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제 2안 (17/154)


  • #17 제 2안
    202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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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걱정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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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헤르한은 리엘라를 가까이 끌어안은 손에 여전히 힘을 준 채 말했다.

    리엘라는 당혹스러운데도 헤르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확히는 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몸이 붙들린 것보다 더 강하게, 헤르한의 푸른 눈동자가 제 눈길을 빨아들이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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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걱정된다며. 감히 네가 나를 걱정한다며. 그러니 어디 한 번 마음껏 해보라고. 다 들어주겠다.”

    빗방울이 헤르한의 이마와 콧잔등을 타고 흘러 입술까지 적셨다.

    리엘라는 그의 단정하고 붉은 입술을 빤히 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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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사는……. 하셨나요?”

    하.

    리엘라의 말이 끝나자 잠깐 황당하다는 듯이 벌어졌던 황제의 입술이 실소를 흘렸다.

    나 놀림당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주제 넘는다고 혼나고 있는 거였나.

    리엘라가 망설이는 동안에 헤르한의 입술은 나름 다정한 대답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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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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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가 고프진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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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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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일정은 무리 없이 잘 마치셨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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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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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그러니까, 지금 비를…….”

    그쯤에서 리엘라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어쩐지 헤르한의 얼굴이 조금씩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아니’, ‘그래’ 같은 짧은 대답만 하는데도 그의 더운 숨결이 느껴질 만큼.

    그러니 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그의 말처럼, 감히 자신이, 이다지도 강렬한 그를 걱정할 수 있을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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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걱정은 그게 다인가?”

    리엘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아주 살포시 숙였는데도 몸이 가까운 탓에 꼭 황제의 가슴에 이마를 파묻는 것만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자신과 맞닿은 탄탄한 몸이 의식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리엘라는 새삼스럽게 허둥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황제는 그때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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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이제 내 차례로 해도 되겠지.”

    리엘라는 황제가 아무 말이나 어서 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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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데는 없나?”

    물론 이런 난데없는 말이 튀어나올 줄은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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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요? 어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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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다.”

    감옥에서 몸이 상했던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 아니면 오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

    어리둥절해 하는 리엘라의 고개를 들어 눈을 똑바로 맞추고, 헤르한은 다시 질문을 덧붙였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하게, 그러면서도 제 뜻이 전달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공들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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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든, 전부다. 너무 많이 아프지는 않으냐고.”

    그 물음은 리엘라의 머리가 아닌 심장으로 바로 내다 꽂혔다.

    비를 맞고 있어서 춥고 어수선하던 것이나, 황제에게 안겨서 당황스럽고 긴장되던 것들. 단번에 모두 백지가 되어버리고 대신 울컥 밀려드는 건 고마움이었다.

    이 남자는 대체 어떻게 아는 걸까, 자신이 많이 힘들다는 것을.

    아팠다. 여기저기가 참 많이도 아팠다.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는 그레타 왕녀의 얼굴을 보는 것도, 그녀에게서 파비안의 이름을 듣는 것도. 또 이젠 몰락하게 될 그들을 지켜봐야 하는 것까지도, 리엘라에겐 전부 아프고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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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저는…….”

    착각이라 할지 몰라도, 어쨌든 내 아픔을 이해받는 것 같다는 이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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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딜만합니다.”

    늦은 대답이었는데도 헤르한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견딜만하다니, 다행이군, 하면서.

    그 뒤로 아주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 모두의 가슴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지만 못 견디게 어색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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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저나 우린 늘 이렇게 젖은 꼴로 만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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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송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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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됐어. 오늘은 의식이라도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지.”

    자조적인 농담에 리엘라는 ‘풋!’ 하고 소소한 웃음을 터트려버리고 말았다.

    참 웃긴 일이었다. 황제가 된 ‘그 남자’와, 이렇게 다시 마주 서서, 그날의 일을 얘기하며 웃게 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때마침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던 아시온과 수행원들이 두 사람의 근처로 도착했다.

    황제는 그제야 리엘라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시종 하나를 불러 세워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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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인분의 식사를 내실로 들이도록 해라. 식사 전에 먼저 씻을 것이니 내실 욕탕에 온수를 받아 목욕 준비를 해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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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2인분의 식사는 아마 제 것까지 포함한 것이겠지.

    리엘라는 황송한 마음에 시종들의 뒤로 한발 물러났다. 황제가 씻는 동안 자신도 어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황제의 명령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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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리엘라 블리니테를 욕탕으로 안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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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나를? 폐하의 욕실로?’

