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리엘라의 자리
(25/154)
25 리엘라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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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리엘라의 자리
2021.09.23.
헤르한은 당황스러운 심정이었다.
리엘라는 그냥 단순하게 기절한 것일 뿐, 어딘가가 심각하게 아픈 건 아니라는 카넬의 진단이 못 미덥고 억울할 정도였다.
‘너무 놀라서? 그래서 기절을 하기도 하나?’
입맞춤에 놀라서 기절했다고 하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처음 입술이 맞닿고 나서 얼마간은 분명 리엘라가 반응하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유를 댈 것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리엘라가 너무 가냘프고 심약한 것을 탓하는 수밖에는.
‘저렇게 약한 몸을 끌고 용병 생활은 어떻게 했던 것인지.’
헤르한은 리엘라가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의 머리맡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아시온이 리엘라를 침실로 옮기겠다고 했지만 그걸 물린 건 헤르한이었다. 여기서 여관까지는 또 한참인데 괜히 잠자리를 옮긴답시고 리엘라의 몸에 더 무리를 주고 싶진 않았다.
황제의 마차는 웬만한 침실 못지않게 넓어서 리엘라가 편안히 자기에도 큰 무리는 없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밤새. 곁에서.
헤르한은 리엘라를 지킬 작정이었다. 그래서 저 또한 침실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아시온에게 말해두었다.
‘입을 맞출…… 생각은 아니었는데.’
리엘라의 호흡이 편안한 것을 몇 번은 더 확인한 후에야 헤르한은 아까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사실 헤르한은 근처에 르 데르의 지류가 흐른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리엘라를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리엘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
네가 줄곧 오해하고 있는 ‘그날’엔 아무 일도 없었노라고. 내가 널 자극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었노라고. 그는 진실을 말하려 했다.
사실 그날 여관에서 자신은 밤새 자지 않았었다고. 네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깨어 있었다고.
그래서 네가 겁에 질리고, 떨고, 흐느끼다가, 비틀비틀 걸어 나가는 것 모두를 보았노라고도 말하려고 했다. 사연이 있는 줄을 알면서도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붙잡지 못하고 그냥 보내주었던 것까지도.
그런데 오늘, 강둑에 선 리엘라가 너무 예뻐 보였다.
강바람을 맞으며 홀가분하게 웃는 모습이 참 기특했다.
제 삶을 어쩔 줄 모르고 울면서 도망치던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게 못내 대견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서 헤르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것이었다. 이성의 끈을 겨우 되잡았을 땐 이미 리엘라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날 밤의 진실은 얘기도 못 했고. 거기에 오늘 밤의 사고까지 추가해버렸고.’
헤르한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잠깐 한눈만 팔면 사고를 치고 다닌다며 아시온이 저를 흉보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확실히 그는 촐싹대긴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혹시 이렇게 날 곤경에 빠트리는 게, 내가 계속 널 속이는 것에 대한 벌인 건가.’
헤르한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리엘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이 답 없이 난감한 상황이 분명 벌이라면 벌인 것 같기는 한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리엘라를 속인 대가가 이렇게 간지럽고 두근거리는 거라면, 이대로 조금 더 그녀를 오해하게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리엘라를 향하는 헤르한 푸른 눈동자 아래, 그의 욕망이 꿈틀거렸다.
*
다음날 이른 아침. 병사들의 다급하고도 힘찬 부름에 아시온은 화들짝 눈을 떴다.
정신을 차려보니 밝은 햇살이 정수리에 내리쬐고 있었다. 바로 옆에선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짹짹거리며 아침 노래까지 하고 있었다.
“대장님! 여기서 주무시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한참 찾았습니다.”
“아. 으응. 무슨 일이야.”
황제의 마차 앞. 대충 가져다 둔 의자 위에서 몸을 쭈그리고 잤던 아시온은 기다란 팔다리를 쭉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폐하께서 보이지 않습니다!”
“……어?”
“침실이 텅 비어 있습니다. 분명 머무신 흔적은 있는데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가신 것인지…….”
