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내가 널 어디까지 데려갈지 (21/154)


#21 내가 널 어디까지 데려갈지
2021.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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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채비를 시작해.”

별궁 2층 동쪽 끝. 리엘라의 침실 앞에 도착한 헤르한은 리엘라를 방 안에 팽개치듯 밀어 넣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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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준 것은 이미 다 내다 버려서 채비할 것도 없으려나.”

헤르한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하지만 헤르한의 눈은 그저 매몰차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언뜻 언제나처럼 서릿발이 일어선 눈동자 같았지만, 푸른 빛 아래 미묘하게 차오른 쓰라림이 보였다.

리엘라는 그게 자신이 할퀴어버린 자국임을 알았다. 그래서 헤르한이 하는 어떤 모진 말도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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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은 뭔데. 상처라도 받았나?”

그러면서 헤르한은 오히려 리엘라의 감정을 되물었다.

그게 아니라, 미안해서요, 나에게 전부 양보만 해준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게 한 게.

헤르한 앞에 선 리엘라는 입술을 꾹 물고 주제넘은 제 감정을 속으로만 삼켰다. 그러면서 아까 파비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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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는 하룻밤 유흥으로 취할 여자 중 하나일지 몰라도 제게는 아닙니다.”

 
리엘라는 꽤 오랫동안 파비안을 미워했다. 하지만 그 미움은 참 이상한 것이라서, 동시에 그를 그립게 만들기도 했다.

파비안으로부터 도망쳐놓고 그를 다시 만나기를 소망한 적도 있었다. 그가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기를, 후회하고 있기를, 그래서 저를 간절히 찾고 있기를. 그런 자존심도 없는 소원을 빌며 잠든 날도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파비안이 더 그립지 않고 오로지 밉기만 했다. 정말 견딜 수가 없을 만큼 그가 지긋지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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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파비안 네가 그런 말을 해. 네가 뭔데 이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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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파비안이 눈에 밟히나 봐.”

그때 황제가 비꼬듯 한 말에 리엘라는 커다란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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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그 이름을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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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에 빠진 널 건져 올렸을 때도 넌 그 이름을 불렀지. 내게 안기면서도 그날 밤 넌 계속 그 사내를 찾았어.”

리엘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정말 그랬던가. 자각이 없었다. 그날 밤 헤르한에게 안겼던 것 자체의 기억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그랬다면 그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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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 사내를 사랑하나? 그래서 날 따르지 않고 여기서 버틸 셈이야?”

헤르한은 그렇게 질문해놓고 정작 대답할 틈은 주지 않았다. 리엘라의 대답이 필요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대답을 듣기가 무서웠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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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지도 않군. 미련하게 구는 것이 네 특기인 줄은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상관없어. 그래도 넌 나와 가게 될 거다. 버틸 수 있으면 버텨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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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지 않아요!”

그렇게 헤르한이 제 할 말만 하고 뒤돌아버리기에, 리엘라는 재빠르게 대답하며 그를 붙잡았다.

그리곤 저를 향해 등을 돌린 그의 앞에 다시 돌아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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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지 않을 거예요. 파비안을 사랑하지 않아요. 미련하게 굴고 싶지도 않습니다. 폐하께서 강요하셔서가 아니라, 제 마음도……. 그러니까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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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이?’

기대치 않았던 당돌한 애원에 헤르한이 눈을 부릅떴다.

리엘라는 목소리를 떨면서도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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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되는 거라면……. 폐하께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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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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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데려가 주세요.”

리엘라의 가느다란 손이 헤르한의 소매를 꽉 붙들고 있었다. 한때는 헤르한 앞에서 제 감정을 억누르느라 주먹을 움켜쥐고 떨던 바로 그 손이었다.

그 손을 본 순간, 헤르한의 가슴 어딘가에 뻐근하던 매듭이 탁 풀린 듯이 깊은숨이 터져 나왔다.

헤르한은 리엘라를 끌어당겨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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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지 마.”

두 사람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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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널 어디까지 데려갈지 나도 몰라.”

위험한 선전포고임에도 불구하고 리엘라는 헤르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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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를 떠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가득 차오른 눈물이 리엘라의 큰 눈망울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결국 이렇게 이 여자를 울릴 수밖에 없었나, 이런 것보단 좀 더 다정다감하게 굴 수도 있었을 텐데, 역시 나는 이래저래 글러 먹은 놈인가.

헤르한은 그런 자조적인 생각을 하며 이를 꽉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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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으로 돌아가는 황제의 수행단은, 그들이 왕국에 나누어준 것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짐을 가지고 돌아가게 되었다. 대부분은 국왕이 제국에 바치는 공물이었고, 리오타 왕국 유수의 귀족들이나 외국 대사들이 바치는 조공도 있었다.

