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악어의 눈물 (14/154)


#14 악어의 눈물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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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됩니다. 갈 필요 없습니다!”

서재의 높은 천장이 울리도록 아시온이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아시온만큼 흥분하진 않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다른 참모진들도 생각은 모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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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승기는 이미 우리가 잡은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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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다 확실히 마무리될 때까지 리엘라 블리니테는 우리 쪽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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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인 도발에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물론 왕녀가 그렇게까지 당돌하게 나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마지막 참모의 말에 나머지 대신들이 다시 아까 일을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아까 정원에서 그레타 왕녀는 당장 리엘라를 채가기라도 할 것처럼 공격적이었다. 그런 그레타를 진정시킨 건 황제도, 대신들도 아닌 리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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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님. 걱정 마세요. 제가 저하의 궁으로 가겠습니다. 언제, 몇 시에 가면 되겠습니까?’

 
당장 그 여자를 이리 내놓으라며 떼를 쓰던 그레타와 비교될 정도로 훨씬 침착하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바로 그 점에 그레타의 심기가 언짢아진 모양이었다. 새삼스레 자기 품위가 신경 쓰였는지, 그레타는 리엘라를 조금 노려보다가 오늘 중으로 다시 기별하겠다며 휙 돌아나갔다.

정원에서의 상황은 그렇게 일단락되었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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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합니다. 죄인 신분에 제가 나서면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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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블리니테 양. 당신이 결백하다는 건 우리 모두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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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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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명령으로 자체적인 재조사를 마쳤습니다. 물론 해당 시기에 용병단 소속이었으니 온전히 책임을 피할 순 없겠지만, 당신이 암살을 계획했거나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르진 않았다는 거, 다 압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쪼그라들어 있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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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백 마디 말로도 모자랄 상황인데 짧은 탄성밖에 나오지 않았다.

새삼 리엘라가 고개를 들어보니 자신을 둘러싸고 앉은 이들의 눈빛들이 제법 따뜻했다. 당신의 결백을 믿는다고,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다고, 언뜻 위로가 담긴 시선들에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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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그렇다고 벌써 울면 안 되는데. 아직 대외적으로는 처리가 다 안 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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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타 왕실에 대한 국제 고발장을 준비 중입니다. 리엘라 양은 그때 우리 측 증인으로 소환될 겁니다. 본인의 무죄는 그때 인정받으시면 됩니다. 준비는 저희가 다 해두었으니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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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작전은 여기 모인 참모진만 아는 것이니 왕실이 눈치채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처리가 끝날 때까지는 가능한 몸을 사려야 한다는 뜻.

리엘라는 어쨌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일어나며 단 한마디의 명령을 한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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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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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아시온이 놀라 되물었다.

리엘라도, 다른 측근들도 모두 고개를 들고 헤르한을 보았다. 모두를 놀라게 해놓고, 정작 헤르한은 평온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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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고. 리엘라 블리니테. 가서 왕녀를 만나고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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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하. 폐하. 그건 좀……. 괜히 왕실 쪽에 책잡힐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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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막으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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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양에게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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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지키면 되고.”

명쾌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참모들이 쏟아낸 걱정과 신중함과 주의를 이렇게 단칼에 베어 버려도 괜찮을까 싶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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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잖아? 왕녀에게 꼭 해야 할 얘기가 있다며.”

저를 향하는 시선들 중 황제가 고개를 숙여 눈 맞춘 건 리엘라 쪽이었다.

벌써 수십 번이나 황제를 마주 보았건만 이렇게 눈이 마주칠 때마다 리엘라는 심장이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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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쪽에도 우리가 모를 사연이 있을 테지. 그러니 아직 왕녀와 풀어야 할 매듭이 남아 있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 리엘라 블리니테.”

황제가 말했다.

묻기만 할 뿐 선택권은 주지 않을 거라고 했으면서. 그는 결국 그렇게 본인이 뱉었던 말도 어겨가면서 뜻을 물어 주고, 선택권도 주었다.

그래서 리엘라는 대답했다. 감사하다고.

죄송하다는 말 대신, 이제 감사하단 말을 더 많이 하기로 했으니까.

황제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온과 참모진들은 미련 없이 일어났다. 리엘라를 동궁으로 보낼 채비를 시작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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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타 왕녀의 서신은 곧바로 도착했다. 시간과 장소만이 간략히 적힌, 초대장이라고 해야 할지 도전장이라고 해야 할지, 그저 명령에 따르라는 말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신이었다.

