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45화 (45/47)

#45

연우는 근정전 안에 앉아 세 겹으로 둘러싼 궁녀들의 가운데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또 다시 내관들이 세 겹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혹시라도 모를 위험을 대비한 훤의 배려였다.

그녀는 그곳에 앉아 바깥에서 들리는 모든 비명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훤이 내어지르던

양명군’이란 소리도 들었다.

무언가 불길한 일이 벌어졌음을 느꼈지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바깥에서

그 어떤 소리가 들리더라도, 그것이 왕이 죽는 소리일지언정,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어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근정전 옆의 행각에서 훤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의 슬픔이

근정전 안의 공기와 더불어 연우까지 뒤흔들었다. 그녀의 몸이 자리에서 저절로 일어났다.

“아니 되옵니다!”

상선내관의 외침에 연우는 안절부절 하며 울먹였다.

“하오나, 상감마마의 슬픔을 어찌 앉아서 듣고만 있을 수가 있습니까?”

“어명이시옵니다. 소인들은 따를 것이옵니다. 그러니 연우아가씨께옵서도 그리 하여 주십시오.”

“들리는 슬픔에 귀를 닫고 마음도 닫아야 하옵니까? 양명군께옵서, 양명군께옵서!”

연우는 자리에 다시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고 눈물을 터뜨렸다. 월이 아닌, 어릴 때의 연우를

사랑했던 양명군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슬픔은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삼간택을 앞둔 바로 전날, 어린 연우는 두렵고도 설레는 감정을 달랠 길이 없어 조용히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별당의 마당은 좁았기에 그녀의 왔다 갔다 하는 감정도 보폭과 같이 짧게 움직였다.

재간택에서 돌아오던 길에 윤씨처녀가 탔던 육인교와 이를 호위해갔던 차지내궁들을 본 이후로

내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뜻은 몰랐지만, 아버지의 한숨과 어머니의

눈물로 인해 어렴풋하게 그 의미를 눈치 채고 있었다.

어두운 그녀의 마음과 닮은 어두운 밤하늘을 보고 있을 때였다.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담을

뛰어넘어 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깜짝 놀란 그녀였지만, 이내 양명군임을 알 수 있었다.

연우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근래에는 그가 담을 넘어오는 장난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옷차림이 다른 날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갓도 쓰지 않고 도포조차 입지 않은 일반

서인의 옷차림이었다. 게다가 이때까지 월장하던 장난도 어두워진 이후로는 하지 않는 예의는

갖춘 사람이었는데 의외였다.

“연우낭자, 나요. 양명군이오. 놀라게 하였소?”

“양명군이시라면 이미 여러 번 소녀를 놀라게 한 분이시지요. 하온데 이 시간에 또 장난이시옵니까?

의관은 또 왜 그러시고요?”

양명군이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섰다. 그런데 그의 등 뒤에는 봇짐까지 메여져 있었다.

놀란 연우의 눈길이 양명군의 얼굴에 닿았다.

“소식 들었소. 그대가 삼간택에 올라갔다는. 그리고 이미 세자빈으로는 윤씨처녀가 내정되어

있다고도 들었소.”

“어쩔 수 없지요, 하늘의 뜻이 그러한데.”

“그건 하늘의 뜻이 아니오!”

연우의 눈매가 슬픔과 미소를 같이 떠올렸다. 양명군은 입술을 씹으며 어떤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런 후, 그의 입이 결심한 듯 힘겹게 열렸다.

“난 그대가 세자빈으로 간택된다면 포기하려고 하였소. 하지만 이제 그대에게 남은 것은

잘 되어도 양제(良?, 종2품으로 왕세자의 소실 중 가장 높은 품계)요. 아니면 영영 출가를

금지당한 채 홀로 여생을 살아야 하오. 난 그대를 나의 어머니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소.”

연우는 고개를 숙였다. 부모님의 괴로움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기에 어찌 할 바를 몰라서였다.

