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첫 번째 접촉 (4/154)


#4 첫 번째 접촉
2021.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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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전혀 처음 보는 여자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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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강물에 뛰어들었나 봐요? 세상에! 무슨 일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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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일행도 없으려나?”

웅성웅성. 손을 빌려줄 생각은 없으면서 입으로만 거드는 척하는 이들이 점점 불어났다.

헤르한은 언짢아졌지만 그렇다고 의식이 없는 여자를 그대로 두고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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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 아이, 제 여동생입니다!”

여자의 가족이라는 사내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근처에 가족이 있었다는 게 의외였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이제 저 사내에게 여자를 넘기고 자리를 떠날 수 있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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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헤르한은 두 팔을 벌린 사내에게 축 늘여진 여자를 넘겨주었다.

그때 헤르한의 손등이 사내의 몸에 살짝 스쳤다. 그러자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섬광이 헤르한의 머릿속에서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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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큭. 웬 횡재냐!’

 
헤르한의 머릿속에서 울린 목소리는 여자의 오빠라는 저 사내의 것이었다. 방금 고맙다고 정중하게 인사한 것과는 달리 아주 사악한 목소리.

헤르한은 부축을 돕는 척하며 다시 그 사내의 어깨를 짚었다. 사내가 음흉하게 쾌재를 부르는 소리는 아까보다 더 크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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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창가에 내다 팔까? 아니. 그 전에 나부터 맛 좀 봐야겠어. 어디서 이런 특상품이 꽁으로 굴러왔담?’

 
헤르한은 무표정하게 사내의 몸에서 손을 뗐다.

손을 떼니 사내의 ‘마음의 소리’도 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헤르한의 심경은 이미 불편해진 뒤였다. 아니. 더러워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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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헤르한은 떠나려다 말고 사내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미 과하게 개입했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치솟는 짜증을 누를 길이 없었다. 지긋지긋한 두통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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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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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바뀌었으니 그 몸 내려놓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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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요? 감사 인사는 했잖습니까. 가, 가던 길이나 가실 것이지.”

사내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들쳐 멘 여자를 꼭 잡고 놓지 않았다.

헤르한은 그 혐오스러운 손길을 무상하게 바라보면서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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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이 여자와 아무 관련 없는 거 알고 있으니 내려놓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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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게 무슨……. 내가 이 여자의 오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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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여동생 이름이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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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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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여자가 기절하기 직전에 말하기를, 로즈라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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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로즈가 본 이름이고 마리는 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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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착각. 로즈가 아니라 로라라고 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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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 말이, 이 아이 이름은 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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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 로테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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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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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로시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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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슨 장난을 치는 거요!”

사내가 버럭 소리를 쳤지만 이미 잔뜩 몰려든 구경꾼들이 사내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진짜 오빠 맞아?’,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데 무슨!’, ‘혹시 납치범 아니오?’ 하고, 여기저기서 삿대질도 튀어나왔다.

당황한 사내는 얼굴이 벌게진 상태로 냅다 욕을 내질렀다. 그래도 헤르한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사내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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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국경의 인신매매범에 대한 단속이 심해졌다지. 위병에게 고발하면 포상금이 얼마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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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난 절대 그런 게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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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으로 굴러온 특상품은 이 여자가 아니라 당신인 것 같은데?”

여차하면 몸싸움을 벌여서라도 여자를 들고 튈 기세였던 사내가 일순간 창백해졌다. ‘꽁으로 굴러온 특상품’이라니. 하필 그 단어가 상대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우연일까?

당신이 동요하는 것을 뻔히 안다는 듯 헤르한이 비식거린 건 바로 그때였다.

사내는 그 소름 끼치는 웃음을 보고서야 그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내는 그 길로 여자를 내려놓고 도망쳤다.

헤르한은 도망치는 사내의 뒷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버려진 여자를 자신이 다시 업었다.

추위에 떠는 여자를 업고 하는 수 없이 그가 향한 곳은 결국 마을의 한 여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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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그…… 부탁하신 여벌의 옷은 금방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여관주인은 허리를 넙죽 숙이고도 쉽게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기절한 쪽을 나머지 한쪽이 업고 들어온, 그것도 홀딱 젖은 채로 나타난 이 낯선 커플의 사연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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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문 앞에 두고 가고 이쪽 객실엔 다른 손님을 더 받지 마십시오.”

주인은 헤르한이 내민 돈다발을 받고서야 화색을 띠우곤 총총 물러났다. 헤르한은 그가 완전히 물러난 것을 확인한 뒤에 객실 문을 잠그고 실내를 둘러보았다.

