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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날 밤에 우리 (10/154)


  • #10 그날 밤에 우리
    202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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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이 앉으라고?’

    리엘라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쉬었다. 헤르한은 정면으로 부딪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리엘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던 서류는 아예 덮어둔 채였다.

    황제의 명이었다. 저 같은 게 감히 가까이 다가가도 될까를 판단할 자격은 없었다.

    리엘라는 조심스레 일어났다.

    한 칸 옆자리로 옮기려고 하니 헤르한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한 자리, 한 자리 더 가까이 나아가다가, 리엘라는 결국 대담하게 헤르한의 바로 대각선 맞은편에 앉았다. 그제야 황제는 서늘한 시선을 거두어갔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이리 오라기에 왔고, 가까이 앉으라기에 앉았는데 그다음을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황제의 말을 기다려봤지만 그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황제는 한참 후에나 침묵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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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리엘라가 그런 그의 의중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헤르한은 피로함이 깃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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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나?”

    아, 먼저 말하라는 건가, 하고 고개를 끄덕거린 리엘라는 얼결에 첫마디를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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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게 갖고 싶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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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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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하시는 게 있다면 반드시 구해보……겠습니다.”

    이번엔 헤르한 쪽에서 리엘라가 하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리엘라가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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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합니다. 대답을 기다리시겠다고 했는데. 도저히 무엇으로 값을 치러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폐하의 뜻을 여쭤본다는 것이…….”

    아. 당신을 도와준 값을 치르라고 했던 것.

    헤르한은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뱉어놓고도 잊고 있었던 말인데, 저 여자는 여태 그걸 신경 쓰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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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구합니다. 폐하께선 이미 세상의 주인이시니 따로 갖고 싶은 것이 없으시겠죠.”

    리엘라는 지레짐작하며 또 사과했다.

    그게 웃기고 황당해서 헤르한은 기가 찬 헛웃음을 뱉고야 말았다.

    머뭇거리면서 말해놓은 것 치곤 그 내용이 너무 당돌하지 않은가. 무엇이 갖고 싶냐니. 말을 하면 줄 수는 있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주제에.

    헤르한은 몇 번 더 실소를 뱉었다.

    리엘라는 자기 말의 어폐를 깨닫곤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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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말이 맞아. 난 갖고 싶은 것은 전부 가졌다. 내가 아직 갖지 않은 게 있다면, 그건 그 누구도 영영 갖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러니 너는 구할 수 없을 테고. 대답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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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저는 무엇으로 은혜를 갚아야……. 증언을 하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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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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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를 암살하려고 용병단을 고용한 게 왕실이었다는 사실이요. 그래서 저를 데려오신 것 아닌가요? 왕실의 덜미를 잡을 증거품으로서.”

    그 말에 헤르한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내려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가 왕실로부터 리엘라를 빼앗아 온 건 당연히 정치적인 이유가 주였다.

    하지만 방금 리엘라의 말은 어딘가, 아주 몹시, 언짢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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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를 물건 취급하는 것이 아주 익숙하군?”

    리엘라는 움찔거렸다. 황제의 말이 너무나 아프게 박혀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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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증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증거는 내 쪽에 이미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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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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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따위의 도움은 필요 없어. 그런 걸 바라고 거둔 것이 아니다.”

    갑자기 야멸차게 변한 헤르한의 태도에 리엘라가 눈을 크게 떴다. 테이블 아래로 내린 손은 옷자락을 꽉 그러쥔 채로. 또 혼자서 모멸과 두려움을 삭히고 있었다.

    그 모습에 헤르한의 목을 타고 뜨거운 감정이 왈칵 치밀었다.

    이 여잔 어째서 이렇게 필사적이면서도 비명도 내지르지 않는 건가.

    숨을 죽이고 불안하게 떠는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울려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단 몹쓸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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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뭔가를 주고 싶다면 차라리 몸을 주지 그래?”

    그래서 헤르한은 일부러 칼날 같은 말을 그녀의 심장에 내다 꽂았다.

    반응은 딱 예상한 대로였다.