“아아. 아침부터 어딜 가신 게 아니라, 아침까지 계속 그러고 계시는 거야.”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아시온은 한 번 더 찌뿌둥한 몸을 쭉 펴고는 그런 게 있다며 병사를 물렸다. 폐하가 계신 곳은 자신이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도무지 영문을 몰라 뚱한 병사는 일단 아시온의 말을 믿고 물러났다.
그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때야 아시온은 주변을 한 번 더 살피고 조심스럽게 마차 문을 열었다.
‘……아이고. 나 참.’
마차 안엔 헤르한과 리엘라가 참 다정히도 서로에게 기댄 채 아직 꿈속에서 헤매는 중이었다.
리엘라야 그렇다고 쳐도 주군까지 저렇게 곤히 주무시고 계실 건 뭔가.
혹시나 밤새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리엘라가 조금만 뒤척거려도 흠칫흠칫 놀라며 카넬을 불러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본인도 지쳐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었다.
‘뭐. 별수 있나…….’
어쨌든 리엘라와 헤르한, 두 사람 모두 편안해 보이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아시온은 다시 마차 문을 닫은 뒤에 역참 뜰로 나왔다.
사람들은 대부분 일어나 천막과 짐을 정리하고 다시 오늘의 행군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늦잠을 자는 건 아마도 황금 마차 안의 두 사람뿐인 듯했다.
“이봐, 필.”
“예. 대장님.”
“오늘 폐하께서는 마차로 기동하실 예정이시다. 내가 마차 선두에서 이끌 테니 너는 폐하의 말을 챙기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경로를 표시해서 가져오고. 우리 오늘 국경을 지나는 거지?”
“예. 맞습니다. 지도를 준비해오겠습니다.”
아시온은 본격적인 출정 전에 휘휘 어깨를 돌려 몸을 풀며 혼잣말을 했다.
두 분, 눈 뜨고 나면 그땐 땅 주인이 바뀌어 있겠는데요, 하며.
*
아시온의 말이 맞았다.
황제의 마차 문이 열린 것은 그들이 드디어 국경을 지나 엘슈바이크 제국 영토에 접어든 후, 수행단 전체가 행군을 멈추고 늦은 점심을 먹을 때쯤이었다.
“흠. 흠.”
“헛기침 안 하고 그냥 나오셔도 되는데요.”
아시온은 또 놀리는 소리로 말하며 바깥에서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인기척을 낸 것은 황제였는데, 열린 문으로 벌컥 튀어나온 것은 리엘라였다.
“오! 일어나셨습니까?”
“……네, 네.”
“몸 상태는 괜찮……. 저기요, 리엘라 양?”
아시온은 리엘라가 그렇게 달리기를 잘하는지는 처음 알았다. 보통 리엘라는 늘 한자리에 우뚝 서 있거나 그 자리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떨고 있는 편이었으니까.
“폐하. 방금 여기서 휙 달려나간 게 뭔지 혹시 아십니까?”
“…….”
“여기 말입니다. 여기 마차 안에서. 제가 분명 오늘 아침까진 봤거든요? 폐하랑 사이좋게 나란히 있는 거. 그런데 지금은 없네요?”
아시온의 말엔 대꾸도 하지 않고 헤르한이 다시 마차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다.
아시온은 안으로 따라 들어가서 주군을 더 본격적으로 골려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가 피식 웃곤 그만두었다.
그랬다가는 정말 근위대장직에서 잘리든 제 목이 잘리든 둘 중 하나일 것 같아서.
*
리엘라는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제 볼을 양손으로 감싸고 냅다 뒤로 뛰었다.
중간중간 리엘라를 알아본 대신들이나 시종들이 안부를 묻거나 함께 식사를 권했지만 그마저도 죄다 뿌리쳤다. 식사 따위가 대수가 아니었다. 당장 얼굴이 뜨거워서 터질 것만 같은데 어떻게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있을까.
“하아……. 하아…….”