방안은 어두워서 더 음침하게 느껴졌다. 낡은 암막 커튼. 먼지 낀 러그. 망가진 조명등을 거쳐 이윽고 헤르한의 시선이 닿은 건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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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온이 알면 정말로 뒤집어지겠어.’

아시온은 평소, 술을 마셔서 몸을 망칠 바엔 차라리 여자를 안으라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해댔었다.

하지만 그런 되바라진 부관도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골칫덩어리 주군이 야밤에 몰래 병영을 빠져나간 것으로도 모자라 웬 여자를 데리고 여관까지 들어갔을 줄은.

하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휘말렸는지, 자신의 충동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건 당사자인 헤르한도 마찬가지였다.
술을 마셔서인가? 주치의의 엄중한 경고를 무시해서?

헤르한은 딱딱한 얼굴로 침대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물에 젖어 머리가 해초처럼 엉킨 데다가 안색도 창백했지만, 콧날이 오뚝하고 이마는 둥근 여자였다. 속눈썹은 짙었고 도톰한 입술도 앙증맞게 꾹 다물려 있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해쓱한 몰골도 이럴진대 제대로 먹이고 입혀놓으면 웬만한 호색가들 정도는 쥐락펴락할 법도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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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였나. 물에 뛰어든 게?’

힘없고 가난한 여자에게 아름다움은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녀의 사연이 어떻게, 얼마나 기구하든 헤르한이 알아야 할 바는 아니었다.

헤르한은 그저 무거운 숨을 내뱉고는 여자에게서 돌아섰다. 호의는 넘치게 베풀었으니 이제는 정말 병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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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마.”

여자가 뒤척이며 작게 웅얼거린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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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의식이 들었나.’

헤르한이 뒤를 돌아보니 여자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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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일어날 필요 없어.”

상대를 안심시키자고 하는 말인지 더 겁주자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래도 여자는 계속 미간을 찌푸리며 괴로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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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마. ……비안. ……가지 마.”

여자는 잠꼬대하듯 입속말을 했다. 분명치 않은 말 중 헤르한이 알아들을 수 있던 건 그나마 ‘가지 마’라는 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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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붙잡으면 안 되지.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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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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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헤르한은 번거로운 기색으로 여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선심 쓰듯 허리를 숙였다.

여자의 입술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대니 여자가 울음 반 호흡 반으로 빚어낸 말이 겨우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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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두고…… 가지 마. 혼자는 무서워. 추워. ……너무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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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까이서 보니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투명한 피부에 바짝 일어선 솜털. 뭐가 그리 서러워 우는 건지 잔뜩 붉어진 눈가. 처연하게 늘어진 눈꼬리 끝에 매달린 눈물 한 방울.

당장 물을 담뿍 주지 않으면 죽어버릴 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어쩐지 헤르한의 단전 밑이 뜨거워져 갔다.

여자의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한입 크게 베어 물면 어떤 맛이 날까. 괜한 충동까지 일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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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앞에 새 옷을 갖다 두라 했으니 알아서 갈아입어.”

헤르한은 애써 몸을 일으킨 뒤 여자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돌아섰다.

그때 여자가 손을 뻗어 떠나려는 헤르한의 손목을 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길이 헤르한의 살갗에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바짝 돋으면서 절로 펄쩍 뛸 만큼 찌릿한 느낌이 헤르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관통했다. 크게 한번 비틀거리는 동안 헤르한의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환한 빛이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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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아무리 두통이 심해져도 이 정도의 환각을 본 적은 없었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던 헤르한은 삐거덕거리는 침대의 낡은 헤드를 꽉 붙들고야 겨우 중심을 잡았다.

아득해졌던 시야는 한참 뒤에 다시 밝아졌다. 그때까지도 여자는 헤르한의 손목을 쥔 상태였다.

정신을 차린 헤르한은 당황한 시선으로 제 손목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살이 닿은 부위가 불에 덴 듯이 뜨거웠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정작 여자의 체온은 위험할 정도로 떨어져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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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뭐였지?”

다소 넋 나간 물음에 드디어 여자가 완전히 눈꺼풀을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열병에 시달리는 듯 멍하면서도 타는 듯한 절박함이 가득 담긴 눈이었다.

그 붉은 눈을 보고 있자니 헤르한의 목을 타고 무언가 뜨거운 기운이 치밀었다. 헤르한은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여자의 어깨를 세게 쥐고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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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뭐야? 마녀라도 되나?”

추궁이 지나쳤던 걸까. 겨우 의식을 되찾았던 여자가 다시 눈꺼풀을 닫고 잠들어버렸다.

제길.

