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 입술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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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 입술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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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 입술의 맛
2021.07.22.
아시온은 주군의 말마따나 병실에서 이틀을 먹고 자며 지냈다. 처음엔 헤르한에게 두고두고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았지만, 사방에 리엘라를 노리는 적이 한둘이 아닌 것을 겪고선 헤르한이 자신을 이곳에 보낸 진의를 깨달았다.
그녀를 감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지키라는 것이었음을.
이해는 했다. 리엘라 블리니테는 리오타 왕국을 굴복시키는 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니까.
‘하지만 그 이상의 뭔가가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원래 헤르한은 남에게 쉽게 관심을 주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리엘라 블리니테에 관한 일에는 어쩐지 눈빛이 조금 달랐다. 심지어 정식 보고를 올리기도 전에 이미 그 여자의 신상에 대해선 전부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지 않았던가.
‘혹시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뭔가…….’
‘……가 있을 수는 없지. 같이 황실을 뛰쳐나왔던 그 옛날부터 365일 24시간 늘 껌딱지처럼 붙어서 그분을 지킨 내가 모르는 게 있을 리가!’
아시온은 그렇게 참 빠르게도 의혹을 털어버렸다.
리엘라 블리니테는 그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다.
아시온은 리엘라가 기력을 회복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다가 그녀의 앞에 앉았다.
“푹 주무셨습니까? 기다리느라 혼났습니다. 나누고 싶은 얘기가 한둘이 아닌지라.”
“…….”
사경을 헤맨 끝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는 리엘라 블리니테는 대답 없이 먼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공허한 눈빛 앞에 선 아시온은 암담했다.
리엘라 블리니테가 깨어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무래도 어렵겠습니다. 그 여자, 입을 열지를 않습니다.”
“처음이니 두렵겠지요. 엄밀히 우리는 피고인 쪽이니 죄인이 겁을 먹는 것도 당연합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설득해보면…….”
“아뇨.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카넬 경이 직접 못 보셔서 그런데…….”
아시온은 참담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런대로 참모진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 대단한 설명이랄 것도 없었다.
리엘라 블리니테가 입을 안 연다, 말 그대로, 그냥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설득이든 협박이든 상관없이, 내 말은 듣는 척도 않는다.……는 것이 다였으므로.
“이상하군.”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낮게 혼잣말을 한 건 헤르한이었다.
여태 심각한 얼굴로 말을 듣고만 있던 주군이 무슨 반응을 보인 것이 반가워, 아시온은 대뜸 목청을 키웠다.
“그렇죠? 가만히 있으면 본인 처형식만 가까워질 텐데.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억울함을 풀어야 할 때 이러는 건 아무래도…….”
“내 얼굴을 보고도 아무 얘길 안 했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니까요. 어떻게 폐하 얘길 하나도 안 할 수가……. 아니……. 네?”
아시온은 어이없다는 듯 헤르한을 보다가 되물었다.
“지금 그 맥락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맥락이야.”
“그 맥락이 무슨 맥락인데요. 그러면 그 상황에, 그 여자가, ‘와 폐하 되게 잘생겼더라!’ 하면서 손뼉이라도 쳤어야 한다, 그런 겁니까?”
“그래. 뭐, 대충. 그런 거라도.”
“예?”
아시온의 말은 농담이었는데, 헤르한의 대답은 농담인 것 같지가 않았다.
심지어 헤르한은 선 자세 그대로 고심하다가 아시온이 잠시 벗어둔 로브를 자기가 걸치기 시작했다. 그건 병실 출입을 허가받은 의료진과 조사관에게만 배급된 로브였다.
“폐하. 설마 병실에 직접 가시겠다는 건 아니시죠?”
아시온이 두려운 표정으로 실실거렸다. 다른 참모진들도 마찬가지인 얼굴이었다.
하지만 헤르한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명쾌하기만 했다.
