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훤이 지정해준 별궁(신부의 집이 아닌 큰 규모의 왕족의 집을 임대하여 별궁이라 함)에서
가례일을 기다리며, 궁중의 법도와 혼례의 순서를 익히고 있는 연우에게로 대궐로부터
사자(使者)가 도착했다. 그리고 대문 밖에 화려한 의장과 악대가 서고, 각종 예물들과
속백함, 말 4필은 안으로 들어왔다. 미리 와서 납채(納采)를 기다리던 신씨는 그 행렬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 납채는 왕실 가례의 첫 번째 단계로 정사와 부사가 대궐 정전에서
왕으로부터 교명문(敎名文, 왕비로 결정된 것을 알리는 명령문)과 기러기를 받아 국구의 집안에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속백함(束帛函, 검붉은 비단 5필, 분홍색 비단 4필이 든 비단 예물함)과
말4필은 납징(納徵, 왕실 가례의 두 번째 단계로 혼인의 정표인 예물을 보내는 의식)에 필요했다.
어안이 벙벙한 신씨에게로 사자가 와서 말했다.
“상감마마께옵서 이전 세자빈간택 시에 이미 납채는 치뤘으니 납징부터 거행하라 어명 하시었습니다.”
납채는 치르고 연우가 죽었으니 그 동안의 괴로웠던 모든 세월을 도려내고, 납채가 끝난 시점과
납징이 시작되는 지금 시점을 잇고 싶은 훤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옛날의 납채가 효력을 발휘하는
지금의 순간으로 인해, 한때 중전의 신분으로 있었던 윤씨는 원래의 자신의 운명이었던 영원한
처녀귀로 돌아갔다. 그렇게 훤은 한 때 뒤바뀌었던, 그리고 영원히 뒤바뀔 뻔 했던 두 여인의
운명을 원위치로 되돌려 놓고 있었다.
신씨는 속백함과 예물들을 받쳐 든 상궁들과 연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다소곳하게 그림처럼
앉아있는 연우에게 절을 올린 그들은 품속에서 서찰을 꺼냈다.
“상감마마께옵서 보내신 봉서이옵니다.”
봉서는 높게 받혀져 연우의 손으로 건너갔다. 그림과도 같아서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그녀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다른 것에 시선도 두지 않고는 재빨리 봉서를
열어 펼쳤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내일을 기다리고, 또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내일을 기다리오.
그대와 함께 할 날은 머지않은 미래의 한곳에 박혀 있는데, 하룻밤 자고 일어난 오늘은
어이하여 그 미래에서 더욱 멀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소.>
비록 훨씬 수려해지긴 했지만, 옛날과 다름없이 기교 하나 없는 힘차고 정직한 필체였다.
그리고 변함없이 연우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내용이었다. 길지 않은 글을 오랫동안 되풀이하여
예전의 감정들과 함께 음미를 하고 있는데, 예물함을 열어 보던 신씨와 상궁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저, 그것이······.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적의와 함께 머리에 쓸 가체를 장식할
예물들 중에 빠진 것이 있사옵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예물 중에 빠진 것이
있다니, 이보다 더 불길한 일은 없었기에 말을 올리는 상궁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하지만 연우는 차분하게 미소를 보내며 우아하게 팔을 앞으로 뻗었다. 예물함을 달라는 표현이었다.
그녀 앞에 펼쳐진 예물함 속에는 휘황찬란한 각종 머리장식품들이 있었다. 그중 눈에 들어오는
외로운 봉잠 하나, 그것은 쌍봉잠 중에서 훤이 이제껏 가지고 있던 한 짝이었다.
한 짝의 봉잠만으로도 다른 비녀에 비할 수 없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비의 가례 봉잠.
“가장 긴 봉잠은 원래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하나이온데, 어찌 이런 일이······.”
“이것 때문이라면 마음 놓으세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구석에 둔 보자기를 가져왔다. 그리고 천천히 풀어 옷가지들 사이에 둔
하얀 천을 꺼내 그 속에서 훤이 정표로 준 봉잠을 내어 놓았다. 예물함에 홀로 있는 봉잠과
똑같은 그것을 본 상궁들은 물론 신씨까지 놀라서 연우를 보았다. 그녀는 그들의 말없는 물음에
답해주는 대신 훤의 봉잠 옆에 자신의 봉잠을 나란히 두었다. 같이 있어 더 아름다워진 쌍봉잠,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그것들은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상궁은 비단 속에 기름종이로 밀폐한 것을
신씨에게로 건넸다.
“원래가 악귀를 쫓는다는 영릉향을 마셔야 하온데, 상감마마께옵서 예비중전마마의 향기 하나라도
다치게 하지 마라시며, 난초 분말을 하사 하셨사옵니다.”
“원, 세상에 이리 많은 난초 분말을 언제 다 쓴다고. 조선팔도에 있는 것을 다 거둬들이셨소?”
신씨의 목소리엔 알 수 없는 떨떠름함이 담겨있었다. 연우는 그녀에게 예물함을 건네고 서안을
당겨 앉아 붓을 들었다. 훤에게 보내는 답장을 쓰기 위해 잡은 붓끝이 오래전의 기억에 물들어 떨렸다.
하지만 한번 종이에 닿은 붓은 날아가듯 유려히 움직였다.
<일 년 안에 주어진 달이 같고, 한 달 안에 주어진 날이 같고, 한 날에 주어진 시간이 같다는
옛 성현들의 말이 이제야 다 거짓임을 알겠사옵니다. 님(임금을 뜻하는 옛말임과 동시에
사랑하는 임)과 보냈던 한 날과 님을 기다리는 이 한 날은 분명 같은 한 날인데, 지금의 한 날은
님과 함께 있던 몇 날을 이어붙인 듯 소녀에게도 참으로 길기만 하옵니다.>
연우의 봉서는 상궁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연우의 집안에서 보내는 답서는 사자가 받혀 들고
화려한 의장과 악대들과 같이 대궐로 돌아갔다. 그들이 가고 난 이후, 방안에 연우와 신씨만 남았다.
신씨도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궁궐에서 보내준 상궁들과 차지들만 남고 별궁은 철통같은
호위에 들어가야 했다. 그녀는 장옷을 팔에 걸치고 일어나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아 한숨과
함께 또 다시 눈물을 보였다. 연우가 위로하기 위해 다정하게 불러보았다.
“어머니.”
“내가 일 년을 바랬더냐, 십 년을 바랬더냐? 내 새끼 얼굴 한 번 더 보고 보내겠다는데,
참으로 인정머리라곤 없는 임금이야. 그 구중궁궐에 들어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다고.”
신씨는 푸념하다 말고 앞에 앉은 이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 중전이란 것을 깨달았다.
“아! 송구하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여식인지라, 품에 조금만 더 끼고 있고픈 욕심에 감히
상감마마를······.”
“어머니, 이렇게 있을 때는 딸로 대해주세요. 어머니와 같이 상감마마를 원망해 드릴게요.”
“그랬다간 예법에 대해서 염의 일장연설을 들어야 하옵니다.”
연우의 입술이 선한 미소와 안타까움을 그리며 움직였다.
“오라버니는 어찌하고 있습니까?”
신씨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염은 어느 때와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일어나야 할
시간에 일어나고, 책 읽고, 자야할 시간에 자고, 스승의 예를 갖추고 오는 선비들마다 대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예전과 달라진 것 하나 없었다. 그래서 신씨의 마음은 더욱 속상했다.
연우의 죽음 뒤에 며느리인 민화가 있다는 것도 그녀는 믿겨지지 않았다. 민화는 여타의
공주들과는 달랐다. 염을 따라 사치 한적 없었고, 시댁 어른들 앞에 공손하고 정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원래 공주가 혼인한 집은 더 큰 칸수의 대저택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아비와 시부의 뜻과 함께 하여, 금상의 누이가 살기엔 턱없이 좁은 지금의 집에
계속 살아준 여인이었다. 그래서 신씨는 오만불손한 공주를 모신 다른 부마집안이 겪는 고통
같은 것은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런 공주가 자신의 딸을 죽였다니, 너무나 충격적이라
믿고 싶지 않았기에 원망도 미처 못 하고 있었다. 왕의 벌은 염에게만 내려졌고, 아직 민화는
그 어떤 언급도 없이 내당의 방에 그대로 기거하고 있었다. 아무리 죄인이라고 해도 임신을
한 여인을 내쫓는 것 또한 법도가 아니기에 왕실에서 어떠한 조치를 해주기 전에는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다른 이들의 탄핵도 모두 거두어져 그녀의 존재 자체가 소외되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염과 민화가 서로를 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씨를 가진 여인을
그리 냉대를 해야 하는 아들의 마음 때문에 신씨의 속도 같이 타들어갔다. 손자를 가지고 있기에
미워하는 것도 조상에 죄송했다. 그래서 그녀의 입에선 한숨만 나올 뿐 연우의 물음에 대한
답은 나오지 못했다.
여식을 하루라도 더 보고 있고픈 신씨의 마음과는 달리 다음날 고기(告期, 혼인 날짜를 별궁에
통보하는 의식)가 거행되었고, 관상감에서 기일이라 정한 그 날짜는 너무도 짧아 신씨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마음 급한 왕과, 후사가 없는 왕의 곁을 잠시라도 비워두면 종묘사직이
걱정된다는 신하들, 그리고 많지 않은 기일을 택해야 하는 관상감의 계산 속에는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고려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며칠 지나지 않아, 궐의 모든 상궁과 궁녀들이
별궁으로 와서 하는 책비(冊妃,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가 거행되었다. 왕이 파견한 상궁들이
주관하는데, 적의를 입은 연우를 본 그들은 모두가 그 기품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도 왕비의 당당함이 더욱 빛을 발하여, 조용하고 차분한 여인에게서 나오는 그러한
기품을 의아하게까지 느꼈다. 무릎 꿇은 연우에게 차례로 책문(冊文, 왕비를 책봉하는 문서),
보수(寶綬, 왕비의 도장인 금보), 명복(命服, 왕비의 옷)이 내려졌다. 그리고 자리에 일어선
그녀에게로 모든 상궁과 궁녀들이 대궐의 안주인에 대한 예를 갖추어 네 번의 절을 올렸다.
