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천사도 여신도 아닌 (11/154)


#11 천사도 여신도 아닌
2021.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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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리엘라는 다급하게 서재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헤르한은 간신히 상체만 책상에 기댄 채로 어지럽혀진 바닥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조금씩 이맛살을 찌푸리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의식을 잃은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 몸을 가누지도 못할 만큼 위중한 상태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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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괜찮으세요? 폐하!”

리엘라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황제에게 전하려고 다부지게 연습했던 말이나 다짐 같은 것들은 당연히 잊어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대처할 방법은 명백했다. 문밖에 시종과 병사들이 있으니 당연히, 그들을 부르는 것이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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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요! 도와주세요! 폐하께서 쓰러지셨어요! 여기…….”

하지만 몇 번을 불러 보아도 내실 안쪽 서재에서의 외침이 바깥 복도까지 닿기는 역부족인 듯했다. 왜 하필 이럴 때 목을 다쳐서는, 더 큰소리를 내기도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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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겠어. 나가서 사람을 불러와야……!’

리엘라는 바깥을 향해 몸을 틀었다.

바로 그때 헤르한이 크게 움찔거리더니 낮은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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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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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리엘라는 튕겨 나갈 듯하던 걸음을 붙잡았다.

헤르한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조금씩 고개를 비틀기도 했다. 악몽에서 깨어나려고 발버둥이라도 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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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제가 당장 사람들을 데려올 테니…….”

리엘라는 말을 하다 말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제풀에 말을 그쳤다.

바닥에 힘없이 축 늘어진 헤르한의 손이 외롭고 아파 보였다. 그걸 본 순간, 어째선지 단 몇 초라도 그의 곁을 떠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르한의 잇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은 듣는 이마저도 괴로울 정도였다.

악몽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할 때의 끔찍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리엘라였다. 절대 그를 혼자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도움을 청하듯 힘겹게 뻗어 나온 손을 두고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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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그래서 리엘라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그리고 화들짝 놀랄 만큼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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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제가 여기에 있어요. 들리세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아니면 도와줄 사람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안심하세요.”

그때였다. 리엘라가 헤르한의 손을 단단히 잡고서 다정한 안심의 말을 전하던 그때.

쉽게 뜨일 것 같지 않던 헤르한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리엘라가 맞잡은 손에도 미약하나마 단단한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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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정신이 좀 드세요?”

리엘라의 부름에 황제가 무어라 말을 웅얼거렸다.

리엘라는 그의 말을 잘 듣기 위해 그의 입술 가까이 귀를 갖다 댔다. 귓가에 곧장 흘러드는 황제의 말엔 뜨거운 숨결이 뒤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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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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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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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블리니테.”

헤르한이 마른 성대를 긁어가며 힘겹게 머금은 건 ‘리엘라 블리니테’라는 이름이었다.

한없이 거칠기만 한 목소리가 이다지도 애잔하고 나른하게 들리는 건 대체 왜일까.

왠지 모를 애처로움에 심장이 옥죄는 듯한 느낌을 꾹 견디면서 리엘라는 ‘네.’ 하고 대답했다.

먼저 손을 잡은 것은 자신이었는데, 이제는 황제가 더 힘을 주어 제 손을 붙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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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한의 이마엔 진땀이 맺혀 있었다.

손을 잡은 것만 해도 이미 엄청난 불경을 저지른 것인데. 황제의 옥안에까지 손을 대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짓인데.

그런데도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엘라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한 손을 들었다. 서재 안으로 사람들이 들이닥친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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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무슨 소란…….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누가 당장 카넬 경을 호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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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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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블리니테! 당장 폐하에게서 떨어져라!”

급박한 외침과 함께 무수한 구둣발 소리가 날아들었다.

시종들은 놀라서 차마 다가오질 못했고 기사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움직였다. 황제를 일으키는 쪽과, 황제에게서 리엘라를 떼어내 거칠게 구속하는 쪽이었다.

그 모습을 본 헤르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몸을 가누기 힘든 상황이면서도 기어이 기사들의 부축을 뿌리치고 가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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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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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 당장 리엘라 블리니테를 내보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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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헤르한의 안색은 창백했다. 입술도 말라 있었고 목소리도 거칠었지만, 눈빛만은 싸늘한 살기가 등등한 평소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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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블리니테에게서 손 떼고. 너희가. 나가라고.”

