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42화 (42/47)

#42

아직 완전한 보름달로 채워지지 못한 달이 하늘에 있었다. 내일이면 완전한 보름달이 될

그 달을 희망의 마음과 두려움의 마음이 뒤엉킨 채 보고 있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훤은 그 많은 마음들에 짓눌려 무거운 머리를 앉아있는 연우의 허벅지 위에 올리고 길게 누웠다.

“별들이 너무도 빛나고 있어 오히려 더 무섭소.”

“먹을 머금은 하늘에 소녀가 뿌린 눈물일 뿐이옵니다.”

“달빛이 땅을 밟는 소리가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소.”

“소녀가 시끄러운 소리를 막아드리겠나이다.”

연우는 손바닥으로 훤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내일을 기다리다 조급해진 훤의 마음도 가렸다.

연우는 손바닥에 닿은 그의 속눈썹의 움직임을 느꼈다. 가늘게 떨고 있는 그 움직임은

그녀의 마음도 떨리게 만들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왕이 가여워서였다. 연우는 서서히

훤의 눈을 가렸던 손바닥을 거두었다. 그리고 거두어진 그 자리엔 그녀의 입술이 대신 내려 앉았다.

훤의 속눈썹이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떨리며 연우의 입술로 전해져 왔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멀어지자 훤은 아쉬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기어코 그대가 나를 미치게 할 생각인 것이오?”

“시끄러운 소리가 막아졌사옵니까?”

눈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연우의 미소가 달빛보다 눈부셨다. 그 미소에 훤도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된 셈이오. 사내의 피가 들끓는 소리에 묻혔으니······. 내 이제껏 더하여져서

아름다운 것이 꽃들인 줄로만 알았소. 그런데 아니었구려. 나의 눈에 더하여진 그대의 입술이

더 아름답고, 그대의 얼굴에 더하여진 그대의 미소가 더 아름답소.”

“아니옵니다. 더하여져서 아름다운 것은 소녀의 미소에 더하여진 상감마마의 미소이옵니다.

그러니 부디 소녀의 미소에서 상감마마의 미소를 감하지 마시오소서.”

“미소만? 아니오. 나의 입술에 더하여진 그대의 입술이 가장 아름답소.”

훤은 연우의 입술을 기다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기다리는 입술이 짓궂은 모양을 하며 한쪽

끝으로 슬쩍 말려 올라갔다. 연우의 입술은 그의 말려 올라간 입술의 끝에 닿았다. 하지만

닿은 그 느낌이 너무도 부드러워 달빛만이 닿은 것 같았다. 그리고 훤의 피를 들끓게 하고는

그녀의 입술은 멀어졌다. 훤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말했다.

“그리 거두어 가는 것이오? 괜찮소. 나 내일을 넘기면 그대에게서 입술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받을 것이니. 이젠 달빛도 시끄럽지 않고 내일도 두렵지 않소. 그대가 나의 중전이 될 사실

아래에 다른 그 무엇이 두렵겠소.”

훤의 손이 연우의 손을 더듬어 꼭 쥐었다. 손끝이 아릴만큼 힘껏 쥐었는데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시간이 흘렀다. 달이 흐르고, 구름도 따라 흐르고, 해가 흐르고, 또한 구름도 따라 흐르고,

붉어진 하늘을 검은 빛으로 밀치며 또 다시 달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구름이 달을 에워싸고 따라 흐르고 있어 보름달의 윤곽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편전에서 정무를

마친 대신들이 내삼청의 군사들의 지시로 일찌감치 퇴청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들

속에서도 역모에 가담한 자들의 분주한 걸음이 있었고, 비상한 기운을 느끼고 한탄하는 자들도 있었고,

아무 것도 모르고 성숙청의 기은제를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고, 뼈 속 깊숙한 곳까지 유학자인

몸으로도 오직 단 하나 왕의 강령만을 기원하여 기은제를 찬성하는 자도 있었다.

장씨는 정성을 다해 머리를 빗어 붉은색 나무 비녀로 쪽을 졌다. 오랜만에 거울에서 보는 자신의

모습은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훨씬 많았다. 보내버린 세월이 아쉬운 듯 거울 속의 자신에게

미소한번 보낸 뒤, 도무녀로서 하얀 소복을 입고는 방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자신의 방안 구석에 곱게 접힌 채 놓여 있는 수의를 보았다.

이내 고개를 돌려 방을 나갔다. 방문 밖에는 수종무녀들이 채비를 마치고 도무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의 모습이 나타나자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장씨는 차가운 땅의 기운을 맨발로 밟았다.

