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당신은 잘 계시는지 (22/154)


#22 당신은 잘 계시는지
2021.09.12.


왕궁에서 엘슈바이크 제국의 황궁까지는 쉬지 않고 이동해도 족히 2주가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제국의 깃발을 앞세운 대대적인 행군은 출발한 지 꼬박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에야 왕국 동부 국경지에 이르렀다.

그동안 그들은 세 번 역참에 들렀다.

이번 황제의 방문을 기해 왕실이 나서서 대대적으로 정비한 역참은 그 시설이 꽤 그럴듯해서, 말을 교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묵고 쉬어갈 수 있도록 여러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제국 수행단의 규모가 너무 커서 모든 인원을 역참 숙소에 수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황제를 비롯한 참모진, 대신들과 몇몇 상급 수행인들을 빼고 대부분의 시종과 마부들은 마차나 간이 천막에서 묵었다.

그런데 리엘라에게는 꼬박꼬박 역참의 방이 배정되었다.

그것도, 늘 창이 크고 볕이 잘 드는 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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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블리니테 양. 오늘 밤에 묵으실 침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마땅한 직함도 없고 맡은 역할도 없는, 그저 ‘리엘라 블리니테 양.’ 그런 자신이 방 하나를 독차지해도 괜찮은 걸까.

불편하고도 송구한 마음에 사양도 해보았지만 리엘라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황제 폐하의 뜻이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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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의 뜻…….’

그 ‘뜻’이라는 건 과연 뭘까.

어김없이 노을빛이 환히 드는 침실에 도착한 리엘라는 황제를 떠올렸다. 타는 듯 강렬하면서도 때로는 손닿지 못할 거리에 아득한, 꼭 저 노을을 뿜어내는 태양 같은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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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식사를 가져왔는데요.”

어린 목소리가 리엘라의 정신을 흔들어 깨운 건 그때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키가 작은 갈색 머리의 소녀가 몇 가지 음식을 담은 작은 쟁반을 든 채 문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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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안해요. 제가 나가서 직접 받아왔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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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요! 마침 일손이 남기도 했고, 또 리엘라 님의 식사는 잘 챙기란 분부가 있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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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님’까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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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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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리엘라 님’이라고 한 거요. 그렇게까지 부를 필요는 없어요. 그냥 이름만 불러주어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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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녜요. 제가 어찌 감히…….”

소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얼굴을 붉혔다.

리엘라는 그 소녀를 사랑스럽게 보며 작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그 소녀는 리엘라가 왕궁에서부터 만난 이들 중 유일하게 자기보다 작고 연약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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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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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예쁜 이름이다. 리오타 왕국 출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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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멋! 그걸 어떻게?”

자신을 ‘루’라고 소개한 소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부끄러운 듯 웃었다.

리오타 왕국과 엘슈바이크 제국은 같은 말과 글을 사용했지만, 억양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곧바로 자신을 알아보았으리라. 게다가 ‘리엘라 님’은 자신과 같은 왕국 출신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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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이번 사절단을 따라서 처음 제국으로 가게 되었어요. 그전까지는 리오타 왕실 창고에서 일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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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지금까지 왕실에서 일했는데 제국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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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국왕 전하의 명령으로…….”

루의 사정을 들은 리엘라는 순간 이맛살을 찌푸렸다. 국왕이 제국에 용서를 빌고 아첨하기 위해 온갖 공물을 바친 줄은 알았지만, 설마 사람까지 물건처럼 멋대로 보냈을 줄이야, 하고.

그 뜻을 알아챈 루는 냅다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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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생각하시는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그게, 교역의 일부로 차출된 건 맞긴 한데요.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저희들에게 엄청나게 후한 보수를 약속해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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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왕실이 사과랍시고 떠밀듯 보낸 이들에게 황제가 그런 약속을 해주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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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 그래서 서로 가겠다고 난리였는걸요! 지원자가 많아서 제비뽑기도 했고요. 그러니 저는 운이 좋은 거예요. 황제 폐하께도 정말 감사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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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폐하께서 베풀어주신 덕에 제국에 처음 가보는 게 나 혼자가 아니었네요.”

리엘라의 다정한 말에 루가 또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색하나마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갔다.

