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박씨부인은 대문을 보며 하염없이 서성거렸다. 운의 안부가 걱정되어 미칠 것 같은데도,
아녀자의 몸이기에 경복궁으로 들어가 동정을 살필 수 없는 것이 더 괴로웠다.
소식을 알아보러 다녀온 하인이 양명군의 죽음을 전했지만, 운에 대해선 그 어떤 것도
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손바닥의 지문이 닳을 정도로 두 손 모아 아들의 안전을
빌며 대문 앞의 땅을 발자국으로 다졌다. 그렇게 자신의 불안도 달랬다. 또 다른 하인이
왕의 군사들이 반란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고 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박씨는 운이 무사하리라
믿으면서도, 그의 머리털 하나라도 상처입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입에 아무 것도 대지 않고 꼬박 바깥에서 서성거린
그녀의 다리는 서서히 거동하기 힘들어져 갔고, 그녀의 손은 꽁꽁 얼어갔다. 그래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저녁 무렵, 대문 밖에 나가 있던 하인이 소리치며 들어왔다.
“주인마님! 도련님이 이리로 오고 계십니다!”
“뭐라? 무사하더냐?”
하지만 하인의 답을 미처 듣기도 전에 갑옷을 입은 운이 말을 탄 채로 급하게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말에서 훌쩍 뛰어 내리는 아들은 건강한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작게라도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느라 박씨의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였다. 운이 다가와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그녀는 멀쩡한 모습을 보여준 고마운 마음을 숨기고 엄하게 말했다.
“무슨 급한 용무이기에 이런 시급한 상황에서 상감마마의 옆을 비웠단 말이냐? 네 직책의
중대함을 잊었느냐?”
운의 입술이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싸늘하게 열렸다.
“상감마마께옵서 소인에게 허통(許通, 서얼의 신분에서 벗어나 아비의 신분을 따르는 것)을
윤허하시었습니다. 하여 마님께 허락을 구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직 이번 사건이 진행 중에 있었지만, 훤은 무엇보다 먼저 운검의 공에 대한 상부터 내렸다.
운의 신분은 운뿐만이 아니라 훤에게도 한이었기 때문이었다. 허통이 내려지자, 운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달음으로 달려왔다. 그의 말을 들은 박씨의 가슴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떤 허락······?”
“하찮은 소인이지만, 어머니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부디.”
박씨의 눈에 서서히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기쁨을 넘어 원망마저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나쁜 놈. 천하에 또 없을 불효막심한 놈. 내 언제 너에게 어머니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느냐?
네가 나에게 아들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느냐?”
운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이제야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죄였고, 이렇게 허락이란 것을 구하려
한 것도 죄였다. 오래전부터 이미 그녀는 어머니였기에 지금의 그는 불효자였다.
“소자, 마음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어머니.”
박씨는 떨리는 손으로 운의 양 팔을 잡았다. 그리고 눈에 차오르던 물기를 기어이 주름진 볼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물줄기를 따라 운의 한도 같이 흘러내렸다.
“다, 다시 한 번 말해보아라. 바깥이 시끄러워서 잘 들리지가 않는구나. 방금 뭐라고?”
“어머니······.”
박씨의 주먹이 운의 가슴을 사정도 없이 때렸다. 그의 철갑옷에 얼어있던 주먹이 아팠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때리며 소리쳤다.
“나쁜 놈! 괘심한 놈! 남들은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을 이제야 하다니. 그까짓 어명이 무어라고!
너와 나의 사이에 어찌 어명 따위가 먼저 선단 말이냐? 부모자식 간의 정이란 것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더냐?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이리도 불효막심한 놈이라니. 이 나쁜 놈아!”
언제나 강인했던 그녀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입술은 눈물과 미소를 동시에
머금고 있었다. 아주 짧은 운의 미소도 보였다. 그리고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도 보였다.
너무 순식간에 스쳐지나간 그의 표정이었지만 박씨는 그것을 보았다. 이윽고 운은 다시 흑마에 올랐다.
