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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돌아온 은총 (1/154)


  • #1 돌아온 은총
    2021.07.01.


    홀을 가득 메운 수백 개의 눈이 하나도 빠짐없이 단상 위의 리엘라를 향했다.

    끈적끈적 집요하게 달라붙는 그 눈길들에 리엘라는 떨리는 호흡을 뱉어내며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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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때 헤르한이 리엘라의 어깨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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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알아서 해. 넌 나만 보면 돼.”

    건조한 그의 목소리는 귓가에서 가르릉거렸다. 리엘라는 그를 믿었다. 그는 분명, 이 회장 안의 누구도 자신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지켜줄 것이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한 번 미쳐버리면 헤르한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 남자인지를,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곧 단상 위로 흰수염을 늘어뜨린 원로가 올라왔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 신전의 사제들, 또 이름 모를 권력자들의 시선이 리엘라에서 늙은 원로에게로 옮겨갔다. 눈 색도 피부색도 다른 그들은 저마다 통역사를 비롯한 수족을 잔뜩 대동한 채로 날 선 경계심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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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 절차를 모두 완료했습니다.”

    원로의 발표에 홀 전체가 쥐 죽은 듯 침묵했다. 무거운 긴장감이 모두의 정수리를 찍어 누르는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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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블리니테……. 감정 결과……, 성녀(聖女)가 맞습니다. 상급 구원자의 자질을 지닌, 명백한 안투의 후손입니다!”

    땅땅땅.

    경쾌한 목소리로 품질 판정을 마친 원로가 판정봉을 두드렸다. 자랑스럽게 어깨를 올린 모양새는 꼭 시장에 최상급 고기를 내놓고 들뜬 도축업자와도 같았다.

    백여 년 만에 되돌아온 신의 은총.

    좌중에선 절로 탄복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는 웃고, 누구는 울었다. 또 누구는 신의 뜻에 감사하며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높은 천장에 울렸다. 성녀를 차지하려는 다툼이 시작된 것이었다. 고귀한 신전이 투기장으로 전락해버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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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억 베르크에 사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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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만 실랑! 거기에 우리 왕실 소유의 금광과 맞바꾸는 건 어떻습니까?”

    소란 속에 한 남자가 단상 위로 올라선 건 그때였다. 아까부터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는, 줄곧 리엘라를 호기롭게 훑던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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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진정하시오! 대륙 연맹의 협약을 잊었소이까?”

    남자가 높이 치켜든 건 낡은 종잇장이었다. 그것이 꼭 신의 계명이라도 된다는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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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똑똑히 적혀 있소이다! 협약에 따르면 성녀, 특히 상급 구원자는 연맹의 관리 대상으로, 연맹 회원국이라면 모두가 공동 소유 권리를 갖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 말에 언성을 높여 싸우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효력도 없는 협약서를 운운하는 게 먹힐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하나뿐인 성녀를 두고 전 세계가 달려들어 싸우는 것보다는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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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이만 레이디를 이쪽으로 넘겨주셔야지요.”

    남자가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헤르한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그는 제 망토를 벗어 리엘라에게 둘러주고는, 몸을 돌려 차분하게 남자를 향해 나아갔다.

    리엘라는 헤르한의 뒤에서 숨을 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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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 마십시오. 폐하. 선조들의 협약에 따라 레이디 블리니테는 앞으로 우리 연맹에서 소중히 다룰…….”

    남자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 헤르한이 그를 향해 크게 팔을 휘둘렀다. 그 궤적을 따라 흩뿌려진 건 붉은 선혈이었다.

    남자는 억 소리를 내면서 쓰러졌다. 낡은 협약서를 굳게 쥐고 있는 그 상태 그대로.

    그 모습을 본 귀부인들이 귀를 찢는 비명을 질렀고, 사내들 역시 기함하며 제 보신을 하기 위해 칼을 찾아대기 시작했다.

    단상 아래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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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긴 참 재미있는 곳이군. 옛날 옛적 패망한 전범 집단이 아직도 연맹이랍시고 설치질 않나, 황제의 여자를 물건 취급하며 서로 사려 들질 않나.”

    헤르한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리엘라를 ‘사려 들었던’ 이들 전부 몸이 굳어 새파랗게 질린 눈으로 서로를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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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더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 자는 없나?”