괜히 촘촘히 박힌 돌들이 담장을 이루고 있는 것을 눈으로 훑었다. 그 눈길을 따라 양명군의

눈길도 같이 훑었다. 그러다 두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연우의 입이 소리 없이 슬픔과

미소를 같이 떠올렸다. 양명군은 급해진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 그녀의 양 팔을 허락도 없이

덥석 잡았다.

“나와 같이 도망해주오.”

“네? 무슨 말씀이온지······?”

“왕자군의 자리도 양명군이란 봉작도 버리겠소. 어차피 소리만이 요란할 뿐 불필요한

신분일 뿐이니, 그대와 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자, 잠깐! 팔을 놓아주시옵소서. 소녀는.”

“내 말을 들어주시오! 나는 오늘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대를 보쌈하기 위해 온 것이오.

이대로는 모두가 불행해질 것이오.”

“소녀의 마음이 이미 세자저하께 가 있어도 좋사옵니까?”

연우의 팔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의문을 떨치지 못한 채

떨리고 있었다.

“세자저하를 그대도 알고 있는 것이오?”

“비록 직접 뵈온 적은 없사오나, 직접 뵈온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마음을 내어드렸사옵니다.”

“만나지도 않고 어떻게······?”

“만나서 나누는 정만이 전부라 하더이까? 세자저하께옵서 꿈길로 찾아오시었고, 소녀 또한

꿈길로 가 뵈었으니 그렇게 서로 나누었던 정만 해도 만 리 길은 더 갈 것이옵니다. 그렇기에

소녀는 세자저하를 믿고 있사옵니다. 소녀가 세자빈이 될 수 없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 하더라도,

세자저하의 여인이 되는 것은 그분의 뜻임을. 허니 양제면 어떠하고, 소훈(昭訓, 종5품으로

왕세자의 소실 중 가장 낮은 품계)이면 어떠하오리까.”

양명군은 망연자실하여 그녀의 팔을 놓았다. 하지만 디디고선 자리에서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연우가 두어 발 물러나 섰다. 그의 눈동자가 눈물이 스며들었는지 반짝이며 일렁거렸다.

“만나지 않고 나눈 정이 만 리 길이라면, 그대를 보며 기른 나의 마음은 몇 리 길이 될 것 같소?”

연우의 손끝이 당황한 듯 입술에 닿았다가, 옷고름 매듭에 닿았다가, 치마를 잡았다.

“어찌하오리까?”

“어찌 할 것이오?”

“그러하면 양명군의 뜻은 어떠하옵니까? 이미 품은 마음인데, 소녀에게 정절을 버리게

하고 싶으신 것이오니까?”

양명군의 걸음이 뒤로 두어 발 물러났다. 부드럽고 정중한 그녀의 말이었지만, 너무도 힘이 있었다.

그녀의 물음에 대해 그가 답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연우가 하늘을 보며 평온한

음색으로 말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소녀의 마음에도 하나의 태양만이 있사옵니다.

오늘 소녀는 밤하늘의 별만을 보았을 뿐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았나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말도 듣지 못하였사옵니다.”

양명군은 담장 위로 뛰어 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오기까지 쉬운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쉽게 돌아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동안 연우에게 닿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다가 말했다.

“연우낭자! 내가 그대에게 같이 도망하자 조른 것은 듣지 않았다 하여도 좋소. 하지만

이것 하나는 꿈속에서라도 들었다 하여주시오. 조선의 태양이 아니라 그대 마음속의 태양이고

싶었던 나, 양명군의 마음을!”

차츰 빗소리가 멎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조선에 덮여있던 어둠도 해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있었다. 근정전 문이 열렸다. 비에 젖은 해가 곧장 연우의 품으로 달려오자 둘러싸고 있던

궁녀들과 내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틈을 내어주었다. 훤은 그녀의 품에 안겨 가엾게도 소리

내어 울었다. 그가 머금은 물기에 그녀도 젖어갔고, 그의 눈물을 따라 그녀의 눈물도 같이 흘렀다.

어둠이 물러가는 것을 느낀 염이 눈을 떴다. 하지만 방안 광경이 사랑방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니 뒷목덜미가 뻐근했다. 순간 어젯밤 갑자기 정신을 잃은 것이 떠올랐다.