“잠시 달려온 것입니다. 일이 마무리되면 정식으로 절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급히 서둘러 가버렸다. 그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니 박씨의 마음은 더욱 벅차올랐다.
급박한 지금 상황에 왕의 곁을 비워가며 이렇게 달려올 운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어머니를
불러보고 싶었던 그의 억눌렸던 마음의 크기가 느껴졌다. 박씨는 기쁨에 북받쳐 젖은 마당임을
깨닫지 못하고 경복궁을 향해 네 번의 큰절을 연거푸 올린 뒤, 엎드려 소리쳤다.
“상감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마께옵서 소신의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겠다고 하시어도
기꺼이 바칠 것이옵니다.”
운은 뛰다시피 걸어서 왕의 곁으로 돌아갔다. 원래 운이 있던 자리를 대신하여 아주 잠시 동안
전 운검들이 있었다. 훤은 천추전에서 어갑을 벗고 곤룡포 차림으로 만기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혈육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조차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친람을 하지 않은 폐해도
폐해였지만, 반란세력을 정리하는 일도 밀려있었고, 무엇보다 내일 조정에 나가 이번의 반란사건과
예전의 세자빈시해사건까지 들춰내기 위해서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를 판이었다. 운이 왕의
앞에서 몸을 숙여 인사했다.
“상감마마, 복귀하였사옵니다.”
“그래, 다녀왔구나.”
운의 모습을 보자 비로소 안심한 훤은 다시 산더미 같은 문건들에 머리를 박았다. 전운검대장이
운에게 다가와 옆에 서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에게는 할 말 없느냐?”
“네, 없습니다.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으로 지방무관. 현재 전운검대장의 관직)어른.”
순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운의 복부를 향해 그의 매서운 주먹이 날아왔다. 하지만 그것을 막아내는
운의 손이 더 재빨랐다. 드센 주먹을 힘껏 감싸 잡은 운이 전운검대장의 귀에만 들리도록 말했다.
“제 몸에 주먹이나 검을 닿고저 하신다면 더 많은 연습을 하셔야겠습니다, 외숙부님.”
마치 협박처럼 들릴 정도로 차가운 말투였지만, 전운검대장의 입가에 싱긋이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인 ‘외숙부’를 정확히 말해주는 운이 고마웠다.
“애교라고는 없는 놈.”
운은 그의 감격스레 중얼거리는 말을 뒤로하며 왕의 옆, 운검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역모사건은 양명군이 건네준 명부에 이름과 함께 새겨진 수결이 발뺌을 할 수 없는 증거로
남았기에 별다른 문초 없이 관련자들을 처벌할 수가 있었다. 외척들의 절반 이상이 관련자로
연류 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관상감에서는 교수들 아래의 훈도들이 공모를 한 것이
드러나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지만, 성숙청은 전의도무녀(전직도무녀)가 연류 되어 있었기에
그나마 관상감보다는 충격이 덜했다. 하지만 조정 전체를 이중 삼중의 충격과 혼란으로 몰고
간 것은 이번의 역모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예전의 세자빈시살사건이었다. 조정이 혼란에 빠진
첫 번째 이유는 왕족들의 연류란 점이고, 두 번째는 죽은 세자빈허씨가 살아있는 것, 세 번째는
세월을 그때로 되돌려 목숨을 끊은 중전윤씨를 폐서인시키는 정도에서 머무르지 않고 아예
처녀귀로 규정하고, 죽었던 세자빈허씨를 첫 중전으로 두려는 왕의 완강한 결단이었다.