    처음엔 하얗게 질려서 경악하더니 곧 참담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뭔가를 말할 듯 말 듯 몇 번이고 입술을 뗐다가 들숨을 쉬었다가 다시 눈을 질끈 감아버리기를 반복하다가.

    그러다가 마침내 괴로운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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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우리가, 그날 밤에…….”

    리엘라는 차마 질문을 다 마치지도 못했다.

    역시 그날 밤의 일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헤르한은 진실을 말해줄 수도 있었다. 많은 일이 있었던 밤이지만, 적어도 네가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없었다고.

    하지만 어째서인지 헤르한은 그러기가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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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맞아.”

    리엘라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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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 안 난다고 발뺌하는 건 아니겠지? 본인이 날 그렇게 붙잡아놓고.”

    거짓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이유 모를 심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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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랬……군요.”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리엘라를 보면서 헤르한은 그다음으로 자신에게 날아들 공격을 기다렸다. 뺨을 치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왜 그랬냐는 한 맺힌 원망 정도는 당연히 날아올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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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합니다. 황족이신 줄도 모르고 제가 폐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리엘라는 사과를 했다.

    정말 가관이었다. 너 따위는 도움도 안 된다고 무시해도 참고, 예전에 내가 너를 취했으니 또 몸을 내놓으라고 쓰레기처럼 굴어도 도리어 사과를 하고.

    이 여자는 대체 무엇을 견디며 살아온 걸까? 어쨌기에 저 모양으로 망가진 거지?

    헤르한은 그녀를 더 보고 있기가 힘들어서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버렸다.

    그 후, 응접실에 홀로 남겨진 리엘라에게 천천히 다가온 건 아시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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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 내가 역시 이럴 줄 알았지.”

    아시온이 혀를 끌끌 차며 한숨을 뱉었지만 리엘라는 괴롭게 고개를 숙인 자세 그대로 아시온을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죄송합니다.’ 하고 또 한 번 지친 목소리로 사과했다.

    아시온은 리엘라를 안쓰럽게 보며 헛웃음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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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가 그렇게 죄송합니까? 그게 말버릇입니까? 그만 일어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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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한이 돌아와 누운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아시온이 다짜고짜 침실 문을 열고 전투적으로 들어섰다.

    헤르한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아시온이 복도 뒤쪽에 서서 리엘라와의 대화를 모두 엿듣고 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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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블리니테는 침실까지 잘 데려다주었습니다.”

    아시온은 웃긴 구석이 있는 자였다.

    방금처럼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또 유모처럼 귀찮게 굴기도 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온은 대꾸도 없이 가만히 침대에 기대어 있는 헤르한에게 다가가 그의 안색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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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헤르한은 그런 아시온에게 짧게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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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싫습니다.”

    그러자 아시온도 짧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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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말로 할 때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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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

    하지만 적당한 협박조를 섞어서 주군이 두 번씩이나 명령하는데 버틸 재간은 없었다.

    결국 아시온은 헤르한에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헤르한은 가볍게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아시온의 생각은 아주 우렁차고 명백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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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움 구경 엄청 재미있던데요. 되게 심술 맞게 구시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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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언짢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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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게. 저 몰래 그리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니 언짢은 일이 생기는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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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여자를 다 안으시고. 둘이 무슨 사이인 줄은 알았지만. 참나. 아니 대체 어느 틈에? 정말 능력도 좋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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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머릿속으로도 잔소리만 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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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과 속이 일치하니, 얼마나 믿음직하고 좋습니까?”

    헤르한은 실없이 한번 웃고는 아시온의 손을 놓았다.

    마음의 소리로까지 잔소리가 너무 심했나. 아시온은 머쓱해서 괜히 어깨를 한번 휘휘 돌리고는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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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한테 이러지 마시고 리엘라 블리니테의 속마음이나 읽으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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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들려. 그 여자 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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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래서 그렇게 못되게 구셨군요.”

    인정하기 싫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면 아까처럼 괴롭히진 않았겠지. 하지만 이상하게 그 여자의 마음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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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폐하의 능력이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이 종종 있긴 하니까요.”

    아시온의 말이 맞았다.

    헤르한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선천적으로 타고 태어났지만, 그 능력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늘 똑같이 통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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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걸 아는데도…….’

