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나와 제국으로 가자 (20/154)


#20 나와 제국으로 가자
2021.09.05.


그레타는 손톱을 물며 초조하게 방안을 오갔다.

답답한 마음에 이따금 창밖을 내다보기도 했지만 쓸모없는 일이었다. 창밖을 본다고 여기서 별궁이 보일 리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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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만났을까?’

그레타는 소파 위에 풀썩 앉으면서 생각했다.

황제가 선사한 굴욕에 앓아누워서 내내 괴로워하던 그레타가 별안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건 어젯밤이었다.

그레타는 몰래 말을 타고 왕궁을 빠져나갔다. 밤새 말을 달려 도착한 곳은 왕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그레타가 소유한 성채였다.

그레타는 굳게 잠긴 성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넓고 쓸쓸한 고성 안. 파비안은 그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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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 이제 더는 숨을 필요 없어. 제국과 보상 조약을 체결했어. 이젠 너도 모든 혐의로부터 자유로워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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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는 어떻게 됐습니까?”

 
기껏 네가 자유가 되었다는데. 그런 너를 데리러 내가 직접 왔다는데!

그런데도 파비안이 제일 먼저 찾은 것은 리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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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는 괜찮습니까? 왕궁에 볼모로 잡혀있는 동안 험한 꼴을 당하진 않았습니까?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왕녀님께서 리엘라를 지켜주시겠다고 했지만. 그 말만 믿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제가 갔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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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 끝났다니까. 파비안. 리엘라는 무사해.”

 
너무 무사해서 탈이지.

이를 악물던 그레타의 머릿속에 반짝하고 순간 어떤 궁리가 떠올랐다.

그레타는 독기가 바짝 오른 속내는 꽁꽁 감춘 뒤, 최대한 안타깝고 애틋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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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리엘라가, 무사하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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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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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리엘라를…….”

 
그레타가 울먹이며 하는 설명에 파비안의 얼굴이 점차 사색이 되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 대한 걱정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건 아주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괴로운 만큼 톡톡한 효과를 불러오리라.

황제가 내건 그 망할 조약 때문에 그레타는 리엘라를 더 건드리지도 못하게 되어버렸지만. 칼로 목숨을 위협할 수 없다면, 영혼을 무너뜨리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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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파비안. 리엘라를 만나게 해줄게.”

 
그레타는 그렇게 파비안을 왕궁으로 이끌고 왔다.

다른 이들이 수상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시종의 옷까지 입혀서 별궁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으니, 이제 남은 건 하늘이 자신을 돕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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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버티고 서서 널 지키면 내가 널 못 건드릴 줄 알고? 걱정 마. 리엘라. 또 죽고 싶어지도록 내가 흔들어 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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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무사한 거지? 그동안 잘 있었어? 리엘라. 하……. 정말 다행이야. 무사해서 정말 다행…….”

파비안이 떨리는 손을 뻗어왔지만 리엘라는 질겁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기만 했다.

네가 왜?

네가 어떻게 여길?

네가 어째서 내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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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그러지 마. 그렇게 멀어지지 마. 응? 제발…….”

파비안의 녹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레타가 우는 것을 보았을 때보다 더 크게, 리엘라는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네가 왜 우는 거야? 무슨 자격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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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모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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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거짓말하지 마. 내 쪽으로 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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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야. 네가 떠났던 그 날부터 하루도 널 생각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

리엘라는 이를 악물었다.

모두가 자길 화살받이로 내세우고 도망쳤다는 걸 알았을 때도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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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왕녀님과 계속 함께 있었던 거. 모를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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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작전을 실패하는 바람에 내가 중죄인으로 몰리게 되어서……. 왕녀님께선 날 지켜주시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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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지키느라고 날 죽이려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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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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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지키는 대신 날 죽이려 했다고. 왕녀가! 그리고 왕녀는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고 있었어. 일이 터지자마자 날 체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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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아니야. 리엘라. 왕녀님이 그러셨을 리 없어.”

거봐. 넌 지금 이 순간도 그 여자를 더 믿잖아.

리엘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웃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오히려 울고 싶은데, 어째서 이렇게 헛헛한 웃음이 나오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너무 황당해서인가. 아니면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 그래. 그쪽이 차라리 나으리라.

그래서 리엘라는 저 자신을 속이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파비안이 아니다, 그냥 못난 말을 하는 어떤 바보일 뿐이다, 절대로 내가 사랑했던, 내 목숨을 버려가며 사랑했던 그 남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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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그럼 이것만 대답해줘. 지금은 괜찮은 거야? 다친 데는 없는 거야?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네가 너무 걱정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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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예전에도 늘 말뿐이었어. 그런데 지금도 말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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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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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걱정이 됐으면…….”