그 사건의 주모자였던 왕대비윤씨가 독살 당했다는 소식이 날아왔기에 자연히 화살은
민화공주에게로만 집중되었다. 그 당시로 사건을 되돌리면 무품계인 공주가 일품계인 세자빈을
시살한 것이기에 죄를 벌하기에는 애매한 문제도 대두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막강한
자세로 딸을 보호하며 버티고 선 대비한씨의 고집이 있었다. 그래서 사건의 종결은 더욱더
난항을 겪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대비와 양명군의 국상을 위해 왕의 집무가 7일 동안
휴무에 들어간 것이다. 그동안 조정은 나름대로의 심사숙고에 들어갈 수 있었고, 훤은 형제와
조모를 잃은 슬픔을 다스릴 수가 있었다.
국상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정은 또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국상 뒤에 찾아온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후사도 없는 왕의 혼례 문제가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원래 국상이 있고
나서는 1년이 지나기 전에는 아무리 왕이라 해도 혼례를 올려서는 안 되는 것이 법도였다.
하지만 후사가 없는 왕의 가례는 이러한 법도에서 제외되었다. 열 일을 재껴두더라도 왕의
가례부터 준비해야 하는 것이 조정의 최우선 과제였지만, 이 또한 과거의 일이 정리되기 전에는
불가한 것이었다. 이렇게 꼬일대로 꼬인 문제들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조정에 성균관 유생들이
더욱 일을 보태고 있었다. 경복궁 밖의 흥례문 앞에는 그들이 몰려와 권당을 하고 있었다.
왕족이라 하더라도 죄를 지은 자들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을 위해서였다. 관련된 왕족만
처리할 수 있다면, 훤도 이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염이라는 죄 없는
인재도 같이 걸려있었다. 수많은 상소들 속에 훤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마음의 결정은 다 내리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 결론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도 되었다. 그래서인지 성균관 유생들이 권당을 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훤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슬쩍 비쳤다.
권당을 위해 난삼(?衫, 옥색의에 청색연을 두른 세종부터 선조까지의 유생들의 예복.
훗날 앵삼(鶯衫)으로 변천)을 입고 줄 맞춰 앉은 유생들의 표정은 모두 비장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제까지 두려워 목을 사리게 했던 외척들이 쓸려 나간 뒤라 그들의 목에는 더욱 힘이 가해졌다.
그런데 침묵하고 있느라 조용한 그들 끝에서부터 술렁거리는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옥색의
물결 속에 새하얀 도포를 입고 흑립을 쓴 염이 단정한 걸음으로 흥례문 앞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 공개석상에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그이기에 소문으로만 그를 만난 유생들도 있었지만,
아름다운 모습과 우아한 몸짓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눈치 채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유생들의
동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염은 그들의 눈빛에 눈을 돌리지 않고 바로 흥례문 앞에서 네 번의
절을 올린 뒤,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 앞에 봉서를 내어놓았다.
염의 출연은 천추전에서 조계를 하고 있는 왕과 대신들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상감마마께 아뢰옵니다. 흥례문 앞에서 성록대부 풍천위가 수차(袖箚, 임금을 뵙고 직접
바치던 상소)를 청한다 하옵니다.”
“드디어 왔구나.”
빙긋 웃으며 중얼거리는 훤의 소리는 오직 운만 들었다. 대신들 사이에서도 술렁이는 물결이
일어났다. 의빈이 된 이후부터 그의 행동은 의빈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고, 그것이
모든 이들로 하여금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목소리를 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지금 처지는 부인인 민화공주와 누이인 세자빈허씨의 가운데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의견이 궁금하기까지 했다. 그 청렴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
어떤 해답을 줄 것이란 기대도 하였다. 이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딛고 왕이 말했다.
“가서 물어라. 풍천위가 올리는 수차가 무엇인지!”
사령은 즉시 달려 나갔다. 그리고 한참 만에 머뭇거리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차마 말도 올리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그에게로 왕의 질책이 내려졌다.
“어떤 수차이기에 그리도 망설인단 말이냐! 무어라 하더냐?”
“그것이······.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자탄장(自彈章, 자신의 죄를 탄핵하는 글)이라 하옵니다.”
대신들 사이에 조금 전 보다 훨씬 술렁이는 물결이 일어났다. 그중 대사헌이 몸을 깊숙이
숙이며 외쳤다.
