛은 퍽 만족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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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모두 삼십 분 뒤에 대회의실에서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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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다시 둘이서만 걷게 된 복도.

헤르한이 아까 바닥에 선을 그어놓고 그 이상 넘어오지 말라고 명령한 덕택에 대신들은 전부 로비에서만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쩌다가 되찾은 고요함 속에서 리엘라는 묵묵히 황제만을 따랐다. 또각또각. 두 사람분의 발소리는 꼭 듣기 좋은 음악처럼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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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해.’

리엘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인의 터전처럼 커다란 황궁의 위용도. 마주치는 사람마다 자신을 날카롭게 훑는 것도.

전부 잡아먹을 듯이 자신을 압도하는 것들뿐인데 이상하게도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이국적인 꽃향기 때문인지 공기마저 낯설고 두려운 이 공간에, 기민하게 의식되는 건 의외로 단 하나의 존재. 헤르한뿐이었다.

그날 후로 처음 얼굴을 보는 것이어서일까? 그래서 이렇게 떨리나? 제국 황실에 들어선 것에 대한 긴장과 공포를 다 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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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치의에게 데려다줄 테니 진료부터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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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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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이 뛰어난 자다. 괴짜에 변태 기질이 있는 게 흠인데, 오히려 그래서 믿을 만한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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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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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불편한 데가 있다면 전부 얘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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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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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나온 김에, 며칠 전의 그때 일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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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덕분에 곰곰이 생각에 잠겨 걷던 리엘라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리엘라의 귓바퀴는 단번에 달아올랐다. 헤르한이 말하는 ‘그날’,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는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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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를 위해서라도 정확히 해야 할 것 같군. 네가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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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그러니까…….”

이번에도 어물쩍 넘어가기엔 벌써 꽤 많은 시간을 끌었다.

민망하다고 피하기만 해서 될 일은 아니겠지. 아까부터 내내, 황제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화끈거리는 이 기운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리엘라는 결심을 굳히고 조심스럽게 대답을 시작했다.

최대한 차분하게. 최대한 숨을 고른다고 한 건데도 목소리에 묻어난 떨림을 감추는 일은 꽤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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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까지는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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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라는 건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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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제게 입 맞추신 것까지는…….”

리엘라의 목소리가 모깃소리만큼 줄어들었다.

자신은 성인인데. 심지어, 기억엔 없더라도 황제와는 이미 갈 데까지도 다 갔었다는데 어째서 입 맞춘 얘기 한 번을 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지.

리엘라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상태로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느라 정신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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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이 중요한데요. 강가, 입 맞추고, 그리고 그 뒤는?”

난데없이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까지 튀어나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펄쩍 튀어 오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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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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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

리엘라가 돌아본 곳에는 은빛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안경을 쓴 남자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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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인기척 좀 내고 다녀주면 안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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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폐하의 은밀한 모습을 다 놓치잖습니까. 제 삶의 낙을 빼앗아갈 생각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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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긋지긋한 도착증을 가지고서 잘도 내가 없는 이 황궁을 지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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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잖아도 죽는 줄 알았습니다. 폐하 냄새가 그리워서.”

‘제스’라는 남자는 거기까지 말하곤 이내 두 팔을 뻗어 헤르한에게 다가갔다. 마치 ‘안아주세요’ 하고 조르기라도 하듯이.

헤르한은 그런 제스의 두 팔을 아주 능숙하게 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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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말한 주치의다.”

일단 제스를 한번 퇴치하고 난 헤르한은 리엘라에게 뒤늦은 소개를 했다.

바로 그때, 제스가 방심한 황제를 뒤에서 안았다. 헤르한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털었지만 제스는 거머리처럼 그에게 탁 달라붙어서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예 헤르한의 뒷덜미에 제 코를 처박고서는 비로소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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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하아-. 이 냄새를 맡으니 이제야 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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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흐름에 리엘라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그런 리엘라 앞에서 헤르한은 그저 무상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크게 화가 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헤르한은 분노 같은 건 이미 옛날 옛적에 초월했다는 듯 달관한 눈빛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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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명세는 이 정도면 됐고. 평소 앓던 지병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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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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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르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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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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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것을 손에 꽉 쥐어보십시오.”

리엘라는 제스에게서 커다란 구슬을 건네받아 그가 시키는 대로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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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세게 쥐십시오. 있는 힘껏.”

제스의 말대로 있는 힘껏 구슬을 쥐니, 투명한 유리구슬 안에 몽글몽글한 형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제스는 그런 리엘라 앞에 무릎까지 꿇고 앉아서 그 구슬을 면밀하게 살피고 기록했다. 아까 리엘라가 복도에서 본 것과는 전혀 다르게 진지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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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리엘라는 혼란스러워서 구슬을 쥔 채로 커다란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는 동안 기록을 다 마친 제스는 선반에서 온갖 시약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말은 없었다.