이로써 연우는 조선의 왕비가 되었고, 왕비는 정식으로 상궁과 내시가 모셔야 하기에 신씨는
더 이상 딸의 곁으로 올 수조차 없게 되고 말았다. 그 옛날, 세자빈이 아닌 처녀귀로만
규정해야 한다는 조정의 중론도 책빈(冊嬪, 세자빈을 책봉하는 의식)을 치르지 않고 죽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명사봉영(命使奉迎, 왕이 사신을 보내 별궁에서 대궐로 왕비를 맞이해 오는 의식.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왕이 직접 왕비를 맞이하러 가기도 함)의 날에는 그 어떤 날보다 부산했다.
이날은 왕실의 종친과 문무백관뿐만이 아니라 국구를 대신한 염도 별궁으로 왔다. 그의 아름다운
모습이 별궁에 나타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린 듯 그의 곁에 몰려들어 순식간에 인파에
둘러싸였다.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아름다움을 탐하고픈 이들 사이에 가벼운 몸싸움도 일어났다.
이러한 소란 속에서도 염은 흐트러지지 않은 미소로 예의를 갖춰 일일이 응대했고, 그의 미소에
사내들조차 설레는 미묘한 마음을 느꼈고, 민화공주의 죄가 이해가 되기까지 했다. 훤도 직접
맞이하러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움직여야 하고, 그런 만큼 국고 또한
낭비가 된다는 연우의 서찰로 인해 욕심을 접어야 했다. 모두가 기다리는 동안 별궁 안에선
궁궐로 들여보내는 딸에게 하는 마지막 당부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연우는 붉은 적의를 입고
머리 위에 갖은 비녀와 떨잠, 쌍단봉잠, 마리삭 금댕기로 장식을 하고, 좌우 양옆에는 헤어져
있던 쌍봉잠이 자리를 잡았다. 그녀에게 염이 유교예법에 정해진 대로 말했다.
“조심하고 공경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명령을 어기지 마소서.”
연우는 격식을 갖춘 것이 생활인 오라버니를 보고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예법에
정해진 말이 아니었어도 그는 똑같이 말했을 것 같았다. 염의 옆에 선 신씨도 정해진 말을 했다.
“힘쓰고 공경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명령을 어기지 마소서.”
단정한 염의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눈물을 삼키느라 힘겨웠다. 이윽고 연우가 연(輦, 가마)에
오르자 사면을 내려 그녀의 모습을 감추게 했다. 신씨는 입술을 깨물고 쓰다듬을 수 없는 딸을
대신해 연을 쓰다듬었다. 보다 못한 염은 그녀를 부축하여 연우에게서 멀어지게 하여 속삭였다.
“어머니, 세상의 모든 눈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시면 중전마마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어두운 가마 속에 앉은 연우도 옆의 덮개를 열어 어머니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덮개를 들썩임과 동시에 옆에 서 있던 상궁이 조용히 아뢰었다.
“중전마마! 심중은 헤아리오나, 닫으시옵소서. 그리고 절대로 안수(眼水, 왕비의 눈물)를
비추어선 아니 되옵니다.”
연우와 신씨가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악대의 피리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화려한
의장을 선두로 하여 갖은 악기가 왕비의 입궐을 축하하며 앞섰고, 그동안 왕비에게 내려졌던
교명문, 책문, 보수, 명복을 실은 가마가 각각 줄을 지어 뒤를 따랐다. 그리고 가마들 중,
연우가 탄 가장 화려한 연이 마지막 가마행렬을 이었다. 문무백관은 그 뒤를 따라 말을 타거나 걸었다.
그 가운데 염도 슬픈 눈매를 숨기고 말을 타고 있었다. 행렬의 양 옆으로 상궁과 내관이 한 겹으로
호위하고, 가장 끝 양 옆은 군사들이 호위했다. 왕비의 가례행렬을 보기 위해 모여든 인파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가짜 왕비가 진짜 왕비를 죽이고 중전이 되었는데, 죽었다가
살아난 진짜 왕비가 죽어가는 왕을 되살려 가짜를 몰아내고 결국 궁궐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문은 세상 무엇보다 빠른 말로 일파만파로 퍼졌기에, 그 기적의 왕비를 보고 싶은 마음에
며칠을 달려온 이들도 있었다. 백성을 괴롭히던 파평부원군 일파를 몰아내준 고마운 은인,
그들의 진짜 왕비를 향해 모두가 기꺼이 땅에 몸을 엎드렸다.
경복궁에 왕비의 행렬이 도착했다. 가마 안의 연우도 멈춰선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한동안 바깥이 어수선 하더니 이내 앞의 가리개가 위로 올려졌다. 환한 바깥이 드러났지만
그녀의 눈은 화강암 판석이 깔린 바닥만이 어지러이 보였다. 혹시라도 저 바닥에 발을 올린 순간
화강암 판석들이 갈기갈기 부서져 떨어져 내리지는 않을까 두려워 큰 숨을 삼켰다. 그때 앞에
하얀 손이 보였다.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고 연우의 손이 얹어지기를 기다리는 그 손의 주인은
분명 훤이었다. 손 하나 만으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이 발을 내디딜 그 곳에 환한
빛이 깔렸다. 연우는 하얀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리고 따뜻하게 꼭 쥐는 훤의 손에
의지해 가마 밖으로 나가 그와 마주섰다. 검은색 구장복을 입고, 면류관을 쓴 그는 연우를
안고픈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그녀의 눈동자 속에 미소를 심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그녀의
눈동자에 스며들어 물기로 변했다. 연우는 눈물을 비추어선 안 된다는 상궁의 말을 떠올려
얼른 입술을 앙다물었다. 훤이 그녀의 마음을 배려한 듯 따뜻하게 말했다.
“내일이란 것도 있었고, 오늘이란 것도 왔소. 매일 오는 오늘이 이리도 신기한 줄 미처 알지 못했소.”
“세상의 신기한 것 중에 상감마마의 미소에 미치는 것이 있다 하더이까?”
“있소, 더 신기한 것이.”
훤은 복잡한 표정으로 두 팔을 뻗어 연우의 가체 양 옆에 꽂혀 있는 쌍봉잠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쌍봉잠에게 하는 말인지 그녀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하나가 되었구려. 두 개가 하나인 것을 알지 못한 채 영원히 홀로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훤과 연우는 활짝 열린 근정전으로 나란히 나아갔다. 문무백관들은 어도 양 옆 품계석 뒤에
줄을 지어 서서 몸을 숙였고, 둘은 그들 가운데를 지나갔다. 훤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 서찰을
보내놓고 가슴이 설레어 잠 못 이루던 어린 훤이 멈춰 섰다. 그리고 연우가 밟고 지나간 자리에
세자의 서찰을 받고 얼굴을 붉히던 어린 연우가 멈춰 섰다. 훤이 조금 더 지나간 자리에 죽통을
들여다보며 싹을 기다리던 어린 훤이 멈춰 섰고, 그 옆에 연우가 지나간 자리엔 화단을 보며
싹을 기다리던 어린 연우가 멈춰 섰다. 또 다시 세자빈으로 간택된 연우를 상상하며 밤하늘의
달을 보던 어린 훤이 멈춰 섰고, 그 옆에 나란히 세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밤하늘의 달을 보던
어린 연우가 멈춰 섰다. 조금 더 지나간 자리에는 죽은 세자빈을 부르며 울부짖는 훤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한양 땅을 떠나며 울부짖는 연우가 있었다. 더 지나간 자리에는 죽은 연우를
그리워하여 북녘하늘을 바라보는 왕이 있었고, 그 옆에는 님이 그리워 경복궁이 있는 북쪽하늘을
바라보는 무녀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많은 발걸음을 하고 지나간 자리에 온양에서의 비오는 날,
누구냐고 묻는 왕과, 누구라고 답할 수 없는 월이 만났다. 몸은 만났으나, 마음은 만나지 못했던
그날의 모습들을 지나 또 다시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들이 지나가는 발아래에 솟아올랐다.
비록 오랜 세월 몸은 떨어져 있었으나, 둘은 같은 날 설레고, 같은 날 싹을 기다리고,
같은 날 서로를 상상하고, 같은 날 울고, 같은 날 그리워하며 같은 곳을 보았고, 같은 날 만났다.
둘은 근정전 기단 위로 올라가 마주보았다. 그러자 올라오던 길에 남겨진 수많은 발자국들이
훤의 마음속으로 병풍처럼 첩첩이 접혀 들어갔고, 연우가 남긴 수많은 발자국들도 그녀의
마음속에 병풍처럼 첩첩이 접혀 들어갔다. 훤은 왼손엔 규를 잡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연우도 왼손엔 규를 잡고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손과 그의 과거를 마주잡았다. 훤도 그녀의
손과 그녀의 과거를 힘껏 잡았다. 그들의 눈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똑같이 시선을 돌려 멀리
광화문을 지나 경북궁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한양 땅과 더 먼 조선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 아래에는 문무백관과 백성들이 왕과 왕비를 향해 국궁례(鞠躬禮)를 올리는 물결이 일어났다.
동뢰(同牢, 첫날밤을 치르는 의식)를 위해 강녕전의 걸음은 소리죽여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원래는 왕과 왕비의 합방은 교태전에서만 가능하지만 동뢰만큼은 강녕전에서 치른다.
