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생각보다 엉큼한
(23/154)
23 생각보다 엉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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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생각보다 엉큼한
2021.09.16.
헤르한은 양옆을 의식하며 괜히 로브에 달린 모자를 더 깊숙이 눌러썼다. 아무도 없는 복도이건만 그래도 누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벌써 십분 째였다.
이렇게 리엘라의 방 앞에 도착하고도 눈치를 보며 망설이기만 하는 것이.
‘노크를…….’
노크해야 하는데. 여기서 이대로 밤샐 작정이 아니라면.
그런데도 어쩐지 쉽게 결심이 서지 않았다.
하긴, 그게 그리 쉬웠다면 지난 며칠을 바보처럼 굴지도 않았으리라.
헤르한은 내내 리엘라가 궁금하고 걱정됐지만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리엘라가 후회하고 있을까 봐. 고향을, 옛사람을 그리워하며 괴로워하고 있을까 봐. 홧김에 저를 데리고 가 달라 부탁하긴 했지만 뒤늦게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를 원망하고 있을까 봐.
헤르한은 리엘라가 결정을 번복할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리엘라를 피했다. 완전히 국경을 넘어서 리엘라가 돌아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때까지는 계속 그럴 작정이었다.
비겁한 마음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비겁하게 구는 동안 리엘라가 병이 난 줄도 모르고.
‘아픈 사람에게 짐은 또 왜 이리 거추장스럽게 들고 왔는지.’
부담 없이 잠깐 들린 척하자니 팔뚝에 걸고 온 묵직한 바구니도 민망했다.
리엘라에게 꼭 필요한 것만을 몇 개 챙겼을 뿐인데 이렇게 피난민 짐보따리처럼 커질 줄은 몰랐다. 역시 아시온이 할 말 많은 눈으로 한숨을 쉴 때 멈추었어야 하는 건데.
이러나저러나 이젠 정말 어쩔 수 없었다.
헤르한은 이번에야말로 눈을 질끈 감고 문을 똑똑 두드렸다. 몇 번 더 노크했는데도 대답이 없어서 조심히 문을 열었다.
문고리는 걸리는 데 없이 매끄럽게 돌아갔다.
“이봐.”
왠지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도 머쓱한 느낌이라, 헤르한은 어정쩡한 말로 인기척을 내며 들어섰다.
방안은 어두웠다. 실내를 밝히는 건 침대 머리맡의 작은 조명등 하나, 그리고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과 함께 드나드는 달빛뿐이었다.
그 빛을 담뿍 받은 작은 등이 침대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작달막하게 느껴지는 뒷모습이었다.
헤르한은 손잡이가 으스러질 정도로 바구니를 쥔 손에 힘을 주면서 안타까운 감정을 억눌렀다.
“아프다고 들었는데. 자는 건가.”
헤르한이 나직하게 물었지만 돌아누운 리엘라는 대답이 없었다.
많이 고되었던 걸까.
그럴 수도 있다. 웬만한 일꾼들에게도 강행군인 여정이니 저 여자의 여린 몸엔 분명 무리가 됐을 것이었다.
“이제 절반밖에 오지 않았는데 벌써 앓아누우려면 어쩌려고. 가기 싫다고 시위라도 하는 건가?”
질책하듯 말을 내뱉고서 헤르한은 또 주먹을 꽉 쥐었다.
분명히 마음속으로는 더 섬세하게 보살펴줄걸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으면서, 비뚤어진 말만 내지르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지.
“내일이면 국경을 넘을 거다. 그러니 도저히 못 버티겠으면 지금 말해.”
결국 그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던 질문까지 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리엘라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채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서운해서였나. 아니면 못 견디게 안쓰러워서였나.
“리엘라 블리니테. 내 말을 듣고 있는 것 알고 있어.”
벼랑 끝을 내딛는 심정으로 건넨 말에 작고 동그란 등이 움찔거리며 떨기 시작했다.
헤르한은 그런 그녀를 향해 가까이 다가섰다.
“고개를 들어라.”
“…….”
“내게 네 얼굴을 보여.”
헤르한도 이제는 답답해서 참을 수 없었다. 여기서 리엘라가 도망쳐버리기를 택한다고 해도 일단 그녀의 눈을 마주 보고 대답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자신을 모른 체하면서 떨고 있는 동그란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은 순간.
“꺄악!”
데구루루- 쿵!
리엘라가 어울리지 않는 비명을 꺅 내지르며 헤르한의 손을 뿌리치더니 제 몸부림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 밑으로 쿵 굴러떨어지는 것이었다.