    왜 그 여자의 마음이 깜깜한 것이 이렇게 답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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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저나 능력 남발하지 마십시오. 건강 해친다고요. 오늘 저녁에 약은 드셨습니까? 두통은 좀 어떠세요?”

    헤르한의 상념을 깨우듯 아시온이 말했다.

    다시 이어지는 잔소리 2차전에 헤르한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척했다.

    하지만 그렇게 애를 써도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아까 일부러 상처를 주었을 때, 옷자락을 꽉 쥔 채로 부들부들 감정을 삭이던 리엘라의 핏기 없던 하얀 손이었다.

    *

    뒤척이는 건 리엘라도 마찬가지였다.

    별궁에서 다시 눈을 뜬 이후로는 줄곧 잠을 설쳤지만 오늘 밤은 특별히 더 심란했다.

    황제 앞에서는 온 힘을 다해 괜찮은 척했지만. 아니었다. 사실 리엘라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 그런 스스로를 하찮게 여긴 제 맘을 들켜버린 것.

    무엇보다, 어쩌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품었던 기대가 그의 입을 통해 어긋나 버린 것.

    모든 것이 하나같이 리엘라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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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대체 뭘 기대한 거야…….’

    생각해보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자길 그리 아껴주었던 파비안과 동료들도 모두 저를 버리고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그 남자라고 무엇이 다를까.

    하물며 엘슈바이크 제국의 황제는 더 바쁘고, 더 매정하다고 소문난 남자였다. 고작 하룻밤을 취한 여자에게 쓸데없는 온정 따위를 베풀 리가 없는.

    그런 그가 굳이 왕녀로부터 자신을 구출해 이곳에 두었다는 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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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로 다시 내 몸이라도 원하는 건가.’

    그쯤에서 리엘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더 눈물이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미리 열심히 울어둔 탓인지, 아니면 이젠 웬만한 일에는 울지 않을 내성이 생기기라도 한 것인지.

    그다음 날 저녁, 리엘라는 이번엔 자신이 직접 황제를 찾아가기로 했다.

    사실 황제는 마음만 먹으면 어젯밤에도 자신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차라리 몸을 주지 그러냐고 물어봐 준 건, 아무리 모난 말이어도 황제가 죄인에게 하는 것치곤 후한 대접이었다.

    그러니 리엘라는 반드시 그 물음에 대답해야만 했다. 그의 말마따나,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처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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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지? 멈춰. 여긴 황제 폐하의 공간이다.”

    황제의 내실 앞을 지키던 기사는 거기까지 용감하게 다가온 리엘라를 황당하다는 듯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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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쪽 서재에 계실 겁니다.”

    한숨을 한번 쉬고 내실 문을 열어준 건 아시온이었다.

    그는 공손하게 묵례까지 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리엘라를 보고 당황해하는 기사에게 ‘아가야, 네가 모르는 그런 게 있단다’ 하고 츳츳 혀를 찼다.

    별궁 내실은 한 칸짜리 리엘라의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은 천장과 그 자체의 위엄을 지녔다. 번쩍거리는 샹들리에, 성스러움마저 풍기는 넓고 호화로운 공간이었다.

    꼭 황제를 닮은 방이었다. 너무 고귀하고 우월해서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두렵게 만드는 점이.

    용기 내어 달려왔는데, 심호흡을 해봐도 파르르 떨리는 숨만 새어 나왔다. 그럴수록 리엘라는 가녀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서재는 내실 로비에서 바로 오른쪽이었다.

    살짝 벌어진 문틈으로 빼곡한 책장들이 보여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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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문이 열려 있는데도 리엘라는 일부러 노크를 하고 인기척을 냈다. 그런데도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바쁘신 건가. 아니면 그냥 축객령인가.

    아무래도 후자일 것 같아 시선을 내리깔고 짙게 망설이는 리엘라의 눈에 헤르한의 손끝이 보였다.

    서재 안쪽, 맨바닥에 축 늘어진 채로 뻗은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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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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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는 더 허락을 기다릴 겨를도 없이 서재 문을 벌컥 열었다.

    서류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책상 아래, 헤르한이 쓰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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