눈으로 수종무녀들을 한 번씩 어루만지니, 멀리서 잔실이가 울며 달려와 장씨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잔실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음에 자신의 입술만 꽉 깨물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장씨의 손이 가볍게 잔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잔실아, 기억해라. 왕과 백성을 잇고, 백성과 하늘을 잇고, 하늘과 왕을 이었던 것이 우리

성숙청이었음을. 내 비록 한 때의 어리석음으로 하늘을 저버리긴 했으나 성숙청이 왕실을

버리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역사를 쓰는 자들이 유학자들이기에 우리는 역사 속에 악인으로만

기록되겠지만······그 어떤 수모 속에서도 끝까지 왕실과 함께 해야 한다. 언젠간 사라질

성숙청의 운명이라 하더라도 마지막까지······마지막까지······.”

장씨는 몸을 돌려 성숙청을 나섰다. 그 뒤를 수종무녀들이 기러기 떼가 긴 길 가듯 따랐다.

차가운 바람이 장씨의 옷고름을 날리고 옷자락을 날려도 그녀는 묵묵하게 차가운 땅을 맨발로

밟으며 근정전으로 나아갔다. 성숙청 바깥의 먼발치에서 혜각도사가 그들의 행렬을 보고 있었다.

장씨의 눈길이 잠시 혜각도사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이윽고 바람에 실어 전해오는 그의

소리가 들렸다.

‘그리 가는 게요? 미안하오.’

바람에 장씨의 소리도 섞었다.

‘이리 가도록 나를 불러들인 건 혜각도사였소. 어차피 다 갉아 먹어 길게 남아 있지도 않은

수명이었소. 내 손으로 더럽혔던 하늘늑대별을 마지막 남은 내 명을 바쳐 닦아내는 것뿐이오.

엉켜있던 왕과 왕비의 인연의 끈을 풀어 온전한 합을 비는 것이 성숙청 도무녀로서 더 없는

영광인 것을······. 혜각도사! 마지막까지 두 분의 끈을 놓치지 않고 이어주어 감사하오.

그대가 아니었다면 난 내 죄 값을 치룰 기회도 얻지 못하였을 것이오.’

혜각도사는 멀어져가는 도무녀와 수종무녀들의 행렬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염은 바깥 기척에 정신이 쏠려 있었다. 예감이란 것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그였지만

오늘밤은 달랐다. 멀쩡했던 왕의 기은제를 한답시고 왕실에서 친히 가마를 보내 모친을 모셔

가는 것도 이상했고, 궁에서 나온 비자가 여전히 왕의 의식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했다.

연우를 둘러싸고 모종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느꼈기에 염의 신경도 날카로워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 속에 민화와 자신도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 까지는

알지 못했다. 순간 창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검을 지닌 사내의 그림자인 듯했다.

“누구냐?”

염의 경직된 물음에 그림자가 공손하게 답했다.

“쇤네, 설입니다.”

염은 긴장된 마음을 놓고 목소리는 더 이상 다가오는 정을 막으려는 듯 최대한 쌀쌀하게 말했다.

“내가 오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도련님을 사내로 볼 것이라면 오지 말라 하시었을 뿐입니다. 지금 쇤네는 그런

마음을 버리고 온 것입니다.”

한순간에 버릴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임을 염도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문득 그림자가 사내 복장을 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허리에 검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알아차렸다.

“웬 검이냐?”

설은 대답이 없었다.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네가 검을 익혔구나. 그래서 줄곧 나를 따라다니는 흔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구나.

왜 하필 검을 잡았느냐?”

“글을 읽을 수는 없었기에 그리 하였습니다.”

염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설의 마음속 대답도 듣지 못했다.

‘쇤네가 잡은 것은 검이 아니었습니다. 도련님의 기억과 도련님의 몸짓을 잡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염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인 일로 검을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이냐? 그리고 너의 옷차림은 또 무엇이냐?”

설은 단 한 번도 검을 지니지 않고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언제나 치마아래에 숨겨놓았기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것을 염이 알 리가 없었다.

“그냥······먼 길을 떠나기 전에 도련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인사입니다.”

마지막이라는 인사 때문에 염은 천천히 일어서 바깥으로 나갔다. 이 또한 마지막 먼 길을 떠나는

자에 대한 인간적 예의였다. 설은 대청에 나와 선 염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염다웠다.

자신이 사랑한 것이 아깝지 않을 만큼, 오히려 사랑하게 만들어 준 그의 인간됨이 감사할 만큼

행복해서 더 없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염은 설의 미소가 낯설어 의아해하며 말했다.

“먼 길이라니? 길 떠나기엔 그리 좋은 날씨가 아닌 듯 한데······.”

비록 남녀 간의 애정이 깃든 염의 염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설은 행복했다. 그래서 더욱더

환하게 웃었다. 염은 설을 따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 좋은 곳으로 가나보구나. 아마도 너의 이리 밝은 미소는 처음인 듯 하니.”