그렇게 한참을 뛰어 맨 끝자락에 자리한 초록 마차에 닿고서야 리엘라는 가쁜 숨을 골랐다.
인기척을 느끼고 마차 안에서 루가 튀어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리엘라 님!”
“어어, 루……!”
루는 마차 아래로 뛰어내리듯 하며 리엘라에게 안겼다.
루의 울먹임엔 지난밤에 쌓인 근심과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돌아오지 않으셔서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저 때문인가요? 그 방을 제게 내주신 바람에! 또 저를 구하시느라고 폐하를 때리는 바람에! 그래서 밤새 벌을 받으셨나요?”
“아, 아니에요. 그런 거…….”
“그렇지만, 어젯밤에 아시온 대장님께서 오셔서 리엘라 님은 여기로 오지 않으실 거라고……. 다른 건 설명도 안 해주시고…….”
이런. 많이 걱정했겠구나.
리엘라는 자신의 품 안에서 울먹거리는 루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어쨌든 리엘라가 무사한 것에 루는 빠르게 진정을 되찾았다. 문제는, 진정을 되찾은 것과 별개로 그 아이의 호기심은 쉽게 가라앉힐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디 갔다 오셨던 건가요? 밤새 무얼 하셨어요?”
그 말에 리엘라의 얼굴이 또 화르르 달아올랐다.
“리엘라 님! 얼굴에서 열이 나요!”
루가 작은 손바닥을 들어 리엘라의 이마며, 볼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 손길.
구석구석 섬세하게 얼굴을 어루만지는 그 손길이 지난밤 리엘라의 기억을 더 깨우고 말았다.
마차 안에서, 황제 품에 안긴 채로 눈을 떴을 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지만 사실 리엘라는 어제의 일이 또렷했다.
황제와의 밤 산책.
르 데르에서 갈라져 나온 강줄기.
당신 덕에 살고 싶어졌다는 고백.
그리고 입맞춤.
‘……그 뒤엔!?’
리엘라의 기억에 흐릿함이라곤 없었다. 단지, 아주 또렷하고도 명확하게 ‘딱 거기까지’일 뿐이었다.
왜 입맞춤 뒤로는 기억이 아예 없을까? 꼭 누군가 가위로 뚝 잘라내기라도 한 것처럼.
‘작년에도 그랬으면서 왜 또 이러는 거지? 르 데르가 문제인 건가. 아니면…….’
아니면 헤르한, 그 사람이 문제인 건가.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바닥을 펼쳐 가슴을 문질러 보아도 쿵쾅거리는 심장은 진정할 줄을 몰랐다.
리엘라는 가슴을 쓸던 손을 뻗어 제 입술을 어루만져보았다.
어쩐지, 지금 다시 그와 입을 맞추는 것처럼 그때의 촉감과 온기가 생생했다.
“리엘라 님. 얼굴이 계속 빨개요. 힝……. 어떻게 하죠?”
리엘라는 애써 루를 달래고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마차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리엘라는 그렇게 자신이 언제 국경선을 넘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제국에 입성했다.
*
국경을 넘은 뒤로 수행단은 더 속도를 냈다. 비록 몇 주간의 여정이었다지만 그것도 길다면 긴 시간인지라, 고국에 돌아온 이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들은 빠르게 나흘을 더 내달려 마침내 엘슈바이크 제국의 황성, 바하보르덴에 당도했다.
바하보르덴에 도착하기 전까지 수행단은 한 번 더 역참에 묵었다.
그날 밤 리엘라에게는 2인실이 배정되었고 리엘라는 거기서 루와 함께 방을 썼다. 일부러 두 사람을 붙여준 황제의 배려였다.
나흘간 황제는 또 리엘라를 찾아오진 않았다.
이번에는 리엘라도 마찬가지로 그를 기다리거나,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충동적이었던 입맞춤의 얼떨떨함과 낯부끄러움을 다 떨치기엔 나흘도 한참 부족한 시간이었으니까.
“와! 리엘라 님! 저기 보이는 게 황궁인가 봐요! 엄청나게 크고 멋있어요. 리오타 왕궁이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요!”