느리지만 한마디마다 또렷한 뜻을 눌러 담은 명령이었다.

모든 소란을 일축해버리는 헤르한의 표정이 섬뜩했다.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경직된 분위기를 수습하는 건 오늘도 아시온의 몫이었다. 그는 아직 비틀거리는 주군의 팔을 지탱하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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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폐하의 명에 따라라. 여긴 내가 정리할 테니.”

 

*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 황제의 내실은 정적을 되찾았다.

기사와 시종이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내실 바깥으로 쫓겨났고 헤르한은 침실로 자리를 옮겨 누웠다. 급하게 달려온 카넬이 헤르한을 진찰했고 아시온은 뭐가 그리 초조하고 언짢은지 내내 달달 다리를 떨었다.

그리고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는 동안, 리엘라는 오도 가도 못하고 죄인처럼 헤르한의 침실 구석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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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작 증세입니다.”

얼마 뒤, 꼼꼼하게 헤르한을 살피던 의사 카넬이 참담한 목소리로 진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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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작 증세?’

리엘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헤르한과 눈이 마주쳤다.

헤르한은 베개를 세워서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꽤나 지친 듯했지만 시선만은 강렬하고 올곧았다. 그래, 내 비밀을 들켰군, 그래서 넌 이제 어쩔 텐가? 하고 도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시온이 다리를 떨던 것을 멈추고 돌연 무서운 표정으로 다가와 리엘라를 추궁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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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를 건드렸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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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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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폐하가 쓰러지셨을 때, 옥체에 손을 댔느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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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그게…….”

죄인의 신분으로서 황제의 몸에 손을 댄 것이 중죄임은 알고 있었다. 알고도 저지른 일이니 담담하게 고백하고 죗값을 치르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자신이 받게 될 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완전히 평정을 잃어버린 아시온의 태도가 낯설고 무서워서.

어쨌든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리엘라는 최대한 크게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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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폐하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 말에 아시온의 안색이 병자만큼이나 창백해졌다.

언제나 차분하고 여유 넘치던 그가. 자신이 황제와 한때 하룻밤을 보낸 사이란 걸 알고도 어이없는 한숨이나 한번 내쉬고 말던 아시온이. 곧 이성을 잃고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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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았……! 왜. 왜 그랬습니까! 왜 그런 행동을 했습니까? 당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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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저는…….”

공황 상태에 이른 아시온이 제 어깨까지 쥐고 흔드는데 리엘라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천한 것이 감히 황제의 몸에 살을 댄 것이 문제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 이상의 잘못을 저질러버린 모양이었다. 그게 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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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잘 잡아먹을 작정이냐, 아시온.”

말 그대로 리엘라가 아시온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할 뻔한 그때. 헤르한이 갈라진 목소리로 아시온을 불러 세웠다.

아시온은 단번에 리엘라를 놓고 그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괜찮으십니까, 제대로 의식이 드십니까, 하고 다급하게 황제의 상태를 확인한 뒤엔 여전히 가라앉히지 못한 초조함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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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폐하. 전후 정황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아야 진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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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하는 건 좋지만. 아시온. 너 지금 엉뚱한 사람을 잡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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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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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 다행히 나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헤르한의 일침은 따가운 동시에 다정했다.

그게 아시온을 일깨운 모양이었다. 아시온은 고개를 푹 숙이고 감정을 삭이다가 곧 다시 리엘라에게 돌아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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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방금은 제가 흥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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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녜요. 저는 괜찮습니다.”

리엘라는 작게 대답했다.

사실 리엘라는 괜찮다는 말 뒤에 더 많은 것을 묻고 싶었다. 혹시 자신이 큰 잘못을 범한 것인지, 지금 황제 폐하의 상태가 심각한 것인지. 또 ‘발작’이니 뭐니 했던 것들의 뜻도.

하지만, 그런 설명을 자신이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헤르한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슈바이크 대제국의 황제였다. 그런 사람의 일신상의 문제는 최측근만이 공유하는 비밀인 게 당연했다.

자신이 이곳 침실에까지 남은 건 역시 어쩌다가 현장에 휘말렸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터였다. 다른 이유가 더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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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오늘 폐하에 관해서 보고 겪고 들은 것을 다른 곳에 누설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렇게 확실한 입막음을 하기 위한 것 정도.

