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43화 (43/47)

#43

설은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자신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염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죽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검을 잡은 손끝이 떨렸고, 그와 같이 검의

끝도 떨렸다.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설의 검이 먼저 움직였다. 설의 공격에 자객들도 같이 움직였다.

장씨의 몸도 움직였다. 그녀의 몸이 빙그르 도니, 따라 휘어 도는 천의 물결에 어두워졌던

별이 어둠을 걷어내고, 장씨의 주름진 손으로 긴 천을 펴니, 세상의 시름도 따라 피어졌다.

각각의 장소에 집결해 있던 반란군도 일제히 경복궁으로 움직였다. 제일 앞에 선 양명군의

말발굽에 땅이 패지고, 바람이 그들의 사이로 휘어들었다.

설의 검이 자객 한명의 검과 부딪혔다. 그리고 빙그르 돌아 다른 자객들의 검도 차례로 받아쳤다.

이내 그녀의 검이 한 자객의 어깨를 베었다. 그 어깨에서 품어 나오는 피가 설의 얼굴에 튀었다.

그녀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머금어졌다. 만약에 염을 그렇게 기절시키고 숨기지 않았다면,

지금 이 더러운 피가 그의 순결한 얼굴에 닿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기 때문이었다.

다른 자객의 검이 설의 팔을 스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그녀의 얼굴에 또

다시 미소가 스며 나왔다. 염의 팔을 대신하여 피를 흘릴 수 있는 자신의 팔이 있음을 감사했다.

피를 보면서도 미소 짓는 그녀 때문에 자객들의 발걸음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등에 소름까지 돋았다.

“미, 미친년!”

소리를 내어지른 자객의 목에 설의 검이 들어갔다. 그리고 한순간에 그 목을 찌르고 자리로 돌아왔다.

설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렸다.

“조용히 해라. 의빈께오서 깨어나신다.”

목을 찔린 자객이 검을 떨어뜨리며 쓰러져 죽었다. 남은 두 명도 일순 긴장했다.

하지만 주춤 거린 것도 잠시, 온 힘을 다한 그들의 검이 설을 향해 사정도 없이 파고들었고,

검 둘을 하나의 검으로 막아야 하는 설의 몸은 여기저기 찢겨나가 피를 흩뿌렸다.

장씨의 하얀 긴 천이 장씨가 도는 주위를 따라 돌다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설의 붉은 핏줄기도 그녀를 따라 돌다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린 피가 땅에 남긴

흔적 때문에 설의 마음이 아팠다. 쉽게 없어지지 않는 핏자국, 그것을 혹시라도 염이 보게

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작은 미물에게조차 가여운 마음을 가지는 그가 자신의 핏자국임을 알고

마음 한 귀퉁이라도 아파지면 어쩌나, 그가 자책을 하며 괴롭게 되면 어쩌나, 그리고 혹시라도

훗날 자신을 기억하는 아주 찰나의 순간에 아픔을 떠올리면 어쩌나, 그래서 평생 미소로만

살았음 하는 그가 단 일각이라도 미소를 버리면 어쩌나, 지금으로도 충분히 미소를 버리고 사는 그가······.

하지만 이내 설의 아픈 마음을 밀치며 편안한 마음이 찾아들었다. 곧 비가 올 거라던 장씨도무녀의 그 말.

아마도 그 비가 핏자국을 씻어가 줄 것이리란 생각에 설의 입가에는 다시 미소가 잡혔다.

미소 때문이었는지 설의 눈동자에 정신을 잃은 염을 안고 멀리로 달아나는 장면이 부질없이

떠올랐다. 그러지 못하고 공주의 품에 염을 돌려준 것은 그의 사랑을 위해서였다.

그만을 위하여 민화공주를 버리고 간다한들, 깨어난 그는 또 하나의 미소를 버리고 살아야 함을 알기에,

그와 함께 그가 사랑하는 여인까지 지키고 싶었다. 그것이 그를 온전히 지키는 길이었다.