헤르한은 그렇게 낮게 읊조리고는 다시 손을 뻗었다. 여자를 잡고 흔들어서라도 깨울 작정으로.

그런데 그녀의 닫힌 눈꺼풀 아래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방울이 헤르한의 발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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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원래 이렇게 감정에 호소 당하는 타입이었던가.

헤르한은 멈칫하는 자신이 우습고 허탈해 실소를 한번 뱉었다.

여자를 깨우려고 뻗었던 손은 조금 주춤하다가, 결국 그녀의 어깨 대신 이불을 잡았다.

그 끝을 당겨 여자의 몸을 덮어주고 난 후에도, 헤르한의 표정은 한참 동안 심란했다.

*

다음 날 아침. 리엘라는 따뜻한 냄새를 맡았다.

어쩐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거운 것에 몸이 짓눌린 것 같기도 하고 아직도 몽롱한 꿈속에서 헤매는 것만 같기도 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냄새가 사실은 ‘누군가의 살 냄새’라는 걸 깨달으면서 정신이 바짝 든 건 몇 초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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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떡 일어난 리엘라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방, 낯선 침대, 그리고 옆자리의 낯선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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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리엘라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낯선 남자는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헛것을 보는 거라면 좋았을 텐데. 아침 햇살에 빛나는 머리카락은 헛것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히 반짝였다.

덜덜 떨며 조심스레 만져보니 남자의 머리카락은 참 부드럽게도 손끝에 감겨들었다. 리엘라는 꼭 뜨거운 것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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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리엘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어지러운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견딜 수 없었던 슬픔과 배신감에 바보 같은 선택을 했던 것. 그런 자신을 구해주었던 남자. 그리고 그런 그의 손을 붙잡았던 자신.

어제 입었던 옷차림이 그대로인 것으로 보아 그 이상의 사고는 생기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향한 자기혐오가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바보같이 배신만 당하더니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 하고. 결국은 이렇게 밑바닥에 스스로를 내던진 우스운 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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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최악이다.’

여러모로 그랬다. 그래서 리엘라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서 떨다가 부랴부랴 떠날 짐을 챙겼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옷가지를 집어 드는 동안엔 몇 번이나 울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정말 꼴불견이라고. 무책임하게 잘못을 저질러 버린 건 자기 자신이면서 울기까지 하면 진짜 한심한 거라고.

그렇게 저 자신을 타일렀지만 계속 온갖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끝까지 남자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리엘라는 힘겹게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계속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눈앞이 아찔아찔했다. 이마와 목덜미에 열도 펄펄 끓었다.

떠나기 전, 딱 한 번. 리엘라는 뒤를 돌아 아직 잠든 남자를 쳐다보았다.

고맙다고 해야 할까.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을 다시 끔찍한 생으로 되돌려놓은 것을 원망해야 할까.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휘몰아쳤지만 그중 어떤 것도 말로 빚어져 나오지는 못했다.

리엘라는 그저 입을 다물고 돌아서서, 비겁하게 도망치기를 택했다. 죽지 못한 오늘을 버티기 위해서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으므로.

*

찬바람에 창문이 요란스레 덜컹거리는 어느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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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실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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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예. 뉘시유?”

하품하며 내실에서 나오던 부인은 방문객의 정체를 확인하곤 놀라서 눈을 끔뻑거렸다. 문 앞에 초면인 웬 아가씨가 서 있는 탓이었다.

눈에 띄는 붉은 머리를 빼면 영 초라한 행색의 여자였다. 막 눈까지 내리기 시작한 요즘 추위를 견디기엔 턱없이 얇은 옷차림이었고, 얼마나 피로와 배고픔에 시달렸는지 안색도 어두웠다.

하지만 여자의 눈동자에만큼은 야무진 독기가 감돌고 있었다.

벼랑 끝에 몰린 몰골인데도 어떻게든 살아내 보겠다는 절박한 의지가 그녀를 이 어두운 밤에, 이 산골 마을까지 이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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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근처에 일자리를 구할 데가 있을까요?”

그래서였는지, 난데없이 등장한 여자가 대뜸 뱉어낸 말도 부인은 별로 놀랍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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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부인께 폐를 끼치려는 것은 아니고…….”

츳츳, 혀를 찰 것도 없었다.

서방도 자식새끼도 없이 이 추운 날, 거리를 떠도는 여자의 사연이야, 다 거기서 거기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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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묵을 데는 있고? 식사는 하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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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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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들어와요.”

부인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선잠을 자던 내실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여자는 한참 문가에 서서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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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들어오라니깐. 찬바람 들잖수.”

여자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려 했지만 목이 메어 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부인은 후덕한 손길로 그런 여자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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