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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햇살처럼 웃는 여자 (2/154)


#2 햇살처럼 웃는 여자
2021.07.04.


왕녀가 손을 뻗었다. 리엘라는 자기도 모르게 그 손을 맞잡았다가 순간 아차 싶어 황급히 손을 빼냈다.

이렇게 함부로 왕족의 몸에 손을 대도 괜찮은 걸까? 왕족과 악수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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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흡. 당황하지 말아요.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요. 여긴 왕실도 아닌걸.”

왕녀의 천진난만한 웃음에 리엘라는 볼을 붉혔다. 공주님은 얼굴만 예쁘신 게 아니라 성품도 좋으시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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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리엘라는 파비안과 절친한 사이라면서요? 파비안의 친구면 내 친구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편하게 대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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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왕녀 저하.”

리엘라는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대답을 하고 돌아서서 생각하니 조금 이상했다. 방금 그 말은, 파비안과 왕녀님은 이미 친구가 되었다는 뜻인가? 대체 어느 틈에?

혼란스러워 슬쩍 곁눈질을 해보니 나란히 선 파비안과 왕녀가 제법 정다워 보였다.

생각해보면 마차에서 내린 이후로 줄곧, 왕녀는 파비안과 눈길을 주고받고, 무엇을 속삭이고, 저들끼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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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가 리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파비안은 원래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인정받는 남자였다. 왕녀님을 에스코트할 때도 부족함 없이 정중했을 테고, 왕녀님이 그런 파비안을 마음에 들어 할 거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리엘라는 파비안이 자랑스러워졌다. 이런 대단한 일감을 구해온 것뿐만 아니라 왕족에게 인정까지 받다니.

역시 파비안은 세상에서 제일 멋졌다.

가장 멋진 ‘내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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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엔 만찬이 있을 예정이었다. 그레타 왕녀가 임무를 마친 행크 용병단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직접 마련한 자리라고 했다.

근방에서 가장 좋은 식당을 통째로 대관했다는 소리에 흥분한 동료들은 벌써 뛰쳐나갔다. 아직 숲속 야영지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리엘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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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꼴로 왕녀님을 맞았다니……!’

자신의 천막 안에서 리엘라는 작은 거울을 보며 한숨을 쉬는 중이었다. 별처럼 반짝거리는 왕녀님에 비하면 제 꾸밈새는 얼마나 볼품이 없었던지.

행크와 파비안이 야속하기도 했다. 의뢰인이 왕녀였다는 걸 미리 귀띔해주었더라면, 깔끔한 새 옷이라도 한 벌 구해놓았을 텐데.

바깥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심드렁한 얼굴로 바깥을 확인하던 리엘라의 얼굴은 단번에 물 먹은 꽃처럼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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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

리엘라는 갈아입을 옷을 고민하던 것도 잊은 채 그에게 뛰어가 안겼다. 파비안의 너른 품에 폴싹 안기니 그제야 내내 긴장했던 몸에 온기가 도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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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아직 여기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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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무슨 일로 다시 왔어? 왕녀 저하를 모시러 간 거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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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뭘 좀 놓고 가서.”

파비안의 손은 자연스럽게 리엘라의 등허리에 얹혔다. 리엘라는 그제야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 신록보다 맑은 녹안. 자신을 따스하게 바라보며 머금어주는 저 미소까지.

이것들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모른다. 고작 이틀하고 반나절 떨어져 있었는데도 리엘라는 파비안과 몇 년을 생이별한 것처럼 외롭고 애가 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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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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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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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이 왕실에서 받은 의뢰였다니! 그렇게 대단한 얘길 왜 내겐 한마디도 안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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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그건…….”

리엘라의 투정에 파비안은 차분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왕실과의 비밀유지 서약이 어쩌고, 의뢰인의 신분이 노출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고 어쩌고.

리엘라는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파비안이 워낙 논리 정연해서이기도 했지만, 이유를 설명하는 내내 제 볼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신경 쓰여서이기도 했다.

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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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뇌물로 바칠 테니까 한 번만 봐주라. 응?”

파비안이 자랑스럽게 웃으며 건넨 꽃 한 송이에 깜짝 놀라 이전의 속상함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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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설마 비비안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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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꼭 구해주겠다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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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이거 구하겠다고 이렇게 늦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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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어때? 도감에서 보던 거랑은 비교도 안 되게 예쁘지? 이것 때문에 마을의 꽃집이란 꽃집은 싹 다 뒤졌다니까.”

허풍이 분명했다. 파비안은 언제나 이렇게 허풍을 떨곤 했으니까.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줄게, 내가 다 가져다줄게, 널 꼭 지켜줄게…… 하고.

하지만 파비안의 허풍보다 웃긴 건, 그런 파비안의 허풍에 언제나 넘어가고 마는 리엘라 자신이었다.

리엘라의 볼이 손에 든 분홍 장미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잠시나마 자신을 왕녀와 비교하며 초라하다고 여겼던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눈부신 사람이 제 곁에 있는데 어떻게 자신이 초라할 수가 있을까.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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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정말 고마워. 파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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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풉. 귀엽기는.”

파비안의 입맞춤이 리엘라의 이마 위에 사랑스럽게 내려앉았다.

리엘라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꽃향기가 달콤했다. 파비안과 함께하는 이 순간처럼.

*

저녁 만찬은 풍성한 만큼이나 요란했다.

제대로 차려진 식탁이 오랜만인 동료들이 걸신들린 듯이 먹어 치우는데도 접시가 빌 틈 없이 새 음식이 차려져 나왔고 술
잔도 끊임없이 채워졌다.