“상감마마! 대사헌 아뢰옵니다. 풍천위의 수차를 거두어들이시면 아니 되옵니다! 풍천위는
누이의 죽음으로 한번 죽었던 분입니다. 그리고 누이를 죽인 공주와 부부의 연을 맺은 것으로
두 번 죽었고, 이제 세 번째의 죽음을 청하는 것이옵니다. 어찌 이 같은 억울함이 또 있겠사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훤은 오랫동안 생각에 빠졌다가 입을 열었다.
“풍천위에게 가서 전하라. 자탄장은 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이니 그만 돌아가라 일러라.”
사령이 흥례문으로 달려가니 그곳에는 의금부 도사가 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숙이고
뜻을 거두어 달라 간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 있던 성균관 유생들도 자신들이 이곳에 뭐 하러
왔는지도 망각한 채 일제히 몸을 숙이고 도사와 같이 염에게 간청하고 있었다.
“풍천위대감. 이번만큼은 제발 휘어지십시오. 지금의 가장 괴로운 분은 상감마마와
풍천위대감이 아니시옵니까? 소인은 세자빈시살사건을 조사한 장본인이기에 전말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풍천위대감의 희생을 보고 있을 수가 없사옵니다. 대감께 죄가 있다 한다면
세상 어느 누구인들 죄가 없겠습니까? 자탄장이라니,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물러나 주십시오!”
하지만 입을 꾹 다문 염의 태도는 변함없이 정갈하기만 했다. 그리고 왕의 말을 전해들은
뒤에도 그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추위도 기승을 부렸다. 그의 몸이 걱정된 유생 한명이 일어나 자신의 난삼을 벗어
염의 어깨에 덮여주며 말했다.
“물러나 주십시오. 저희도 물러나겠습니다.”
이 한 사람을 시발점으로 하여 유생 한명씩 차례로 일어나 염의 어깨에 자신들의 난삼을
벗어 덮어주며 물러나 달라는 간청을 했다. 하지만 염의 눈동자는 여전히 흥례문만을 응시한 채
그들의 간청을 듣지 않았다. 어느새 염의 어깨에는 수많은 옥색의 난삼이 덮였고, 주위에도
가득 쌓였다. 그래서 죄인의 옷으로 입고 온 새하얀 그의 옷은 선비의 색인 옥색으로 덮여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염의 고집은 밤을 샜다. 그리고 훤의 고뇌도 밤을 새워 천추전에 있었다.
새벽이 되자, 조강을 하기 위한 대신들의 입궐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따로 결의 한 것이 없었는데도, 변함없는 태도로 앉아 있는 염에게 모두가 절을 올리고 난 뒤
흥례문을 넘어섰다. 그리고 그에게 절을 한 어느 누구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남의 죄를
논하기에 앞서 자신의 죄부터 보는 그의 앞에서는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었기에. 옛날 외척들의
득세에 목소리를 낮추느라 세자빈허씨의 죽음에 석연찮은 부분이 있는 것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죽음을 덮고 처녀귀로 규정한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들이기에. 그리고 스스로의
죄를 잊고 청렴한 척 살아왔기에.
“풍천위의 강직함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가서 자탄장을 받아오너라!”
천추전에서 밤을 꼬박 지새운 왕의 첫마디였다. 대신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아니 되옵니다, 상감마마!”
“이대로 두었다간 그의 몸이 상할까 걱정이오. 그러잖아도 친구인 양명군을 잃고 슬퍼하느라
이미 몸이 상했을 터인데.”
무거운 걸음으로 나간 사령은 염의 봉서를 가져다 비단 천에 표구한 뒤 두루마리에 엮어 왕의
앞에 바쳤다. 천천히 두루마리를 풀어 내용을 읽던 훤의 눈동자에 기쁜듯한 눈물이 맺혔다.
