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두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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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두 이방인
2021.07.08.
“내가 오해한…… 거지?”
“…….”
“아. 취하셨나? 어쩐지 과음하시더라.”
“…….”
“왕녀님도 참. 아무리 그래도 네게 저렇게나 분별없이 구시다니. 네가 참 마음에 드셨나 봐. 파비안. 이러다가 왕실에 일자리라도 얻게 되는 거 아니야? 하하하…….”
리엘라가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지껄이며 억지로 웃는 동안에도 파비안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점점 리엘라의 목을 졸랐다. 덕분에 울음도 꽉 틀어막혀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간절한 마음으로 외고 또 욀 뿐이었다. 파비안, 제발 아무 말이나 해봐, 변명이라도 해봐, 하고.
“리엘라.”
파비안이 드디어 입을 연 때에 리엘라가 떠올린 건 참 우습게도 파비안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었다.
“리엘라. 리엘라! 정말 예쁜 이름이다!”
6살.
헝클어진 갈색 머리에 상냥한 눈빛을 한 동갑내기 꼬마애가 다가와 처음 말을 걸어주었던 그 날부터 리엘라는 파비안을 사랑했었다.
역병이 돌던 죽음의 거리 위에서 어린 리엘라가 기억하는 것은 제 이름뿐이었다. 그래도 리엘라는 자신이 가진 그 유일한 ‘이름’이라는 게 참 자랑스럽고 좋았다. 파비안이 그 이름을 예쁘다고 해주었으니까.
“리엘라. 나랑 같이 가자. 내가 친구 해줄게!”
파비안이 불러주는 이름은 꼭 사랑 노래의 곡조 같았다. 둥글어지는 파비안의 입술. 나긋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울림. 그런 것들이 언제나 리엘라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어린 날의 리엘라는 정말,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분명히 그랬었는데.
“리엘라. 넌 내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야.”
파비안의 달콤한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리엘라. 난 진심으로 네가 행복하길 바라. 너 역시 내가 그러길 바라지?”
그런데 어째서 오늘 같은 말을 듣는 제 심장은, 이다지도 찢어지듯 아픈 걸까.
“너에게만은 꼭 축하받고 싶어.”
“파비안, 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
“왕녀님께서 날 사랑하신대. 내 마음도 왕녀님과 같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파비안은 리엘라의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이었으니까. 기둥이 무너진 세상에 하늘이 내려앉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함께 왕실로 갈 거야.”
파비안이 말하는 ‘우리’ 안에는 ‘리엘라’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리엘라는 그 사실이 어처구니없어서 정신이 멍했다.
“농담하지 마. 네가 왕녀님과 왕실로 가다니. 어떻게…….”
“…….”
“나는……. 나는 어쩌고……?”
보통 이런 상황에선 욕도 하고 상대의 뺨도 한 대 갈기던데.
그런데 정작 리엘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
“약속했잖아. 이번 일만 끝나면 우리 평생 함께하기로……. 네가 나에게 맹세했잖아.”
“변하는 건 없어. 리엘라. 난 계속 네 곁에 있을 거야. ……좋은 친구로서.”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답답하고 혼란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왕녀를 사랑한다면서 계속 제 곁에 있겠다는 건 또 뭔가.
“파비안. 네가 나한테 어떻게……. 장난은 그만 쳐!”
리엘라는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제대로 된 논리도 펼치지 못하고 동정에 호소하는 거. 울면서 악만 쓰는 거. 세상에서 가장 싫은 행동인데 어느새 그걸 자신이 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추스를 수 없는 감정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이렇게 악을 쓰며 파비안에게 덤빈 적은 처음이었다.
“리엘라! 파비안! 대체 무슨 난리야? 엉?”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들이 몰려들었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다가온 그들은 소동을 눈치채고는 리엘라를 파비안에게서 뜯어냈다.
동료들의 손길이 닿으니 리엘라의 서러움이 한층 더 거세어졌다.
두 사람은 몸집이 토끼만 하던 때부터 늘 한 세트였다. 결혼까지 약속했다는 것을 아직 알리지 못했을 뿐, 파비안과 리엘라가 서로에게 특별한 사이라는 걸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그러니 동료들은 당연히 제 편을 들어주리라고 리엘라는 생각했다. 네가 어떻게 오랜 신의를 저버리고 리엘라를 배신할 수 있느냐고, 자기 대신 파비안을 따끔하게 호통쳐줄 줄 알았다.