리엘라는 시간에 맞추어 별궁을 나섰다. 동궁까진 걸어서 이십 분 정도로 가까웠다. 리엘라의 양옆엔 제국 측의 기사 둘이 따라붙었다. 대외적으로는 죄인의 감시병이었고, 은밀하게는 리엘라를 지키는 호위병이었다.

그레타 왕녀가 기거하고 있는 동궁의 풍경은 이색적이었다.

들판처럼 넓은 뜰과 갖가지 꽃나무를 갖춘 별궁과는 달리, 우아하고 매혹적인 느낌이 물씬한 곳이었다.

동궁 뜰 안까지 들어서고야 리엘라는 그것이 사방에 핀 장미꽃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붉은 장미, 흰 장미, 푸른 장미까지 색색의 장미가 담장마다 풍성했다.

그레타 왕녀는 그중에서도 분홍 장미가 탐스럽게 핀 담장 옆 가제보 아래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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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로즈.’

리엘라는 헛웃음을 삼켰다.

아마도 일부러 저 자리를 골랐을 테지.

훤히 보이는 그레타의 속내를 짐작하면서, 리엘라는 자신이 많이 무뎌졌음을 느꼈다. 그레타 왕녀는 아마 자신을 울리려고 했을 텐데. 미안하지만 울음 대신 웃음이 나와서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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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저 여자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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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림이 저게 뭐예요? 사교 모임이라도 하러 왔대요? 저 여자, 죄인으로 조사 중인 거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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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황제 폐하의 총애를 샀다고 해도 그렇지. 왕녀님 앞에 끌려오는 주제에 수갑이라도 차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구요?”

그레타를 둘러싼 시녀들의 말소리가 먼발치의 리엘라 귀까지 들려왔다. 일부러 들으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그들의 의도적인 말 중에 단 한마디도 리엘라는 아프지 않았다.

진실을 알아주는 이가 저쪽 어딘가에 있으니까.

자신을 믿어주는 존재가 하나라도 있다는 건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힘이 되는 일이었다. 혼자만 버려진 줄 알았던 때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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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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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왕녀 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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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가 예쁘네. 요새 왕궁 침방이 별궁으로 새 옷을 지어서 나르기 바쁘다더니. 그게 다 리엘라 옷이었구나?”

호로록 차를 마시며 그레타가 뱉는 말에 옆에 서 있던 시녀들이 킥킥대고 웃었다.

리엘라는 빳빳이 선 자세를 유지하고 그런 그들에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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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감사하게도 폐하께서 하나하나 신경 써주셔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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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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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옷도 직접 골라주셨습니다. 동궁의 장미 정원과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시면서.”

시녀들이 웃음을 거두었다.

리엘라를 황제의 정부라도 된 양 취급해서 뭉개줄 생각이었는데 정작 당사자가 저리 당당하니 자신들만 우스워진 것이었다.

심지어 황제가 직접 옷을 골라주기까지 하다니?

그냥 처형을 면하려고 몸을 판 것 정도의 사이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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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좋아 보이니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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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직 회복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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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폐하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으면서,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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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송구하게도. 몸에 남은 독 기운이 너무 강했나 봅니다.”

그 말에 그레타가 찻잔을 든 채로 손을 멈추었다.

그레타 옆의 시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독? 저 여자가 독이라고 했어? 하고.

그레타는 달칵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고 리엘라를 노려보았다. 독 얘기를 꺼낸 건 일부러 자길 당황 시키기 위함이리라. 옛날엔 더한 일을 당하면서도 찍소리 못하더니, 이젠 리엘라 저것도 참 만만치 않아졌네, 싶었다.

하지만 아직 본게임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레타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생글거리는 웃음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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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무리하면 안 되지. 리엘라.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이쪽에 앉도록 해. 엠마, 리엘라에게 차를 한 잔 내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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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 왕녀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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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두 자리를 피해줘요. 리엘라와 단둘이 할 말이 있어서. 그쪽 기사님들도 조금만 물러서 있어 주면 좋겠는데. 숙녀들의 이야기를 엿들을 건 아니죠? 리엘라를 해치지 않을 테니 그런 걱정은 마시고요.”