‘리엘라 블리니테’ 역시 그중 하나였다.

환송식을 하루 앞둔 전날, 마지막 공식 접견. 황제가 리엘라를 제국으로 데려갈 뜻을 밝히자 그레타는 격하게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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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리엘라 블리니테가 눈앞에서 얼쩡거리면서 발목을 잡는 것보단 내가 데리고 사라져주는 것이 왕실에 좋은 일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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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드, 듣는 귀가 많은데 여기서 그런 말씀은……!”

그레타는 주변의 시선을 하나도 의식하지 않는 황제의 일침에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르한은 양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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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를 최대한 먼 곳으로 치워버리는 게 왕녀에게도 좋을 텐데? 그 남자를 무사히 가지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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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남자’라니?

이해할 수 없는 황제의 말에 주변의 대신들이 술렁였다. 모두가 설명을 구하듯 국왕을 쳐다보았지만, 국왕은 안색이 파래져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그레타는 한마디 반박도 하지 못하고 황제를 노려보기만 했다.

어제 리엘라가 당하는 꼴을 구경하러 별궁에 슬쩍 가봤을 때, 그레타가 목격한 건 파비안이 황제의 기사들에게 결박당하는 모습이었다.

당장 왕녀의 권위를 내세워 파비안을 구해오긴 했지만 그 뒤로 파비안은 줄곧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계속 리엘라를 찾기만 할 뿐.

그레타의 계산 착오였다.

리엘라를 괴롭게 만들려고 한 일이었는데 오히려 무너진 건 파비안뿐이었다. 이게 다 황제 때문에. 황제가 그 자리에 나타나서 리엘라를 채 가지만 않았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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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노리고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겠는데, 아주 바보 같은 짓이었어. 왕녀.”

황제는 그런 속내를 뻔히 알겠다는 듯이, 그레타의 귓가에 속삭이고는 접견실을 나가버렸다.

비어버린 자리에는 황제가 입도 대지 않은 찻잔만 뜨거운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레타는 그 잔을 냅다 집어 바닥에 던져 버렸다. 와장창, 찻잔이 깨지며 찻물이 튀고 국왕과 대신들이 고함을 쳤지만 그레타는 전부 무시한 채 씩씩거렸다.

결국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저 오만한 황제에게, 그리고 그의 뒤에 쏙 숨어버린 리엘라 블리니테에게.

*

리오타 왕국 건국 이래, 가장 호화로운 봄날이었다.

왕궁 뜰을 빼곡히 메운 황제의 수행단과 왕국 대신들, 초대된 귀족들 앞에서 타란 2세는 헤르한 황제의 이번 순방을 통해 왕국과 제국이 얼마나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끊임없이 자랑했다. 한 시간이 넘는 연설과 축사였다.

반면 헤르한 황제의 연설은 간결했다. 그는 왕국 백성의 평화와 안녕만을 빈 채 단상에서 내려와 자기 말 위에 올랐다. 왕실을 향해서는 그 흔한 감사 인사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리엘라는 국왕과 황제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먼, 행렬의 끄트머리에 점처럼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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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차에 타시면 됩니다. 아하하. 좀 끝자리……이긴 하죠? 그래도 새로 공수해 온 마차라 쿠션은 엄청 좋습니다! 한번 앉아보십시오.”

 
출발 직전 아시온이 리엘라에게 안내해 준 자리는 수행단 행렬의 끝, 작고 소박한 초록 지붕의 마차였다.

정확히는 ‘조금 끝자리’가 아니라 ‘맨 끝자리’.

그 점이 민망했던지 아시온은 이것저것 핑계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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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막판에 급하게 합류하셨잖습니까? 이미 수행단의 마차 배치가 다 끝난 상황이라 다시 조정하기도 촉박하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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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괜찮습니다. 대장님. 마차를 따로 내주신 것만으로도 과분해요.”

 
사실 리엘라는 그게 황제의 명령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궁 밖에서 병사들이 하는 대화를 들은 덕이었다. 행렬 최후방엔 물자를 실은 수레와 병사가 배치될 예정이었는데, 오늘 아침 황제가 굳이 맨 끝 쪽을 지목해 초록 마차를 가져다 놓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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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폐를 끼친 건가.’

자신이 하도 불쌍해서 데려가 주겠노라 황제가 말하긴 했지만, 막상 보는 눈이 많은 상황에 그렇게 하려니 입장이 난처해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가능한 눈에 띄지 않게 마차를 끄트머리에 배치했을 수도.

이유가 어쨌든, 리엘라는 자신이 불평불만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갈 데 없는 자신에게 도망 길을 열어준 것만으로도 황제에겐 다 갚을 수 없을 만큼의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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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출발!”