“리엘라? 괜찮은가?”
헤르한은 놀라서 리엘라의 상태를 물으면서도 내심 상처를 입어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나를 뿌리칠 일인가? 손이 닿는 것도 끔찍해서 몸을 부르르 떨 만큼?
“일단 일어나서…….”
그래도 일단은 리엘라를 일으키고 보자 생각하며 손을 뻗는데 이번엔 뒤에서 쿠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것이 달려들어 등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제법 강한 타격이었다. 웬만한 사내라면 자빠트릴 수도 있을 만한.
문제는 황궁 밖에서 꾸준히 수련하며 야인으로 살아온 헤르한이 ‘웬만한 사내’의 범주에 들 리는 없다는 것이었다.
헤르한은 기습에 당황한 마음을 빠르게 가라앉히고 날렵하게 몸을 틀어 역습했다. 헤르한을 공격하던 상대는 맥없이 제압당했다.
“네 놈은 누구……!”
습격자의 양쪽 손목을 모두 쥐고 벽 쪽으로 몰아붙인 헤르한은 상대에게 호통을 다 치기도 전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손목을 낚아챘을 때부터 그 보드랍고 여린 느낌에 설마 했는데.
“리엘라!?”
“설마……! 폐하?”
기겁하며 놀란 건 헤르한의 정체를 확인한 리엘라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헤르한은 곧장 리엘라의 손목을 놓고 뒤로 몇 발 물러났다.
헤르한만큼이나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리엘라의 손에서 묵직한 가죽 물통이 턱 떨어졌다. 그게 바로 황제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던 둔기의 정체였다.
헤르한은 정신이 혼미했다.
저 가죽 물통 따위에 정신없이 맞은 것에, 또 이 황당한 공격을 퍼부은 것이 다름 아닌 리엘라라는 것에. 그리고…….
“네가 리엘라라면……. 저기 저 여잔 누구지?”
“이번에 왕국에서 온 시종 아이인데요. 몸이 좋지 않아서 제 침대에 잠시 눕혀두었는데……. 그 사이에 폐하께서 오셨을 줄은…….”
지금껏 열심히 걱정하고, 낯부끄러운 말을 건네고, 다가가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이가 전혀 엉뚱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
“그 아이는?”
역참 여관의 작은 뒤뜰 구석.
이끼가 낀 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헤르한은 리엘라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이제 좀 진정한 것 같습니다. 방 안에 들어온 게 괴한인 줄 알았던 모양이에요. 저도…… 그랬고…….”
“…….”
황제는 팔짱을 풀지 않고 있었다.
분명 엄청 화가 나셨겠지. 분명 엄청 싸늘한 눈으로 나를 보고 계실 거야.
리엘라는 그런 끔찍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까칠한 타박이 이어졌다.
“오늘처럼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건 처음이다.”
“…….”
“적들에게 붙잡혀서 고문을 당했을 때도 몽둥이로 등을 후려 맞진 않았는데.”
“……!”
“너도 보기보다는 꽤 힘이 좋은-.”
“죽여주세요!”
그쯤에서 리엘라는 헤르한의 말을 더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버렸다.
무릎만 꿇은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 이마를 찧을 정도로 고개까지 푹 숙이고, 죽여달라는 말은 또 어찌나 우렁찼는지 인근에 자는 이들을 전부 깨울 지경이었다.
그만큼 리엘라는 필사적이었다.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사무치게 후회하기도 했다.
루에게 먹일 물을 떠서 돌아오니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방 안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가 루를 위협하는 듯이 보였고, 리엘라는 당연히 그를 도둑이나 괴한이라고 여겼다. 평생 떠돌이 용병 생활을 하면서 만나온 자들은 으레 그런 이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황제였을 줄이야.
“정말…….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폐하께 무슨 짓을 한 건지…….”
“그래서, 정말 죽여달라고?”
그때, 되묻는 황제의 음성이 제법 가까이 들렸다.
리엘라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느새 제 눈높이만큼 무릎을 접고 앉은 황제가 자신을 흘겨보고 있었다.
“내가 널 살리느라 얼마나 갖은 고생을 다 했는데. 그런데 죽여달란 말을 그렇게 쉽게 한다고?”
“아, 아닙니다. 저는……. 제 말뜻은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건가?”
“…….”
네…….
선수를 빼앗겨 당황한 리엘라는 헤르한의 눈을 빤히 보다가 면목 없는 목소리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감히 황제를 공격해놓고 사과 한마디로 때우는 것이 너무 염치없어 보였던 걸까. 리엘라가 다시 한번 진심 어린 사죄를 하려는 순간.