술과 음식을 차린 상을 두고 수줍게 등지고 있는 훤과 연우 옆으로 상궁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 그들이 훤은 귀찮고 영 못마땅했다. 이곳 강녕전의 동쪽 온돌 큰방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연우는 가체와 적의를 벗고 당의 차림으로 왔고, 훤도 면류관과 구장복을 벗고 곤룡포를 입고
들어왔기에 그다지 손가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수발을 든답시고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상궁들이
못마땅할 수밖에. 하지만 그들은 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하나의 박을 쪼개어
만든 잔에 술을 부으려고 하고 있었다. 결국 그의 급한 성격이 드러났다.
“모두 물러나라!”
제조상궁이 당황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아직은 아니 되옵니다. 입태시가 되려면.”
“어허! 물러나라 하였다. 잠시 중전과 이야기라도 나누려고 하는 것이니라.”
말을 자르며 역정을 내는 왕을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그들은 물러나기 전에 왕의
곤룡포를 벗기기 위해 다가왔다. 이를 눈치 챈 훤이 냉큼 말했다.
“됐다. 내 중전의 시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중전의 시중은 내가 들 것이니 어서 나가기나 하라!”
“그리 하오시면 술잔이라도······.”
“그 또한 알고 있다. 세 번씩 나눠 마시면 되는 것 아니냐.”
상궁들은 왕의 부릅뜬 눈을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머리맡에 도끼가 그려진 병풍을 쳐 놓고
방문들을 닫고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났다고 해도 멀리 간 것은 아니었다. 바로 큰방에 둘러진
작은 방들에 각각 앉아, 술을 적신 솜으로 귀를 막고 자리를 지켰다. 훤은 상궁들이 사라지자마자
연우의 등을 끌어안았다.
“저들이 조금만 더 미적거렸다면 그대가 첫날밤 생과부가 될뻔 하였소.”
연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훤은 그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궁금하오. 급히 저들을 몰아내는 나를 보며 등 돌리고 앉아 어떤 표정으로 있었소?”
“마음으로 웃고 있었사옵니다.”
“내가 경박하여 우습게 보였소?”
“아니옵니다. 어쩜 신첩의 마음과 그리도 똑같을까 신기해하느라 웃었사옵니다.”
“그렇다면 돌아서 나를 보시오.”
“돌아 보고픈데 막으신 분은 상감마마시옵니다.”
안고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품에서 놓았다. 떨어진 그녀의 뒷모습에선
틀어 올려진 머리에 꽂힌 용잠이 보였다. 그곳엔 이젠 더 이상 붉은색 낡은 댕기는 없었다.
훤은 쪽진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하나의 박을 쪼개 만든 두 개의 잔에 술을 부었다.
한 잔은 연우에게 주고 한 잔은 그가 들었다. 입술에 잔을 가져다 대니 술 향이 코로 들어왔다.
난향, 아니 울금향이었다. 훤의 눈썹 사이가 촉촉하게 일그러졌다.
“나란 놈은······어찌 이리도 어리석은지.”
울금초로 향을 낸 술은 신랑신부의 첫날밤에 악귀를 쫓는 술이었다. 그러니 온양에서 처음 만날 날
월이 바쳤던 술은 초례를 위한 것이었다. 연우는 이미 옛일이라는 듯 미소로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다독이며 술을 마셨다. 훤도 겨우 미소를 되찾아 술을 마셨다. 작은 양의 술을 세 잔
연거푸 마시고 나니 연우의 볼과 입술에 붉은 기가 올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훤의 입술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 조심스럽게 닿았고, 혀끝의 난향에 닿았다. 연우의 비녀를 뽑아 땋은 머리를
내려뜨린 뒤 가볍게 닿았던 입술은 서서히 멀어졌다. 그리고 연우의 옷고름도 서서히 그의
손에 당겨져 풀어졌다. 훤은 그녀의 입술 대신 옷고름 끝에 입을 맞췄다. 이내 입술은 옷고름을
따라 올라가 목덜미에 닿았다. 그의 두 손은 자유로이 움직이며 당의를 벗겨내고 치마와 겹겹이
둘러진 속치마들을 걷어냈다. 그래서 그 안의 하얀 비단적삼만 남았다. 속살이 비치는 모습을
잠시 보고 있던 훤은 그녀의 팔을 당겨 손목의 맥박을 삼켰다. 살아있기에 뛰는 맥박이 술보다
더 취기를 오르게 했다. 또한 연우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가늘게 떨리는 숨소리가 그의 몸을
더욱 달아오르게 했다. 결국 훤은 곤룡포를 급하게 벗어 던지고 붉은 비단 이불 아래에 그녀를
끌어다 눕혔다. 그리고 저고리와 바지도 벗어 던졌다. 갑자기 서두르는 그의 몸에 그녀는
잠시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말했다.
“어복을 고이 접겠나이다. 잠시 물러나 주시옵소서.”
“에? 무, 무슨······?”
“어복이 함부로 나뒹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이는 신첩이 예를 저버리는 것이옵니다.”
연우는 자리에는 일어나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옷가지들을 정성을 다해 접었다. 그 모습을
어리둥절하게 보고 있던 훤은 기가 막혔지만, 마음과 같이 몸도 급했기에 툴툴거리며 같이
옷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옷을 접어 본 적이 없는 왕이었기에 그의 손에 접혀진
옷들은 모두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다시금 그녀의 손이 갔다. 연우는 툴툴거리는
그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훤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중전이 나를 놀리고 있는 것 같소. 내 몸이 지금 어떤 지경인지 모른다 하진 못할 것이니.”
연우는 다 접은 옷가지들을 머리맡에 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신첩의 몸 또한 상감마마와 그닥 다르지 않사옵니다. 하오나 예는 예인지라.”
“꿀맛을 모르는 벌도 꽃 속의 꿀을 찾아가고, 꽃향을 모르는 나비도 꽃가루를 취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이러한 벌과 나비의 본능을 꽃이 어찌 알겠소?”
성을 가르치지 않아도 성욕을 느끼는 본능을 가지는 것이 사내의 몸이고, 여자는 그런 본능을
모르니 현재 그의 달아오른 몸을 다 헤아리진 못할 것이란 뜻이었다. 연우는 다소곳하게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 청순한 목소리로 말했다.
“봄철의 꽃과 풀은 비가 오지 않아도 피고, 뜰 앞의 노란 국화는 서리를 기다리지 않고도
피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온데, 하물며 자연과 하나인 여인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사옵니까?”
나이가 들어 몸이 성숙하면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성욕이란 것이,
사내의 몸과 여인의 몸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의 당돌한 말에
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더 이전에 첫 서찰을 받았을 때부터
그녀는 만만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연우의 말을 음미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고,
몸도 더운 열기에 휩싸여 달아올랐다.
“비 없이 핀 봄철의 꽃과 풀을 한창일 때 취하고, 서리 없이 핀 뜰 앞의 노란 국화도 한창일 때
취하는 사내도 자연과 더불어 단단히 여물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오.”
‘단단히 여물었음’이란 말에 연우의 두 볼이 붉어졌다. 이내 곧 훤의 품 안에 안겨
붉은 비단 이불 아래에 들어간 그녀의 볼은 더욱 붉어졌다. 그의 손이 적삼 치마 아래에 들어와
여러 곳을 더듬거리다가 속곳을 벗겨냈다. 그리고 자신의 속곳바지를 벗어 내린 뒤 연우의
무릎 사이로 들어가면서 몸 위로도 올라갔다.
“우뚝 솟은 산일수록 쉽게 낮아지지도 않는 법이니, 그대의 몸이 힘겹더라도 나를 미웁다 마시오.”
훤의 장난어린 너스레에 연우는 고운 미소로 응수했다.
“깊게 패인 계곡일수록 더 많은 물이 흐르는 법이니, 그 물 맛에 취하지나 마옵소서.”
붉은 비단 이불이 큰 물결을 치며 한번 출렁 움직이자, 붉은 비단 천에 금실로 수놓아진
황금용이 있는 힘껏 꿈틀거렸다. 그 순간 연우의 큰 눈이 놀라 더욱 크게 떠졌고, 짙은 속눈썹과
턱은 경련이 일듯 파르르 떨렸다.
“그것 보시오.···으···그대의 몸이···힘겨울 거라 하지 않았소.”
“뜨, 뜨거워서······.”
붉은 비단 이불이 또 한차례 큰 물결을 일으켰다.
“아······.”
힘겹게 삼키는 신음소리를 훤의 입술이 빨아들였다. 그렇게 그녀의 신음소리와 더불어 자신의
신음소리도 같이 삼켰다. 그리고 붉은 물결은 갈수록 빈번해져갔다. 가쁜 숨을 쉬기 위해
입술을 놓았다.
“뜨겁다니?······해가 뜨거운 줄 정녕 몰랐소?”
“아아······, 이토록이나 뜨거운 줄을 몰랐사옵니다.”
“나 또한 몰랐소.···겉이 차가워 안도 그럴 것이라 여겼건만,···달 속이 이리 뜨거울 줄이야.”
더 이상 두 사람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훤의 허리가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짐과 동시에 붉은
비단 물결도 더욱 거세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뚝 솟은 산일수록 쉽게 낮아지지 않는다는
훤의 말이 결코 너스레가 아니었음이 드러났고, 깊은 계곡의 물맛에 취하지나 말라던 연우의
응수대로 훤은 흠뻑 취하고 말았다. 그 취기로 말미암아 강녕전 마당에서 울러 퍼지는 입태시를
재촉하는 북소리도 듣지 못했다.
어느덧 모든 의식이 끝나고 세상의 시간도 끝난 것만 같은 적막함이 찾아왔다.
하지만 훤은 여전히 연우의 난향에 취해 있었다. 소중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누워 속삭였다.
“내일 아침이면 그대의 난향이 내 몸으로 다 옮겨와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마마의 국화향은 신첩의 몸에 옮겨와 있을 것이옵니다.”
“두렵소.”
“무엇이 두렵사옵니까?”