그레타의 시녀들은 징징거렸으나 곧 쫓겨났고, 제국 기사들도 시선이 닿는 거리까지만 떨어지는 것을 조건으로 몇 발 물러나 주었다.

마침내 둘만 남은 야외 테이블 주변으로 독한 장미향이 코를 찔렀다.

꼭 그날처럼. 파비안을 안고 있는 그레타를 보았던 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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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후로 반년만인가? 물론 우리 왕궁에서 드문드문 봤지만 이렇게 둘이서 얘길 나누진 못했으니까.”

그레타 역시 그날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리엘라는 그게 끔찍했다. 그레타 왕녀와 같은 기억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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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할 말이 많겠지. 리엘라.”

물론이었다. 리엘라가 꾸는 모든 악몽마다 그레타는 빠짐없이 나왔었다. 그때마다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질문을 던졌던가.

왜요. 내게 왜 그랬어요. 왜 하필 나였죠. 왜 하필 파비안이었죠. 왜 당신은 이미 많은 걸 가졌으면서. 한번 나를 죽음으로 내몰았으면 됐지, 어째서 또.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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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먼저 말할게. 리엘라.”

하지만 그레타는 리엘라가 그 숱한 질문 중 하나만을 꺼낼 시간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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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리엘라.”

그리고 리엘라가 자신을 원망하고 욕할 시간조차 가로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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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너에겐 정말 미안해. 미안한 마음뿐이야. 나도 내가 끔찍할 정도인데 넌 오죽할까? 나, 많이 미웠지?”

동궁으로 오기 전까지 리엘라는 아시온의 훈련 아닌 훈련을 받았다.

어떤 식으로든 그레타 왕녀에게 휘말리지 말 것. 흥분하지 말 것. 혹여나 왕녀가 너무 가증스러워 견딜 수 없더라도 그녀의 머리채를 잡지 말 것…… 같은.

이곳까지 오는 리엘라의 심정도 같았다.

조리 있게 따지진 못하더라도 울지는 말자. 궁지로 몰리더라도 겁내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왔다.

그런데 이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왕녀가 사과를 해버리면.

그녀에 대한 원망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심장인데, 저렇게 허무하게.

……힘 빠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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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레타가 눈물을 뚝뚝 흘려냈다.

순간 리엘라는 그 몇 방울의 눈물 속에 깊이 잠겨버린 것만 같았다.

바보가 된 것 같고 말문이 막혀서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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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리엘라.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너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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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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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파비안을 사랑했어. 그래서 그런 거야.”

파비안.

그 이름에 리엘라의 눈이 커졌다.

왕녀와 독대하면서 파비안의 얘기가 나오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예상했는데. 미리 각오도 하고 왔는데.

그런데도 그레타의 목소리로 ‘파비안’이란 이름을 듣는 건 생각보다 가슴 철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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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도 널 많이 걱정했어. 알잖아. 그이 성격. 또 파비안이 널 얼마나 특별히 아끼는지도. 그걸 다 알면서……. 더더욱 너에겐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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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파비안 얘기는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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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이 무너지면 파비안도 죽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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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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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나는 죗값을 받아도 싸. 하지만 파비안은 어떻게 해? 넌 파비안이 죽어도 좋아?”

그레타는 이제 크게 소리 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리엘라는 멍한 정신을 애써 다잡았다.

논리로 따질 일이 아니었다. 가슴으로 결정할 것도 아니었다. 이건 답이 정해진 문제였다. 왕녀와 파비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신이 모르는 반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파비안은 이미 리엘라의 인생 밖으로 벗어난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리엘라를 먼저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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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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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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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프게 흐느끼던 그레타가 울음을 뚝 멈추었다.

그녀가 제 손바닥 사이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눈꼬리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싸늘하게 리엘라를 올려다보는 눈가가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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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이 죽어도, 그래도 상관없다고?”

되묻는 그레타의 목소리엔 물기가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 그리 애처로웠냐는 듯이 섬뜩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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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상. 관. 없다잖아.”

거기에 대답을 가로챈 건 헤르한이었다.

언제 왔는지 모를 그의 등장에 그레타는 눈을 부릅떴다.

헤르한은 지체 없이 리엘라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잘 버텼어, 하고 귓가에 나지막이 소곤거려주는 그의 말에 리엘라는 비로소 눈을 사뿐히 감고 미소 같은 날숨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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