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그레타의 부탁 (16/154)


#16 그레타의 부탁
2021.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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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용건은 무엇이신지요, 폐하?”

동궁 실내로 자리를 옮겨 앉자마자 그레타는 제법 맹랑하게 본론을 캐물었다.

헤르한은 대답 대신 손짓을 했고, 그러자 그를 뒤따라왔던 시종들이 몇 개의 상자를 왕녀 앞에 내놓았다.

그레타는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번쩍번쩍한 상자들은 누가 봐도 귀한 보물이 가득한 선물 상자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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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왜 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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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뜻으로 건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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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뜻이요?”

저더러 왕국을 통째로 내놓고 사과하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황제가 사과의 선물을 내놓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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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내 사람이 왕녀를 울린 듯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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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헤르한 황제치곤 친절한 대답에 그레타의 황당함은 더 극치에 달했다.

리엘라가 그렇게 소중한가? ‘내 사람’이라고 칭할 정도로? 혹시나 리엘라가 왕녀를 울린 죄로 부당한 일이라도 당할까 봐 이렇게 직접 와서 수습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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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리오타 왕실에 하사할 생각으로 가져온 물건들이었으니 부담은 느끼지 않았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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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폐하.”

그레타는 부정적이었다. 부담이 돼서가 아니라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게다가 콧대 높은 황제가 저자세로 나오는 것이 영 께름칙하기도 해서.

헤르한은 그레타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직접 상자를 열어, 그 안에서 제일 값나가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엘슈바이크 제국의 북부 광산에서만 나는 사파이어가 박힌 목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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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왕실의 사이가 좋다는 걸 그쪽 귀족들에게 과시할 증표가 필요하지 않나? 그렇지 않아도 지금 꽤 곤란한 상황인 걸로 알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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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고 계시는군요.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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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게으른 덕택이지. 그러니 필요할 거야.”

약 올리듯 말하는 헤르한의 손 위에서 푸른 보석이 번쩍거리는 광채를 뿜었다.

황제가 내미는 것엔 눈길도 주지 않으리라, 그레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큼지막한 사파이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황제의 말이 맞았다. 제 자존심이 상하는 건 둘째치고, 대외적으로 제국과의 우호를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황제의 손에서 빛나는 저 보석은 매우 탐나는 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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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한번……. 둘러만 보겠습니다.”

결국 그레타가 항복했다.

너무나 값진 보석이라 곁에 있는 시종들은 차마 목걸이를 만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점잖은 표정을 유지하며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헤르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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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접 둘러주지.”

그렇게 목걸이를 든 헤르한이 그레타의 등 뒤로 다가왔다.

사라락.

흑단처럼 매끄러운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황제의 손길이 농밀했다.

웬만한 강대국의 왕족들도 갖기 어렵다는 엘슈바이크제 보석을 목에 걸게 되어서인지, 아니면 훤히 드러난 제 목에 닿는 손길이 아찔해서인지,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린 그레타의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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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아깐 꽤 놀랐어. 왕녀가 리엘라 블리니테와 인연이 있는 사이라고는 들었지만, 그렇게 울 정도로 깊은 사연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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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별거 아니에요. 그냥 잠깐 알았던 사이랄까……. 그런데 폐하. 이건 몇 캐럿이나 되죠?”

그래서 그레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신이 푸른 보석에 혼이 팔려 방심해버린 그 짧은 사이에, 헤르한이 제 머릿속의 기억들을 샅샅이 헤집고 있을 줄은.

* * *

작년 이맘때의 봄이었다. 그레타가 파비안을 처음 만난 것은.

하지만 그레타가 처음부터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파비안은 제법 반듯하게 생기고 행동도 진중했지만 결정적으로 신분이 천했다.

몰래 왕궁 밖으로 나와 시장에서 꽃수레에 치일 뻔한 자신을 구해주었을 때도, 그레타는 그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사랑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미친 짓까지 저지르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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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허락받았어. 이 일은 당신에게 맡기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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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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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 않아.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정보는 내게 다 있어. 필요한 돈도 다 대줄게. 일이 잘 끝나기만 하면 당신은 작위와 영지를 받게 될 거야. 그러면 그땐 나와도 당당하게 결혼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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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님. 하지만 저에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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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겐, 뭐? 리엘라가 있다고?”