그래서 리엘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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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블리니테. 내게 용건이 있어서 왔을 텐데. 아쉽지만 대화는 나중에 해야겠군. 아시온. 리엘라 블리니테를 배웅해라.”

그러니, 당연히 이런 황제의 명령도 이제 그만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뜻인 줄 알았다.

나중에 얘기하자는 황제의 말이 진짜로 다음을 기약하는 약속이라고는, 리엘라는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다.

*

리엘라 블리니테에게 아시온을 딸려 보낸 후에야, 헤르한은 혼자만의 시간을 청했다. 물론 의사 카넬이 쉽게 물러나 주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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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진정제를 드셔야 합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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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히 정신 차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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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발작 중에 타인과 접촉하셨으니 또 힘이 폭주할 우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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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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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빨리 기력을 되찾으신 건 처음이시지 않습니까? 혹시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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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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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발작 없이 잠잠했는데. 이렇게 반년 만에 갑자기 쓰러지신 것도 아무래도 걱정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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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카넬. 네 걱정 때문에 또 쓰러지겠군.”

알겠으니 그만하라며 헤르한이 두 손을 들어보이자 의사 카넬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헤르한의 침대 옆 협탁 위에 물과 약을 다 챙겨두고서야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렇게 겨우 머무르게 된 고요 속에서, 헤르한은 아까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그가 아까 서재에서 보고 있던 건 타란 2세가 별궁으로 보내온 서신이었다. 아직도 저들이 저지른 과오를 덮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편지는 리오타 왕실의 온갖 변명과 궁색한 회피로 뒤덮여 있었다.

시간낭비로군, 하고 헤르한은 생각했었다. 심드렁하게 서신을 덮어버리려던 그때,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헤르한은 그렇게 책상 아래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곧 물속에 잠긴 것처럼 호흡이 가빠졌다.

앞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온갖 환각과 환청이 그의 온 감각을 뒤덮었다. 많은 이들이 울부짖는 소리, 몸부림치는 모습들. 헤르한이 직접 보고 들은 장면도 있었지만 아닌 것이 더 많았다.

타인의 마음을 읽는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그 능력은 평범한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신의 은총인 동시에, 세상의 모든 고통을 제 것처럼 겪어야만 하는 저주이기도 했다.

한 번씩 그 힘이 폭주할 때면 헤르한은 의식을 잃고 몇 날 며칠을 환각 속에 시달려야만 했다. 바로 오늘처럼. 그게 바로 ‘발작’이었다.

발작은 몹시 괴롭지만, 종종 겪어왔기에 딱히 낯설지는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 이따금 감기를 앓곤 하는 것처럼. 헤르한은 그렇게 제 저주를 평생 앓아왔다.

하지만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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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제가 여기에 있어요. 들리세요?’

 
지독한 안개 틈으로 뚫고 들어오는 햇살 같은 목소리.

따뜻하고 맑은데, 강렬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그의 온 감각을 사로잡은 고통을 단번에 몰아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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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하세요. 폐하. 정신이 좀 드세요?’

 
또 한 번의 목소리에 끔찍한 환각과 환청들이 구름 개듯 절로 흐려졌다.

다시 시야를 되찾은 헤르한의 눈 한가득 들어온 건 불꽃 속에서 저를 품어주고 있는 존재였다.

천사. 나를 구원하러 온 여신.

그 찰나에 헤르한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린애 동화 같은 유치한 낭만 따위는 취급도 하지 않는 자신이 그런 되지도 않는 착각을 다 하다니.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아마 정신이 혼미했던 탓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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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블리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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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의 부름에 리엘라 블리니테가 대답했었다.

리엘라 블리니테였다.

약에 온몸이 흠뻑 절 정도로 진정제를 퍼마셔야만 겨우 가라앉힐 수 있는 발작을 단 몇 마디 부름으로 몰아내 버린 건, 바로 그 여자였다.

천사도 여신도 아닌, 보잘것없는 그 여자.

리엘라 블리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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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대체 뭐지?’

이제 와서 헤르한은 다시 속으로 물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그녀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단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르 데르에서의 그날 밤에.

병증이 진정되었는데도 헤르한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 여자의 정체를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고, 자신을 바라보던 그 여자의 얼굴이 눈이 밟혀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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