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덫 (5/154)


  • #5 덫
    2021.07.15.


    모든 걸 잃은 그해 가을과 겨울은 꼭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았는데, 사람이란 생각보다 단단한 존재였고 세상도 그리 쉽게 무너지진 않았다.

    그렇게 리엘라는 리오타 왕국 남부의 아주 깊은 산골 마을 갈랜드의 일원이 되었다. 풍요롭진 않지만, 꽤나 정답고 소박한 평화가 머무는 곳이었다.

    리엘라는 낯선 자신을 말없이 보듬어주었던 페르니에 부인의 술집에서 정신없이 일하며 지냈다.

    리엘라는 그런대로 잘, 해나갔다.

    ‘그런대로 잘’ 그럴 수밖에 없었던 동료들을 이해해보려고도 했고, ‘그런대로 잘’ 과거를 떨치고 새로운 삶에 적응했고.
    또 그런대로 잘, 파비안을 잊어나갔다.

    그러는 동안 계절은 빠르게 변화했다.

    남은 가을과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봄을 맞이했을 때쯤엔 절대 낫지 않을 것 같던 상처들도 제법 아물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문 것이 아니라 무뎌진 것이었지만.

    도망쳐서 숨어든 곳이 이곳 마을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갈랜드의 바쁜 일상은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잊게 해주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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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우리 술값 계산해달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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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 씨. 아까 계산하셨잖아요. 벌써 취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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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소리야아. 난 계산한 적 없는데. 딸꾹! 어서 술값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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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싫어요. 그랬다가 또 내일 와서 다시 물려 달라 하실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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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으으응! 절대 안 물려. 이건 리엘라에게 주는 거니까아, 아 받으래도?”

    혀가 꼬부라진 손님 앞에 리엘라가 난색을 보이자 계산대에 있던 부인이 깔깔 웃었다. 빌 씨가 리엘라에게 용돈을 주시려나 보네, 리엘라, 그냥 모른 척하고 받아, 하면서.

    리엘라는 제 앞에서 우스꽝스럽게 휘청거리는 손님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바쁘게 지내면서 사소한 것에 웃기도 하다 보면, 아직 아픈 기억들로부터도 언젠가 해방될 수 있겠지.

    리엘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딸랑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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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어서 오……. 어머나?”

    늘 똑같은 단골손님으로만 북적이는 술집 안에 뜻밖의 손님이 들어선 건 바로 그때였다.

    싸구려 맥주 한 잔에 하루의 회포를 풀던 이들로 시끌벅적하던 실내가 일시에 침묵에 잠겼다.

    모두의 이목은 철갑을 두른 낯선 방문객들에게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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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어서 오세요. 왕실 군이…… 이런 누추한 곳엔 어쩐 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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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병사들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딱딱한 얼굴로 안을 두리번거리기만 하는 그들은 꼭 미리 맡겨둔 물건을 찾으러 온 사람들 같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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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저기 있군.”

    수배 전단을 든 맨 앞의 병사 눈에 붉은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선 청초한 여자가 들어왔다.

    누가 봐도 이런 곳엔 어울리지 않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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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블리니테.”

    병사는 리엘라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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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법에 따라 널 체포한다. 제국에 인도되기 전까지, 이 시간부로 너의 신병은 우리 리오타 왕국의 왕실 군이 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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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뭐라고요? 체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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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가? 여보세요. 뭔가를 잘못 아신 것 아닌가요?”

    페르니에 부인을 비롯한 술집 직원들과 근처의 손님들이 놀라 달려들었지만, 병사들은 손쉽게 그들을 물리치고 리엘라의 손목을 구속했다.

    리엘라는 그저 멍한 얼굴로 휘청거렸다.

    이게 뭘까? 꿈인가? 이제야 악몽에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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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 좀 놔 보십시오! 리엘라가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다는 겁니까?”

    그때 손님 중 가장 젊고 건장한 사내가 뛰쳐나와서 병사의 멱살을 잡았다. 평소 리엘라에게 은근히 추파를 던지며 호의를 베풀던 남자였다.

    병사는 그 남자에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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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슈바이크 대제국 황제 폐하의 암살을 모의한 죄다.”

    병사가 뿌리치지도 않았는데 넋을 잃은 사내가 스르륵 멱살 잡은 손을 놓았다. 매섭게 항의하던 다른 손님들도, 페르니에 부인도 전부 경악한 표정으로 제 입들을 틀어막았다.

    싸늘한 침묵이 리엘라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리엘라에게 수갑을 다 채운 병사는 이제 리엘라의 몸통을 사슬로 감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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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리는 마차 안에서 리엘라는 계속 간절하게 외쳐댔다. 말도 안 된다고, 착오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제국의 황제 같은 사람을 자신이 무슨 수로 암살하냐고.