    좌중을 훑는 헤르한의 눈빛은 푸른 광기를 띠었다.

    홀 안은 거대한 적막에 휩싸였다. 방금까지는 언성을 높여 싸우던 이들이 지금은 숨소리라도 새어나갈까 봐 스스로 제 입들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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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 폐하……! 고정하옵소서. 이곳은 중앙 신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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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그랬지. 순간 도둑놈 소굴인 줄 알고.”

    얼굴이 붉어진 원로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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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히 내 보물을 탐내는 꼴들이 우스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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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하지만 폐하. 성녀는 신이 정하시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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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왜. 여기, 이 땅 위에 선 모든 것 중 내 것이 아닌 게 있나?”

    피바다가 되어버린 단상 위에 낱장으로 흩어진 협약서가 둥둥 떠다녔다.

    그 찰나에 헤르한에게 베인 남자는 숨이 끊어졌고, 목숨을 걸고 나섰던 원로도 결국은 눈을 질끈 감고 물러났다.

    헤르한은 아예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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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리엘라 블리니테는 나, 헤르한 린하트 폰 비엘스바흐의 여자임을 분명히 알린다. 오늘 같잖은 소환에 응한 것은 이 말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경고는 이번뿐이야. 그래도 욕심을 부릴 자가 있거든 전쟁을 각오하고 덤벼라.”

    처벅처벅.

    핏물을 밟고 리엘라에게로 돌아가는 헤르한의 구둣발 소리 외에는 쥐새끼 한 마리의 기척도 없이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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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자. 리엘라.”

    마침내 제 자리로 돌아온 헤르한은 다른 이들에게 언제 그랬냐는 듯 나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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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 마. 이젠 고개 들어도 돼.”

    그의 뜨거운 손이 리엘라의 볼을 어루만졌다.

    손 대기도 아까운 보물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에 리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헤르한의 짙은 눈동자는 꼭 거울처럼 제 모습을 가득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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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안겨. 네 발에 더러운 피가 묻어선 안 되니.”

    리엘라가 쏟아지듯 기댄 몸을 헤르한은 가볍게 안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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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유유히 단상을 내려와 퇴장하는 동안 리엘라는 문득 헤르한에게 처음 안겼던 밤을 떠올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벌써 수도 없이 접촉했는데도, 헤르한의 살에 몸이 닿는 일은 아직도 리엘라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 * *

    가을볕이 따사로운 날이었다.

    리엘라는 활짝 웃었다. 근 몇 년을 통틀어. 아니, 태어난 이래 이보다 더 신나고 들뜬 적은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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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옷 어때요? 아니면 이 옷이 나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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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잘 모르겠는걸. 아무거나 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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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아저씨. 그러지 말고 잘 좀 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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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난 모르겠다니까! 나 원 참!”

    칼이 버럭 대답하고 돌아서 버리는데도 리엘라는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그저 ‘칼 아저씨도 많이 긴장하셨나 보네. 평소랑은 다르게!’ 하며 가볍게 웃어넘기기만 할 뿐.

    아까부터 리엘라를 못마땅한 듯 보던 행크가 다가온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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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송이. 무슨 허튼짓을 하는 거냐? 네까짓 게 의뢰인에게 잘 보여서 뭘 어쩌려고?”

    왜 저리 신경질일까? 누가 괴팍한 영감 아니랄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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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의뢰인에게 잘 보이려고 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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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비안에게 잘 보이려고 이러는 거지.’

    리엘라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마지막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파비안 얘기를 꺼내는 것이 새삼 쑥스럽기도 하고, 괜히 말을 늘여서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버석버석. 발밑에서 낙엽이 바스러지는 느낌이 좋았다. 흙바닥이 머금은 가을 냄새도 포근했고, 그 위에 늘어진 천막들과 모닥불도 정다웠다.

    이 숲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던가.

    작전을 펼친답시고 야영을 하는 건 언제나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자신의 천막은 너무나 낡고 좁기만 했으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게 오늘따라 유독 애틋한 풍경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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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

    리엘라는 어린 시절에 행크에게 거두어진 이후로 행크의 용병단에 소속되어 전국을 떠돌았다.