“아까 네가 그랬잖아? 직접 못 봐서 그런다고. 그러니 내가 직접 보고 오는 수밖에.”
“폐, 폐하…….”
“아무도 따라오지 마라. 황제가 움직인다는 걸 떠들썩하게 알리고 싶지 않으니까.”
헤르한은 그렇게 엄포를 놓곤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그런 헤르한의 뒤를 의전관이 부랴부랴 따라나섰다. 갈 땐 가시더라도 보던 서류는 다 확인해달라며, 그가 내민 건 왕실 측에서 보내온 수두룩한 연회와 접견 일정이었다.
“…….”
잠시 걸음을 멈춘 헤르한은 고개만 살짝 틀어 묵직한 서류를 한 번, 그 뒤 의전관을 한 번 거칠게 노려봐주었다.
“폐하, 그게……. 벌써 사흘이나 공식 일정을 전부 미루지 않았습니까? 더는 왕실의 요청을 무시하기가…….”
“…….”
“하, 하루만 더 미룰까요?”
“…….”
“그렇게 하겠습니다…….”
헤르한의 침묵 속에 담긴 겁박에 의전관은 알아서 고개를 수그리고 뒤로 물러났다.
헤르한은 다시 동쪽 병동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결국은 이렇게 참지 못하고 스스로 그녀를 만나러 가게 된 길에, 헤르한의 눈은 서늘한 이채를 띠었다.
*
“자. 약.”
병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궁의는 짜증 어린 얼굴로 리엘라에게 약물이 든 컵을 내밀었다.
왕가의 건강을 살펴야 할 궁의가 천한 죄인에게나 매여 있다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꾹 참고 꼬박꼬박 죄인에게 약을 대령하는 건 왕녀 저하의 특별한 지시 때문이었다.
‘그 잘생긴 조사관은 없네. 웬일로.’
허튼 자가 접근하지는 않는지, 누가 죄인을 공격하거나 빼돌리지는 않는지. 계속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던 조사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을 보고 궁의는 팔짱을 꼈다.
마침 짜증이 나던 터에 잘된 일이었다. 이제야 마음껏 악담이라도 퍼부을 수 있게 되었으니.
“죄인 팔자가 참 좋아? 왕실이 몇 주나 공들인 영접식을 깽판 쳐도 용서해줘, 왕국 병실에서 치료도 해줘, 천한 몸 상하실까 이리 귀한 약까지 내주고.”
궁의는 기다렸다는 듯이 악다구니를 쳤다.
그런데도 리엘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 말을 제대로 듣긴 한 걸까?
“꼴깍꼴깍 잘도 받아먹는구나? 웃겨. 어차피 곧 사형당할 텐데. 목이 잘릴 땐 잘리더라도 건강은 챙기고 싶은가 보지?”
제대로 못 들었을까 봐 다시 말을 던져 봐도 리엘라의 무시는 일관적이었다.
와. 황제의 목을 노렸던 여자라더니, 확실히 독종은 독종이네. 아니면 그냥 멍청한 건가.
“뭐야. 진짜 재수 없어.”
리엘라가 잔을 다 비우자, 궁의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병실을 홱 나와 버렸다.
죄인이 반항하지 않고 얌전하다는 건 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분은 더 나빴다. 꼭 시체를 상대하는 것만 같아서 찝찝하고 불쾌하달까.
어찌 보면 이상할 정도였다.
소문으로는 포악한 암살자라던데, 정작 저 ‘리엘라 블리니테’는 포악은커녕 자신의 독설에 한마디도 받아치지 않을 만큼 맹하기만 하지 않은가.
마침, 옆 복도에서 리엘라에 관한 수다가 한창이기에 궁의는 재빠르게 그 틈으로 합류해 말을 섞었다.
“그냥 맹하기만 하면 다행이려고? 가끔 보면 좀 섬뜩하다니까요.”
“맞아요. 꼭 혼이 빠진 사람 같지 않아요?”