    처음에 병사는 리엘라의 말을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하는 수 없이 대답해준 건, 이틀이나 먹지도 자지도 않고 악을 쓰며 덤비는 리엘라를 이길 수 없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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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골짜기에 숨어 있었기로서니, 간 크게 일을 벌여놨으면 세상사 돌아가는 꼴은 살펴봤어야지. 제국에 행방불명되었던 황태자가 돌아와 새 황제가 된 걸 정말 몰랐단 말인가? 너희 용병단이 작년 가을에 죽이려 했던 바로 그 황태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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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무슨……. 잠깐, 작년 가을이라고요……?”

    리엘라는 자기 귀를 의심해야 했다.

    작년 가을이라면 자신이 파비안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그레타 왕녀를 만나고, 떠올리기조차 가슴 아픈 배신을 당했던 바로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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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 착오가……. 그때 우리가 맡은 건 도적단이었어요. 제국의 황태자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심지어 그때 의뢰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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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뢰인이 뭐. 왕실이라고?”

    병사의 선답에 리엘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동시에 이제야 제 억울한 누명이 풀리려나 싶은 희망도 들었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병사는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리엘라를 비웃을 뿐이었다. ‘거봐, 죄인이 분명 왕실 탓을 할 거라더니, 왕녀 저하 말씀이 딱 맞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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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진한 척 발뺌해도 소용없다. 네가 황제의 암살 작전을 주동했다는 관련자들 증언은 모두 확보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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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지도 않은 일에 관련자들이라니?’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드는 리엘라에게로 또 한 번 조롱의 웃음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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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동료들 말이다. 너의 간계에 속아 범죄에 이용당한 용병단 동료들. 그리고 그 외 목격자들까지. 전부 널 진범으로 지목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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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말까지 듣고서야 리엘라의 머릿속에 가득 찼던 의문들이 해소되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리엘라는 여태껏 자신이 사랑이 식은 연인에게 버림받은 정도의 비극에 처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위험한 배신을 당한 모양이었다.

    리엘라가 왕궁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 어느 늦은 밤이었다. 마차는 일부러 정문을 통하지 않고 뒤쪽 후문을 통해 궁 안에 들어섰다.

    혹시 파비안이 여기에 있을까. 동료들도, 그레타 왕녀도 이곳에 있을까.

    감옥으로 끌려가는 동안 리엘라는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면 어떤 표정을 보일지를 연습했다. 표독스럽게 노려봐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바보처럼 울지는 않으려고 계속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그조차 헛된 기대였다. 막상 마차에서 내리는 리엘라를 맞이한 건 그녀를 인계받기 위해 마중 나온 간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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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추울 거다.”

    간수는 리엘라를 얼음장 같은 감옥 안에 내던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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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며칠만 잘 버텨봐. 그 뒤엔 편안해질 테니까.”

    리엘라가 그 말뜻을 알게 된 건 며칠 뒤였다. 간수들이 들으란 듯이 나누는 얘기를 통해서였다.

    그들은 제국의 황제가 이곳 리오타 왕궁에 도착하기까지 며칠이 남지 않았다는 것과 황제가 도착하는 즉시 시행될 처형식에 관해 얘기했다. 처형식의 주인공은 물론, 리엘라였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나락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두려움 속에서. 리엘라의 의식은 점점 흐려져 갔다.

    그때까지도 차디찬 철창 안엔 오로지 리엘라뿐이었다.

    파비안도, 리엘라의 동료들도. 그레타 왕녀조차도 나 몰라라 얼굴 한번 들이밀지 않았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철저한 외면이었다.

    *

    리오타 왕궁의 봄은 아름다웠다. 올해는 유난히 더 그랬다. 엘슈바이크 대제국의 새 황제의 공식적인 방문을 앞두고 왕실이 죽자고 달려들어 조경에 힘쓴 덕이었다.

    조경뿐만이 아니었다. 성문의 녹슨 경칩에서부터 사람의 시선은 닿지도 않는 왕궁 지붕 꼭대기까지, 광이 나도록 닦고 또 닦았다.

    왕국 영토를 가로지르는 대대적인 도로 공사도 있었다. 제국과 접한 국경에서부터 왕성까지, 황제의 마차가 지나갈 만한 길목이란 길목은 죄다 갈아엎어졌다.

    황제와 그의 수행단이 머물 별궁도 단장을 마쳤고, 황제의 방문을 환영하는 대연회 준비는 이미 2주 전에 마무리되었다.

    더 손을 댈 것이 없이 모든 준비가 완벽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궁의 주인, 타란 2세의 안색은 창백하기만 했다. 그레타는 딱딱 이를 부딪칠 정도로 긴장한 왕에게 바짝 붙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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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 마세요. 아버지. 우리 하나도 꿀릴 거 없으니까.”