막상 낯가림을 떨치고 난 루는 제법 귀엽게 먼저 조잘거리기도 했다. 그래서요, 제 가족들은요……, 제가 돈을 벌면요……, 황실에 가면요…….

지루할 틈이 없이 이어지던 루의 수다는 결국 리엘라를 향한 질문으로까지 이어졌다.

내내 웃으며 루의 말을 듣던 리엘라는 어떤 질문이든 루처럼 밝게 대답해주리라,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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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리엘라 님은 어떻게 할 계획이세요? 앞으로 제국에 가면요? 황실에서 사시는 건가요? 혹시 폐하와 함께 지내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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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기 좋게 입이 틀어 막히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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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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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러게.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고민하는 리엘라의 머릿속으로 언젠가 들었던 황제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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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지 마. 내가 널 어디까지 데려갈지 나도 몰라.”

 
그게 그에게 들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리엘라는 그 뒤로는 황제를 보지 못했다. 왕국을 떠날 준비를 하느라 너무 바빠서, 또 떠나오느라 너무 바빠서.

기나긴 행렬의 맨 끝에서 그들을 따라가는 리엘라가 목을 길게 빼봤자 볼 수 있는 건 아득히 먼 앞에서 흔들리는 붉은 제국기였다. 아마 황제는 그쯤에 있을 테고, 당연히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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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데…….”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시무룩한 속마음을 내뱉고야 말았다. 루가 바로 옆에서 듣고 있다는 것도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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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가요? 뭐가 궁금하신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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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녜요. 그냥…….”

그때 그 말뜻은 무엇이었는지, 앞으로 날 어떻게 하실 것인지, 요새는 왜 얼굴을 보여주시지 않는지, 많이 바쁘신 것인지.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당신은 잘 계시는지.

언젠가 그가 자신을 궁금해했던 것처럼, 리엘라는 그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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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가 배탈이 난 건 몇 시간 뒤, 해가 다 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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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흑.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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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 루. 괜찮아요?”

루는 먹은 것을 토하며 흙바닥 위를 구르고 있었다. 밤 산책을 나왔다가 루를 발견한 리엘라는 당장 그녀를 등에 업고 다급하게 의료반에 뛰어갔다.

루를 알아본 당직관의 눈길은 심드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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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배탈이네요. 행군이 길어지면 체력이 약한 사람들은 종종 이러죠. 속 좀 게워내고 쉬면 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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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많이 아파하는데 진통제 같은 건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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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딱히.”

리엘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루한 듯 하품하는 당직관의 뒤에 버젓이 커다란 구급함이 있었다. 수백 명이 움직이는 여정에, 게다가 번듯하게 의료반까지 갖춘 이들이 기본적인 상비약을 챙기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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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없는 게 아니라 루에게 내줄 약이 없는 거겠지.’

어리고 보잘것없는 시종인 데다가 제국 국적도 아닌 아이니까.

리엘라는 당직관에게 따질까 고민하다가 그냥 의료반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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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지금 뭐 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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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아이를 눕히려고요. 푹 쉬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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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자리가 없습니다.”

리엘라가 황당한 표정으로 막사 안의 빈 침대들을 쳐다보자 당직관이 몇 발 움직여 그런 리엘라의 눈길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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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비상용 병상입니다. 그 외엔 여분이 없으니 그냥 나가서 바닥에 눕히십시오. 담요라면 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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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보세요.”

참다못한 리엘라가 발끈하려는 순간, 등에 업힌 루가 기력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리엘라 님, 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하고.

속상했지만 루의 말이 맞았다. 여기서 당직관에게 싸움을 걸어봤자 앞으로 황실에서 일해야 할 루에게 득이 될 일은 없었다.

리엘라는 당직관을 원망스럽게 보다가 결심한 듯이 루를 업고 나와서 역참 여관의 제 침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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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 돼요. 제가 감히 리엘라 님의 침대에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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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니 누워 있어요. 나는 물을 좀 가져올 테니까. 역참 관리인에게 부탁하면 약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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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잉……. 그래도……. 죄송합니다.”

서러움이 북받쳤는지 루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리엘라는 식은땀에 머리칼이 엉킨 루의 이마를 다정히 쓸어주었다.

리엘라는 루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낯선 곳에 떨어져 두렵기만 할 때 누군가 내밀어주는 손길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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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푹 자요.”