“아침마다 그대의 품에서 나를 떼어내려는 계인(북으로 아침을 깨우는 사람)의 목을 베라
명하는 폭군이 되지는 않을까······.”
“마마께옵서 폭군이 되시면 신첩은 기꺼이 요부가 될 것이고, 성군이 되시면 또한 기꺼이
현부가 될 것이옵니다.”
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참동안 큰소리로 웃고 난 그가 연우의 몸 위로 다시 슬그머니
올라가며 말했다.
“중전은 현부가 될 것이오. 내가 그리 되게 하리다.”
“기꺼이······.”
그의 말에 대한 답인지, 아니면 몸짓에 대한 답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말과 표정이었다.
훤은 그녀의 몸 안을 찾아들며 감정이 차올라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오.”
“네.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 주시오소서.”
연우는 팔을 둘러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에도 감정이 차올랐다. 큰방 주위의
작은 방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상궁들은 애가 탔다. 가례절차상 내일의 왕비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와
전하회백관(殿下會百官), 그리고 왕비수내외명부조회(王妃受內外命婦朝會)라는 빽빽한 일정이
남아있었기에, 왕비의 몸을 생각해서라도 그만 조용히 잤으면 했다. 하지만 솜을 막은 귀로
간간히 들려오는 소리와 움직임이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아 괜히 왕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상궁들의 마음은 모두 하나가 되어 어서 잠들기를 밤새 기원했다.
#완결
조용히 시간이 흐를 동안 사람들의 머리에 민화는 잊혀져갔고, 그리고 배는 불러만 갔다.
어느덧 그 시간들은 염의 집 대문 앞에 숯과 한지를 끼워 엮은 금줄과 함께 가로 걸렸다.
민화의 목숨이 위태로울 상황까지 갔던 힘겹던 해산이 끝나고 사내아이를 낳았지만,
그녀는 아이를 안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미리 왕비가 내의원의 수의와 의원들을 내려주지
않았다면 금줄이 걸리기도 전에 그녀의 숨은 사라졌을 것이다. 민화가 정신을 차리고 제일
먼저 물은 것은 아기였다. 비록 염과 조정으로부터 내쳐지긴 했지만 그의 씨였고,
어쩌면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건강하고 또한 사내였으면 했다. 그래서 염과 꼭 닮은 건강한 사내아기란 답에 그녀는 비로소
안심의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해서라도 한번 안아 보고픈 마음에 주위의 도움을 받아 겨우
품에 안아보았다.
열 달을 뱃속에서 노심초사하며 키운 아들이었다. 그리고 목숨 줄을 내어놓고 어렵게 낳은
자식이었다. 열 달을 품은 것과, 그리고 어렵게 낳은 것을 빼고도, 품에 있는 아이는 가슴이
아파서 숨이 막힐 만큼 소중하고 아릿했다. 그 소중함이 그녀의 숨을 움켜쥐었다. 심장도 움켜쥐었다.
그리고 아이를 안기 전에 흘린 눈물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은 눈물을 쏟아져 나오게 했다.
“이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어야 하는데······. 죄인의 자식이 되어선 안 되는데······.”
그녀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마음, 갓 태어난 아이의 마음이 되어본 것이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 마음먹어서도 아닌, 자연스럽게 든 마음이었다.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민화의 몸이 회복되어간 시간이기도 했지만, 이름을 받지 못한
아이와 정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유예기간은 끝이 났다.
“죄인 민화공주는 나와서 어명을 받으시오!”
의금부판사의 목소리가 염의 사랑채를 흔들고 들어와, 민화가 있는 안채까지 흔들었다.
그녀는 체념한 듯 아기를 안고 눈물과 함께 말했다.
“그냥 넘어갈 상감마마가 아니심을 알기에 오랫동안 기다렸다. 아가! 이젠 너도 죄인의 품이
아닌 아비의 품으로 가겠구나. 그분이 네게 성을 주고 이름도 주실 거야.”
하지만 말과는 달리 품에 안은 아기를 쉽게 내어놓을 수가 없었다. 방글방글 웃던 아기는 어미의
슬픔에 동화된 것인지 울먹거리다가 작은 주먹을 움켜쥐고 예쁜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울음을
뿜어내는 입술도 작았고, 그 안에 치아가 없는 잇몸과 혀도 자그마했다.
“네 이가 자라는 것도 못 보겠구나. 앞니만 두 개 난 귀여운 모습도 못 보겠구나.
정확하지 않는 발음으로 엄마를 부르는 소리도 못 듣겠지······.”
바깥에서 어서 나오라는 소리가 요란했다.
“민상궁! 아기가 우니 마지막으로 젖은 물리고 나가겠다고 전해다오. 마지막으로······.”
젖을 물리니 아쉽게도 예쁜 울음소리가 그쳤다. 그리고 새까만 눈망울에 눈물 덩어리를 매달고
어느새 방글거리며 젖을 빨기 시작했다. 한 달된 아기 같지 않게 숱 많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이 딱 염의 축소판이었다.
“서방님의 어린 모습은 내 접하지 못하였는데, 보지 못했던 서방님의 아기 모습을 너를
통해 보는구나. 고맙다.”
배불리 먹고 난 아기는 젖을 그대로 입에 문 채로 잠이 들었다. 민화는 유모에게 아기를 건넨 후
하얀 소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다시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신씨가 안절부절 하며
서서 울고 있었다. 민화는 그녀의 품에 아기를 안겼다. 그리고 딸을 죽이려 했던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신씨에게 며느리로서 마지막 큰 절을 올리고 일어났다.
그녀의 발은 중문으로 향하다 말고 길을 돌려 쪽문이 있는 뒷길로 향했다. 그곳엔 여전히 굳게
닫혀 진 쪽문이 있었고, 붉게 물든 단풍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다니지 않게 된 길엔
다른 낙엽들과 같이 단풍잎도 떨어져 애초부터 사람이 다니지 않았던 것처럼 길을 숨기고 있었다.
때마침 떨어지던 단풍잎 하나가 민화의 하얀 어깨에 떨어졌다. 손가락 두 개로 집은 붉은 것을
옛날의 그때처럼 입에 맞춰보았다.
“서방님, 붉은 단풍잎이 꼭 불꽃같아서 설레어요.”
민화는 손에 든 붉은 단풍잎을 옷 속의 품에 넣고 의금부판사가 기다리는 사랑채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멍석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염이 있는 사랑방 문을 쳐다보며 그곳에
무릎 꿇고 앉았다. 의금부판사는 두루마리를 펼쳐들고 큰소리로 읽었다.
“죄인 민화공주는 들어라! 8년 전 세자빈시살사건 때, 개인의 욕심을 위해 사사로이 생명을
앗는 주술을 직접 행한 죄를 묻노라! 이에 너의 직첩을 회수하고, 노비형을 선고한다!
단, 왕족임을 감안하여 태형은 면제하노라!”
“아기는? 태어난 아이는 어찌하라 하시었느냐?”
“원래가 허 염의 씨니, 이 가문의 자식이라 하시었습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자신이 노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보다 아이의 안전에 마음 놓는 민화였다. 그리고 안심하자마자,
찾아오는 슬픔은 염과의 헤어짐에 따른 것이었다. 이미 오래전 부부간의 인연은 끊어졌지만
한 울타리 안에는 있었는데, 이제는 그나마도 아니게 되었다. 민상궁도 소복을 입고 민화를
따라 가기 위해 나왔다. 의금부 관원들이 어서 나가자고 재촉하자 민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염이 있을 사랑방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하지만 숙여진 몸은 그대로 멈춰 앉아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느라 일어서지 못했다.
사랑방에 앉아있는 염도 민화와 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흐느껴 우는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입을 막은 주먹을 이로 깨물었다. 차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대문을 빠져나가 듯
멀어져 갔다. 염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버선발로
마당을 달려 대문으로 갔다. 그의 눈에 이미 모든 일행이 나가고 닫히고 있는 대문이 보였다.
그 앞에 멈춰선 염은 팔을 뻗어 대문을 짚고 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땅에는 떨어진
그의 눈물자국이 선명히 새겨졌다.
“염아.”
염은 신씨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품에는 강보에 쌓인 아기가
세상의 떠들썩함과는 상관없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안아보렴. 신기할 정도로 널 많이 닮았단다. 순하고, 예쁜 것이 마치 네가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아.
아마도 태중에 있을 때 공주께오서 너만 닮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어서 일게야.”
아기를 안아 든 염의 손길은 서툴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기는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잘도 잤다.
“자면서도 내가 네 아비인 줄을 아는 것이냐? 정말······순하구나. 반갑다, 의야.”
허 의. 태어나던 날 지어놓지만 전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의는 좋은 꿈을 꾸는 것인지,
아니면 아비의 말에 답을 하는 것인지 입에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하인이 염의 신발을 가져다
발아래에 놓았다. 신을 바로 신은 그의 발길은 조용히 쪽문이 난 뒷길로 향했다. 여전히 첩박힌
상태의 쪽문이 있었고, 문 너머에 붉은 단풍이 보였다.
“공주, 붉은 단풍잎이 마치 꽃과도 같아서 슬픕니다.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 제 마음은
변하지 않겠지만, 공주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염은 조심스럽게 아기를 품에 꼬옥 안고 민화가 보고 싶은 마음을 숨겼다.
긴 길을 걸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양 땅을 벗어난 민화는 이렇게 오랫동안 걸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지쳐 다리가 꺾여도 호송하는 의금부관원들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이 되니 발에 물집이 짓물러져 이젠 더 이상 걸을 수조차 없었다. 결국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의금부판사도 더 이상 걷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잠시 동안 쉬겠다며
시간을 주었다. 민상궁은 자신이 지친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민화부터 평평한 돌에 앉혔다.
