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함께 걸을 사람2021.08.08.
다음날 리엘라는 늦잠을 잤다. 왕궁에 끌려온 뒤로는 늘 긴장의 연속이라 잠을 설쳤는데 이다지도 까무룩 깊이 잠든 건 처음이었다. 어제 내실에서 있었던 일에 잔뜩 놀라고 긴장했던 것이 한순간에 풀려서였을까. 한 시종이 다급히 들어와 어서 의복을 갖추라고 깨우지 않았다면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했을 만큼 혼곤했다. 순식간에 그 잠기운이 달아난 건 지금 황제가 문 앞에 와 있다는 시종의 통보 덕택이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물어도 좋다.”
방 안으로 들어온 황제는 리엘라가 채비를 다 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던 것 치곤 다짜고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리엘라는 얼떨떨했다. 대뜸 찾아와서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으라니. 살짝 고개를 들어 황제의 모습을 살피니, 그는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선 채였다. 시종들을 전부 침실 밖으로 내보내고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눈빛이 또렷하고 맑았다. 바로 어제 쓰러졌던 사람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몸은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헤르한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리엘라 나름대로는 고심해서 낸 말인데, 아무래도 황제가 원했던 질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죄인 따위가 황제의 안위를 묻는 것이 주제넘었나? 아, ‘몸’이 아니라 ‘옥체’라고 해야 했던 건가.
“많이 나아졌다. 보다시피.”
그때 헤르한이 리엘라의 걱정을 깨고 대답했다. 다행이었다. 엉성한 화법에 황제의 심기가 상하지 않은 것도, 또 그가 무사히 건강을 회복했다는 것도. 그러다가 리엘라는 문득 자신이 황제를 꽤 많이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 챙겨주셨으니까. 어제도 괜한 의심 사지 않게 감싸주셨고…….’
그러니까 마땅한 감정인 거겠지. 그래. 염치가 있다면 이러는 게 맞는 거지. 리엘라는 그렇게 아무도 묻지 않은 것에 대해 혼자 변명하고 합리화했다.
“그리고 또?”
“네?”
“다음 질문은 없나? 궁금한 게 많을 텐데.”
황제가 비스듬한 자세를 고쳐서 반듯이 섰다. 그제야 리엘라는 굳이 이른 시간부터 자신을 찾아온 황제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는 어제의 일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나중에 얘기하자던 어제 그 말. ‘외면’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약속’이었던 거구나.
“그러면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긴 한데…….”
“그래. 뭐든.”
“혹시 제가 어제 폐하를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한 건가요?”
“……뭐?”
황제가 황당하단 표정을 짓기에 리엘라는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뭐든 물어도 좋다고 했으니까. 리엘라는 다시 숨을 골랐다. 긁어 부스럼이더라도 이 부분을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제 아시온 대장님의 말씀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제가 폐하께 함부로 손을 대는 바람에 뭔가 틀어진 걸까 하고. 계속…….”
“…….”
“걱정했습니다.”
당신을 걱정하였다, 그 말에 헤르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물론 찰나였다. 그는 금방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리엘라 블리니테. 고개를 들어서 내 얼굴을 똑바로 보아라.”
리엘라는 순순히 황제의 명령을 따랐다. 고개를 든 리엘라의 눈에 담긴 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굳건한 빛의 얼굴이었다.
“지금 내 모습이 너의 걱정을 사야 할 상태로 보이는가?”
헤르한의 되물음에 리엘라는 곧장 고개를 푹 숙였다. 말실수해버린 건가.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아니, 주제 넘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볼 수 없었지만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리엘라는 다시 한번 더 사과하려고 했다.
“내가 멀쩡하다고.”
그때, 리엘라보다 먼저 순서를 가로챈 헤르한의 해명이 제법 다정했다.
“네가 걱정해야 할 만한 일 같은 건 없었다는 뜻이다. 너 때문에 틀어진 건 없어. 폐를 끼친 것도 없다.”
“…….”
“오히려 네 도움을 받았다고 해두지.”
그렇게까지 말해줄 줄은 몰랐는데. 일시의 침묵이 놓였다. 잘못한 게 없다고 하는데도 리엘라는 여전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얼굴이 붉어졌다.
“반대로 내가 묻고 싶은데. 너는 왜 내 손을 잡았지? 손까지 잡아주고 달래면서 안심시켜줄 만큼, 내가 너에게 그리 호감 가는 사람은 아닐 텐데.”
황제가 역질문을 했지만 리엘라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지, 하고. 호감 가는 사람이 아닐 거란 황제의 말이 맞았다. 리엘라에게 그는 두려운 사람이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널 구해준 대가로 몸이라도 취하겠다고 말하는, 야멸찬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따지러 가던 길이었다. 이 몸뚱이를 안는 것으로 값이 된다면 얼마든 안아보라고 덤비러 가던 길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넌 모든 말을 죄송하다고 끝맺는군. 듣는 나까지 지겹게. 이제부터 죄송하단 말은 금지다.”