    깜짝 놀라는 리엘라만큼이나 명령을 들은 시종도 경악하는 듯했다. 하지만 저 같은 것이 감히 황제의 뜻을 되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종은 금방 낯빛을 고치고선 리엘라 앞에 고개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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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리엘라 블리니테……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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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제의 침실 옆에 붙어 있는 욕실은 리엘라의 침실보다도 넓고 온갖 장식으로 화려했다.

    리엘라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조 속에서 몸을 녹이면서도 몇 번이나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한 번은 별궁 시녀가 리엘라의 목욕 수발을 들어주겠다며 노크를 했고, 한 번은 또 다른 시녀가 리엘라가 갈아입을 옷을 들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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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괘, 괜찮습니다. 혼자 씻을 수 있어요. 옷은 거기 두고 가주세요. 고맙습니다.”

    누가 안으로 들어올세라, 후다닥 대답하는 리엘라의 목소리는 언뜻 듣기에도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그걸 알아챈 이가 세 번째로 욕실 문을 두드렸다.

    또 시녀겠거니, 살짝 몸을 틀었던 리엘라는 곧장 얼굴을 터질 듯이 붉힌 채로 고개를 돌렸다. 숨을 데도 없는데 물속에 얼굴이라도 처박아야 하나.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엿본 건 황제의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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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블리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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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네!”

    리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황제가 들어오려나? 지금? 여기로? 그러니까…… 여기서?

    그에게 안길 수도 있다는 건 충분히 알았지만. 이곳에서 씻으라고 할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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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간에 온수를 넉넉히 쓸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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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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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탕을 내준 것이니 그만 벌벌 떨고 빨리 씻고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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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리엘라가 한마디 대꾸를 할 새도 없이 욕실 문은 다시 닫혀버렸다.

    다시 혼자 남은 욕실 안에서, 리엘라는 전보다 더 얼떨떨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긴장감이 가라앉고 그 뒤에 들이닥치는 건 말로 다 표현 못 할 민망함이었다.

    리엘라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욕조 안에서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제 정수리에 물을 끼얹어버렸다.

    얼마 뒤, 리엘라는 쭈뼛거리며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시녀 둘은 리엘라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던지 단박에 달려들어 머리를 말리고 옷매무새를 갖추어주기 시작했다.

    리엘라는 이번에도 괜찮다고 그들을 뿌리치려다가 말았다. 응접실 식탁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황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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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배려해주신 덕분에……. 편히 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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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히 씻었는지는 몰라도, 실망한 것 같던데? 내가 욕조에 함께 들어가 주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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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아니에요! 폐하, 정말! 저는! 추호도 그런 생각은……!”

    헤르한은 그래, 어련히,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제의 그런 짓궂은 반응이 얼마나 부끄럽고도 억울했는지 리엘라의 눈엔 눈물까지 찔끔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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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로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폐하! 그, 그야, 조금 긴장은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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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서 식사나 해. 배고프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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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고픈 것보다 제 억울함을 푸는 게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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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암살자란 누명을 썼을 때도 그렇게 열심히 반박하진 않았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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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그건……. 아시잖아요. 그땐 독을 마시는 바람에 저도 어쩔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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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밤은 여기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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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빠르고 힘차게 오가던 대화는 거기서 뚝 끊겼다.

    지금 뭐라고? 내가 잘못 들었나?

    리엘라가 스스로 들은 것을 의심할 정도로 헤르한은 태평스럽기만 했다. 차분하게 제 접시에 담긴 고기를 한 점 썰어 입에 넣고, 씹어 삼키고, 그 후에 와인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기까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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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방에서 자고 가라고.”

    헤르한은 그렇게 담담한 얼굴로 방금 했던 명령을 다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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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결과적으로 네 기대가 맞아떨어진 것이니 억울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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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리엘라는 그렇게 맞받아치듯 대답하면서도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억울함이 어쩌고 하는 걸 보면 그냥 자신을 놀리려고 한 말 같은데, 그의 표정을 보면 또 마냥 농담인 것 같지는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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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담이다.”

    그런 리엘라의 속내를 꿰뚫어 본 듯 헤르한이 덧붙였다.

    그때부터 리엘라는 또 말수를 줄이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구경도 못 할 산해진미들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식사 내내 안절부절못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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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오늘 밤은 넓은 침대에서 푹 자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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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 폐하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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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오늘 밤샘 회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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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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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또 실망했나?”

