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당신은 잘 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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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당신은 잘 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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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당신은 잘 계시는지
2021.09.12.
왕궁에서 엘슈바이크 제국의 황궁까지는 쉬지 않고 이동해도 족히 2주가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제국의 깃발을 앞세운 대대적인 행군은 출발한 지 꼬박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에야 왕국 동부 국경지에 이르렀다.
그동안 그들은 세 번 역참에 들렀다.
이번 황제의 방문을 기해 왕실이 나서서 대대적으로 정비한 역참은 그 시설이 꽤 그럴듯해서, 말을 교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묵고 쉬어갈 수 있도록 여러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제국 수행단의 규모가 너무 커서 모든 인원을 역참 숙소에 수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황제를 비롯한 참모진, 대신들과 몇몇 상급 수행인들을 빼고 대부분의 시종과 마부들은 마차나 간이 천막에서 묵었다.
그런데 리엘라에게는 꼬박꼬박 역참의 방이 배정되었다.
그것도, 늘 창이 크고 볕이 잘 드는 방으로.
“리엘라 블리니테 양. 오늘 밤에 묵으실 침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마땅한 직함도 없고 맡은 역할도 없는, 그저 ‘리엘라 블리니테 양.’ 그런 자신이 방 하나를 독차지해도 괜찮은 걸까.
불편하고도 송구한 마음에 사양도 해보았지만 리엘라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황제 폐하의 뜻이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제 폐하의 뜻…….’
그 ‘뜻’이라는 건 과연 뭘까.
어김없이 노을빛이 환히 드는 침실에 도착한 리엘라는 황제를 떠올렸다. 타는 듯 강렬하면서도 때로는 손닿지 못할 거리에 아득한, 꼭 저 노을을 뿜어내는 태양 같은 그를.
“저……. 식사를 가져왔는데요.”
어린 목소리가 리엘라의 정신을 흔들어 깨운 건 그때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키가 작은 갈색 머리의 소녀가 몇 가지 음식을 담은 작은 쟁반을 든 채 문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 제가 나가서 직접 받아왔어야 했는데.”
“아녜요! 마침 일손이 남기도 했고, 또 리엘라 님의 식사는 잘 챙기란 분부가 있기도 했고…….”
“나는 ‘님’까진 아니에요.”
“네?”
“방금 ‘리엘라 님’이라고 한 거요. 그렇게까지 부를 필요는 없어요. 그냥 이름만 불러주어도 괜찮아요.”
“아, 아녜요. 제가 어찌 감히…….”
소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얼굴을 붉혔다.
리엘라는 그 소녀를 사랑스럽게 보며 작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그 소녀는 리엘라가 왕궁에서부터 만난 이들 중 유일하게 자기보다 작고 연약한 존재였다.
“루……라고 합니다.”
“루. 예쁜 이름이다. 리오타 왕국 출신이죠?”
“네? 어멋! 그걸 어떻게?”
자신을 ‘루’라고 소개한 소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부끄러운 듯 웃었다.
리오타 왕국과 엘슈바이크 제국은 같은 말과 글을 사용했지만, 억양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곧바로 자신을 알아보았으리라. 게다가 ‘리엘라 님’은 자신과 같은 왕국 출신이기도 하니까.
“실은 이번 사절단을 따라서 처음 제국으로 가게 되었어요. 그전까지는 리오타 왕실 창고에서 일했고요.”
“네? 지금까지 왕실에서 일했는데 제국엔 왜?”
“그게, 국왕 전하의 명령으로…….”
루의 사정을 들은 리엘라는 순간 이맛살을 찌푸렸다. 국왕이 제국에 용서를 빌고 아첨하기 위해 온갖 공물을 바친 줄은 알았지만, 설마 사람까지 물건처럼 멋대로 보냈을 줄이야, 하고.
그 뜻을 알아챈 루는 냅다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
“새, 생각하시는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그게, 교역의 일부로 차출된 건 맞긴 한데요.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저희들에게 엄청나게 후한 보수를 약속해주셔서…….”
“……그래요?”
왕실이 사과랍시고 떠밀듯 보낸 이들에게 황제가 그런 약속을 해주었다고…….
“네! 그, 그래서 서로 가겠다고 난리였는걸요! 지원자가 많아서 제비뽑기도 했고요. 그러니 저는 운이 좋은 거예요. 황제 폐하께도 정말 감사하고요.”
“……그랬구나. 폐하께서 베풀어주신 덕에 제국에 처음 가보는 게 나 혼자가 아니었네요.”
리엘라의 다정한 말에 루가 또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색하나마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갔다.