“깨어난 이후로 뭘 하나 계속 지켜봤는데, 그냥 가만히 벽만 보고 있더라니까요? 오전 내내 꿈쩍도 안 하고요!”
“불러도 대답도 안 하는 건 예삿일이고요. 다시 처형당할 생각에 미쳐서 벙어리가 돼버렸단 말이 돌던데.”
“하긴. 이제 깨어났으니까 조만간 다시 처형이 논의되겠죠.”
“아으. 어떻게 하든 빨리 치워버렸으면 좋겠어요. 불길하고 짜증 나.”
궁의는 몸서리까지 쳐가며 열심히 동료들과 불평불만을 늘어놓느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자신이 리엘라가 비운 잔을 병실 안에 그대로 두고 나와 버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복도 뒤에서 그들의 말을 잠자코 듣던 남자가 리엘라의 병실 안으로 들어가 그 잔을 손에 쥐었다는 사실까지도.
“벙어리가 되어버렸다고.”
병실 안.
손에 쥔 빈 물잔을 바라보는 헤르한의 눈길은 설산에 몰아치는 서릿발처럼 냉담했다.
“그쪽 고된 사정도 이해하지만, 그런 핑계로 계속 날 모른 체하면 안 되지.”
침대로 한발 다가간 그가 리엘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리엘라는 침대에 반듯하게 앉은 자세 그대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느슨하게 풀린 동공을 아무렇게나 둔 채로, 방문객이 온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하고 또 말을 걸려다 말고 헤르한은 잔을 내려놓았다.
“…….”
그리고 그 손으로 리엘라의 턱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헤르한의 엄지가 리엘라의 붉은 입술 위를 쓸었다. 아까 마신 물약을 아직 머금은, 촉촉한 입술이었다.
약 때문인가.
말캉한 살결 위를 훑는 헤르한의 손끝이 화끈거렸다. 꼭 불에 타들어 가는 듯 머리까지 아찔해서 헤르한은 한번 이를 꽉 물곤 그만 손을 뗐다.
그리고 그 손끝을 다시 제 입으로 가져와, 리엘라의 입술에서 묻어난 것을 핥았다.
정체를 알 것만 같은 쓰디쓴 맛이었다.
헤르한의 이마에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얼마 뒤.
헤르한이 돌아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아시온은, 별궁으로 돌아온 그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한마디 말도 걸 수 없었다.
헤르한은 리엘라 블리니테에 관해선 일언반구도 없이 다짜고짜 의전관을 호출해 명령했다.
“국왕과 오늘 저녁 만찬 일정을 잡아. 왕녀도 참석하는 것으로.”
“아? 정말이십니까? 예!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국왕께서 아주 기뻐하시겠는데요. 그쪽에서 준비는 다 해두었다고 하니 시간에 맞추어 가시기만 하면…….”
“아니. 만찬을 베푸는 건 우리 쪽. 제국에서 가져온 식재료를 가지고 음식을 준비하라 일러라.”
“예?”
“왕실에 신세 지고 있으니, 한번은 우리 식으로 대접해줘야겠지.”
의전관은 얼떨떨한 얼굴이었으나, 어쨌든 좋은 게 좋은 모양이라 생각하고 물러났다.
다른 참모진들도 잇따라 물러간 후, 아시온과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야 헤르한은 느린 말투로 알쏭달쏭한 질문을 던졌다.
“아시온. 7년 전이었나. 하니스트에서 붙잡았던 포로들 기억하나?”
“예. 클라디 독으로 스스로 입을 막고 버티다가 자결해버렸던 놈들 말이시지요. 그런데 그 얘기는 지금 왜?”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헤르한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시온은 스스로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아내고는 낮게 탄식했다.
“……아.”
아시온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병동에서 돌아온 뒤 헤르한이 줄곧 보인 것과 같은 빛깔로.