민화는 잠시 쉬는 동안에도 염과 아기와 헤어진 슬픔으로 인한 가슴이 걷기 힘든 다리보다
더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 지친 그녀들 앞으로 제일 앞서가던 의금부판사가 다가와 품에서
봉서 하나를 꺼내 건넸다.
“상감마마께오서 내리신 봉서이옵니다.”
민화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서 봉투를 열고 읽었다. 글이 엄한 오라비의 목소리로 들렸다.
<민화공주 보아라. 지금 네가 걸어가고 있는 길은 14살의 어린 여인이 부모와 오라비,
그리고 정혼자를 두고 죽은 자가 되어, 천한 신분이 되어 울며 갔던 길이다. 혹여 너의 아기를
두고 가는 슬픔을 느끼느냐? 한 달간의 정으로 인해 느끼는 슬픔의 양이 얼마이냐?
너로 인해 14년간의 정을 쌓은 자식을 잃은 너의 시부와 시모, 그리고 지아비의 슬픔은
지금 네가 느끼는 슬픔보다 얼마나 더 컸을지 헤아려 보아라. 너의 죄로 인해, 그리고
죄를 벌하느라 내리는 벌로 인해, 너는 네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두 번 죽였음을 잊지 말아라.
아무리 힘들어도 네 삶을 포기하지도 말아라. 그렇게 된다면 넌 네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세 번 죽이게 될 것이다. 죄를 씻고자 한다면 부디 삶으로 용서를 구하라.>
민화는 자식을 잃은 시부와 시모의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누이를 잃은 염의 마음도 되었다가,
자식의 죄를 가려주기 위해 대의를 버렸던 부왕의 마음도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훤의 마음이 되었다가 모든 것을 잃은 연우의 마음이 되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선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정전 앞에는 대비한씨가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이번 왕의 처사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었다.
민화는 그녀의 딸이었고, 왕의 누이였다. 그런데 공주를 관비로 보낸 것은 대비뿐만이 아니라
조정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대신들의 요구였으면 대비가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였다. 이미 사건 종결이 나고 모두 잊어가고 있는 것을 왕이 들춰내서 대신들이
반대하는 것을 설득하여 벌까지 내렸다. 결코 공주라 하여 죄를 눈 감아 준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최소화하기 위해 출산할 때까지 벌을 연기한 것이란 왕의 말은 그 어떤 것보다
대신들의 마음을 두렵게 만들었다.
훤은 대비가 바깥에서 울며 소리치는 것을 무시하고 언제나 다름없이 정사를 돌보았다.
석강을 끝내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사정전을 나갔다. 앞에 앉아 있는 대비 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친 훤은 빠른 걸음으로 강녕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왕의 뒤를 향해 대비가 울부짖었다.
“주상! 세상의 도의가 이런 것이옵니까? 누이에게 허물이 있다하면 제일 먼저 그 허물을 덮어주고
가려주어야 하는 것이 핏줄의 도리가 아니옵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주상!”
강녕전의 마당에 선 훤은 그제야 애써 힘주고 있던 어깨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북쪽의 하늘을 보며 옆의 운에게 말했다.
“운아, 이로써 난 불효자가 되었구나. 아바마마께오서 할마마마와 민화공주를 용서하고
지켜 달라 하시었는데, 그것이 안 되면 아바마마를 용서치 말라 하시었는데······.
난 결국 아바마마를 벌한 것이다. 하지만 알아주시겠지. 민화를 벌한 것은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
왕으로서 한 일이란 것을. 그 부탁은 미래의 왕이 아닌 아들에게 한 부탁이었을 것이니.”
훤은 운을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쁜 놈.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그럴 것이다 라던가 뭐, 달리 할 말은 없는 것이냐?”
“상왕마마께오서 윤언하시었을 때 소신, 그 자리에 없었사옵니다. 허니, 그 뜻 또한 판단해선
아니 되는 것으로 아옵니다.”
훤은 그를 붙잡고 뭘 말하겠느냐는 표정으로 웃었다. 하지만 그가 사심이 들어가지 않는 시선으로
곁에 있어주는 것이 든든했다.
“옆에 있는 신하는 말이 없어 외롭게 하고, 북촌에 있는 신하는 벼슬만 내리면 모조리
고사하여 외롭게 하는구나.”
훤은 강녕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날과 다름없이 그 뒤를 돌아 교태전으로 들어갔다.
그곳 마당에는 연우가 노심초사하며 그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도 공주의 소식을 들었지만
왕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는 성품 때문에 홀로 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훤은 연우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보자 이제껏 참고 있던 감정들이 올라와 얼른 고개를 돌리고 교태전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때였다면 그녀를 품에 안는 것을 먼저 했겠지만, 오늘 만큼은 얼른 단둘만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상석에 앉은 훤은 목소리에 힘을 주고 애써 왕의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동안 미뤘던 일을 처리하였소. 이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기에 중전께선 그 어떤
말도 삼가시오.”
연우는 왕의 옆에 앉아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듯 누르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삼가할 말이 없사옵니다. 오직 상감마마의 아픈 가슴만이 염려되옵니다.”
“나는······. 나는······.”
연우의 표정과 손길이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자 훤은 굵은 눈물을 쏟아냈다. 바깥에서 싸움이
붙어 덩치 큰 놈, 작은 놈 가리지 않고 모조리 패고 들어온 꼬마가, 엄마가 다정하게 다친
곳을 쓰다듬으면 갑자기 눈물콧물 다 쏟아내며 울음을 터트리는 것처럼, 훤도 그녀의 위로에
왕으로서의 긴장감을 풀고 감정을 가진 나약한 한 인간이 되었다.
“내가 잘 한 것이라 하여주시오. 당연히 그리 하여야 한다 말해주시오. 아바마마께 죄송해도
그리 하여야만 한다고······.”
연우는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를 따라 같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공적이 뚜렷하면 아무리 탐탁지 않고 미천한 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상을 주고, 과실이
뚜렷하면 근친이나 총애하는 신하라 할지라도 반드시 벌주면, 소원한 자들은 열심히 일할 것이고,
측근자는 오만해질 수 없을 것이라 하였사옵니다<한비자中>. 상감마마께오서 행하시는
그 어떤 일도 옳지 않을 수가 없사옵니다. 단지 신첩이 이렇게 눈물을 보이는 것은 누이를
벌한 한 사내의 마음과 하나인 아내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녀의 말에 훤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왕으로서 위로를 받았다. 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 당겨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 안은 채로 말했다.
“어이하여 이 시간까지 석수라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오?”
“그것이······. 소주방에 일러 석수라는 강녕전으로 들라 하였사옵니다.”
왕이 왕비와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제껏 교태전에서 주로 식사를 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강녕전으로 가야 한다니 이상했다. 연우는 그의 궁금함을 덜어주었다.
“대비마마께옵서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저리 계시온데, 어찌 며느리가 되어 먹을 것을
가까이 할 수 있겠사옵니까? 신첩은 대비마마와 함께 할 것이니, 상감마마께옵선 강녕전에서 드시옵소서.”
평소 공주가 저렇게 된 것이 중전 때문이라며 며느리를 좋게 보지 않는 대비였지만, 연우는
시모를 정성으로 받들었다. 대비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아들이 지나치게 며느리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의 일이 터졌으니 앞으로 연우가 더 힘들 것 같아 훤은
미리 마음이 쓰였다.
“나 또한 어마마마와 함께 할 것이니, 석수라를 치우라 하시오.”
“하오나.”
“또한 그대와도 함께 할 것이오. 그대와 함께하지 않는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오.”
훤은 소리를 높여 바깥에 말했다.
“강녕전에 들 석수라는 필요 없으니 치워라 일러라!”
그리고 연우를 안은 팔을 풀지 않고 미소로 말했다.
“난 또 장방(長房, 왕비소속의 서리실)의 금고가 비어 굶는 것이라 생각했소.”
연우가 깜짝 놀라 훤을 보았다. 금고가 비어있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했소? 하늘 아래에 이 내가 모르는 것이 뭐가 있겠소. 모른다면 좋은
왕이라 할 수 없을 것이오.”
“그, 그것이······. 어찌 아시었사옵니까?”
“암행을 보낸 이가 올린 장계에 한양 외곽에 배고프고 아픈 백성들을 도와주는 곳이 있어
알아보았더니, 혜민서 관리들이었다고 쓰여 있었소. 수상히 여겨 그 자금의 출처를 조사했더니
장방에서 흘러나온 돈이라 하였소. 마침 내수사에 일러 내탕금을 풀려고 했는데 내가 할 일이
없어져서 기분 나빴더랬소. 혹여 왕비도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것이오? 어찌 한양 외곽의 일을 알고 있소?”
“궁을 드나드는 무수리들이 하는 이야기를 얼핏 들어, 알아보았을 뿐이옵니다.
상감마마께 의논코저 하였으나, 만기에 누를 끼칠까 하여······.”
“이번이 처음이 아님도 알고 있소. 왕인 나의 눈을 피해 갈수 있을 것이라 여겼소?”
훤은 손을 더듬어 연우의 치마를 올리고 속치마를 잡아당겨 보이게 했다.
“왕비의 속치마에 기운 흔적이 있음은 교태전 상궁과 나만이 알 수 있을 것이오.”
연우는 들킨 것이 부끄러워 치마를 당겨 속치마를 덮었다. 그리고 속치마보다 더 아래를
더듬는 그의 손길을 막았다.
“내가 그대를 현부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나를 성군이 되게 하는구려.”
“상감마마, 눈길과 손길이 어성과 어울리지 않사옵니다.”
훤이 본격적으로 속곳을 벗기려 하자마자, 바깥에서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상감마마, 중전마마. 내의원에서 어의가 들었사옵니다.”
말소리와 동시에 훤의 몸이 뒤로 벌렁 넘어갔다. 굉장히 기분 잡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곧 내의원이란 말에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바깥에 소리쳤다.
“내의원이라니? 누가 아픈 것이냐?”