리엘라를 연구실까지 데려다준 황제가 떠난 후로, 제스는 계속 그랬다. 진료에 필요한 말 외엔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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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는 그렇게 이상하게 굴더니…….’

그래서 혹시 자신에게까지 기이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리엘라는 내내 긴장했었다.

그런데 황제가 가버리고 없는 자리에서의 제스는 사무적이고 무뚝뚝한 의사 그 자체였다.

괜히 겁을 먹고 뻣뻣하게 굴었나? 황제 폐하와는 그만큼 친한 사이여서 장난을 쳤을 수도 있는 것인데.

리엘라는 그를 오해했던 것이 미안해서, 조금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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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스 쪽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여러 시약을 이리 섞고 저리 섞을 뿐.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싶어서 리엘라는 흠흠 목청을 다듬은 뒤에 다시 크게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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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주치의이신데, 제 몸까지 친절하게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엘라가 애써 씩씩하게 낸 목소리가 제스의 넓은 연구실 안에 울려 퍼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젠 넉살 좋은 대답은 아니더라도 퉁명스러운 대꾸쯤은 해주겠지, 생각하며 리엘라는 제스의 뒤통수를 끈질기게 보았다.

이윽고 제스가 얼굴을 보였다. 그는 방금 제조한 물약을 찰랑찰랑 흔들며 리엘라에게 다가왔다.

리엘라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제스의 대답을 기다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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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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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스는 대답이 아닌 약을 내밀며 딱딱한 설명만을 덧붙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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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진용 시약입니다. 내일 몸의 피로도를 정밀하게 측정하려면 지금 마셔두어야 합니다. 또 클라디 독도 완전히 해독되었는지 알아봐야 하니까 저녁 식사 후엔 이 알약도 드십시오. 내일 다시 몸을 살필 테니 수면 시간은 따로 기록해 두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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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리엘라는 얼떨결에 제스가 내미는 것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아직 자신의 감사 인사에 그가 반응하지 않은 것이 신경 쓰였다.

혹시 하도 일에 골몰해서 인사를 듣지 못한 걸까?

그런 걱정에 리엘라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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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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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징후는 없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제가 보기엔 그런데, 당사자의 느낌은 다를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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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임신이요?”

난데없이 튀어나온 임신 얘기에 리엘라는 기겁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정작 제스는 무미건조한 얼굴이었다. 무심하게 안경을 한번 추켜올린 그는 리엘라의 검진 결과가 담긴 서류를 살피며 다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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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와 동침한 이후로 피가 비친 적이 있다든가 배가 뭉치는 느낌이 났다든가 하면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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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에요! 저는! 그러니까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요.”

리엘라는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많은 사람이 비슷한 오해를 하는 줄은 알았지만 사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제 흉을 보든 리엘라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제스는 달랐다.

그가 황제의 주치의인 것을 넘어 헤르한이 개인적으로도 믿고 아끼는 심복이란 건 아까 그 둘 사이에 오가는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 때문이 아니라 헤르한 때문에라도, 제스는 응당히 진실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리엘라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오랜 시간에 걸쳐 열성적으로 며칠 전의 일을 해명했다. 루의 배탈, 산책, 강물, 마차……, 그런 할 필요도 없는 얘기까지도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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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네. 그러니까 어쨌든 임신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런데 리엘라의 성의가 민망할 정도로 제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잠잠히 리엘라의 말을 다 들어주는가 싶더니, 결과적으로 그는 검진 서류의 마지막 항목에 X자 하나만을 치는 것으로 제 역할은 다했다는 듯 일어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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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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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임신 아니라면서요. 그럼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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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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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더 필요합니까?”

마땅히 할 대답을 잃은 리엘라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그렇지. 그거면 됐지. 그렇긴 한데…….

방금 전 제스의 오해를 푼답시고 손짓, 발짓해가며 허공을 헤집던 것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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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나가보십시오.”

리엘라의 귓바퀴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뻔히 보고도 제스는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고도 리엘라가 정신을 추스르고 일어날 그 몇 초를 기다려주기가 아깝다는 듯 아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구실 안쪽으로 쑥 들어가 버리는 제스를 보고서야 리엘라는 뒤늦게 깨달았다.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두 번이나 한 그 인사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던 거. 말을 못 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못 들은 체한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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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부터 보기 좋게 무시당해버렸네.’

리엘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쉽지 않을 줄도 알았고 이 정도의 일도 당연히 예상했지만, 역시 아픈 것은 아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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