*
“이 영광스러운 것을 어찌해야 할지. 황제께서 직접 마련해주신 식사 자리에 초대받은 군주는 제가 처음일 겁니다!”
그날 저녁. 별궁의 응접실에 차려진 만찬장에서 국왕 타란 2세는 아주 만족스럽게 껄껄 웃어댔다.
하지만 그레타는 그런 제 아버지가 한심하고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황제가 생색내며 마련한 식사 한 끼에 그간의 모욕을 다 잊고 허허실실한 꼴이라니!
“여독이 꽤 짙더군요. 휴식이 길었습니다.”
“아이고. 그럼요. 그러시겠지요. 저희는 다 이해합니다.”
‘이해하기는 무슨!’
가뜩이나 죄인 관리가 엉망이라고 첫날부터 공개적인 망신을 당한 참에, 왕실이 고생해서 준비한 모든 연회와 접견 일정에 보이콧까지 당한 건 엄청난 능욕이었다.
아마 그대로 며칠만 더 있었더라면 왕궁 대신들과 귀족 사회가 폭동이라도 일으켰으리라.
그런데 이제 와서 선심을 베푸는 황제의 의중을 그레타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분명 무언가 음흉한 속내가 있을 텐데, 대체 그게 무엇이냔 말이다.
“어찌, 머무심에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예. 궁이 참 아름답더군요. 신경 써주신 덕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그것참 기쁜 말씀입니다!”
심지어 믿을 수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라 께름칙했다.
가장 떨떠름한 건, 실속 없는 대화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동안 리엘라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는 거였다.
자신들이야 일부러 말을 피하고 있다지만 황제는 대체 왜? 리엘라 얘기를 하려고 저들을 부른 게 아닌가?
‘계속 조사관을 붙여놓고 감시까지 했으면서, 왜 지금은 아무 관심도 없는 척……. 대체 어쩔 작정이야?’
알 수 없는 헤르한의 심보가 그레타는 영 불편했다. 또 한편으로는 은근한 기대심도 들었다.
‘리엘라가 여태 입을 열지 않으니 포기한 걸 수도 있어. 역시 그쪽이 가장 합당하…….’
그렇게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레타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어느새 헤르한 황제가 서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던 것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레타는 사레들린 기침을 마구 뱉어냈다. 난데없이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가슴이 벌렁거리고 당혹스러웠다. 꼭 제 속마음을 다 듣기라도 했다는 듯이 헤르한 황제가 싸늘한 웃음을 머금어서 더욱.
“이런. 왕녀께서 많이 긴장하셨나 보군.”
“아닙……. 쿨럭! 송구…… 읍, 쿨럭!”
“빌. 왕녀께 차 한 잔을 내어드리도록 해.”
그레타는 당황한 만큼이나 심하게 캑캑거리며 기침했다.
그런 그레타 앞엔 곧 노란빛의 차 한 잔이 놓였다.
“드십시오. 진정효과가 탁월한 차니.”
“가, 감사합니다…….”
헤르한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괜히 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명분도 서지 않았다.
그레타는 몇 번 더 속기침을 삼킨 후에 차를 마셨다. 진정효과가 있는 차라던 황제의 말은 정말이었는지, 금세 기침이 멎고 민망함에 들떴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오. 참 신통한 차로군요.”
“국왕께서도 한 잔 받으시겠습니까?”
“좋습니다. 황제께서 엘슈바이크에서 직접 가져오신 차를 다 대접받다니, 몸 둘 바를 모를 따름입니다.”
헤르한은 여유 있게 타란 2세의 지독한 아부를 웃어넘겼다.
“남방의 섬에서 수입한 것이니 정확히는 제국 땅에서 난 것은 아닙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클라디’……라는 독초인데.”
“……큽!”
그때였다. 헤르한이 차 종류의 이름을 말한 그 순간.
기침을 다 가라앉혔나 싶었던 그레타가 전보다 더 크게 펄쩍 뛰어오르며 마시던 것을 반쯤 뱉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