염은 이미 깨어나는 순간부터 민화가 바로 곁에 앉아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곳으로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그는 민화가 아닌 멀리 앉은 민상궁을 향해 말했다.

“민상궁! 왜 나의 몸이 이곳에 뉘어져 있는가!”

민화는 바로 옆에 앉은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그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를 보았다.

민상궁은 공주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저기, 쓰러져 계신 것을 행랑아범이 모시고······.”

“내가 쓰러진 곳이 사랑채였거늘, 어찌 이곳까지 데리고 왔단 말인가? 내 내당과의 인연을

끊은 줄 모른다 할 참인가!”

민상궁은 더 이상 핑계를 찾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염도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음이 급해진 민화가 그의 다리를 잡았다.

“소첩이 보이지 않사와요? 이제 눈빛도 섞지 않고, 말도 섞지 않을 것이어요? 소첩이 어찌

하면 용서하여 주실 것이어요? 서방님이 하라시면 무엇이든 다 할 것이어요. 그리하여

서방님의 노여움이 조금이라도 풀어진다면······.”

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공주의 죄가 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제가 손수 씻겨주었을 것이고, 용서될 수 있는

것이라면, 제가 용서를 구하려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은 애초에 선하게 태어나니, 세상 아래에

용서 못할 죄도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천륜을 저버린 죄만큼은 용서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까지 용서된다면, 세상은 더 이상 사람이 살수 없는 곳이 될 것입니다. 적어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은 남겨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신분의 고하(高下)나,

나이의 대소(大少)를 가릴 수 없습니다. 만약에 세상이 용서한다 하더라도 저만큼은 최소한의

것을 지키겠습니다. 공주께서 저의 무엇을 사랑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이라 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저의 최소한을 지킬 수 있도록 하여주십시오.”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도 염은 민화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염의 최소한을 지키기 위해선

그녀는 죄를 용서받아선 안 된다는 의미였다. 이제 더 이상 내려갈 절망도 없지만,

민화는 희망 없는 애원을 했다.

“서방님은요? 소첩을 사랑하시는 서방님의 마음은 어찌하시고?”

“사랑의 가치가 천륜의 가치보다 우위에 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은 그 뒤에 묻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민화의 방을 나갔다. 그녀의 눈에선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차라리 그의

목소리가 차가웠다면, 그리고 화를 냈다면 눈물을 흘릴 여유라도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잔인할 만큼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염이 닫은 방문에 고통스럽게 스스로의 가슴을

움켜쥐는 그의 그림자가 보였다. 민화를 용서하지 않는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고통이었다.

민화도 염을 따라 가슴을 고통스럽게 움켜쥐었다. 그의 고통이 민화에겐 가장 큰 형벌이었다.

마당에 내려선 염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인들의 행동이 하나같이 부산했다. 흥건했던

핏자국도 이미 빗물에 씻겨 나가고, 또 그 위에 다른 흙을 덮었기에 그의 눈에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 다른 때와 분명 다른 것 같았다. 언뜻 내당으로 들어오려던 청지기가 염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몸을 숨기려 하였다.

“왜 숨는가? 이리 나오너라.”

청지기가 머뭇거리며 염의 앞으로 왔다.

“기침하셨습니까요, 주인어른?”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내당 마당이 어찌 이리도 어수선 한가?”

“비가 많이 내려서······.”

설의 유언을 받들어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라는 공주의 명령 때문에 청지기는 진땀을 빼고 있었다.

하지만 순간, 이 일에서 모면할 이야기 거리가 떠올랐다.

“아! 그것보다 주인어른, 지금 한양 일대가 난리가 났습니다요. 밤새 경복궁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을 못 잤는데, 아무래도 무슨 전쟁 비스무리 한 거라도 났는지······.”

“뭣이? 입궐하신 어머니는 어디 계시느냐?”

“지금까지 아니 오셨습니다요.”

염의 몸이 충격으로 휘청했다.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곧 입궐할 것이다. 준비하거라.”