구석에선 악사가 감미로운 연주를 이어나갔지만, 음악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모두의 대화가 시끌벅적했다.

그 가운데 그레타 왕녀는 시종일관 기품 있는 모양새였다. 왕족인 입장에선 다소 불쾌할 정도로 무질서한 식탁인데도 그녀는 인상 한 번 쓰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방긋방긋 예쁘게 웃으며 대화를 화기애애하게 주도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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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후의 계획은 모두 정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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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고민 중입니다. 저하. 이렇게 큰 보수를 받아본 게 처음이라……. 돈도 써본 놈이 쓸 줄 안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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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됐든,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때려 칠 거란 건 확정이지만요!”

누군가의 외침에 옆자리의 동료들이 크게 웃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동료들이 저마다의 포부를 밝히기 시작했다. 누구는 가게를 열겠다, 누구는 정식 길드를 내겠다, 또 누구는 이제라도 장가를 들어 남은 평생 맘 편히 놀고먹을 거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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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회에 모두 왕성으로 이주하시는 건 어떤가요? 원하신다면 왕성 위병대에 자리를 마련해드릴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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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 저, 정말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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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모두 왕실에 보탬이 되는 큰일을 해 주셨으니까요.”

곧 이어진 왕녀의 파격적인 제안에 식사 자리는 한 단계 더 달아올랐다. 웬만한 귀족들도 자리 잡기 어렵다는 왕성에 입성할 생각에, 들뜨지 않는 건 리엘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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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는 별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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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송구합니다. 저하. 그게 아니라, 저는……. 왕성도 좋지만, 그보다 미리 생각해둔 다른 계획이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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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어떤 계획인데요?”

흥미로 반짝이는 왕녀의 눈동자를 보며 리엘라는 어디까지 대답해야 할까 망설였다.

독립해서 파비안과 결혼할 계획이라는 건 아직 동료들에게도 말하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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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머뭇거리던 리엘라의 시선이 맞은편, 그레타 왕녀의 옆자리에 앉은 파비안에게 닿았다.

그는 어쩐지 난감한 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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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역시 아직은 비밀로 해야 하는 얘기였나.’

그때 다행히, 그레타 왕녀가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무래도 비밀 계획인 것 같으니 억지로 듣지 않겠다며, 부담을 주어서 미안하다며.

리엘라는 또 한 번 그레타 왕녀의 사려 깊음에 감탄했다. 좋은 곳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면 다 저렇게 기품 있는 사람이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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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렇다면 리엘라에겐 다른 보상을 생각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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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이미 과분한걸요. 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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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리엘라에겐 특히 고마운 게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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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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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 그런 게 있어요.”

그레타 왕녀는 더 대답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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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실례할게요.”

얼마 뒤 왕녀가 우아하게 일어섰고, 눈썰미 좋은 파비안이 시중을 든답시고 곧바로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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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편하게 식사하고 계세요.”

파비안과 왕녀가 자리를 비우고 나니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내내 깨작이기만 하던 리엘라는 그제야 몇 점의 음식을 집어먹었다.

하지만 그 편안한 마음도 얼마 가지 않았다.

생각보다 왕녀님이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길어졌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파비안은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인지 궁금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던 리엘라는 결국 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료들은 이미 저들끼리 거나하게 취해서 리엘라가 일어나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식당 바깥으로 나가보니 왕녀님이 타고 왔을 마차는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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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멀리 가시진 않을 거라 했는데…….’

용병단 동료들을 배려한답시고 왕실 시종들마저 물리고 온 왕녀님이었다.

혹시 그분의 정체를 알아챈 마을 불한당들의 시비에 휘말리기라도 한 건 아닐까?

리엘라는 초조해진 마음에 더 다급하게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건물 뒤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어딘가 익숙한 분홍색 꽃잎이 두어 개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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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로즈? 이게 왜 여기에?’

리엘라는 그 꽃잎이 이끄는 대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었다. 한발 한발 다가갈수록 바닥에 떨어진 꽃잎이 많았다.

이윽고 코너를 완전히 돌았을 땐, 한 아름 안아도 다 들지 못할 정도의 비비안 로즈 꽃송이가 바닥에 수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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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리엘라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낮게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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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하게 꽃비가 쌓인 곳. 그 가운데서 파비안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던 그레타 왕녀가, 리엘라를 발견하곤 또 햇살처럼 웃었다.

돌처럼 굳어버린 리엘라에 비해 그레타는 여유를 잃지 않고 입술을 다시 파비안에게 갖다 대기까지 했다.

쪽.

다시 파비안에게 입을 맞추는 동안, 그레타는 그의 어깨너머로 리엘라를 보고 있었다. 보란 듯이 앙큼한 키스를 다 퍼붓고 난 후에야, 그레타는 파비안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녀의 입 모양이 빚어낸 건 대충 ‘리엘라’라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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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비안은 그제야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걸 보았을 때보다 파비안과 눈이 마주쳤을 때, 리엘라의 심장이 더 철렁 내려앉았다.

아직 어떤 자초지종도 듣지 못했는데. 잘못 본 것일 수도,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 건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 이상의 반전은 없으리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파비안의 눈빛이 그랬다. 그는 벌써 모든 걸 다 놓아버린 것처럼 초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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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난 이쯤에서 자리 비켜줄게요.”

그레타가 싱긋 웃으며 먼저 자리를 떴다.

리엘라는 뻔뻔하게 자길 스쳐 지나가는 그레타를 붙잡지도 못했다. 그 와중에도 함부로 손을 뻗을 수 없을 만큼 그녀는 고귀한 ‘왕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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