그런데.
“하……. 리엘라. 그냥 조용히 넘어가 주지 그러냐? 이제 와서 이런다고 바뀌는 것도 없는데.”
“우린 다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 가족이 좋은 연줄 잡아 출셋길 좀 걸어보겠다면 응원해주는 게 도리 아니겠어?”
동료들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반응을 보였다.
“지금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리엘라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혹시 이게 다 꿈은 아닌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동료들의 반응은 여전했다.
“그러면 누가 잘못했다는 건데? 파비안? 파비안 더러 어쩌라고? 왕녀 저하께서 파비안이 마음에 드신다는데, 제 주제에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절이나 해야지, 거절하란 거냐? 너라면 그럴 수 있겠어?”
“막말로 너희가 정식으로 혼인이라도 했냐, 애를 낳고 살림을 차리길 했냐. 젊은 남녀 사이야 뭐 붙었다 떨어졌다 할 수도 있는 거고. 안 그래?”
이건 아니다. 아무리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통째로 뒤집혀버린 게 아닌 이상,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얼마 전만 해도 파비안과 자신을 두고 얼레리 꼴레리 놀리던 동료들이 어떻게 이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가 있지?
‘그러고 보니…….’
속으로 날짜를 셈해 맞추어보니 이젠 웃기기까지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파비안과 자신의 사이를 놀리던 동료들이 어느 순간부터 짓궂은 말과 행동을 감쪽같이 그만두지 않았던가.
그게 대략 한 달 전. 파비안이 이 의뢰를 처음 받아왔던 그쯤부터였다.
무리에서 이상하게 겉도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던 것도 따져보니 그 무렵부터였다. 자신이 다가가면 직전까지 화기애애하던 동료들이 갑자기 어색하게 입을 다문다든지, 은근히 시선을 피하고 황급히 다른 얘길 꺼낸다든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의뢰를 맡아서 모두가 긴장했나보다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다들……. 알고 있었던 거군요.”
이제 곧 받게 될 엄청난 보수는 사실 파비안을 탐내는 왕녀를 웃게 만들어주는 대가로 약속받은 것이란 걸.
동료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이었다.
그들은 리엘라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그때부터 이미 리엘라를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리엘라. 어떤 마음일지 다 안다. 당장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네게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야.”
“그래. 왕녀 저하의 약속을 잘 떠올려봐라. 너에게는 특별히! 더 좋은 보상을 주시겠다고 하셨잖냐.”
그래요. 세상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거. 나한테는 전부인 그 하나를 빼앗아가는 대가로 말이죠.
리엘라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대차게 뱉을 힘도 나지 않았다.
동료들은 하나같이 전전긍긍한 얼굴이었다. 리엘라가 상처받았을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리엘라가 더한 난동이라도 부려서 일이 틀어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리엘라는 맥이 탁 풀렸다.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전부 다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사실 자신은 언제든 필요에 의해 버릴 수 있는 짐짝에 불과했던 건가.
동료들의 배신도 아팠지만, 더 아픈 건 가장 앞장서서 자신을 배신한 사람이 다름 아닌 파비안이라는 사실이었다.
“리엘라. 가지 말고 내 말 좀 더 들어봐. 응?”
“……이거 놔.”
“제발. 네가 이렇게 가버리면 난 어떻게 해.”
어떻게 하냐니. 그걸 나에게 물으면 어떻게 해. 날 버리는 건 너잖아.
리엘라는 어지러운 심정으로 파비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꼭 자기가 버림받는 것처럼 애처로웠다.
마지막 죄책감까지 모두 떠넘겨버리는 그 선한 눈빛이 리엘라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사랑해 마지 않던 파비안의 예쁜 녹안이 이렇게 끔찍하게 보이는 날이 올 줄이야.
리엘라는 더 이상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아직도 이 절망이 제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고 어떻게 이겨나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파비안의 손을 뿌리쳤다.
“어디로 가는 건데? 갈 데도 없잖아. 금방 돌아올 거지? 그렇지, 리엘라?”
돌아서 걷는 내내 파비안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하지만 그렇게 소리를 내지르면서도 파비안은 끝까지 직접 뛰어와 리엘라를 붙잡거나 앞을 막진 않았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는 갈 곳 없는 리엘라가 결국은 자신들에게 돌아오게 되리라 자신하고 있었다.
그 멍청한 확신이 훗날 자신들을 어떤 곤경에 빠트리게 할 줄도 모르고.
