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가장 따스한 위로2021.08.19.
“폐하께서 여긴 어떻게…….”
“내가 방해가 됐나?”
울고 있는 건 그레타였지만, 정작 헤르한은 리엘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황제의 푸른 눈길 끝에서 리엘라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애처롭도록.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다른 오해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방금 저희 대화는……, 흐윽.”
그레타가 말했다. 일부러 울음을 묻혀가면서.
“리엘라와 사적으로 의논해야 할 얘기가 있어서…….”
“의논이라기엔 왕녀 혼자 일방적으로 말하던데.”
하지만 헤르한의 대답은 쌀쌀맞았다. 그레타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열심히 어필하건 말건, 그의 관심 밖인 탓이었다. 쉽지 않네, 저 남자 속이기가. 그레타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돌렸다.
“폐하께서 직접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잊은 게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헤르한이 자기 품 안에서 꺼내든 건 반듯하게 접힌 손수건이었다.
“아까 챙겨주려 했던 걸 깜빡했다. 누구 하나는 울 줄 알았거든.”
그 말에 리엘라는 내내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제야 왕녀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곤란하게 와닿았다. 죄인과 독대하던 왕녀가 애처롭게 울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이 실수한 걸까? 이것 때문에 황제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까?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분할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하다못해 모진 말 한마디도 아직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왕녀가 먼저 울어버리는 통에, ‘감히 주제도 모르고 왕녀님을 울린 죄’까지 덮어쓰게 되어버렸다. 이 일을 추궁 당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저는 가만히 있었는데 왕녀가 혼자 울었단 말을 황제가 믿어 줄까? 리엘라는 자조적이고도 슬픈 고민에 잠겼다.
“받아라.”
“……!”
그때 헤르한이 품에서 꺼낸 손수건을 리엘라에게 내밀었다. 리엘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레타가 아니라 자신에게? 벙찐 건 마주 앉은 그레타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제게 주는 것인 줄 알고 손수건을 받기 위해 뻗어 나온 손이 허공에서 망신스럽게 떨릴 만큼.
“네게 필요할 것 같군.”
황제의 음성은 나긋했다. 굳이 몸을 숙여 가며 리엘라에게 손수건을 쥐여 주는 손길도 부드러웠다. 소리는 내고 있지 않지만, 진짜로 울고 있는 건 리엘라라는 걸 알아보기라도 한 듯이. 리엘라는 황제가 건네준 손수건을 꾹 쥐고 울컥하는 것을 감정을 꾹 삼켰다. 그렇지 않아도 정말로 울음이 날 것 같았는데, 의외로 금방 사그라들었다. 손에 쥔 부드러운 손수건 덕분인지. 아니면.
“다른 게 더 필요하다면 얘기해라. 블리니테.”
“…….”
“내가 곁에 있어 주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고.”
호위기사라도 되는 양, 제 옆자리를 든든하게 지키고 선 이 남자 덕분인지.
“괜찮습니다. 왕녀 저하께 들을 말씀은 더 없는 것 같습니다.”
“네가 해야 할 얘기는?”
하려던 건 해야지, 하고 헤르한이 용기를 주듯 시선을 맞추었다. 리엘라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레타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지쳐버려서. 또 도무지 영문 모를 그레타의 사과와 눈물에 질려버려서 도망쳐버리고 싶던 차였다. 황제는 그걸 알았을까? 그래서 자신을 다독여주기 위해 온 걸까? 리엘라는 어쨌든 그레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 뒤의 얘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할게요. 왕녀님.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와는 관련 없는 얘기니까요.”
“리엘라, 너…….”
“그리고 저도 왕녀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도 사과를 드리려고요.”
리엘라는 아직도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그레타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왕녀가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리엘라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이젠 다 상관없는 일이었다. 원망을 쏟아내고도 싶었고 구차한 변명이라도 들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리엘라는 그녀를, 그리고 이 상황을 애써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그레타 왕녀에게 이 말만은 꼭 해야 했다.
“예전에 저에게 하셨던 부탁…….”
“……!”
“아무래도 그건 못 들어드릴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려고 온 거예요. 죄송합니다. 왕녀님.”
*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별궁의 자신의 방 앞에 도착해 리엘라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까지도 헤르한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굳이 병사들을 멀찍이 떼어놓고 직접 침실까지 데려다준 것 치곤 어색한 침묵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나요?”
“그래.”
“궁금하지 않으세요?”