리엘라는 망연자실했다.

간절한 주문이 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전한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그는 정말로 파비안이 맞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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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걱정이 됐으면 진작 날 보러 왔어야지!”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제야 울음이 터져 나왔다.

파비안에게 돌아섰던 그 날부터 차곡차곡 쌓아둔, 깊은 울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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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이거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잘 어울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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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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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양이 준 작별 선물인데요. 본인이 가지고 있던 가죽 가방을 재단해서 제 혁대로 만들어줬지 뭡니까? 치수를 묻더니 이틀 만에 뚝딱 만들어 가져왔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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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헤르한은 눈을 치켜떴다. 온종일 왕국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지쳐버렸던 눈동자는 단번에 매서운 기운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시온은 덩실덩실 움직이며 헤르한의 약을 올리기만 했다. 눈치를 땅에 갖다버린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둔하게 행동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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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씨가 정말 굉장하죠? 디자인도 딱 저와 어울리지 않습니까? 이쪽엔 검집을 걸 수 있는 고리도 있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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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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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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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죽 가방은 내가 준 것이었으니 그것도 내 것이다. 그러니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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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폐하가 준 것은 아니죠. 그건 이번 수행 원정의 공금으로 마련한……. 어어, 폐, 폐하! 으핫!”

헤르한의 공격은 무차별적이었다. 아시온에게만은 유치한 속내를 감출 필요도 없거니와, 그가 간지럼을 타는 부위까지 모든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으니 더욱 진심인 몸싸움이었다.

아시온은 결국 허망하게 바닥에 엎어져, 기어이 제 혁대를 빼앗아간 헤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은 과연 알까? 엘슈바이크 대제국의 젊은 새 황제가 실은 저렇게 속 좁고 얍삽한 남자라는 걸.

거기다가 보기와는 다르게 얼마나 겁쟁이인지.

다른 때는 대담하게 사고도 잘 쳐대면서 꼭 그 여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선 한없이 조심스럽고 머뭇거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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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거면 데려가십시오.”

그러니 별다른 수가 있나.

황제의 충복. 일등 부관. 주군의 마음을 유일하게 들여다볼 줄 아는 자신이 등이라도 떠밀어 주는 수밖에.

이건 절대 혁대를 빼앗겨 분한 마음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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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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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블리니테 말입니다. 제국으로 데려가자고요. 그렇게 하고 싶으시잖습니까. 그럴 능력도 충분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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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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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왜 리엘라 양이 폐하께만 작별 선물을 안 드린 건지 아십니까?”

글쎄. 그건 내가 어렵고 밉보여서.

헤르한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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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낼 준비가 안 돼서 그런 거 아닐까요?”

답은 아시온이 대신했다.

그러고는 주군을 달래겠다는 것인지 또 약을 올리겠다는 것인지 모를 말까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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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랑은 악수도 하고 기념품도 나누고 훈훈하게 덕담까지 다 주고받았습니다. 카넬은 포옹까지 했고요.”

뭐, 포옹을?

잠시 아득하게 먼 곳을 보나 싶던 헤르한이 다시 눈을 번뜩였다.

아시온은 움찔했다. 이건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하고. 카넬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아시온은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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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폐하께는 아직도 제대로 인사를 못 했잖아요. 그건 폐하도 마찬가지이시고. 그러니까 폐하. 보낼 준비가 정 안 되겠으면, 그냥 보내지 마십시오. 그것도 또 하나의 방안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왕실을 상대하면서 2안을 선택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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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안이라…….”

리엘라는 이미 평생을 이방인으로 떠돌며 살았던 여자였다.

그러니 또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고 헤르한은 생각했다. 여태 여기저기 힘겹게 끌려다니기만 한 그녀를, 자신이 또 낯선 곳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런 사람으로 남기 싫었다.

아마 그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리엘라 블리니테에게 지금껏 만났던 이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욕심.

그것 때문에 헤르한은 너를 내 나라로 데려가겠노라고 리엘라에게 말하지 못했다.

자신은 말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리엘라가 먼저 자신에게 매달리기를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 그 겁 많은 여자에게 그런 부담을 줬던 걸까. 마지막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니 괜한 치기가 솟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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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여자가 정 싫다고 하면 말면 되는 거고요. 어떻습니까? 그냥 물어나 봅시다. 한번 물어보기만 하는 건 어차피 공짜잖습니까?”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는 일이었다. 아시온에게 가르침이나 받다니.