*
리오타 왕국의 동쪽 국경, 디에타 마을은 험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마을이었다. 그곳은 외지인이 드문 곳이었으나 의외의 명소를 품고 있었다. 데르센 산맥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합쳐져 이룬 ‘르 데르’ 강이었다.
‘르 데르’는 물이 맑은 데다가 폭이 넓고 수심도 꽤 깊어서, 밤이면 별이 뜬 하늘을 그대로 퍼 담은 듯 반짝였다.
‘남자’는 바로 그곳, 르 데르에 있었다.
그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단지 이방인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풍기는 고귀함과 위압감이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인상도 묘했다.
은은한 달빛을 그대로 머금는 머리칼이나 잘 다듬어진 반듯한 눈썹을 보면 어느 권세가의 귀공자 같은데, 긴 속눈썹 아래 도사리는 서늘한 눈빛은 꼭 야생에서 나고 자란 짐승처럼 날카로웠다.
그런 남자가 강둑의 흙바닥에 허랑하게 앉아 싸구려 술이나 병째로 들이키고 있으니 이목이 더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르 데르를 지나는 모든 이들은 흘긋거리며, 또는 대놓고 탐색하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는 자신에게 흐르는 눈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남자, 헤르한은 사실 아까부터 한 곳만을 뚫어지도록 빤히 보고 있었다.
시작은 심드렁했었다.
술도 먹지 마라, 작전에도 나서지 마라, 날파리 같은 것들은 저들이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주군께서는 그저 가만히만 계시라. 그런 끝도 없는 부관의 잔소리를 피해 충동적으로 뛰쳐나온 참이어서인지 퍽 재미가 없었다.
술잔을 나눌 이도,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을 이도 없는 그 상황에 마침 헤르한의 눈에 띈 것이 저편의 여자였다.
자신만큼이나. 아니, 자신보다 더 어지럽게 이 강가를 헤매고 있는 또 다른 이방인.
우연히 눈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이 헤르한의 온 정신을 사로잡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운명과 같았다. 아스라이 먼 거리라 보이는 건 그저 흐릿한 형체일 뿐인데도.
여자는 절벽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강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은 불꽃 같았다. 소멸하기 직전, 마지막 힘을 다해 타오르는 것처럼.
‘울고 있군.’
보이지 않는데도 헤르한은 그 여자의 얼굴이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곧 무슨 사고라도 낼 것만 같은 아주 절박한 얼굴이.
그건 확실히 술안주로 삼기에 적당한 광경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도 헤르한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왠지 지금 자신의 꼴도 저 여자와 같은 모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점에 헤르한은 이미 마시던 술을 씁쓸하게 내려놓은 뒤였다.
‘……!’
여자가 낙화처럼 요요히 물속으로 몸을 던진 건 바로 그때였다.
헤르한은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소스라치는 비명은 몇 초 뒤 들려왔다.
“꺄악! 저기 어떤 여자가 강물에 빠졌어요!”
단 한 명의 대답도 없이 허공으로 고꾸라지는 비명이 쓸쓸했다.
헤르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정확히는, 그는 그 어떤 일에도 관여해선 안 될 처지였다.
하지만.
강물에 반짝이는 달빛이 마음에 걸렸다. 사람이 빠진 것치곤 수면이 고요했다. 그건 여자가 발버둥 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스스로 뛰어들었다……라.’
헤르한의 잇새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울면서 제 종말을 재촉하는 사람 치고 정말로 죽음이 기꺼운 사람은 없다는 걸 헤르한은 아주 잘 알았다. 그 자신 역시 하루하루 다가오는 죽음에 내쫓기는 처지였으므로.
저주받은 삶에 굴복하는 건 자신 하나면 족했다. 특히 오늘처럼 술맛이 뭣 같은 날엔.
헤르한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일단 마음먹은 뒤엔 동작에 지체가 없었다. 헤르한은 빠르게 강 속으로 뛰어 들어가 여자를 건져 올린 후 입을 열었다.
“숨은 붙어 있군. 몸을 따뜻하게 해야겠는데. 근처에 담요로 쓸 만한 것이 있습니까?”
그 사이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전부 구경꾼들일 뿐이었다.
그저 어벙한 얼굴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그들을 향해 헤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여긴 제대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없는 겁니까? 아니면 다들 귀가 먹은 건가?”
시든 꽃처럼 축 늘어진 여인을 끌어안은 그의 머리칼에서는 보석 같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