처음 인 것은 환한 미소만이 아니었다. 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스스럼없이 가까이 다가가 선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아름다운 뺨에 손을

대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염은 설의 손이 닿자 눈에 슬픔을 담으며 말을 흘렸다.

“가엾게도······. 젊은 여인의 손이 이리도 거칠다니.”

설의 손이 멈칫했다. 그 순간 염의 고운 손이 그녀의 추한 손을 가볍게 감싸 잡았다.

“우리 연우의 손을 잡았을 때 예전과 변함없이 여전히 고와서 마음이 덜 아팠었다. 그 아이의

손이 그리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너의 손이 거칠어졌기 때문이었음을 내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설은 웃는 눈에 눈물 한줄기를 흘러 보내며 손을 거둬왔다. 태어나 지금까지 줄곧 원망만 했던

천주제신이 지금은 더 없이 감사했다. 그녀를 천하디 천하게 점지한 것도 천주제신이었지만,

염이란 존재를 이 세상에 보내준 것도 천주제신이었기에. 아니었다면 더 없이 천하게만 살아간

자신이 불쌍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만약 그가 없는 세상이었다면 아무리 귀하게 태어났어도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이젠 도련님의 고운 손에 닿았던 쇤네의 천한 손조차 고와진 듯 합니다.”

“난 네게 미안하기만 하구나. 애석하게도 사내의 마음 또한 하나뿐이라·······.

하나 있던 마음이 부서져 없어졌기에, 더 이상 남은 마음도 없어서.”

설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올 것이 없다는 그의 마음 보다, 남아 있는 마음이 없다는 그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뒷걸음질을 하며 천천히 염의 눈에서 멀어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염은 천천히 마당에 내려서서 구름만 가득한 하늘을 올려보았다. 마치 자신의 마음과도 같고,

현재의 상황과도 같았다. 염의 눈은 하늘에서 안채 쪽으로 천천히 돌려졌다. 그의 모습을

지붕에 올라가 몸을 감추고 있던 설이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순간 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멀리서 복면 쓴 수상한 사내들이 몸을 숨기며 염의 집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설은 순식간에 염의 등 뒤로 내려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염이 자신이 쓰러지는 것도 알아차릴

시간 없이 조용히 자리에서 쓰러졌다. 염을 기절시켜 품에 안고서도 설은 당황하여 잠시 고민했다.

소리죽인 발걸음은 다가오는데,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의 모습은 쉽게 마음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설의 문제는 염 하나만이 아니었다. 만약에 오고 있는 수상한 사내들이

염뿐만이 아니라 민화공주까지 노리고 오는 것이라면 염만 숨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민화가 죽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염이 슬플 것이기에······.

설은 우선 사내들이 두 패로 나뉘어져 염과 민화에게 각각 흩어지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힘겹게 염을 어깨에 걸치고 안채로 갔다. 안채에 불이 켜져 있었다. 충격으로 몸져

누워있는 민화를 민상궁이 열심히 간호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안에······누가 좀······.”

민상궁이 마당 쪽 문을 열며 말했다.

“누구냐?”

이윽고 민상궁이 정신을 잃은 염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서 달려 나왔다.

“이 무슨 일이냐? 대감께 무슨 일이?”

“말씀을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우선 공주자가와 주인어른을 모시고 멀리 달아났다가.”

설의 말을 민상궁이 자르고 들어갔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주자가께옵서도 운신키 어려우신데······.”

설의 이마가 어두워졌다. 바로 뒤에 까지 가까워진 자객들의 발자국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설은 자신의 긴 한숨이 미처 다 내뱉어지기도 전에 굳어진 입술로 꼭 다물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민화가 있는 방으로 민상궁의 도움을 받아 들어갔다. 민화는 앓아누워 있다가

염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서방님!”

설은 힘들게 지고 온 염을 고스란히 민화의 품속에 안겨주었다. 그리고 민화가 그를 끌어

안는 것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왜 염이 쓰러져 있는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도 상관 하지 않고

오직 염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부비는 것에 정신이 팔린 공주를 바라보았다. 설은 가까워진 발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민상궁에게 말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바깥에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도 나오면 안 됩니다.”

설의 목소리에 민화도 염에게서 정신을 놓았다. 그리고 큰 눈을 굴리며 설을 보았다.

“넌 누구냐?”

떨어지지 않는 힘든 입이었지만, 마음이 바빴기에 설은 얼른 말했다.

“종입니다.”

“처음 보는 얼굴인듯 한데······?”

설은 민화의 말에 답하지 않고 민상궁을 보며 말했다.

“또 다른 부탁이 있습니다. 만약에 저에게 어떠한 일이 생기게 된다면,······주인어른께서

깨어나시기 전에 치워지십시오. 그리고 저를 본적이 없다고 하여주십시오.”

설은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빨리 방을 나갔다. 하지만 이미 안채 마당에는

사랑채에 염이 없는 것을 확인한 자객들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설은 마당에 내려섰다.