    우아하게 치장한 모습만큼이나 그레타 왕녀는 당당한 모양새였다.

    곧 전령의 호각 소리가 하늘 높이 뻗어가자 성문이 묵중한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엘슈바이크 제국의 새 황제의 사절단은 군대처럼 성문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인접국과의 친교를 위한 의례적인 순방인데도, 수백 명의 수행원이 전장에 나서는 것처럼 절도 있고도 화려한 모양새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웅장한 행렬 가운데 유난히 화려하고 키가 큰 말이 있었다.

    제국의 새 황제. 헤르한을 태운 말이었다.

    그레타는 잠시 그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헤르한의 존재가 그리 달갑지 않은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때맞춰 왕궁 의장대가 터트린 축포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게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황제에게 바보같이 얼빠진 얼굴을 보일 뻔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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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오. 대륙의 새로운 태양. 엘슈바이크의 젊은 황제이시여.”

    국왕 타란 2세가 팔을 벌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레타 역시 품위 있는 걸음으로 한 발 뒤에서 국왕을 따랐다. 그들은 그렇게 기쁘게 황제를 맞는 표정, 손짓, 걸음걸이를 백 번도 넘게 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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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께서 친히 이곳을 방문해주심을 진심으로 환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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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국왕.”

    그런데 정작 헤르한은 왕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끊었다. 그가 말에서 내린 뒤로도, 이어진 행동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제 옷에 붙은 먼지를 탁탁 털어내는 것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일국의 왕답지 않은 저자세로 헤르한을 맞던 타란 2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방에서 꽃비가 흩날리는데도 이상하게 전운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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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 먼 길을 오시느라 여독이 깊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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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인지 귀가 아프군요.”

    헤르한의 심드렁한 대답에 국왕은 질겁하며 당장 군악대의 연주를 멈추도록 지시했다.

    북소리까지 멎으니 그곳은 전쟁터와 다름없이 삭막했다.

    싸늘한 분위기를 알아챈 의전 대신이 다급하게 나아갔다. 그는 헤르한을 궁 안 마련된 곳으로 안내하고자 했지만, 헤르한은 슬쩍 고개를 비트는 것으로 탐탁지 않은 뜻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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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왕궁을 둘러보시겠습니까? 마음껏 노독을 푸신 후엔 성대한 환영연도 준비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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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전에. 먼저 왕국으로부터 인도받기로 한 것을 확인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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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예? 아……. 그 죄인을…… 지금 말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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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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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여기서……. 말씀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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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르한은 두 번 대답하지 않았다.

    의전 대신은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직 기나긴 행렬이 몰고 온 먼지도 가라앉지 않은 상황. 심지어 자신들을 향하는 시선이 수천 개인 이곳에 ‘그 여자’를 당장 꺼내놓아도 될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준비해놓은 처형대도 이곳에서 꽤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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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부대로 대령하겠습니다. 폐하.”

    그때, 대신의 대답을 가로챈 것은 그레타 왕녀의 명랑하고도 기품 있는 목소리였다.

    그레타는 곧바로 옆의 병사들을 시켜 리엘라를 이쪽으로 끌고 오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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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타. 정말 괜찮겠느냐? 여기서……. 분명 황제가 칼부림을 낼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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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 오히려 잘 됐어요. 많은 이들이 보고 있으니 국가 법도의 위엄이 더 바로 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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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그레타는 제 옆에 찰싹 달라붙어 바들바들 떠는 부왕의 귀에 속삭임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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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리 치워버릴 수 있으면 좋잖아요.”

    곧 병사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건 ‘누군가’라기 보다는 ‘누군가의 껍데기’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혈색도 괜찮고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만큼 기력도 있었지만, 밀랍처럼 무표정했으며 영혼이 달아난 듯 동공이 퀭했다.

    그레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런 죄인을 헤르한 앞에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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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슈바이크의 새 황제께 바치나이다. 고귀하신 비엘스바흐의 핏줄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이 자를, 부디 뜻대로 다스리소서.”

    풀썩.

    사자 앞에 던져지는 고깃덩이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한 여자가 헤르한 앞에 던져졌다. 헤르한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숨 쉬고 있는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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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와 그녀에게 집중했다.

    내내 목석처럼 꼿꼿이 있던 황제의 수행원들도, 왕궁의 병사들과 멀찍이 뭉쳐 있는 왕실 시종들까지도. 하나같이 목을 빼고 눈을 부릅떴다.

    터질듯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마침내 헤르한이 움직임을 보였다.

    크고 단단해 보이는 그의 손이 천천히 제 허리춤의 칼집으로 향했다.

    그레타는 곧 길게 뻗어져 나오는 은빛 칼날을 보며, 마침내 오랜 꿈을 이루었다는 듯이 싱그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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