    행크 용병단은 말이 좋아 용병단이지, 사실은 돈 많은 귀족의 천박한 심부름이나 대신해주던 집단에 불과했다.

    생활고가 뒤따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용병단 사내들은 여자아이를 기르기엔 너무나 투박했고, 리엘라는 그들 틈에서 자라기엔 너무나 꽃처럼 섬세했다.

    리엘라에겐 구박받고 상처받고 눈치 보고 울며 잠드는 밤이 많았다. 어디에나 하나씩 있을 법한 불운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리엘라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은 않았다. 괴로울 때마다, 그 괴로움보다 더 큰 아름다움이 제 곁에 있어 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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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비안.’

    용병단의 유일한 동갑내기 파비안은 리엘라의 최초의 친구이고 가족이었으며, 앞으로의 모든 것을 함께 할 연인이고 삶의 전부였다.

    행크에게 구박받고 우는 리엘라를 달랠 때마다 파비안은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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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내가 반드시 널 행복하게 해줄게. 돈을 벌어 여기서 독립하면 제일 먼저 널 내 신부로 맞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넌 내가 지킬게.”

    그런 파비안이 약속한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오늘 의뢰인이 보수를 정산해주고 나면, 리엘라는 파비안과 결혼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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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 의뢰인의 마차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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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 다들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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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들 있지? 경박하게 굴면 절대 안 된다는 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아는 예의란 예의는 총동원하라고!”

    그 대단하다는 ‘익명의 의뢰인’이 누구인지, 그가 자기들 같은 무명 용병단에 이런 거액의 의뢰를 제안하고 보수를 치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리엘라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차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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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비안!’

    리엘라에게 중요한 건 의뢰인을 마중 나갔던 파비안이 저 언덕 아래에서 늠름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파비안이 몰고 오는 저 은빛 마차가 앞으로 자신에게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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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까지 멍청하게 웃고만 있기는. 속 뒤집히게.”

    그때까지만 해도 리엘라는 자신의 장밋빛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행크가 괴로운 얼굴로 자신을 보며 던지는 경고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이윽고 호화스러운 마차가 일렬로 늘어선 용병단원 앞에 멈춰 섰고, 파비안이 그 안에서 제일 먼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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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비……!”

    리엘라는 단박에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안길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직 파비안이 에스코트해야 할 손님이 내리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들떠서 발이 동동거리더라도, 그전까지는 예의를 차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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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뢰인이 대체 누구길래 다들 이렇게 군기가 바짝 든거지?’

    리엘라는 호기심에 사슴처럼 길게 목을 뺀 채로 우뚝 멈추었다.

    열린 마차 문으로 뻗어 나와 파비안의 손을 잡는 건, 눈꽃처럼 예쁜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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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

    리엘라는 놀라서 괜히 옆의 눈치를 보았다. 정작 동료들은 표정 변화 하나 없는 것을 보니 의뢰인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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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곳까지 발길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녀 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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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게다가 왕녀라고!?’

    행크가 손님에게 건네는 인사까지 보고서는 아예 자지러질 뻔했다. 저 고집불통 영감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꼴도 놀랍지만, 그보다, 왕녀라니……. 의뢰인이 왕녀라니!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늘 행복한 동화를 꿈꿔오던 자신에게 ‘왕궁에서 사는 공주님’이란 요정처럼 마냥 신비롭기만 한 존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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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크는 구면이지만 나머지 분들은 처음 뵙는군요. 모두 안녕하세요?”

    자신을 ‘그레타’라고 소개한 그녀는 햇살처럼 생글거렸다. 꼭 장인이 빚어놓은 도자기 인형처럼 흠집 하나 없이 예쁜 얼굴이었다.

    왕녀의 머리에 꽂은 나비 모양 핀은 각도가 틀어질 때마다 햇빛을 튕겨내며 반짝였고, 에메랄드빛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도 오로라처럼 너울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빛이 나는 여자.

    태생부터 다른 존재의 아름다움에, 또 그 우아함에 리엘라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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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리엘라로군요.”

    그레타 왕녀가 다가오자 리엘라는 깜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왕녀는 흑진주처럼 검은 눈동자를 굴리며 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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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비안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얼마나 만나보고 싶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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