그녀의 느닷없는 등장에 자객들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 사이 설은 칼집에서 검을 뽑은 뒤,

멀리로 칼집을 던졌다.

“나의 검은 더 이상 집이 필요 없다! 다시는 돌아가 꽂히지 못할 것이니.”

자객들은 설이 그저 남장을 한 여인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검을 고쳐 잡은 그녀의 기에

압도당해 섣불리 다가가지는 못했다. 차가운 바람이 휘몰려 다니는 마당 가운데에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를 탐색했다.

근정전 앞의 큰 마당에 장씨는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거대한 마당 가운데 선

그녀의 몸은 너무도 작아 보였다. 수종무녀들이 선 채로 있는 장씨의 목을 두른 긴 하얀 천을

아래로 드리웠다. 그리고 바닥에 주름 한 점 없이 길게, 길게 쭈욱 펼쳐나갔다. 정성어린 손길을

끝내고 수종무녀들은 멀리로 물러났다. 장씨의 눈에 멀리 근정전을 병풍처럼 하고 기단 위에

앉은 왕이 들어왔다. 몸을 숙인 채 호랑이 가죽을 어깨부터 몸 전체에 덮고 있는 왕이

까마득한 거리에 있었다. 그의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기단 위엔 왕만 있었다.

심지어 운검조차 보이지 않았다. 기단 옆의 굿상 주위에는 두 손 가득 딸의 혼을 기원하여

맞잡아 비는 신씨부인의 염원이 있었고, 아들의 완쾌만을 비는 대비의 염원이 있었다.

그리고 멀리 정업원의 불당에선 눈물로 엮어 만든 염줄을 잡은 희빈박씨의 염원이 있었다.

그녀의 기도에는 상감도, 상왕도 없었다. 오직 아들 양명군의 행복을 비는 마음만이 있었다.

또 다른 먼 곳에는 박씨부인이 서안 앞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도

아들 운의 안전만이 있었다. 이 모든 이들의 마음을 아우르듯 도무녀의 손가락은 천천히,

긴 천을 잡아 자신의 가슴께로 잡아당겼다. 그와 동시에 멀리 앉은 화쟁이들은 그녀의 몸짓에

숨을 고르며 일제히 악기를 고쳐 잡았다.

교태전의 궁녀들은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녔다. 기은제를 위해 근정정에 나가야 하는 중전윤씨가

당의를 벗어둔 채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사라진 중전윤씨는 하얀 소복만을 입고 홀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동아줄이 쥐어져 있었다. 북쪽을 향해 걸어만 가던

그녀는 한적한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튼튼한 나뭇가지를 골라 동아줄을 묶으며 중얼거렸다.

“중전의 당의를 벗고 이 하얀 소복을 입으니 이리도 편안한 것을······. 애초 이것이

나의 옷이었음을 알았음에도 당의를 벗지 못했던 것은 나의 잘못이고, 상감마마를 치러 오는

아버지를 말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상감마마께 아버지를 고하지도 못하는 것 또한 나의 잘못이니,

아버지를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버지! 당신 딸의 목을 죄는 동아줄은, 바로 당신의

손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유언도 없이 중전윤씨가 아닌, 윤보경이란 여인으로 조용히 목을 매달았다.

양명군의 사가와 파평부원군의 사가, 그리고 각각의 주요 집결지에 사병들이 모여들었다.

양명군은 갑옷을 갖춰 입고, 상투에 검은 천을 둘러 묶은 뒤, 뒤로 길게 드리웠다.

그리고 품속에 넣어둔 서책을 꺼내 한 번 더 확인했다. 처음에는 빈 책이었던 그곳엔 이 일에

가담한 외척의 이름들과 금상을 배반하고 권력을 쥐겠다 맹세한 이들의 이름과 수결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양명군은 훗날 공신록이라 적겠다고 했던 그 공책을 품속에 넣고 소중히 품었다.

마지막으로 검을 힘껏 쥔 뒤, 양명군은 자신의 방을 나섰다.

세상의 움직임을 담은 장씨의 두 눈이 게슴츠레하게 떠졌다. 그리고 서서히 많아지는

말 발굽소리와 가까워지는 거친 숨소리를 던져내듯 긴 천을 오른 손으로 던져 올렸다.

그러자 해금 한 줄이 조용한 공기를 찢으며 길게 피를 토해냈다. 해금소리에 찢어진 공기는

장씨가 던져 올린 긴 천을 하늘로 솟구쳐 오르게 하여 너울너울 춤추게 했다. 그리고 긴 천 끝을

장씨가 다시 잡아당겨 팔을 크게 휘저으니, 구름에 가려진 달을 대신하는 듯 커다란 달 형상을

만들어내고 이내 스러져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각종 악기가 동시에 근정전

일대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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