늘 리엘라의 뒤를 졸졸 쫓다 못해 이젠 마차에까지 따라 타기 시작한 루는 황궁의 높은 성벽이 보일 때부터 계속 들떠 있었다.
“어떻게 하죠!? 너무 떨려요!”
“그러게요. 나도요.”
루의 수선에 맞장구를 치긴 했지만 리엘라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성벽의 높이나 그 너머로 보이는 궁의 찬란한 위용이 리오타 왕궁과는 남달랐지만, 어쩐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데…….’
리오타 왕국은 헤르한 황제를 맞이할 때, 또 헤르한 황제를 환송할 때, 건국 이래 가장 호화스러운 행사를 열었다.
왕궁을 번쩍번쩍하게 치장한 건 물론이고 황제의 행렬이 지나는 모든 길마다 축포를 터트리고 환호성을 내지르는 인파들도 배치했다. 여기저기가 내내 북적북적하고, 소란스러웠다.
그런데 엘슈바이크 제국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언뜻 보이는 황성 거리의 건물, 지나는 사람들, 넓은 잔디 광장과 분수대, 그리고 마침내 황궁으로 들어서는 긴 다리를 지나도록.
눈에 닿는 모든 게 더 거대하고 부유해 보였지만 어딘가 삭막함이 느껴졌다.
그건 황궁 안에 들어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축포도, 뿔피리도, 꽃가루도 없었다.
의장대도 없었고 음악이나 황제의 연설 같은 것도 없었다.
행렬의 제일 꼬리인 리엘라의 초록 마차까지 성벽 안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앞서 도착한 사람들이 수레에서 짐을 내리거나, 내린 짐을 어깨에 메고 궁 내로 복귀하고 있었다.
“어, 환영식…… 그런 건 없나 봐요.”
이미 왕궁에서 성대한 환송회를 겪었던지라, 루는 몹시도 실망한 듯했다. 심지어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루 레이사?”
“네?”
“배치될 곳을 안내하겠다. 짐을 들고 나를 따르도록.”
“앗, 네, 넵!”
머리를 바짝 틀어 올린 고루한 인상의 귀부인이 루를 호명하며 데리고 가버린 것이었다.
루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황궁에서 일했던 이들이건, 아니면 루처럼 새로 황궁에 온 이들이건, 저마다 누군가의 부름에 따라 제 목적지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야 할 곳을 알지 못해 멀뚱멀뚱 서 있는 건 이 넓은 뜰을 통틀어 리엘라 저 자신뿐인 듯했다.
“저기, 부인. 죄송합니다. 저는 어디로 가면 될지…….”
그래서 리엘라는 실례를 무릅쓰고 루를 데려갔던 부인에게로 뛰어갔다.
부인은 안경을 한번 매만지고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두꺼운 명단을 휘리릭 넘겼다.
“리엘라 블리니테. 리엘라 블리니테라……. 그런 이름은 없습니다만?”
“그러면 어느 분께 가서 여쭈어야 할까요?”
“글쎄요. 어쨌든 제 소관은 아닌 듯하군요.”
“다른 담당관이라도 알려주시면…….”
다소 신경질적인 부인의 말투에 리엘라의 어깨가 움츠러들 참이었다.
“내 소관이지. 물론.”
바쁘게 짐을 옮기느라 뭉쳐 있던 시종들의 머리 위로 키 큰 그림자가 나타났다.
시종들은 자신들이 누구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고는 기겁하여 양옆으로 갈라졌다.
명단을 들고 있던 귀부인도 급히 뒤로 몇 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당연한 거잖아. 왜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거지?”
“아, 그게…….”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과 눈을 맞추는 건 리엘라뿐이었다.
황제는 그런 리엘라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다가, 까딱하고 턱을 틀어 제 옆자리를 고갯짓했다.
네 자리는 당연히 여기잖아, 너도 알면서 뭘 그리 망설이고 있어, 하고 리엘라를 얄밉게 꾸짖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