황제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새삼스럽게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심드렁한 그의 시선이 끝내 향한 건 빛이 들다 마는 창가 쪽이었다. 원래는 커다란 창이 있었지만 리엘라가 방을 쓰게 되면서 판자로 창을 막았다. 혹시 모를 죄인의 도주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리엘라 블리니테. 햇빛을 본 지 얼마나 됐지?”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죄송…….”
리엘라는 또 그렇게 대답하다가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황제는 그 점에 대해서 질책하진 않았다. 물론 살가운 분위기가 이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대화는 거기까지였고 말없이 휙 돌아서 방을 나가버리기까지 헤르한은 좀 언짢은 기색이었다. 헤르한이 떠나고 난 뒤 리엘라는 긴장이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것저것 얘길 많이 한 것 같긴 한데 기억에 제대로 남는 것이 없었다. 아직 방 안에 남은 황제의 향기만으로도 벼랑 위에 서 있다 간신히 내려온 것처럼 정신이 혼미했다.
“외출 준비를 하라십니다.”
시종이 들어와 말한 건 그때였다.
“폐하의 명령이십니다.”
아직도 바닥에 앉은 채로 고개를 드는 리엘라의 눈 한가득, 귀족 아가씨들이나 입을 법한 외출복들이 턱 놓였다.
* 그레타는 씩씩거리며 자신의 궁으로 돌아왔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이마다 잔뜩 이골이 난 왕녀의 모습에 놀라는 듯했지만, 그레타는 제 위신 따위를 챙길 겨를이 없었다. 벌써 황제로부터 세 번째 퇴짜를 맞았다. 심지어 이번엔 서신이 아니라 사람을 직접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은 황제 폐하의 알현이 불가하다’라는 답변만 받았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안 된다면, 대체 언제 된다는 건데!?’
헤르한 황제가 하는 짓은 적군의 농성과 다를 것이 없었다. 왕궁 일부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서는 왕실을 보란 듯이 무시하고 있지 않은가. 딱 한 번, 왕가와 저녁 만찬을 가졌지만 그것도 실은 리엘라를 빼앗아가기 위한 수작에 불과했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황제를 자극할 수도 없고……. 리엘라, 그 여자가 내 목줄이 될 줄은……!’
그레타는 이를 물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미리 동궁에 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부왕과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그레타! 어쩔 참이냐? 이제 어쩔 것이야?”
득달같이 달려드는 아비의 모습에 그레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헤르한 황제가 리엘라를 데려간 이후로 타란 2세는 줄곧 저런 상태였다. 황제에게 덜미를 잡힌 것이 분명하다며, 이제 이 왕실은 끝이라며.
“아무래도 불안하구나. 황제가 더한 일을 벌이기 전에 그냥 우리 쪽에서 먼저 사죄하고 보상을 제안하는 게…….”
“하! 보상이요?”
그레타는 자조적인 비웃음을 내뿜었다. 아무리 제 아버지이지만 그래도 일국의 왕이라는 분이 저 정도로 유약할 수가 있나?
“황제를 암살하려 했던 걸 무슨 수로 사죄하실 건데요? 어떻게 보상하시려고요? 제국의 속국이라도 되겠다는 말씀이세요?”
“하, 하지만 당시 그자는 아직 황제가 아니었으니 조금이라도 정상참작이…….”
“가출한 황자도 황족은 황족이에요. 하물며 그 남자가 지금은 황제가 되었는데, 우리 왕실을 가만히 두겠어요?”
“그럼 어쩌란 말이냐!”
난들 아나요? 그레타는 사나운 눈빛을 쏘아내는 것으로 말대꾸를 대신하고 휙 돌아섰다. 완벽한 열세였다. 헤르한 황제는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리오타 왕실을 국제 사회에 고발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돌아선 그레타가 입술을 질끈 깨물 때, 타란 2세가 그런 그레타의 등에 대고 버럭 외쳤다.
“이게 다 네가 그 천한 용병 놈을 일에 끌어들인 탓이지 않으냐!”
천한 용병 놈. 그 말은 단번에 그레타에게서 모든 감정을 빨아들였다. 자조. 모멸. 이 상황에 대한 짜증과 답답함까지 모두. 타란 2세는 그레타가 싸늘하게 굳어버린 것을 알아채고도 대거리를 멈추지 않았다. 나라가 통째로 몰락하게 생긴 마당에 치부를 공격당한 딸의 심정 따위, 알 바도 아니었다.