리엘라는 루를 토닥이고 나오면서 한때 이렇게 자신을 보듬어주었던 헤르한을 생각했다.

당신도 내게 이랬을까. 이렇게 애틋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나를 봐줬던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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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교체 완료했습니다. 수레바퀴 점검도 잘 마쳤고, 모두 아무 이상 없습니다.”

역참 관리인의 보고가 끝나자 헤르한은 할 말이 남은 듯 미적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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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 쪽에도 특별한 문제는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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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에 어떤……. 특별한 문제 말씀이십니까?”

뜻을 몰라 순수하게 묻는 말에 헤르한은 설명하기가 난감한지 괜히 시선을 피했다. 황제 대신 아주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질문을 다시 해준 건 아시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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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호 투숙객의 상태는 어떠한가? 어디 도망 안 가고 무사히 짐은 잘 풀었는지, 저녁은 잘 먹고 잠자리엔 잘 들었는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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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 말씀이셨군요.”

그래. 그 말씀이야.

한숨을 푹 쉰 아시온은 그렇게 덧붙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역참마다 헤르한은 늘 이렇게 관리인을 불러 리엘라의 근황을 따로 확인하곤 했다. 비단 역참에 들를 때만이 아니었다. 행군 중일 때도 아침저녁으로 최소 두 번은 리엘라의 마부가 황제 앞에 호출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세 좋게 사람을 세워놓고 헤르한은 그리 대단한 염탐을 하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리엘라가 식사는 잘하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정도를 물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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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거면 그냥 본인을 불러서 확인하시면 될 것을, 뭘 지금에 와서 데면데면 구시는지. 전 애인 문제로 그때 다투기라도 하셨나?’

그렇게 아시온이 속으로 주군의 흉을 보는 동안, 헤르한은 관리인만을 뚫어지라 보았다.

관리인은 진땀을 흘리며 객실 명부를 뒤적이다가 이내 화색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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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호라……. 리엘라 블리……. 아, 그 붉은 머리의 숙녀분이군요! 이분이라면 알고 있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쯤이면 약효가 들어서 많이 나아지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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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약효?”

예상치 못한 보고에 헤르한은 반사적으로 되물으며 곧장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황제의 반응에 당황한 건 관리인도 마찬가지였다. 어라, 이게 아닌가,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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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저희가 구비한 것 중 가장 효능이 뛰어난 진통제를 내어드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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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호 투숙객이 아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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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고 여쭤보신 것이 아니셨습니까? 아까 관리실에 급하게 오셔서 배탈과 몸살이 심하다며 약을 받아가셨는데…….”

황제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꼭 배탈 난 것이 201호의 여자가 아니라 자신이기라도 한 것처럼.

험악한 표정으로 말문을 닫아버린 황제 대신 아시온이 관리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하곤 그를 돌려보냈다.

이윽고 둘만 남은 처소 안에서 아시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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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건 아닐 겁니다. 지금 바로 사람을 보내 리엘라 양의 상태를 확인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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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라고는 했지만 그게 영 시원찮은 대답이라는 건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모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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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직접 가보시겠습니까?”

결국 분위기에 등 떠밀리듯 아시온이 건넨 제안에 헤르한이 몸을 움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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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호면 바로 옆 건물이라 가까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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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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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시선이 걱정이시면 얼굴을 가릴 수 있을 만한 로브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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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황제는 묵묵부답이었다.

아직도 영 결심이 안 서시나.

싫다는 주군을 더 닦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시온은 그쯤에서 돌아가려 몸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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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주도.”

그때 아시온의 뒤통수로 꾸물거림이 가득한 대답이 날아들었다.

아시온은 황당한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주군이 이렇게 우물쭈물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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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이 위장에 좋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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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물어봤는데요.”

민망한 나머지 묻지도 않은 것을 설명하며 말을 돌리던 헤르한은 곧 마음을 굳혔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아시온에게 뻔뻔하게 추가 임무를 하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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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물이랑 기력 회복에 좋은 음식도 좀 가져오고.”

아시온은 그런 주군에게 한소리를 할까 하다가 말았다. 계속 주인 떼어놓은 강아지처럼 조마조마해 하는 꼴을 보느니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편이 웃기긴 해도 차라리 더 익숙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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