그레타는 곧장 매서운 목소리로 다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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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얘기야? 내가 말했잖아. 파비안! 그건 사랑이 아니야. 동정심이지. 당신, 평생 그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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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님. 리엘라는 제게 가장 소중한 존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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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건 나야.”

그레타는 파비안의 멱살을 끌어 잡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곤 계속 그의 귓가 가까이 주문 같은 말을 흘려 넣었다. 네가 사랑하는 건 나야, 네가 사랑하는 건 나야, 하고.

파비안은 그 뒤로 왕녀의 말을 잘 듣는 듯했다. 네가 왕가의 부마가 되어 출세하는 길이 리엘라의 일생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설득이 먹힌 모양이었다.

그는 동부 국경에 숨어 있는 황자 헤르한의 진영에도 제법 잘 접근했다. 이름 없는 평민 용병단이라는 점 덕에 적의 경계망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작전은 무리 없이 성공할 터였다.

그레타는 일찍이 축배를 들기 위해 마지막 습격을 남겨두고 직접 파비안이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 보란 듯이, 리엘라에게, 파비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었다.

파비안이 아주 슬픈 눈을 하고 그레타 앞에 무릎을 꿇은 건 그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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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리엘라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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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 또 그 소리! 리엘라를 버리는 게 아니야. 리엘라는 내가 책임지고 챙겨주겠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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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왕녀님.”

리엘라가 모든 진실을 알고 떠나버린 밤.

파비안은 무너졌다.

사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보다 작은 체구의 여자 앞에 납작 엎드리고, 울면서, 빌었다. 죄송하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리엘라인 것 같다고.

리엘라. 리엘라. 리엘라……!

그레타는 그런 파비안을 뿌리치고 뛰쳐나왔다.

곧장 주변을 수소문해서 파비안과 다투고 떠나버렸다는 리엘라를 찾아서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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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있어요. 리엘라.”

그레타 앞에 불려온 리엘라는 유령처럼 공허해 보였다.

세상을 다 잃은 듯이 넋 나간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또 분노가 치솟기 시작했다. 리엘라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울던 파비안과 너무 똑같은 얼굴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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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라기보다는 부탁하는 건데.”

그레타는 단숨에 다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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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줘요.”

말이 화살처럼 아플 수 있다면 좋았으리라. 그러면 그레타는 충분히 리엘라를 고통 속에 죽게 할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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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파비안의 발목을 잡았으면 충분하잖아요. 파비안이 리엘라의 생명의 은인이라면서. 그러면 리엘라도 파비안에게 그 빚을 응당 갚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파비안이 당신 때문에 얼마나 미련하게 구는지 당신은 몰라. 파비안은 평생을 그러고 살아왔겠죠. 당신을 챙기느라. 자기는 손해 보면서.”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엘라는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

슬픔이란 것에도 지극한 끝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 끝은 바로 저런 얼굴이려나.

그건 알 수 없었지만, 그레타는 그래도 자신의 말이 제대로 먹혀들고 있다는 건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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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죽어줘요. 더 폐 끼치지 말고. 제발. 사라져버려요. 부탁이에요.”

이 말이 끝나면 리엘라는 스스로 사지로 걸어갈 것이었다.

그러면 모든 일은 다 바르게 돌아가겠지.

파비안도 어쩔 수 없이 제게 돌아오게 될 것이었다.

리엘라만 이대로 사라져준다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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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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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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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폐하……?”

벌써 열 번째의 부름이었다.

하지만 아시온이 얼마나 애타는 심정으로 부르든지, 헤르한은 묵묵부답이었다. 단지 대답만 없는 거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눈빛까지 살벌했다. 꼭 허공에 뜬 망령과 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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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괜찮으십니까? 설마 또 발작 증세가 오는 겁니까!? 그러게 능력 쓰시지 말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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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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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예!”

열한 번째 부름 만에 헤르한은 겨우 입을 열었다.

아시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레타 왕녀를 만나고 나온 뒤로 주군의 얼굴이 내내 창백해서 걱정됐는데 다행히 발작은 아니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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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나면 제일 먼저 할 말이 뭐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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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거야 뭐. 당연히 ‘고맙다’…… 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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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보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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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요? 그거 무슨, 수수께끼 같은 겁니까?”

궁금해하는 아시온에겐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헤르한은 다시 침묵했다.

침묵하면서 리엘라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리엘라가 자신에게 처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대로 눈을 맞추고 처음 마주 앉은 날에, 리엘라가 처음으로 한다는 소리는 고맙다는 인사가 아니라 원하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살려준 은혜를 갚겠다면서.