상궁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말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중전마마께오서 조금 전 마당에서 어지럼증을 느끼시는 것 같사와
급히 어의를 청했사옵니다.”
“어지럼증이라니!”
불호령과도 같은 훤의 고함소리에 상궁은 더욱 몸을 움츠렸다. 연우가 당황하여 그의 팔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아주 잠시 신첩이 치맛자락을 잘못 밟았사온데 김상궁이 과하게 생각한 것 같사옵니다.”
훤은 그녀의 말은 듣지 않고 김상궁에게 고함을 질렀다.
“어서 어의를 들게 하지 않고 무엇 하는 것이냐!”
김상궁이 방과 방 사이의 발을 내리고 어의와 의원들을 들게 했다. 그들은 왕의 모습을 보자
놀라서 벌벌 떨며 네 번의 절을 올렸다.
“절은 그만하고 어서 진맥부터 하라! 중전이 어지럼증을 느낄 때까지 대체 내의원이란 곳에서
무얼 한 것이냐? 이따위로 하고 녹봉을 챙겨 먹었단 말이냐!”
“소, 송구하옵니다.”
연우는 훤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의 손을 잡고 토닥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모두 처결을 되었다지만, 예전의 저주주술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연우가
아픈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손을 힘껏 쥐었다.
의녀와 상궁이 들어와 중전의 팔목에 하얀 명주실을 묶었다. 그리고 길게 실을 빼내 발 너머의
어의한테로 건넸다. 하지만 여전히 왕은 중전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상감마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중전마마와 떨어지지 않으시오면 옳은 진맥을 할 수가 없사옵니다.
잠시만이라도 부디······.”
훤은 우물쭈물 거리며 연우와 떨어졌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녀를 안고 있었다. 어의가
명주실의 끝을 팽팽하게 당겨 잡고 오랫동안 맥을 살폈다. 그런데 실을 잡은 손이 서서히 떨리면서
그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발이 가리고 있었기에 훤은 그가 땀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없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당황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눈치 채고 말았다.
“중전의 몸이 어떠한가? 어찌하여 맥을 이리도 오래 짚는단 말이냐!”
“상감마마, 어성을 낮추어 주시오소서. 신첩의 몸이 너무도 건강하여 맥으로 어떤 병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당황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만약에 맥이 이상하다면 그것은 마마의
뇌위(雷威)에 놀라 심장이 뛰었기 때문일 것이옵니다.”
아무리 연우가 환하게 웃으며 말해도 훤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명주실이 어의의 손을
벗어나 다른 수의의 손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 한참 있던 실은 또 다른 의원의 손에 건너갔다.
그리고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다가 일제히 몸을 바닥에 엎드리며 소리쳤다.
“상감마마! 감축, 또 감축 드리옵니다.”
중전의 몸이 안 좋은데 감축이라니, 왕은 진노가 하늘에 닿으려고 하자마자, 이성과 마주쳐
정신을 차렸다. 이내 들려오는 그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중전마마께오서 회임하신 것이 확실하옵니다. 종묘사직에 이 같은 기쁨이 또 어디 있겠사옵니까.
실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훤은 오랫동안 멍하게 있다가 품에 연우를 포근하게 안는 것으로 넘쳐나는 행복을 표현했다.
그리고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훤은 앞의 수많은 상소들 중에 몇 개를 들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한없이 어리게만
보이는 원자이기에 어서 강학청(講學廳, 원자의 3~4살부터 7~8살까지의 교육기관)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그다지 달갑지 않아서였다. 아직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마음껏 뛰놀게
해주고픈 아비의 마음이기도 했다. 말 없는 왕의 분위기를 살피며 대신이 입을 열었다.
“상감마마. 신, 홍문관부제학 아뢰옵니다. <안씨가훈>에 이르기를 자식은 어릴 때부터 가르치라고
하였사옵니다. 원자께서는 비록 세 살에 불과하나 벌써 천자문을 읽고 쓰니, 이는 하늘이
우리나라에 복을 주려 하는 것이 분명하옵니다. 어서 강학청을 설치하여야 하옵니다.”
“그저 글을 읽고 쓸 뿐 그 뜻까지는 모르고 있다. 중전께서 워낙에 책을 가까이 하기에 따라서
흉내 내는 놀이를 한 것뿐인데 이리 호들갑 떨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아직은 장난치느라
바쁜 원자가 아닌가. 그러니 현재의 원자에게는 보양청으로도 충분하니, 일 년 뒤에 설치해도 늦지 않다.”
왕의 떨떠름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얼마 전에 왕비가 두 번째
회임을 하였기에 그녀의 힘을 덜어주기 위해서도 물러나선 안 되었다.
“신, 사간원대사간 아뢰옵니다. 국왕의 세자에게 가르침이 신중해야 하는 이유는 위로는
조종의 왕업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신민의 안위가 달려 있는데다가, 국가의 흥폐와 존망이
언제나 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옵니다. 그러하니 신들도 어찌 신중하게 생각지 않았겠사옵니까?
지금 원자가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옛 사람이 일찍 교육시키던 방법에 비하면 이미 늦었사옵니다.”
훤은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개구쟁이처럼 뛰어 다니던 원자가 중전 옆에서 보고 들은 것을
장난삼아 대신들 앞에서 자랑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세 살 밖에 안 된 아이가 천자문을 읽고
쓰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겠지만, 위치가 원자였기에 신하들이 들떠서 빨리 본격적인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입을 모으게 된 것이다. 원자가 영민하기는 많이 영민했다. 그리고 장난치는데
있어서는 과거의 훤을 능가했다. 훤도 아들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더 뛰어놀게 하고 싶었다.
이윽고 그의 머리에 얼마 전 교태전에 놀러왔던 염의 아들, 의가 떠올랐다. 원자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았지만, 점잖고 예쁘게 생긴 것만 아비를 닮은 것이 아니라, 소학의 문장을 척척 대며
말하는 투가 여간 똑똑한 것이 아니었다. 연우가 팔을 뻗어 안으려고 하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예를 지켜야 한다며, 작은 두 손을 모으고 네 번의 절을 앙증맞게 올리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원자는 훤을 많이 닮아 천방지축인 편이었다.
“허 염의 아들이 제법 똑똑하지 않소?”
깊은 생각에 빠진 왕의 말에 대신들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도 의가 신동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성이라기보다는 염에 의해 만들어진 신동이었다. 의는 젖을 먹을 때만 유모의 품에 가고
그 외에는 모두 염이 키웠다. 그 젖먹이를 품에 안고 글을 읽었으니 의가 보고 듣는 것은
염의 글 읽는 소리 외에는 없었고, 그의 행동과 말투까지 그대로 닮을 수밖에 없었다.
훤이 번쩍 떠오른 생각으로 인해 기분 좋게 말했다.
“허 염의 아들을 우리 원자의 배동(陪童, 놀이동무)으로 선발하면 어떻겠는가? 강학청보다
훨씬 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야.”
같이 놀 수 있는 친구는 훤이 어릴 때부터 너무도 부러워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에게는
그런 어린 시절을 주고 싶었다. 지금 원자에게 있어서 친구라고는 바빠서 눈 마주칠 시간도
없는 운밖에 없었다. 그것도 목마 태워 달라 조르고 졸라 한번정도 그의 어깨에 올라가는 것이
놀이의 전부였다. 어린 아이가 무서워하기 딱 좋은 그가 왜 좋은지 알 수는 없지만, 운은 원자에게도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에 반해 저번처럼 대비가 보고 싶다고 청해서 어쩌다 한번 의가 궐에
들어왔다가 가면 원자는 다음 날 까지 의를 다시 데리고 오라고 울며 지냈다. 그리고 의와
함께 있으면 곧잘 점잖은 척 하기도 했다. 분명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신들도 왕의 생각이 옳다고 여겨 더 이상 강학청을 몰아붙이지 않고, 대신 내년에는 반드시
설치할 것을 약속받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 왕과 마찬가지로 강학청 원자의
스승으로 허 염보다 적격인 인물은 떠올리지 못했다. 단지 그가 벼슬을 고사하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대신들이 물러나자, 훤은 강제로 떠밀어 명나라 사신으로 보낸 염과 그 일행이 돌아온다는
보고는 없었는지를 승지를 불러 물었다. 명나라와 조선 간의 수학경시대회가 있어 두 달의
시간이면 충분하였을 텐데, 이미 돌아와야 할 시간에서 보름을 넘기고 있었기에 걱정되었다.
벼슬을 고사만 하던 그도 명나라를 꺾을 인물이 달리 없었기에 마지못해 대회에 참석하러 간 길이었다.
더군다나 명 황제가 조선에서 은광을 찾으라는 분부에 대해 거절을 하러 간 길이기도 했다.
은본위제였던 명나라는 많은 은을 필요로 했기에 옛날부터 금과 은 조공에 대한 압박이 심했다.
그런데 세종이 조선 땅에는 금과 음이 나지 않으며, 현재 있는 것들은 외국에서 건너온 것이란
거짓 문서를 보냈고, 그것으로 인해 금은 조공은 면제를 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그들은
수시로 은광을 개발하란 압박을 넣어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수학경시대회를 빌미로 그 압박을
무마시키기 위해 사신을 보낸 것이었다. 승지는 걱정하는 왕에게 다행히 선발대로 오는 일행 중
몇 명이 오늘 도착 할 것이라고 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이들 중 한 명만이 우선
성격 급한 왕 앞에 엎드리게 되었다.
“잘 다녀왔느냐? 어찌 이리도 늦은 것이냐?”
“그것이······,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명나라 황제께오서 허 염을 붙잡고 좀 더 있다 가라
청하는 바람에······. 그나마도 뿌리치고 온 것이옵니다.”
훤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염을 조정에 끌어내기 위해 사신으로 보냈다가 그것을 빌미로 벼슬자리를
안기려는 술책이었는데, 의도하지 않았던 황제의 눈에 띄게 한 것이 불안했다.