결국 리엘라가 먼저 말을 걸었지만, 헤르한은 살짝 입술을 떼었다가 말 뿐이었다. 분명 파비안이란 이름을 들었을 텐데. 예전에 왕녀가 자신에게 했다는 부탁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궁금할 테고, 자신이 제국의 계획에 누를 끼친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될 텐데.
“물론 궁금해.”
“그럼 말씀드릴…….”
“하지만 됐어.”
“…….”
“이만 쉬어라.”
헤르한은 그 말만을 하고 리엘라를 방안으로 들여보냈다. 혹시 화가 나셨나? 침실 안으로 들어와 벽에 붙은 작은 거울을 들여다보고서야, 리엘라는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알았다.
‘내가 이런 얼굴이었구나.…….’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르고 난 것처럼 지치고 아픈 얼굴. 황제의 침묵이 나름의 배려였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또 미안함과 고마움이 울컥 치밀었다. 리엘라는 터덜터덜 침대 위로 돌아와 앉았다. 고요함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 아까 그레타 왕녀와 나누었던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파비안이 죽을 수도 있다고……. 파비안이…….’
관심 없다고,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애써 대꾸했지만 당연히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파비안을 들먹이다니. 이제 와서? 그래서 저더러 어쩌라고? 왕실이 몰락하고 말고는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왜? 내가 죽어갈 때 파비안은 어디서 무얼 했는데? 날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면서…….’
리엘라는 서러운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나 미워죽겠는데 어째서 그 얼굴은 잊히지도 않는 건지. 어쩜 이렇게 선명하게 남아서 저를 끈질기게 괴롭히는지.
‘바보 자식. 이기적인 자식. 여태껏 어딘가에 꼭꼭 숨어서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이젠 나더러 널 살려달라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비겁할 수가 있어. 어떻게 넌 끝까지 그래…….’
혹시 문밖으로 울음이 새어나갈까 봐. 그러면 또 별궁 기사들과 황제를 귀찮게 만들고 말 테니까. 리엘라는 최대한 몸을 옹송그리고 숨죽여 울었다. 그러다가 문득 오므린 무릎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있단 걸 깨달았다.
‘창문이…….’
고개를 들어보니 활짝 열린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화사했다. 오늘 아침, 황제와 산책을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판자가 덧대어져 꽉 막혀 있던 창문이었다. 리엘라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의자 하나를 끌어와 창문 앞에 놓고는, 거기에 앉아 탁 트인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후련하게 울었다. 보드라운 햇살의 위로를 받으면서. 아니, 어쩌면 그 햇볕보다 더 따스한 누군가의 위로를 받으면서. 그대로 창틀에 기대어 까무룩 잠들어버렸던 리엘라가 퍼뜩 눈을 뜬 건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 때문이었다. 아침만 해도 비가 올 조짐은 없어 보였는데. 하늘은 그새 먹구름으로 뒤덮여 사방이 꽤 어두웠다. 얼마나 잔 걸까. 설마 하루가 다 지나버린 건 아니겠지, 하고 리엘라는 벌떡 일어났다. 침실 밖으로 나간 리엘라가 향한 곳은 황제의 내실이었다. 내실 문을 지키는 기사는 이제 리엘라의 방문을 막지 않았다. 대신 먼저 노크를 하며 그녀가 왔음을 안에 알리고 문을 열어주었다. 내실 로비에 서 있던 황제는 자신을 찾아온 리엘라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주변엔 아시온을 비롯한 참모진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는데…….”
“폐하는 지금 바쁜 일정이 있으십니다.”
대답을 가로챈 건 막 황제의 옷매무새를 점검해주던 의전 대신이었다. 리엘라는 쭈뼛거리며 물러났다. 죄송하다고,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려던 참에 먼저 입을 연 건 황제였다.
“급한 용건인가?”
“아닙니다. 폐하.”
잠결에도 후다닥 달려온 것은 오늘이 다 가기 전에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면 나중에 하지.”
“네.”
그러니 괜찮았다. 황제가 처리해야 할 바쁜 정무들에 비하면, 그에게 신세 진 이의 변변찮은 감사 인사 따위는 뒷순위로 밀려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오늘 저녁은 어때?”
“네?”
“잠시 본궁에 들렀다가 올 것이다. 저녁 전엔 돌아올 테니 저녁 식사를 함께하지.”
헤르한의 제안에 옆에서 듣고 있던 대신들이 놀라 동작을 우뚝 멈추었다. 당연히 리엘라도 무어라 대답할지를 몰라 입만 벌리고 멀뚱거리는데, 헤르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쐐기만을 박았다.