드디어 환송 행사가 모두 끝나고 출발을 알리는 구령이 울려 퍼졌다.

열을 맞추어 서 있던 수행원들이 마차에 탔고, 병사들은 말에 올라 고삐를 쥐었다.

리엘라 역시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왕궁 뜰의 잔디를 밟고 있던 발을 옮겨 마차 계단을 딛는 순간, 비로소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팠다.

이제, 여기는, 정말로 안녕이구나, 하고.

리엘라를 태운 마차는 제일 마지막에야 덜커덩거리며 출발하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 바퀴가 구르는 소리. 왕궁의 뿔피리 소리와 마지막 축포가 터지는 소리.

‘떠나는 것’이 실감이 듦과 동시에 리엘라의 머릿속으로 온갖 기억들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이 나라 이 땅 위를 떠돌았던 많은 나날과 함께했던 많은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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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줄곧 멍하던 리엘라는 그제야 울컥하는 탄식을 뱉었다.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말 내가 이대로 여기를 떠나서, 괜찮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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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잠시만요…….”

본격적으로 마차가 달릴 때, 리엘라는 아직 이 땅에 자신이 다 주워 담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마부를 불러도 보았지만 마차를 세우긴 역부족이었다.

하긴. 마차를 세운다고 한들 무얼 할까. 다시 돌아갈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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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리엘라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마음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앉은 등받이 뒤 벽에 커튼이 있는 것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커튼을 살짝 걷어보니 마차 후면에 난 커다란 창이 드러났다. 우연인지, 아니면 원래 모든 마차에 다 이런 창이 있는 것인지.

리엘라는 커튼을 완전히 젖혔다.

그리곤 방해물 하나 없이 탁 트인 창을 통해, 뒤로 서서히 멀어지는 것들을 보았다.

멀어지는 사람들. 멀어지는 왕궁의 모습. 멀어지는 리오타의 하늘.

하염없이 보고 또 보면서 리엘라는 그렇게 자신을 감싸고 있던 세상과 천천히 이별했다.

울음이 끓어올랐지만 제대로 울 수는 없었다. 소리가 새어나가면 안 되니까. 자기가 데려가 달라고 한 거면서, 빚만 진 사람들에게 우는 모습까지 보이는 건 너무 염치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쉼 없이 달리던 마차가 거친 산길로 들어서더니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왕성을 떠나온 지 한 시간쯤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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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에 없던 경유지가 생겨서 길을 조금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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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유……요?”

상황을 설명해준답시고 갑자기 마부가 들어온 통에 리엘라는 벌게진 눈을 급하게 감추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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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께서 엘든 계곡 쪽으로 경로를 트셨답니다. 그 길은 땅도 거칠고 더 오래 걸리는데, 무슨 연유이신지…….”

마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리엘라 앞에 고개를 들이민 건 그로부터 삼십 분 더 달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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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다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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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라고요?”

마부가 크게 소리쳤지만 리엘라는 그 말을 잘 듣지 못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로 바깥이 워낙 시끄러운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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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른델 폭포 앞에서, 휴식하다가, 두 시간 뒤에 다시 출발한다고 합니다!”

수백 명이 이끄는 거대한 행렬이 멈춰선 곳은 엘든 계곡의 명물이라는 거대 폭포 앞이었다.

왕궁에서 출발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뜬금없이 경로에도 없던 숲길 한가운데서 황제가 말을 멈춘 것은 전엔 없던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황제께서 새삼스레 명소 관광이라도 하고 싶으셨나. 의아한 수행원들이 추측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리엘라는 마차 안에 우두커니 앉아 홀로 다른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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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라면 마음껏 울 수 있을지도…….’

목청껏 소리를 내지르며 울어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

확실히 말과 마차에서 내린 이들이 속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 앞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거기서 저들끼리 까르르 웃기도 하고 왁자지껄 소리도 질러댔지만 전부 거대한 폭포수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리엘라는 창 너머로 그런 이들을 보다가 이내 안심하고 조용히 차창의 커튼을 모두 닫았다.

그리고 마차 구석에 조그맣게 웅크린 채 내내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흐느꼈지만 이내 울음이 드세졌다. 얼마 뒤엔 엉엉 꼴사나운 소리도 내며 목을 놓아 울었다.

아침부터 목구멍에 뻑뻑하게 걸려 있던 이 감정이 죄다 슬픔인 줄만 알았는데, 아이처럼 크게 울면서 리엘라는 깨달았다. 지금 쏟아져 나오는 건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후련함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것을.

쏴아아 폭포수 소리는 여전히 지축을 울렸다.

리엘라의 거센 울음까지 품어버리는 굉음이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어디 한번 힘껏 울어보라고, 그게 얼마나 크고 괴롭든 내가 다 껴안아주겠노라고 말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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