어째서 이 여자는 자신을 대가나 바라고 동정심을 베푸는 남자로 만드는 건가.

헤르한은 그런 마음에 허탈했었다. 리엘라가 괘씸하고, 황당하기도 했었다.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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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발목 잡았으면 충분하잖아요. 그러면 그 빚을 응당 갚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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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죽어줘요. 더 폐 끼치지 말고. 제발. 사라져버려요. 부탁이에요.’

 
그런 말들에 내내 시달리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그날도 르 데르에 몸을 던졌던 거고, 그래서 이번에도 제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건가.

참 바보 같은 여자였다. 바보 같을 정도로 맑고 연약해서 얼룩지고 깨어지기 쉬운 여자.

헤르한의 시선이 다시 아득해졌다.

빗줄기가 더 굵어지고 있었다. 후두두 쏟아지는 세찬 소리에 헤르한은 마음이 더 어지러웠다.

뭔가가 퍼뜩 떠오른 듯 아시온이 입을 연 건 그들이 막 별궁을 둘러싼 담을 지날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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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그러고 보니 시간이 꽤 지체되어버렸네요.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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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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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블리니테와 저녁 약속하셨잖습니까?”

아. 이런.

헤르한은 낭패감에 우뚝 걸음을 멈추어버렸다.

그가 갑자기 멈춰서는 바람에 황제의 뒤에서 우산을 들고 따르던 시종도, 선물 상자를 들고 함께 이동했던 수행원들도 줄줄이 멈춰 섰다.

대열이 밀려 몸과 몸이 부딪치고 빗물이 튀었지만 헤르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걸 잊어버리다니. 아무리 그레타 왕녀의 기억에 이가 악물렸대도 잊을 게 따로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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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온. 먼저 뛰어가서 식당을 확인하고 내 사정을 전해. 그 여자, 또 미련하게 기다리고만 있을 테니 먼저 식사를 내주라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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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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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농담할 시간은 없으니 어서 가라고 아시온을 떠밀기 직전, 헤르한은 아시온이 가리키는 방향의 끝을 보고 숨을 멈추었다.

저 멀리. 별궁 정문 입구 앞에, 꽃같이 서 있는 이가 있었다.

리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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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한은 한번 제 눈을 의심했다가 다시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아시온은 일부러 팔을 뻗어 수행원들이 황제를 뒤따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곤 저 역시 수행원들과 마찬가지로 담장 근처에 발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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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뭘 하고 있지?”

헤르한은 어느새 리엘라 앞에 훌쩍 다가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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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나를 기다렸나?”

머뭇거리던 리엘라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오물거리다가 작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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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지셔서요. 비도 오고 하니까. 혹시나 하고 ……걱정이 되어서.”

네가 나를 걱정한다니.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하면서. 너는 대체.

걱정된다는 말소리는 하마터면 빗소리에 파묻힐 정도로 작았다.

살짝 내리깐 리엘라의 속눈썹에 습기가 보석처럼 맺혀 있었다. 머리칼도 조금 젖어 있었다. 얼마든지 안쪽에서 비를 피하면서 기다릴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정문 지붕 끝까지 나와서는 한 번씩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 빼꼼 내밀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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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비가 드셉니다. 거기 계시지 말고 어서 안쪽으로…….”

그런데도 리엘라는 황제가 더 젖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어째선지 우산을 든 시종은 저 멀리 멈춰서 오지도 않고, 코앞에서 맨몸으로 비를 맞는 황제의 모습에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리엘라는 결국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헤르한의 몸 앞에 훌쩍 다가선 리엘라는 제 두 손바닥으로 가림막을 만들어 헤르한의 머리 위에 갖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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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비 맞으시면 안 되는데…….”

리엘라가 까치발을 딛고 팔을 뻗자 달콤하고도 은은한 체취가 훅 끼쳐왔다.

헤르한은 이를 꽉 물고 주먹을 쥐었다.

자기도 비를 맞고 있는 주제에. 저보다도 더 추위에 떨고 있는 주제에.

헤르한은 리엘라의 허리에 손을 감고 그녀를 자신의 품 가까이 끌어당겼다. 바깥에 얼마나 오래 있었던 것인지 리엘라의 몸은 제법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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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몸과 몸이 밀착하면서 두 사람 모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당황한 리엘라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가까이 맞닿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둘 중 누구도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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