“할 얘기는 그때.”
“…….”
“그전까지 좀 더 자둬. 아직도 얼굴이 엉망이군.”
얼굴이 엉망, 이라는 소리에 리엘라는 화르르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거울도 보지 않고 나왔다. 펑펑 울다 그대로 엎드려 잤으니 분명 눈이 퉁퉁 부었겠지. 많이 못나 보일까, 하는 생각에 입술을 물며 부끄러워하는 동안 황제가 다가왔다.
“더 쉬고 있으라는 뜻이야.”
귓가에 대고 말하는 음성이 나긋나긋했다. 거기에 놀란 리엘라가 다시 고개를 들 틈도 주지 않고 황제는 발길을 재촉했다. 참모진들은 애써 당황한 기색을 누르고 황제의 뒤를 따랐다. 내실에 혼자 남은 리엘라는 가만히 제 귀를 어루만졌다. 빨갛게 변해버린 귓바퀴엔 아직도 황제의 숨결이 어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 동궁으로 향하는 내내 아시온은 표정이 어두웠다. 입술을 삐죽 내민 것이 토라진 듯도 했고, 이따금 헤르한을 위아래로 살피며 한숨을 푹푹 쉬는 것이 걱정이 있는 듯도 했다.
“잔소리할 거면 해.”
“하면 뭐합니까? 듣지도 않으실 거면서.”
하긴 그렇지, 하고 헤르한이 피식 웃자 아시온은 또 뚱한 목소리를 냈다. 여기서 웃음이 나오십니까, 하고.
“폐하.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시면 안 됩니까? 발작이 가라앉은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능력을 쓰시는 건 좀……. 아, 네네. 제 말 안 들으시죠?”
참고 참았던 아시온의 잔소리는 예상대로 아무런 소득 없이 땅바닥에 꽂혔다. 헤르한은 묵묵히 앞으로 걸을 뿐이었다. 주군의 고집을 꺾는 건 불가능하니 그냥 받아들이긴 한다지만, 그래도 아시온이 보기엔 좀 이상한 데가 있는 상황이었다. 혼자 서재에 틀어박혀 오후 내내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주군이 난데없이 왕녀를 만나야겠다고 했다. 그냥 만나는 것도 아니고, 왕녀의 기억을 읽어봐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 와서 말이십니까? 뭐 하러요? 아, 아니. 덤비자는 소리가 아니고요. 사건 진상 조사는 이미 다 마쳤는데요. 속마음 읽는 건 어차피 증거로 쓰이지도 못하니 왕가를 가만히 두자고 하신 건 폐하이셨잖습니까?”
“그냥.”
“예? 그냥? 그냥이 어딨습니까!”
“궁금해 죽겠는데 그 여자한테 물어볼 수는 없잖아. 툭 건들기만 해도 울 것 같은데.”
“그 여자라면……. 리엘라 블리니테 말씀이십니까……?”
헤르한은 그쯤에서 침묵했었다. 최근 들어 헤르한이 맥락 없이 입을 다물어버리면 그건 죄다 리엘라 블리니테에 관한 일이었다.
“폐하. 혹시 리엘라 블리니테에게 정말 특별한 마음이라도 품으신 겁니까? 소문처럼? 순애보, 팜므 파탈, 그거?”
그래서 아시온은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을 던졌다. 걸음을 우뚝 멈추거나, 자길 노려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황당하게 웃기라도 할 줄 알았던 헤르한은 의외로 아주 담담하고도 빠르게 대답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 그렇다고요!?”
“그래. 특별히, 궁금해.”
“아이고. 난 또 뭐라고! 그건 그 여자에게 폐하의 능력이 통하지 않아서 그런 거잖습니까?”
아시온이 촐싹대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안 헤르한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글쎄. 그런 건가. 정말 그것뿐인가.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하는 동안 헤르한은 동궁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께서 이 누추한 동궁을 하루에 두 번씩이나. 게다가 비도 오는데.”
의심스러운 눈을 치뜨며 다가오는 그레타에게 황제는 손을 내밀었다. 반갑게 손등에 입맞춤이나 나눌 사이가 아니란 건 알았지만, 그래도 그레타는 예의상 제 손을 내밀었다.
‘아까는 나를 그리 무시해놓고,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이야?’
헤르한의 머릿속에 그레타 왕녀의 앙칼진 투덜거림이 울려 퍼졌다. 뚜렷한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아직 멀었다. 그가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은 왕녀의 좀 더 은밀한 기억. 헤르한은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레타의 손등에 입술을 갖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