“그러게 내가 그놈은 못 미덥다고 했지! 더 실력이 확실한 암살자들을 고용해야 한다고! 그런데 네가 기어이 우겨서……. 기어이 그 천한 것을 품겠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대꾸하는 그레타의 목소리가 얼음장 같았다. 타란 2세는 그런 그레타가 무서운 동시에 한심했다. 악독하리만치 야무지고 영특한 제 딸이, 어째서 그 하찮은 사내 얘기만 나오면 철없는 나이처럼 감정적으로 구는 것인지.
“그러게, 사람은 저마다 제 그릇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네가 그 천것을 쫓아다니며 일을 벌일 때부터 내가 알아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파비안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등만을 보이던 그레타가 천천히 국왕에게로 돌아섰다. 어딜 감히 군주의 말을 막느냐고 혼쭐을 내려 했던 국왕은 딸의 얼굴을 본 뒤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맹랑한 딸이란 걸 알기로서니, 저다지도 살벌한 눈빛으로 아비를 쳐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럴 자격 없으시잖아요? 헤르한 황자를 없애란 명령을 받고 쩔쩔매던 아버지를 구해드린 건 저와 그 사람이란 걸 잊으시면 안 되죠.”
“너, 너는 아직도!”
“그래요. 아직도요. 파비안은 우리 때문에 빛도 못 보고 숨어 있어요. 그러니 감히, 그 사람을 욕보이지 마세요. 아버지.”
짐짓 공손한 말투였으나 그게 협박이라는 것을 국왕은 모르지 않았다. 국왕의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제국 황제에게 당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못 차리겠는데 이젠 딸마저 저를 죽일 듯 덤벼드니.
“제가 어떻게든 하겠어요. 황제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비는 한이 있더라도 이대로 왕실이 무너지게 두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늘 하던 대로 뒷방에 숨어서 벌벌 떨기나 하세요. 내 사람 모욕하지 마시고.”
그레타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궁을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국왕은 그레타가 다 나가고서야 또 한숨을 터트렸다. * 리엘라는 쭈뼛거리며 걸어 나왔다. 비싼 옷자락이 발끝에서 나풀거리는 것도 어색하고, 별궁 계단을 내려가는 것도 어색했다. 그동안, 조사 중인 죄인으로서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은 별궁 2층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폐하는 별궁 앞뜰의 정원에 계신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병사는 꼭 창끝으로 등을 쿡쿡 찌르듯이 말했다. 그 말에 내몰리듯이 걷는 걸음이 초조했다. 황제가 기다리고 있다. 자신이 황제를 기다리게 만들고 있다. 그 사실에 또 다른 중죄를 짓는 것만 같아 리엘라는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별궁 로비를 지나 메인 광장으로 나가는 즉시 모든 불안함과 초조함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없이 눈부신 빛이 사방에 쏟아지고 있었다. 번쩍이는 기둥과 화려한 아치, 색색의 꽃들까지 리엘라의 시야를 오색찬란하게 메웠다. 거의 2주 만에 보는 햇빛이었다. 아까 황제가 떠나고 난 뒤 늦게나마 셈을 해보니 그랬다. 영접식 때 잠깐 밖으로 끌려 나왔던 것을 빼고 감옥에 갇혀 있던 것까지 따지면 거의 한 달 만에 바깥 풍경을 보는 것이었다.
‘왕궁의 봄은 이런 느낌이었구나.’
이곳에 온 뒤로 지금까지. 리엘라의 봄은 아프고 어지럽기만 했다. 어둡고, 무거웠다. 그런데 이렇게 환한 세상이었다니. 눈에 닿는 것 하나하나, 발끝에 채는 돌멩이마저 반짝이고 예쁜 이곳에서, 저만 혼자 지옥이었다니. 왠지 눈물이 차올랐다. 분한 건지 허무한 건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왈칵 치밀었다.
“리엘라 블리니테. 이쪽으로.”
서늘한 목소리가 이름을 부른 건 그때였다. 여전히 대하기 어렵지만 이젠 제법 익숙하기도 한 목소리였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든 곳에 그가 있었다. 자신을 인질로 잡은 소유자. 엘슈바이크 제국의 황제. 아니면 르 데르에서 하룻밤을 보냈던 남자. 그것도 아니라면…….
“같이 좀 걷지.”
그저, 오늘, 나를 이 환한 곳으로 꺼내준, 이 눈부신 길을 함께 걸을 사람. 리엘라는 심호흡을 하고 발을 뗐다.
번쩍이는 기둥보다, 화려한 아치와 꽃길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는 곳의 중심에서. 잔뜩 엉킨 관계 속의 헤르한이 또 다른 모습으로 제게 손을 뻗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