설의 눈동자에 염의 모습이 사라지고, 민화의 방으로 발걸음을 떼는 자객이 들어왔다.

그 자객을 향해 그녀의 걸음도 급히 움직였다. 설의 검이 자객의 가슴을 찌른 그 순간,

다른 자객의 검이 설의 복부를 뚫었다. 그녀의 눈이 자신의 몸을 관통한 검을 향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것은 염의 미소였다. 설의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함께 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그와 함께 나눈 미소도 없었고, 그와 함께 만든 추억도 없었다. 오직 숨어서 훔쳐본 것 이외엔

그 어떤 이야기도 없었다.

“바보같이 왜 내 마음을 말해버린 것일까······. 그분 마음 아프게······.”

자객의 가슴에서 검을 뺀 설의 눈동자가 이번에는 자신을 찌른 자객을 향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심장을 뚫지 그랬느냐? 그랬다면 너의 검을 타고 뛰는 내 심장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마지막까지 그분을 생각하며 뛰었던 내 심장 소리를 네놈에게나마 들려줄 수 있었을 텐데.”

가슴을 찔린 자객이 결국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자객은 싱긋이 웃는 설의

표정에 오히려 새파랗게 질려 그녀의 몸에서 검을 빼냈다. 빼낸 검과 함께 그녀의 피도 터져 나왔다.

설의 몸이 휘청했다. 하지만 검을 다잡고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렇다고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피까지 멈춰 세운 것은 아니었다.

“다행이다. 아직 나의 숨이 멈추지 않아서. 그렇기에 아직은 그분을 지킬 수가 있어서.”

설은 복부에서 피가 쏟아지는데도 자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설의 의지에 의해 오히려

자객이 밀려났다. 또다시 검의 날이 설의 어깨에서부터 가슴까지 긋고 지나갔다. 거기서도

시뻘건 피가 터져 나왔다. 설의 눈동자는 검은자 보다 흰자가 더 많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다리는 후들거리긴 했으나 쓰러지지 않았고, 그녀의 검도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까스로 기어 나왔다.

“나를 넘어가진 못한다. 나의 숨이 멈출지언정, 나 죽어도······나를 넘어가게 하지 않겠다!”

설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그녀의 목구멍을 막을 정도로 피가 몰려 올라왔다.

설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힘들게 올라오는 핏덩어리를 되삼켰다. 땅에 떨어진 핏자국을

최대한 적게 남기려는 마음에서였다. 혹시라도 핏자국을 발견하게 될 염의 마음이 덜 아프도록······.

설의 검은 여전히 자객을 향해 달렸다. 자객은 두려움에 소름이 돋았다. 한순간 검을 잡았던

자객의 팔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복부도 잘려나갔다. 마지막 힘을 실은 설의 동작이 멈췄다.

검 날이 부딪치던 소리가 멈추고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과 더불어 적막했다. 자객이 피를 쏟으며

자리에 쓰러지고 나서도 설은 검을 잡은 그대로 있었다. 혹시라도 쓰러져 있는 자들 중에 숨이

붙은 이가 일어설지도 몰라 자신의 몸에서 흐르는 피를 돌볼 수가 없었다. 설의 귀에 염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들어왔다.

“난 네게 미안하기만 하구나.······.”

그녀는 그때 답하지 못했던 말을 마음으로 답했다.

‘도련님, 미안하다 마십시오. 쇤네는 도련님으로 인해 사람이 되었고, 여인이 되었고,

그리고 설이 되었습니다. 비록 성도 없이 이름만 있지만, 성과 함께 있는 그 어떤 이름이

쇤네의 이름보다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설의 다리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잡았던 검도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무너지듯

차가운 땅바닥에 앉았다. 고개가 서서히 숙여진 그녀의 귀에 다시금 먼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염의 다정한 말이 들어왔다.