“안됩니다요. 이제 막 시끄러운 소리가 그쳤다고 하는데, 가셨다가 의빈대감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시면······.”

“어허! 지금 내 몸이 무에 그리 중요한가! 이런 상황에 자고 있었던 불충과 불효를 힐책해도

모자를 판에. 어서 준비하라!”

염의 발걸음이 급하게 안채를 벗어났다. 머릿속에는 경복궁에 있는 이들을 걱정하느라,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의 뒤를 청지기도 따라 나갔다.

신씨부인과 대비한씨, 그리고 그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굿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삼청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대비전에 숨어 있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공포스러운 소리가 멎자 대비한씨의

걱정은 더욱 심해져 자리에 앉지 못하고 방안을 안절부절 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 소란 속에도

신씨부인은 조용히 앉아서 오직 죽은 딸, 연우만 생각하고 있었다. 비가 완전히 그치고 날이

밝아지자, 대비한씨는 결국 방안을 나섰다. 신씨부인도 어쩔 수 없이 대비를 따라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비전 마당을 벗어나지 못하게 내삼청 군사들이 길을 막았다.

“네 놈들이 감히 나의 길을 막는 것이냐? 비켜라! 그렇지 않을 시엔 경을 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협박에도 그들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한참을 옥신각신 하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상감마마, 납시오!”

대비는 얼굴에 환한 미소로 안심을 표현했다. 그리고 왕의 모습이 보이자, 모든 이가 허리를

숙이고 땅을 행했지만, 그녀는 얼른 아들에게로 달려갔다. 왕의 옆에는 운검이 있었고,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그 뒤를 내관과 궁녀가 길게 늘어섰다.

“주상, 무슨 일입니까? 무엇보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훤은 아직 어갑을 입고 있었다. 혼란한 상황이었기에 옷을 갈아입을 정신이 없었다. 대비에게는

옆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여인은 보이지 않고 아들의 부운 눈만 보였다. 훤은 걱정 어린 대비의

눈을 외면하며 연우를 앞으로 떠밀었다.

“어서 가보시오. 가서, 어머니라고 불러보시오.”

연우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허리를 숙이고 땅만 보고 있는 수많은 여인들 중에

어머니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많이 야위고, 흰머리가 듬성듬성 자라있고, 보이는

옆얼굴의 눈가에 굵은 주름이 잡혀있었지만, 꿈에도 잊어보지 못한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다가가 멈춰 서서 어머니라고 부르려고 하는데 목에서 박혀 올라오지를 않았다. 말을 대신해서

눈에서 눈물만이 흘러내렸다.

신씨부인은 누군가가 다가온 것을 보았다. 하지만 왕의 앞에 허리를 들 수 없었기에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여인의 다홍색 치마였다.

앞에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는 다홍색치마가 의아해서 그녀의 눈길은 치마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연노랑 저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저고리를 보자 연우가 더욱 생각났다.

미혼인 처자들이 자주 입는 연노랑저고리와 다홍색 치마. 그렇기에 연우도 살아생전 즐겨 입던

옷이었다. 연우가 죽고 난 뒤, 신씨부인은 이런 옷을 입은 여아만 있으면 모두가 연우인 것만

같아서 실성한 듯 따라가곤 했다. 이번도 그렇게 생각했다. 저고리 보다 위로 눈길을 들어 본

여인의 얼굴이 눈에 다 들어오지도 못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 마치 하늘의 선녀가 장대같이

내리던 비에 휩쓸려 실수로 내려온 것만 같아 연우로 착각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이 아닌 여인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다시 허리를 숙였다.

“어······머니.”

귀가 잘못된 줄로만 알았다. 기와를 타고 떨어진 물 덩어리가 땅의 여기저기 고인 물구덩이에

떨어지는 소리로만 들렸다.

“어머니.”