하지만 조금 괘씸하고 방자한 면이 있긴 해도, 아시온이 하는 조언은 대체로 맞을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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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는 지금 어디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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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있던 곳에 있겠지요.”

그렇군. 하긴. 그 여자는 늘 그곳에 있었지.

헤르한은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재촉했다.

본궁에서 별궁까지가 이렇게 멀었던가. 아까까진 왠지 리엘라를 마주하는 것이 불편했는데 한번 결심을 굳히고 나니 조급함에 속이 타들어 갔다.

마침내 별궁에 다다라서는 거의 뛰듯이 걸었다.

헤르한이 정원에서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리엘라를 발견한 건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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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헤르한이 그런 식으로 리엘라의 이름만을 크게 부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리엘라는 목소리를 알아듣고 헤르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울고 있었다. 입술을 꽉 물고, 얼굴은 잔뜩 찡그린 채로.

그 얼굴을 본 순간 헤르한은 자신이 왜 별궁으로 급하게 돌아왔는지, 리엘라를 만나 무엇을 물으려고 했던지를 다 잊었다. 그저 성큼성큼 커다란 걸음으로 내달아 리엘라를 낚아채듯 품에 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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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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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냐는 물음 뒤엔 네 옆에 있는 이 자가 누구냐고 물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벼락같은 성화를 내지르기 직전에 입이 막혀버렸다.

리엘라를 괴롭히고 있던 남자. 리엘라처럼 우는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이 남자.

아는 얼굴이었다. 그레타의 기억을 통해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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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슈바이크 제국의 황제 폐하…… 되십니까?”

파비안, 이라던가.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이름인데.

헤르한은 리엘라를 제 옆으로 놓아주는 대신 그를 향해 인상을 썼다.

그러자 돌연 파비안이 표정이 험악하게 바꾸더니 헤르한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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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당신이 리엘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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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 손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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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엄하구나! 이분이 누구이신 줄 알고!”

리엘라가 소리를 지르고 아시온이 검을 빼 들었다.

그 둘을 모두 막은 건 헤르한이었다.

헤르한은 침묵을 유지한 채 냉담하게 제 멱살을 쥔 사내를 쳐다보기만 했다. 과연 네가 무슨 짓까지 할 수 있을지 한번 보겠다는 듯이.

헤르한의 계산이 맞았다. 파비안은 헤르한에게 아무 짓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였다.

헤르한의 멱살을 쥔 채 부들거리기를 한참 후 스스로 손을 놓아버린 파비안은, 두 발 뒷걸음질 치더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버렸다.

아시온도, 리엘라도 입을 틀어막고 헉 소리를 냈다. 오직 헤르한만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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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를 놓아주십시오.”

아무것도 아닌 자의 애원에 이상하게 헤르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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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리엘라를 놓아주십시오. 폐하께는 하룻밤 유흥으로 취할 여자 중 하나일지 몰라도, 제게는 아닙니다. 리엘라는 안 됩니다. 제발……. 놓아주십시오.”

조금 듣고 보니 더 확실했다. 어디서 헛소문이나 주워듣고 와서 하는 개소리라는 걸.

그러니 하찮게 여기고 웃어넘기면 될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게 되지 않는 것인지. 왜 잇새가 악물리고 묵직한 기운이 머리끝까지 치솟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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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죄송합니다. 파비안의 말은 듣지 마세요. 파비안은 아무것도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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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나와 제국으로 가자.”

그래서 헤르한은 일부러 그가 들으란 듯이 말했다.

눈물을 잔뜩 매단 채로 파비안을 해명하러 나섰던 리엘라가 눈을 치떴다.

헤르한은 그런 그녀를 빤히 보다가 직접 손을 뻗어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쳐냈다. 다른 사내를 두둔하며 흘리는 눈물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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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 것이 아니다. 명령이다. 네게 선택권은 없어. 너도 잘 알듯이.”

이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또 이렇게 강압적으로, 겨우 자유가 된 리엘라를 몰아세우고 싶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뭐든 이젠 다 상관없어졌다고 헤르한은 생각했다.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는 리엘라의 눈이 불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의 손을 잡고서 발을 뗐다. 리엘라는 조금 머뭇거렸지만 이내 그가 잡아끄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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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안 됩니다. 폐하, 제발……! 리엘라! 제발……!”

뒤에서 파비안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치워버려, 헤르한이 아시온에게 명령했다. 그리곤 리엘라가 그를 돌아보지 못하도록 리엘라를 붙잡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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