“여인은 검을 쥐면 그 운명이 슬퍼진다 하였다. 그러니 장난으로라도 검을 쥐지는 말아라.”

그때는 미처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이마에 닿았던 염의 손이 뜨거워서, 그리고 ‘여인’이란

그의 말에 가슴이 뛰어서 다른 말은 듣지 못했던 것이다. 설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답했다.

‘비록 짧았던 삶이었지만,······쇤네는 검을 쥔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설의 눈이 감겨졌다. 그리고 염이 있는 방을 등지고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둔

그녀의 얼굴엔 미소만 남아 있었다. 하늘을 향한 장씨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장씨의 눈에서 눈물도 흘러나왔다.

민화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더욱더 염을 끌어안았다. 민상궁도 적막한 바깥

기운에 조금 전의 여인이 숨을 거둔 것을 알았다. 처음 본 여인이었지만, 그 마음이 가여워

눈물이 나왔다.

“너는 왜 눈물을 흘리느냐?”

“그러면 공주자가께옵선 어이하여 눈물을 흘리시옵니까?”

“모르겠다. 서방님을 보던 저 여인의 눈동자가 나와 닮아서일까. 자신의 시신을 서방님이

보기 전에 치워달라던 마음이 눈부셔서일까. 아니면 서방님을 내 곁에 묶어두려고만 했던

내 사랑이 초라하고 또 초라해서일까······. 모르겠구나, 정말.”

장씨의 눈물을 닦아 주려는 듯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천천히 허공을

만지는 그녀의 손가락에 꼬여있던 운명의 실이 풀어졌다. 그리고 긴 천과 하나가 된 그녀의

춤이 근정전 마당 한가운데를 어루만졌다. 평소 욕설이 섞인 그녀의 말투와는 달리 우아하고

절도 있는 성숙청 도무녀의 춤이었다. 하늘을 향해 임금과 나라와 가엾은 백성을 굽어 살펴 달라

조르는 도무녀만의 언어였다. 광화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근정문을 넘어 장씨의 긴 천을 날렸다.

그녀의 손끝에 매달린 하얀 천이 바람에 너울거리며 땅과 수평을 이루어 왕이 앉은 곳을

향해 뻗었다. 그 천을 허리에 감고 빙그르 돌았다. 한 바퀴 돌아 멈춘 장씨의 손은 공기에

녹아 꿈틀대고 있는 악귀를 당겨 자신의 몸에 가두고, 다시금 돌아 천을 입과 코에 감고 원귀의

한을 잡아 가슴에 넣었다. 그렇게 세상을 달래고 스스로의 명을 버렸다. 천의 끝까지 허리와

얼굴에 감은 그녀의 발끝은 멈추지 않고 근정전 마당을 돌아다녔다. 장씨가 디뎠던 발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그곳엔 빗물 하나가 떨어져 남았고, 또 다른 곳으로 발을 옮기면,

그 곳엔 또 다른 빗물이 떨어져 그녀의 디딘 발자국을 대신했다.

마지막으로 긴 음악의 소용돌이가 몰아치자, 그녀의 팔이 하늘로 뻗어졌다.

‘조선을 살피시는 하늘이여, 죄 많은 이 몸의 남은 명을 제물로 바치오니 부디 만백성이

조선의 백성임을 감읍하게 하여 주시옵고, 금상의 백성으로 살다가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게

되기를 비나이다.’

장씨의 팔이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굵어진 빗줄기도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눈이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떨어지는 비를 얼굴에 맞았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을

가득 타고 떨어지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씨의 눈이 먼저 가고 있는

설을 향해 농담을 걸었다.

‘비인가 여겼더니, 눈이었구나. 불꽃을 가슴에 품고 가니 비처럼 내리지.’