이상했다. 물소리가 아니었다. 다시 들린 소리는 분명 눈물소리였다. 신씨부인의 눈길이 조금

전보다 더 더디게 위로 올라갔다. 힘겹게 올라간 눈길은 한동안 멍하게 연우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연우는 그녀의 눈과 마주치자 눈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흘러내려 더 이상 어머니를

부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손으로 일그러지는 입술을 막았다. 신씨부인은 넋이 나간 채로

떨리는 손을 뻗어 연우의 가린 손을 떼어냈다. 자세하게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딸의 얼굴을 살피던 그녀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비가 흥건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귀신으로라도 보고 싶다 했더니······. 헛것이 보이는가.”

연우도 어머니를 따라 땅에 주저앉아 도리질을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저 살아있는 연우예요. 귀신이 아니에요.”

연우는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봐요. 따뜻하잖아요. 살아 있잖아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앞으로 부르지 못할 연우를 끊임없이 불렀던 아버지의 마음과 똑같이, 그동안 불러보지 못했던 것을

한꺼번에 다 불러보고 싶었는지 어머니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신씨부인의 귀에는 메아리로만 들렸다. 죽은 딸이, 그것도 땅에 묻은 지 수년이 흐른 지금

살아나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초점 잃은 눈동자를 하고서 손만 무의식적으로

연우의 얼굴과 팔을 쓰다듬었다.

“연우? 우리 연우냐? 정말 내 착한 딸, 연우냐? 그래, 이 눈. 이 코. 이 입술. 아까운 내 딸.

널 땅에 묻고 내 마음도 이미 너와 같이 땅에 묻었는데······.”

뒤늦게야 신씨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한번 터져 나온 눈물은 멈출 수 없을

만큼 쏟아졌다. 죄인으로 죽은 딸이었기에 이름조차 입에 담을 수 없었던 그동안의 설움과 맞물려,

그녀의 울음소리는 통곡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양명군의 사가에 희빈박씨의 가마가 도착했다. 가마에서 내리는 그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었다.

상궁이 그녀를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사랑방에는 양명군의 시신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눕혀져 있었다. 희빈박씨가 들어가 시신 옆에 앉자, 시신을 지키고 있던 하인이 양명군의

얼굴을 덮고 있던 헝겊을 조심스럽게 들어냈다. 그 얼굴을 본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누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였느냐? 저 미소가 안 보이느냐? 살아있구먼, 살아있구먼.”

희빈박씨는 아들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싸늘했다.

“양명군, 이 추운 날 비오는 밤에 또 저잣거리에 나가 바보놀음 하였습니까? 이리 차가우니

사람들이 양명군이 죽었다고 내게 말하러 오지요. 장난은 그만 하고 일어나 보세요.”

하지만 죽은 시신이 일어 날 리가 없었다.

“이러면 안 됩니다. 이 어미가 겁나잖아요. 제 손 떨리는 게 안보이십니까? 이 이상 장난 하면

저도 화를 낼 겁니다. 양명군!”

그녀의 손이 양명군의 시신을 흔들었다. 얼굴만이 아니라 온몸이 싸늘했다. 아들의 죽음이

손을 타고 가슴으로 넘어왔다. 그래서 더욱 심하게 시신을 흔들었다. 그러자 주위사람들이

그녀를 만류하며 멀리 떨어지게 했다. 비록 어미였지만, 그녀는 아들보다 품계가 아래이기에

왕자의 시신을 함부로 해선 안 되었다. 가까이 오려는 그녀와 이를 말리는 사람들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났다. 그녀의 옷섶은 뜯겨지고 입술은 이에 짓눌려 피가 났다.

결국 힘에 부친 그녀는 아들과 떨어진 곳에 쓰러지듯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지만

살아있을 때 이름 한번 불러보지 못했다. 아들 앞에 공대만 해야 했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살아있을 때도 한번 안아보지 못했는데, 지금 시신으로라도 안을 수가 없었다.

“이리 가려고, 그때 이 어미한테 왔었습니까? 나란 것도 어미라고 마지막이라도 보려고······?

그것도 모르고 난 한심한 말만 하고, 한심한 짓만 하고······.”

희빈박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왕의 후궁이 된 이후로

처음으로 목 놓아 울었다. 아들에게 미안했다. 자신이 낳아준 것이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차마 미안하다는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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