“아무래도 수학경시대회에서 명을 꺾었나 보구나.”
“네, 상감마마께도 보여드리고 싶을 정도로 멋졌사옵니다. 허 염 홀로 그 많은 명의 학자들
콧대를 꺾는데······. 구고현법(피타고라스의 정리) 문제까지 나왔다 하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로 인해 훤은 자신의 불안이 구체화됨을 느꼈다. 그래서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서 황제가 그를 눈 여겨 보았단 말이지?”
그는 왕이 미리 보고를 받은 것처럼 말하는 것에 당황하여 더듬거리며 말했다.
“네? 아, 그렇사옵니다. 아니, 그것보다도······. 대회가 있은 날 저녁에, 황제가 명나라의
자존심이 상한다며 사신으로 간 저희들과 시문대결을 하자 청하여서······.”
“뭐라? 그래서 허 염이 또 나갔단 말이냐?”
“신들 중, 그보다 시문에 능한 자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그래서 신들이 부탁해서 허 염도
마지못해······. 황제께서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 쪽 세 명과 명나라 시인 세 명과 그렇게
대결 하였사옵니다. 우리 쪽 세 명이라고 해보았자, 허 염 혼자나 마찬가지였지만.
하지만 황제께서 허 염의 시를 더 높게 평하여 이겼사옵니다. 그러니 노여움을 푸시오소서.”
훤이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자, 그는 위로한답시고 다시 말했다.
“허 염의 시를 들으시며 황제께서 ‘눈과 귀와 마음이 같이 감동하였다’며 극찬을 하였사옵.”
“닥쳐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두 모른단 말이냐! 눈치 없는 것들 같으니. 더 듣지 않아도
은광문제는 무조건 우리 쪽 말을 믿어주었겠군.”
“어, 어찌 아시었사옵니까? 상감마마의 성명은 과히.”
“그만 되었다. 물러가라.”
왜 왕이 화가 났는지 미처 헤아리지도 못한 그는 울먹거리며 물러났고, 승지는 왕의 눈치를
살피며 궁금한 듯 물었다.
“하온데 눈과 귀와 마음이 감동하였다는 건 무슨 뜻이옵니까? 마음은 시에 감동했다는 것 같은데······.”
“그의 아름다운 외모와 음성, 그리고 인품이 모두 마음에 든다는 뜻이다! 아아, 어쩌자고
허 염은 황제까지 홀리고 다니는지. 명에서 은광이 아니라, 그를 내놔라 하겠구나. 이런 일엔
양명군 이상의 적격이 없는데, 그가 없으니······.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구나.”
왕이 머리를 짚으며 서안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명에선 조선 땅에 나는 것들은 다 자기네 것인 줄로만 안다. 심지어 사람까지. 그러니 염과 같은
인재는 반드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조선 땅에 두느니, 차라리 능력을 썩히더라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고 볼 것이니. 도저히 고민되어 못 있겠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잠시 나갔다 오겠노라.”
승지들은 시간을 짐작해 보았다. 과연 왕이 슬슬 중전을 보고 싶어 할 시간이었다. 조계가
끝나고 윤대가 시작되기 전에 언제나 중전 얼굴 보러 뛰어갔다가 오는 왕을 그들도 모르고
있진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루에 몇 번씩 일하던 중에 왕이 잠시 빠져 나가면 대부분 중전에게
가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모른 척 해줄 뿐이었다.
오늘은 그나마 사신으로 간 선발대의 윤대는 미리 받았으니 오래 참은 셈이었다. 정식 윤대가
끝나면 또 다시 왕은 부리나케 뛰어 주수라를 핑계로 중전에게 달려 갈 것이다. 승지들이
짐작한대로 훤은 뛰어서 교태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에서 일어나는 연우를 힘껏 끌어안았다.
“사신으로 다녀온 자의 보고를 받느라 오지도 못하고, 중전이 보고 싶어 숨넘어가는 줄 알았소.”
“오라버니도 무사히 돌아왔다 하옵니까?”
“아직 도착은 못했지만, 무사한건 확실하오. 아참! 의를 우리 원자의 배동으로 두면 어떨까
하는데 중전의 생각은 어떻소?”
연우는 그의 품에서 조금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은 훤의 팔은 그대로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원자는 미래의 세자가 되옵니다. 하니, 다양한 가문의 다양한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되옵니다. 한데 저의 오라버니와 의도 외척이옵니다.
그러니 멀리하는 것도 좋지 않겠사옵니까?”
단정한 연우의 말 끝에 훤은 입술을 포개고 말과 혀를 번갈아 굴렸다.
“내가 원자의 배동으로 의를 생각한 것은 파를 나눈다던가, 학문을 익히게 한다거나 하는
목적이 아니오. 사람을 사귀고 예의를 배우게 하려는데 첫 이유가 있소. 한데, 우리 원자 또래 중에
의와 같이 예의 있고 의젓한 아이가 어디 있겠소? 제멋대로의 떼 부리는 또래들과 어울리게 한다면
도리어 그 아이들을 따라 버릇없어질 것이고, 그것은 미래 조선의 누가 될 것이 분명하오.”
연우도 훤을 따라 말과 혀를 번갈아 굴렸다.
“상감마마의 뜻이 정히 그러하다면, 신첩 또한 마음을 다해 따르겠나이다. 대신 신첩의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중전의 청이라면 하나밖에 더 있겠소? 민화공주의 복권.”
“삼년 넘는 세월이 흘렀사옵니다. 신첩이 알아본 바로는 옆에 있던 민상궁 마저 세상을 떴다 하더이다.
의를 배동으로 두고 싶으시다면, 의에게 어미를 돌려주시오소서.”
훤은 재빨리 연우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확고부동한 태도로 말했다.
“의는 공주가 키우지 않았기에 지금 그리도 뛰어난 신동으로 큰 것이오!”
“아무리 의젓하고 예의 있는 아이라고는 하나, 어미를 보고 싶어 하는 그 마음까지 의젓하겠사옵니까?
민화공주께선 이미 몸으로 마음으로 죄를 뉘우쳤다 사료되옵니다. 벌이라는 것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겠사옵니까? 단지 죄에 대한 처벌만으로 벌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만을 취하는
것이옵니다. 하지만 죄인으로 하여금 벌로서 죄를 내려놓고 다시 죄를 짓지 않게 한다면
모든 것을 취하는 것이옵니다. 용서는 왕 만이 할 수 있사옵니다. 지금 민화공주는 용서에
필요한 벌을 충분히 이행하였사옵니다.”
훤이 미처 답하기도 전에 바깥에서 윤대를 해야 한다는 상선내관의 재촉이 들어왔다.
그래서 연우더러 추우니 나오지 말라고 하고, 다리를 툴툴거리며 방 밖으로 나갔다.
엉덩이 한번 자리에 붙여보지 못하고 가는 셈이었다. 섬돌 위의 신을 신으려다 발고 훤은
몸을 돌려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연우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쥔 뒤,
눈과 코, 뺨, 이마, 턱에 입술 도장을 찍고, 마지막으로 입술과 혀에 긴 도장을 남기고 뛰어 나갔다.
훤은 행여나 익선관이 벗겨질세라 한손으로 내리 누르고 사정전까지 최선을 다해 뛰었다.
그 덕분에 운과 내관들도 따라 뛰어야 했다. 그리고 상선내관은 허구헌날 이런 뜀박질을
하기엔 자신이 늙은 것을 왕이 알아주었으면 하고 빌었다.
며칠 후, 염의 일행이 한양에 도착했다. 가을에 떠났는데 벌써 겨울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염은 허한 눈동자로 빙그레 미소를 보였다. 아무래도 하늘이 눈을 뿌릴 기세였다. 그는 왕에게
먼저 가야하는 법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천추전에 들었지만, 마음은 두 달 넘게 홀로 둔
아들에게 가 있었다. 비록 조모인 신씨가 지극 정성으로 의를 돌본 걸 알고 있지만 염은 뼛속이
아플 만큼 보고 싶었다. 왕은 그의 속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허 염! 수학과 시문을 동시에 휩쓸고 왔다는 건 이미 들었소. 그리고 은광 문제도 넘어갔다고?”
“다행하게도 그러하옵니다, 상감마마.”
“그리고······황제가 그대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였다던데, 맞소?”
염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조선의 사신이라 다른 나라의 사신들에 비해 후대한 것 같사옵니다.”
“혹여 황제가 그대에게만 살짝 명나라의 관직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염은 깜짝 놀랐다. 황제가 염에게만 은밀히 말한 것이기에 일행 중 이 일에 대해 아는 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내, 훤의 추측임을 깨달았다.
“네. 하오나 황제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거절하고 돌아왔사옵니다.”
“왜? 조선의 관직보다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인데?”
“소신이 부귀영화나 공명을 바래었사옵니까? 소신, 조선의 죄인은 될지언정 명나라의 관리는
되고 싶지 않사옵니다.”
“조선의 죄인보다 조선의 관리가 더 좋지 않소?”
염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 더 이상 관직을 거절하는 것도 왕에 대한 불충에 이를 지경이었고,
이번의 사신 건은 더욱 그의 입장을 난처하게 했다.
“얼마 전 내가 중전에게 물었소. ‘백성에게 있어서 어찌하면 좋은 임금이 될 수 있겠소?’라고.
헌데 우리 중전이 이리 답하였소. ‘<육도삼략>에 이롭게 하고 해롭게 하지 말며, 이루게 하고
실패하지 않게 하며, 살게 하고 죽게 하지 말며, 주어야 하고 빼앗지 말아야 하며, 즐겁게
하고 괴롭게 하지 말며, 기쁘게 하고 노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적혀있사옵니다’라고.
아아······, 참으로 멋진 중전이지 않소?”