    몇십 분 전에 당했던 수에 또 똑같이 당한 리엘라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 자신을 황제의 침대 속에 파묻어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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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고요? 리엘라 블리니테가 오늘 밤 폐하의 침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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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그렇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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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어떻게 된 겁니까, 아시온 경? 두 사람에 관한 얘기, 그건 그냥 왕실 쪽 하수인들이 퍼트린 헛소문 아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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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그건 그냥 소문이긴 한데. 또 영 헛소문인 건 아니고. 그 여자가 폐하와 꽤 복잡한 사연으로 엉켜 있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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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잡한 사연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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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또 있었던 겁니까?”

    참모진들에게 둘러싸인 아시온은 곤란하면서도 한편으론 우쭐했다.

    주군에게 당하기만 한 것이 한두 번도 아니겠다, 이 기회에 제대로 복수라도 해버려, 어째? 하고, 거들먹거리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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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보단 다른 얘기는 어때? 예를 들면 주군의 사생활을 왜곡하고 함부로 퍼트리는 부관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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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 폐하! 여긴 무슨 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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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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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황제의 등장에 회의실 안에 늘어져 있던 이들 모두가 벌떡 일어났다. 아시온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그런 대신들의 옆을 지나 회의실의 제일 안쪽 상석에 착석했다.

    꼭 지금부터 회의를 주재하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그 모습에 대신들은 어정쩡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총대를 메고 나선 건 아시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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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간에 회의실은 어쩐 일이십니까? 리엘라 블리니테와 같이 계신 것 아니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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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까진 그랬지. 블리니테는 지금 내 방에서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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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벌써 끝나셨습니까?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대화가 벌써 끝났냐는……. 그게, 아직 취침에 들긴 이른 시간이고…….”

    거기까지 해라, 하고 싸늘하게 노려보는 헤르한의 시선에 아시온은 ‘옙.’ 하고 정직하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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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 다들 모여 있으니 잘 됐군. 간단히 점검할 사항이 있으니 모두 착석해.”

    그 말에 회의실에 모인 모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간단히 점검할 게 있으니 일단 앉아- 라는 건, 헤르한이 뭔가에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할 때 늘상 하는 말이었다. 게다가 그 말을 하는 때가 이렇게 늦은 시각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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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근 당첨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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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 마. 금방 끝날 거다. 작년 사건에 관해서 왕실 측 보고서와 우리 측 보고서를 모두 가져와. 국제법에 관한 서류와 완성된 고발장도. 전부.”

    금방 끝날 거라는 말과는 상반되는 양의 많은 서류가 곧 회의실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참모진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맡은 부분의 문서들을 검토하며 헤르한의 질문에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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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오타 왕실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한 후에 예상되는 판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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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가 일원들의 신분 박탈과 추방령 또는 신전 유폐형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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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사형까진 힘들겠지?”

    그 물음에 회의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왕가의 향후 처분에 관해선 늘 말을 아끼던 황제였기에 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사형’이란 단어는 그만큼 더 무겁고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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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사형은 어려울 것입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시기 전의 일인지라 군주를 시해하려 했다는 혐의가 소급되지 않습니다. 적용되는 죄명은 황족 시해 정도인데 그것도 미수로 끝났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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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곤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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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민 용병단을 고용해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던 정황까지 고려된다면 노예로 강등되는 것까지도 기대해볼 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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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아예 죽어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면, 뭐든 다 곤란해.”

    진땀을 흘리며 열심히 대답하던 법무 대신도, 그 옆의 참모들도 긴장이 역력한 눈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황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어서였다.

    리오타 왕국의 국왕과 왕녀의 죽음을 바라는 것인가? 갑자기? 어제까지만 해도 그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여유로웠던 황제인데.

    고민하던 대신들은 왕가에 더 톡톡히 죗값을 물을 대안을 몇 가지 더 내놓았다. 하지만 전부 헛다리였다. 헤르한은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구석에 서서 줄곧 헤르한을 지켜보던 아시온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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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혹시 2안을 고려하고 계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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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안.

    그 말에 방법을 찾느라 애쓰던 대신들이 일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들 모두의 시선이 헤르한에게로 향했다. 헤르한은 여전히 고심하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침묵 끝에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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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명료한 답변으로부터 퍼져나간 의미심장한 기운이 곧 회의실 전체를 메웠다.

    대신들은 지금껏 보던 문서들을 전부 덮었다.

    아시온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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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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