“나도.”
“……네?”
“놀라고 겁먹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너와 그 시녀 아이에게 모두.”
도리어 황제가 하는 사과에 리엘라는 멍해져서 눈만 깜빡거렸다.
“내가 조심스럽지 못했다. 이런 옷을 입고 있었으니 오해를 산 것도 내 업보지.”
“아……. 아녜요. 제가 죄송합니다.”
리엘라는 얼떨떨하게 사과 말을 덧붙였다.
헤르한은 언제까지 그렇게 바닥에 엎어져 있을 것이냐며 리엘라를 또 타박했다.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키려는 리엘라에게 손도 뻗어주며.
리엘라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나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당연한 듯 익숙하게 황제의 손을 잡게 된 게 대체 언제부터일까, 하고.
“변명하자는 건 아니지만, 내가 평소 누구 허락을 얻고 문을 여는 편은 아니라.”
그때 황제가 변명 아닌 변명으로 리엘라의 상념을 깨웠다.
리엘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제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곧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당연하죠. 황제 폐하이시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웃는 리엘라의 모습에 헤르한도 긴장을 풀었는지 실없는 웃음을 뱉었다.
그 웃음이, 내내 미안하고 초조하고 당황스러워 불편하던 리엘라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루, 라던가. 그 아이는 다시 잠들었다고?”
“네. 폐하께서 가져다주신 매실주를 마시고 속이 많이 편해진 모양이에요. 감사합니다.”
“너는 덕분에 잠자리를 뺏겼겠군.”
리엘라는 그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빙긋 웃었다.
잠이야, 마차에서 자면 그만이었다. 용병단 시절엔 맨바닥에 나뭇잎만을 깔고도 잘만 잤으니 마차 정도면 충분히 호화스러운 잠자리였다.
“그럼 나를 따라와라.”
“네? 어, 어디를……?”
“지금 딱히 잘 곳도 없잖아.”
그런데 헤르한이 리엘라의 손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리엘라는 일단 헤르한이 이끄는 대로 가면서 그의 말이 뜻하는 바를 곰곰이 생각했다.
잘 곳이 없는 자신을 굳이 끌고 간다는 것은, 잘 곳을 주겠다는 건데, 역참 여관의 객실은 당연히 만실이고, 천막도 이미 배정이 끝났을 터인 데다가, 황제가 자신을 끌고 가는 방향은 여관 독채가 있는 곳이고, 독채는 황제가 묵고 있는…….
“폐하! 설마 저를 폐하의 침실로……! 그건 안 될……! 무, 물론 왕궁에서도 한번 그랬지만 그건 폐하가 회의로 안 계실 때의 일이었고……!”
“쉿. 사람들을 다 깨울 참인가?”
“하, 하지만…….”
황제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는 리엘라를 얄밉게 곁눈질했다.
“우리, 처음도 아니잖아?”
“폐하!”
리엘라는 커다랗게 부릅뜬 눈을 파르르 떨었다.
“분명히 난 너를 안을 거라고도 했고. 너도 기꺼이 내게 빚을 갚겠다고 했고.”
그건 헤르한이 어떤 남자인지 잘 모를 때 했던 말이었다.
그의 진심을 오해하고, 저 또한 많은 것을 불신하며 나약했던 때. 그때 했던 말과 행동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없던 말이 되는 것은 아니라서 리엘라는 입이 열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황제를 따라 제국행 마차에 오른 그 순간, 앞으로 이 남자가 제 운명의 향방을 결정하리란 것도 충분히 각오한 일.
황제가 품겠다면 품는 것이다.
그건 그가 좋은 사람이란 것이나, 자신이 그에게 제법 많은 마음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래.”
결국 리엘라는 더한 강요나 설득 없이 스스로 수긍하며 조용히 대답했고,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그렇게 꽤 많은 거리를 손을 잡고 걸었다.
어느새 황제가 머무는 독채가 코앞인 것에 리엘라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그런데 리엘라를 잡아끄는 헤르한의 걸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독채를 지나, 뒤쪽 담벼락에 난 쪽문도 지나, 아예 역참 터로부터 한참을 멀어지도록 계속.
“폐……하?”
“같이 산책을 할 생각이었다. 지금 넌 잘 곳도 없고 잘 생각도 없어 보여서.”
“……네?”
“그런데 넌 내 침실에 들 생각을 다 했다니. 전에도 느꼈던 것인데 넌 생각보다 엉큼한 면이…….”
리엘라는 그다음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황제의 손을 휙 놓고 도망치듯 앞으로 내달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