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 까맣게 잊고 연우를 생각하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하던 연우가 발가락의 핏줄까지 곤두설 만큼 예뻐서 참지 못하고 강녕전에서 일을
벌이고 말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순간 천추전 안의 분위기가 팔불출 왕 때문에 싸늘해 진 것을 깨달았다.
“아참! 내 지금 중전에 대해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지? 어흠! 내 그 말을 듣고 허 염이란 백성에게
있어서 난 최악의 임금이구나 하고 생각했소. 아무튼, 이번 일에 대한 상벌은 백관수의
(百官收議, 전체 관료를 대상으로 의견을 물어 여론수렴 하는 것)하여 결정할 것이오.
그리고! 혹여 명나라의 첩자가 그대를 보쌈 해 갈지 모르니 검술을 더 연마해 두시오.
하긴, 은근히 그대의 검술도 뛰어나지?”
“소신 비록 검을 잡긴 하오나, 여지껏 풀 한포기 제대로 베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미약하기에
감히 검술이라 칭하기도 민망할 지경이옵니다.”
염이 왕의 농담이라 생각하고 웃으며 한 말에, 훤은 도리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또 겸손이오? 예전, 부원군의 난이 있던 날, 그대의 사택에 잠입한 검객 세 명을 처리했다 들었는데.
관아에 들어온 시신에 대한 기록이 분명 검상으로 적혀있어, 내가 심장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있소.”
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머릿속은 그때의 기억으로 달려갔다. 수많은 기억 들 중,
바로 전날의 설의 모습이 가장 뚜렷이 머리에 그려졌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그의 표정을 보고
훤은 의아했지만, 그 검객들은 누군가가 염을 지키기 위해 죽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누군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란 추측도 했다. 염은 왕에게
절을 올린 뒤, 휘청거리는 마음을 안고 일어났다. 물러나는 그를 향해 훤이 말했다.
“교태전에 들렀다 가시오. 그곳에서 그대 아들이 간식을 먹고 있다고 하니.”
염이 완전히 물러나자, 훤은 다른 사신들과 마주했다. 도화서의 화원과 관상감의 지리학훈도였다.
그들은 천추전 바닥에 지도그림을 펼쳤고, 그 위에 수 십장의 그림을 겹쳐가며 차례로 펼쳐보였다.
명나라로 가는 길마다 상세하게 지형을 살펴 기록하고, 지도로 만들라는 왕의 밀지대로 한 것이었다.
훤은 그것들을 꼼꼼하게 점검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여러 가지를 물었다.
교태전에 들어서니, 막 마당으로 연우와 원자, 의가 나오고 있었다. 그중 의가 제일 먼저
부친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런데 바쁜 마음과 달리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차갑게 언 바닥에
아플 정도로 넘어지고 말았다. 궁녀들이 더 놀라서 의에게 다가가 일으키려고 하자, 염은 그들의
행동을 멈추라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뒷짐 지고 기다렸다. 의는 벌떡 일어나
고사리 같은 손의 흙을 탈탈 털고, 옷도 마저 털었다. 그리고 복건을 고쳐 쓰고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염에게 달려가 작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혀 짧은 소리로 점잖게 말했다.
“아버지, 다녀오셨습니까? 소자, 보고 싶었습니다. 많이많이.”
염은 그의 눈높이에 맞춰 자리에 앉아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우리 의가 가장 좋아하는 것, 그리고 이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의는 까르르 웃으며 염의 목에 매달려 입에 뽀뽀를 했다. 그러자 원자도 그에게 달려가 목에
매달렸다. 염은 깊숙하게 허리를 구부리며 원자와 중전에게 인사를 한 뒤 일어섰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도 염은 설의 일로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중전마마, 예전 일 중에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갑자기 무엇이 궁금하세요?”
“혹시 설······이란 아이를 기억하시옵니까?”
연우의 얼굴이 슬픈 모양을 그리며 땅을 향했다. 염도 그녀의 표정을 따라 슬픈 모양을 그렸다.
연우가 눈동자에 눈물을 맺어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도 그 아이의 죽음을 알게 되셨군요. 저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민화공주께서
좋은 곳에 묻어준 것을 뒤늦게야 알고, 제가 성숙청에 일러 진오기굿을 해주었어요.
그것밖에는 해줄 것이 없었습니다. 가엾게도 오라버니를······.”
“제가 어리석게도 좋은 곳으로 가느냐고 물었사옵니다. 웃기에 그런 줄로만 알고······.”
염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랬다. 어쩌다 눈이 와 그녀가
떠오르면 좋은 곳에서 씩씩하게 잘 살고 있을 것만 같아서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었다.
그런데 이제는 눈만 오면 그녀가 떠오를 것이고, 그녀가 떠오르면 좋은 곳으로 가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답하던 그녀의 환한 미소가 같이 떠올라, 미소가 아닌 슬픔만 짓게 될 것 같았다.
염은 의를 데리고 경복궁을 나갔다. 그리고 남여(정3품의 승지와 각 관청의 참의 이상이 타던 포장이나
덮개가 없는 작은 가마)에 의만 태우고 그는 걸어서 북촌을 향했다. 하지만
출발하자마자 아까부터 우중충하던 하늘에서 뿌리는 눈을 만났다. 이제 더 이상 기분 좋게
미소 지을 수 없는 눈이었다.
“아버지, 눈입니다. 와! 예쁘다.”
“그래, 예쁘게도 내리는 눈이구나. 의야, 이 아버지가 언제나 당부하던 말을 기억하느냐?”
의는 남여에 앉은 채로 정확하지는 않은 발음이지만 또박또박 공손하게 대답했다.
“위험하고 높은 곳에 오르지 마라. 또 깊은 늪이나 산골에 가지 마라. 몸을 다쳐 부모가
걱정할까 해서이다.<소학中>입니다.”
“왜 그 말을 당부하는지 아느냐?”
“네! 소자가 다치면 아버지가 훨씬 더 많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기특하구나. 그리고 네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무엇이냐?”
“아무리 작은 악이라도 악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선한 일은 작다고 해서 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조열(照烈, 유비현덕)이 그 아들을 훈계하여 한 말. 소학中>입니다.”
“아버지가 너의 옆을 비운 동안 네가 행한 악한 일과, 선한 일을 말해다오.”
의는 큰 눈을 꿈뻑거리다가 숨을 들이켠 뒤, 그동안의 일들을 최대한 조리 있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이좋은 부자는 끊어짐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염은 언뜻
누군가가 그의 집 모퉁이 뒤로 숨는 것이 보였다. 어스름이 깔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여자 같았다.
점점 내리는 양이 많아진 눈 때문이었는지 설이란 생각도 스쳤다.
그래서 그는 의와 가마꾼들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홀로 모퉁이 쪽으로 숨어서 다가갔다.
죽은 여인이 살아온 것은 아닐 테지만, 만약에 귀신이라면 따스한 말이라도 건네주고 싶었다.
염은 모퉁이를 돌아 마주친 여인을 보고 그만 자리에서 언 채로 굳어졌다. 민화였다.
초라한 행색으로 낡은 보자기를 끌어안고는 추위에 오돌 오돌 떨고 있는 작은 형체는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아도 심장이 먼저 알아보는 민화였다. 그 어떤 말도 못하고 멍하게 서 있는 염에게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갈 곳이 없어서······. 가고 싶은 곳이 여기뿐이어서······.”
여전히 입을 다물고 서 있는 그에게 다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감마마께오서 용서하시어 관비에서 풀어주셨사와요. 그래서······.”
말없이, 표정 없이 서 있는 그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런 작은 감정들이 묻힐 만큼 그가 보고픈
감정은 더 컸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의 얼굴은 안보였다. 눈에 가득 차고 넘쳐 내리는 눈물이 그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민화의 발걸음이 멈췄다. 자세하게 보이진 않아도 무표정하게 있는 그가 가엾고 안 되어 보여
더 이상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돌아지지 않는 걸음을 애써 떼며 염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를 등 뒤에 두고 멀어져
가는 민화의 눈에선 주체 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발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걷다가 결국 더 이상 염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견딜 수가 없어 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포근하게 끌어안았다.
세상의 모든 추위와 죄악을 좇아내 주는 그, 민화와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염이었다.
“저 지금 더럽고······냄새가 나는데······. 손도 다 갈라지고 못생겨졌는데······.”
“깨끗하고 하얀 눈이 모든 것을 덮어줄 것입니다.”
민화의 귀에는 그의 울음소리가 목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그리고 민화를 등 뒤에서 안고 있는
염에게로 마치 그의 행복을 기원하듯 그들에게로만 눈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같은 눈이 내리는
경복궁에선 감쪽같이 사라진 왕을 찾는 내관과 관상감 관리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교태전으로 들어갔을 거라 짐작은 하지만, 양의문에 세워둔 감시병들은
왕이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관상감에서 오늘은 중전이 회임 중인데다가 눈까지 오니, 특히 더 강녕전에 있어 달라 부탁드렸건만,
잠시 적설량을 예측하러 한눈 판 사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들은 합궁일을 무시한 왕의
빈번한 교태전 출입으로 인해 낭패를 보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낭패는 이미 태어난 원자와
현재 태중에 있는 아기씨의 입태시를 알 수가 없어, 사주를 정확하게 분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녕전과 교태전 사이의 담 중간쯤에서 보초병이 왕의 흔적을 찾았다며 작은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르르 몰려간 그 곳엔 담 지붕의 눈이 그 부분만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그리고 높은 담 너머로
발을 돋워 보니, 하얀 눈 위에 성큼성큼 띄어져 찍혀 있는 왕의 발자국이 교태전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분명 어디에선가 왕을 지키며 긴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을 운의 모습은 그들 눈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사람들의 귀가 한곳으로 모아졌다.
멀리 교태전에서 가야금 선율이 들려오고 있었다. 왕이 중전을 위해 친히 뜯는 조선 제일의
가야금 선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