허리에 감겨있던 천이 스르르 풀려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입과 코를 감고

있던 천은 빗물을 머금고 더욱 그녀의 얼굴에 밀착한 채로 떨어지지 않았다. 숨구멍까지

막은 빗물로 인해 장씨의 숨도 서서히 멎어갔다. 하늘은 그렇게 장씨의 수명을 거두어 가는 대신에

장씨의 죄를 씻어가고, 설의 피를 씻어갔다. 그리고 조선의 겨울을 씻어갔다.

양명군과 반란군이 광화문 앞에 도달했다. 그러자 궐내의 동정을 살피고 달려온 자가 그들의

말발굽 소리를 멈춰 세워 기은제가 거행되고 있는 동태를 상세하게 보고 했다.

잠시 멈췄던 말발굽소리가 빨라졌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반란군의 걸음도 빨라졌다.

눈앞에 활짝 열려진 근정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근정전 마당이 보였다. 이때 양명군의 말이 갑자기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덩달아 옆에서 보좌하는 다섯 명의 선발대도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바로 뒤에 있던

군사들과 서서히 거리가 벌어졌다. 달려 들어온 근정전 마당에는 단 한명의 사람도 없었다.

오직 기단 위에 고비로 몸을 덮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왕만 있었다. 뒤따라 들어오던

파평부원군의 머리에 이상한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아무도 없이 비를 맞고 앉아 있는 왕이라니,

그의 등골에 빗물과 함께 오싹함이 타고 내렸다. 조금 전에 보고 받은 성숙청의 무녀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양명군이 타고 달리는 말의 속도였다.

하지만 파평부원군의 머릿속이 정리되기도 전에 기단 위에 앉아 있던 왕이 고비를 벗어 던지며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훤이 고비 아래에 입고 있던 옷은 황금빛의 어갑(御甲, 임금의 갑옷)이었다.

당황한 파평부원군이 말을 멈춰 세우며 소리쳤다.

“멈춰라!”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양명군의 등만 보고 달려가는 군사들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양명군의 등은 선발대의 무사들과 더불어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순간 파평부원군과 반란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과 양명군의 중간을 가로막을 듯,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는 캄캄하기만 하던

행각(行閣) 안의 양옆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달려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검은색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말 위에 용문투구를 쓰고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이들은 분명 운검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놀란 이유는 운검이 한 명이 아니라 모두 다섯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양옆에서 선발대를 향해 달려오자, 양명군과 무사들의 말고삐는 더욱 박차를

가하며 왕을 향해 돌진했다. 운검들이 가로막으려는 찰나의 틈으로 양명군이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선발대도 양명군을 따라 통과했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다른 반란군들은 운검들이

가로막은 선을 넘어가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운검들의 사이에는 검은 군복을 입은 군사들이

무기를 들고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기단에 서 있던 왕의 팔이 서서히 들려졌다.

그런데 그 손에는 커다란 어궁(御弓)이 들려져 있었다. 훤은 등에 메고 있던 동개에서 화살을 빼내

어궁에 장착하고 길게 활시위를 당겼다. 그와 동시에 양명군도 검을 빼내 든 채로 왕을 향해 달려왔다.

팽팽하게 당겨진 훤의 활시위가 그의 손끝에서 놓아졌다. 왕의 화살은 빗속을 뚫고 양명군의

바로 왼쪽에서 달려오는 선발대 무사의 목을 관통했다. 그들이 놀랄 사이도 없이 양명군의

검이 비를 가르며 옆을 향했다. 순간 양명군의 오른쪽에서 달리던 무사의 목이 그의 검에 잘려

땅에 떨어졌다. 또 다른 왕의 화살이 무사의 목을 다시금 정확히 관통했다. 그리고 양명군의 검도

선발대의 또 다른 무사를 베었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그들은

왕이 서 있는 기단에 도달하기도 전에 차례로 시체가 되어 땅에 떨어졌다. 놀란 파평부원군은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돌아선 그의 눈엔 거대한 근정문이 반란군을 모조리 몰아넣고는

닫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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