막상 낯가림을 떨치고 난 루는 제법 귀엽게 먼저 조잘거리기도 했다. 그래서요, 제 가족들은요……, 제가 돈을 벌면요……, 황실에 가면요…….
지루할 틈이 없이 이어지던 루의 수다는 결국 리엘라를 향한 질문으로까지 이어졌다.
내내 웃으며 루의 말을 듣던 리엘라는 어떤 질문이든 루처럼 밝게 대답해주리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리엘라 님은 어떻게 할 계획이세요? 앞으로 제국에 가면요? 황실에서 사시는 건가요? 혹시 폐하와 함께 지내시는 거예요?”
“…….”
보기 좋게 입이 틀어 막히고야 말았다.
“그러……게요.”
“네?”
그러게.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고민하는 리엘라의 머릿속으로 언젠가 들었던 황제의 말이 떠올랐다.
“후회하지 마. 내가 널 어디까지 데려갈지 나도 몰라.”
그게 그에게 들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리엘라는 그 뒤로는 황제를 보지 못했다. 왕국을 떠날 준비를 하느라 너무 바빠서, 또 떠나오느라 너무 바빠서.
기나긴 행렬의 맨 끝에서 그들을 따라가는 리엘라가 목을 길게 빼봤자 볼 수 있는 건 아득히 먼 앞에서 흔들리는 붉은 제국기였다. 아마 황제는 그쯤에 있을 테고, 당연히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궁금한데…….”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시무룩한 속마음을 내뱉고야 말았다. 루가 바로 옆에서 듣고 있다는 것도 잊고.
“예? 뭐가요? 뭐가 궁금하신데요?”
“아, 아녜요. 그냥…….”
그때 그 말뜻은 무엇이었는지, 앞으로 날 어떻게 하실 것인지, 요새는 왜 얼굴을 보여주시지 않는지, 많이 바쁘신 것인지.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당신은 잘 계시는지.
언젠가 그가 자신을 궁금해했던 것처럼, 리엘라는 그가 궁금했다.
*
루가 배탈이 난 건 몇 시간 뒤, 해가 다 진 무렵이었다.
“아흑. 억!”
“어떻게 해. 루. 괜찮아요?”
루는 먹은 것을 토하며 흙바닥 위를 구르고 있었다. 밤 산책을 나왔다가 루를 발견한 리엘라는 당장 그녀를 등에 업고 다급하게 의료반에 뛰어갔다.
루를 알아본 당직관의 눈길은 심드렁했다.
“그냥 배탈이네요. 행군이 길어지면 체력이 약한 사람들은 종종 이러죠. 속 좀 게워내고 쉬면 나을 겁니다.”
“아직 많이 아파하는데 진통제 같은 건 없나요?”
“예. 딱히.”
리엘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루한 듯 하품하는 당직관의 뒤에 버젓이 커다란 구급함이 있었다. 수백 명이 움직이는 여정에, 게다가 번듯하게 의료반까지 갖춘 이들이 기본적인 상비약을 챙기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약이 없는 게 아니라 루에게 내줄 약이 없는 거겠지.’
어리고 보잘것없는 시종인 데다가 제국 국적도 아닌 아이니까.
리엘라는 당직관에게 따질까 고민하다가 그냥 의료반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잠깐.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침대에 아이를 눕히려고요. 푹 쉬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여기는 자리가 없습니다.”
리엘라가 황당한 표정으로 막사 안의 빈 침대들을 쳐다보자 당직관이 몇 발 움직여 그런 리엘라의 눈길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저건 비상용 병상입니다. 그 외엔 여분이 없으니 그냥 나가서 바닥에 눕히십시오. 담요라면 빌려드리겠습니다.”
“아니, 이보세요.”
참다못한 리엘라가 발끈하려는 순간, 등에 업힌 루가 기력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리엘라 님, 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하고.
속상했지만 루의 말이 맞았다. 여기서 당직관에게 싸움을 걸어봤자 앞으로 황실에서 일해야 할 루에게 득이 될 일은 없었다.
리엘라는 당직관을 원망스럽게 보다가 결심한 듯이 루를 업고 나와서 역참 여관의 제 침실로 향했다.
“아, 안 돼요. 제가 감히 리엘라 님의 침대에 어떻게…….”
“괜찮으니 누워 있어요. 나는 물을 좀 가져올 테니까. 역참 관리인에게 부탁하면 약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흐잉……. 그래도……. 죄송합니다.”
서러움이 북받쳤는지 루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리엘라는 식은땀에 머리칼이 엉킨 루의 이마를 다정히 쓸어주었다.
리엘라는 루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낯선 곳에 떨어져 두렵기만 할 때 누군가 내밀어주는 손길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한숨 푹 자요.”