“풍천위! 금고를 당했던 그간의 시간 동안도 게을리 하지 않고 학문을 닦았구나. 자신을 탄핵하는
글을 이리도 논리정연하게 단정히 쓸 수 있는 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며, 이토록이나
미려한 필체 또한 어느 누가 흉내 낼 수 있단 말인가. 어이하여 풍천위는 나에게 이러한 수차를
바친 자를 징계토록 하는 시련을 준단 말인가.”
왕의 한탄만큼이나 염의 글을 돌려 읽은 대신들의 마음도 찹찹했다. 훤은 빈 종이를 펼쳐
힘 있게 글을 써내려갔다. 최대한 간결하게 쓴 뒤 건넨 글은 즉시 사령이 표구를 하는 곳으로
가져갔고, 그곳에서 두루마리로 엮어 의금부판사의 손으로 건너갔다. 의금부판사는 뒤에 선전관과
사람들을 거느리고 흥례문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당도하자 일제히 긴장하여 술렁거렸다.
오직 염만이 움직이지 않았다. 의금부판사가 소리쳤다.
“성록대부 풍천위는 어명을 받으시오!”
염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주위로 어깨에 덮여있던 난삼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염은 그동안 얼어붙은 다리에 휘청거렸지만, 이내 단정히 하여 힘겹게 네 번의 절을 올리고
자리에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의금부판사가 왕의 전교를 펼쳐들고 읽었다.
“성록대부 풍천위는 들어라! 예전의 세자빈시살사건에서 저주주술의 죄를 지은 민화공주와
부부의 인연을 맺은 죄를 묻노라. 이에 그대의 의빈 봉작을 파하고, 작위에 준하여 내려졌던
모든 재산을 압수한다. 그러하니 품계는 민화공주와 국혼을 올리기 바로 전의 정5품으로
삭감하고 용관(冗官, 직책 없이 품계만 있는 벼슬)으로 대기토록 하라!”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결코 벌이 아니었다. 염은 깜짝 놀라 땅에 엎드리며 울부짖었다.
“받잡을 수 없사옵니다.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천신을 징계하여 주시옵소서, 상감마마!”
소리치는 염의 뒤로 성균관의 유생들도 소리쳤다.
“충분하옵니다! 어명을 받잡아주십시오!”
염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목이 쉴 정도로 벌을 내려달라 소리쳤다. 그렇게 울부짖는 염의 앞에
조정의 대신들이 나와서 일제히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중 영의정이 대표로 말했다.
“소인들의 청입니다. 부디 물러나 주십시오. 대감께서 어명을 받잡지 아니한다면, 소인들도
상감마마께 자탄장을 아니 올릴 이들이 없습니다. 그리하면 지금의 상감마마의 곁에 누가 남아있겠습니까?
민화공주와의 부부 인연을 끊는 것으로 이만 물러나 주십시오. 상감마마를 윗잡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대신들도 버티고 엎드려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염도 그들의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염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눈에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의 새하얀 옷은
죄인의 옷이 아니라 순백의 청렴의 옷으로 비춰졌다. 그는 오던 길과 같이 가는 길도 가마를
옆에 세우고 걸어서 돌아갔다. 그의 뒤로 그동안 그를 흠모했던 수많은 선비들이 따라갔다.
근정전의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훤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풍천위는 왕의 말은 듣지 않아도 백성의 말은 듣는 인물이지.······민화공주!
눈이 있으면 보고, 귀가 있으면 듣고, 마음이 있으면 느껴라. 네 편협한 치마폭에 홀로 품으려
했던 사내가 얼마나 큰 인물인지를. 네 죄까지 감싸 안는 그의 깊은 마음을. 부디, 그의 뒤를
따라가는 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어다오.”
염의 봉작 삭탈이라는 왕의 어명이 있고 난 이후, 그 어떤 누구도 민화공주의 탄핵을 입에
담는 자들이 없었다. 그녀의 더러운 죄를 염의 깨끗한 성정이 충분히 가려주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