리엘라는 루를 토닥이고 나오면서 한때 이렇게 자신을 보듬어주었던 헤르한을 생각했다.
당신도 내게 이랬을까. 이렇게 애틋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나를 봐줬던 걸까.
*
“말은 교체 완료했습니다. 수레바퀴 점검도 잘 마쳤고, 모두 아무 이상 없습니다.”
역참 관리인의 보고가 끝나자 헤르한은 할 말이 남은 듯 미적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객실 쪽에도 특별한 문제는 없고?”
“객실에 어떤……. 특별한 문제 말씀이십니까?”
뜻을 몰라 순수하게 묻는 말에 헤르한은 설명하기가 난감한지 괜히 시선을 피했다. 황제 대신 아주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질문을 다시 해준 건 아시온이었다.
“201호 투숙객의 상태는 어떠한가? 어디 도망 안 가고 무사히 짐은 잘 풀었는지, 저녁은 잘 먹고 잠자리엔 잘 들었는지 등등.”
“아아. 그 말씀이셨군요.”
그래. 그 말씀이야.
한숨을 푹 쉰 아시온은 그렇게 덧붙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역참마다 헤르한은 늘 이렇게 관리인을 불러 리엘라의 근황을 따로 확인하곤 했다. 비단 역참에 들를 때만이 아니었다. 행군 중일 때도 아침저녁으로 최소 두 번은 리엘라의 마부가 황제 앞에 호출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세 좋게 사람을 세워놓고 헤르한은 그리 대단한 염탐을 하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리엘라가 식사는 잘하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정도를 물을 뿐.
‘그럴 거면 그냥 본인을 불러서 확인하시면 될 것을, 뭘 지금에 와서 데면데면 구시는지. 전 애인 문제로 그때 다투기라도 하셨나?’
그렇게 아시온이 속으로 주군의 흉을 보는 동안, 헤르한은 관리인만을 뚫어지라 보았다.
관리인은 진땀을 흘리며 객실 명부를 뒤적이다가 이내 화색을 띠었다.
“201호라……. 리엘라 블리……. 아, 그 붉은 머리의 숙녀분이군요! 이분이라면 알고 있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쯤이면 약효가 들어서 많이 나아지셨을 겁니다.”
“뭐? 약효?”
예상치 못한 보고에 헤르한은 반사적으로 되물으며 곧장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황제의 반응에 당황한 건 관리인도 마찬가지였다. 어라, 이게 아닌가,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예. 저희가 구비한 것 중 가장 효능이 뛰어난 진통제를 내어드렸으니까…….”
“201호 투숙객이 아픈가?”
“아, 알고 여쭤보신 것이 아니셨습니까? 아까 관리실에 급하게 오셔서 배탈과 몸살이 심하다며 약을 받아가셨는데…….”
황제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꼭 배탈 난 것이 201호의 여자가 아니라 자신이기라도 한 것처럼.
험악한 표정으로 말문을 닫아버린 황제 대신 아시온이 관리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하곤 그를 돌려보냈다.
이윽고 둘만 남은 처소 안에서 아시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심각한 건 아닐 겁니다. 지금 바로 사람을 보내 리엘라 양의 상태를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라고는 했지만 그게 영 시원찮은 대답이라는 건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모두 알았다.
“아니면 직접 가보시겠습니까?”
결국 분위기에 등 떠밀리듯 아시온이 건넨 제안에 헤르한이 몸을 움찔거렸다.
“201호면 바로 옆 건물이라 가까운데.”
“…….”
“사람들 시선이 걱정이시면 얼굴을 가릴 수 있을 만한 로브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황제는 묵묵부답이었다.
아직도 영 결심이 안 서시나.
싫다는 주군을 더 닦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시온은 그쯤에서 돌아가려 몸을 틀었다.
“……매실주도.”
그때 아시온의 뒤통수로 꾸물거림이 가득한 대답이 날아들었다.
아시온은 황당한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주군이 이렇게 우물쭈물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기에.
“……매실이 위장에 좋다잖아.”
“안 물어봤는데요.”
민망한 나머지 묻지도 않은 것을 설명하며 말을 돌리던 헤르한은 곧 마음을 굳혔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아시온에게 뻔뻔하게 추가 임무를 하달했다.
“신선한 물이랑 기력 회복에 좋은 음식도 좀 가져오고.”
아시온은 그런 주군에게 한소리를 할까 하다가 말았다. 계속 주인 떼어놓은 강아지처럼 조마조마해 하는 꼴을 보느니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편이 웃기긴 해도 차라리 더 익숙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