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오늘도 파평부원군에게서 어떠한 소식도 없으시었느냐?”
“네, 중전마마. 송구하옵게도······.”
중전윤씨는 어지럽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궁녀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숙인 고개로 인해 무거운 가체가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지만, 무엇보다 더 힘든 것은 마치
자신을 버리기라도 한 듯 발길을 끊은 파평부원군이었다. 중전이란 신분을 가지고도 교태전에
스스로 들어가지 못해 함원전에 겨우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그나마 유일한 의지가 되었던 이가 아버지였건만, 이제 그 아버지에게서조차 버림을 받은 것만
같아 그녀의 불안은 극도로 심각해져 있었다. 이따금씩 환청을 들을 때도 있었다. 그 환청은
언제나 ‘감히 중전도 아닌 것이 중전을 죽이고 앉아 있느냐!’는 꾸짖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 만들어낸 목소리임을 아는데도 마음은 어느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중전윤씨는 짓누르는 마음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보고 싶었지만 다른 방법은 달리 찾지
못하고 자신의 무거운 가체를 벗는 것만 겨우 생각해내었다. 그래서 궁녀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경대를 꺼내 거울을 펼쳤다. 그런데 펼쳐진 경대의 거울은 중전윤씨의 얼굴이 아닌, 그녀의
등 뒤에 고고하게 떠 있는 달을 먼저 담았다. 물끄러미 넋 나간 사람 마냥 거울에 담긴 달을
보고 있기만 하는 중전에게로 궁녀들이 다가가 얼른 가체를 벗겼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정신 나간 상태로 달을, 그리고 달이 의미하는 진정한 중전인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허씨 처녀, 연우를 보고 있었다. 비슷한 또래였음에도 간택으로 모인 여인들 중 단연 눈에 띄었었다.
어느 누구보다 세자빈다워 얼굴조차 감히 볼 수 없을 만큼 황송했던 기분도 아직까지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재간택이 끝나고 후보내정자로 확정되어 육인교를 타고 차지내궁의
호위를 받으며 가던 그때, 단촐한 가마에 오르던 연우와 비교되어 더 송구스러웠던 기억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 지금의 왕비 당의를 입고 있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연우였다.
상궁이 나지막하게 아뢰었다.
“춥사오니 그만 창문을 닫겠사옵니다.”
창문이 닫혀지자, 중전윤씨의 눈 초점은 그제야 경대 거울에 맞춰졌다.
“모두 잠시 물러나 있거라.”
다른 때와 다름없는 중전의 힘없는 목소리에 상궁과 궁녀들은 일제히 물러나 나갔다.
그리고 그녀를 홀로 둔 방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아버지. 저를 버리실 것입니까? 그렇다는 것은 상감마마를 기어이······.”
한 번도 지아비라 생각해 본적 없는 왕이었지만,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자신에게 ‘윤씨’라는 성과 ‘보경(寶鏡,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이름을 준 자신의 아버지가 왕을,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 어이하여 모르십니까? 저는 단지 거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달이 잠시 거울에 비쳐
빛을 낸다 하여도 거울이 달일 수는 없듯, 저도 중전일 수는 없는 것인데·····.”
중전윤씨의 귓가에 또 다시 누군가의 호통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움찔거리며 실성한 듯
품속에 숨겨두었던 은장도를 꺼내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찢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비의 당의가
은장도에 갈기갈기 찢어진 것과 같이 그녀의 몸에도 여기저기 상처자국이 생기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가 없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그리고 깜짝 놀라
자신이 저지른 짓을 보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그 순간에도 자신의 몸에 난 상처보다
이 장면을 보게 될 궁녀들의 눈초리가 더 걱정되었다. 그래서 아파할 거를 없이 얼른
넝마가 되어 있는 당의를 벗어 숨기기에 바빴다. 그녀는 우왕좌왕 하다가 달리 숨길 데가 없어
깔고 앉은 요 아래에 급히 두었다. 이제 곧 들어올 궁녀들에게 금방 들키고 말 것이란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녀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얀 비단 소복 곳곳에 상처에서 번져 나온
붉은 핏자국이 그녀의 입가에 창백한 미소를 만들어 내었다.
“내가 어찌하다 이리 되었을꼬. 나에게도 평범한 아낙의 꿈이 있었거늘, 이곳 구중궁궐 안에
내 꿈을 담을 수가 없구나. 내가 중전일 수 없으니, 차라리 상감마마께오서 왕이 아니었더라면
좋았을 걸······.”
소격서의 뜰로 지친 혜각도사가 내려섰다.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없는 혜각도사의 오랜 기도 뒤였기에,
그를 걱정하는 도류가 따라 나왔다. 하지만 혜각도사는 그 도류에게조차 눈길로 들어가라 명하고
뜰 안을 가득 메운 바람을 홀로 맞이했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새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움직였지만,
그는 바람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달이라······. 헛으로 붙이는 이름조차 우연인 것은 없는 법이지.
운명이 이끈 인연의 작은 길이 우연일 뿐······.”
약하던 바람이 순간 세차게 일어 혜각도사를 가득 감싸 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상왕전하, 혹여 떠돌고 있는 이 바람이 마마이시옵니까? 조선팔도 구비구비 떠돌다 지쳐도,
지친 마음 하나 눕지 못하는······.”
혜각도사의 눈앞에는 어느새 상왕이 슬픈 모습으로 등을 돌려 서고 있었다.
“상감마마, 급히 천신을 부르신 연유가 무엇이옵니까?”
아직은 흰 머리카락보다 검은 머리카락이 더 많은 혜각도사가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물었지만,
왕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지 않아도 강녕전을 가득 뒤덮고 있는 왕의 고뇌가
느껴졌다. 아마도 곧 있을 세자빈 간택문제로 속을 끓이고 있을 것이란 짐작만 겨우 할 수 있었다.
혜각도사는 고개를 들어 왕을 보았다. 그는 앞에 서찰 꾸러미를 펼쳐놓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것이 다 무엇이옵니까?”
“내가 세자의 품에서 훔쳐낸 것이라네. 허허허.”
왕의 웃음이 기쁜듯 하면서도 슬프도록 공허하게 울려왔다. 내관이 조용히 서찰들을 혜각도사
앞으로 가져다 놓고 물러났다. 그래서 이유도 모른 채 서찰 중 하나를 펼쳐보았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필체가 눈에 먼저 들어왔고, 뒤이어 귀한 신분이 될 빛을 머금은 이름 석 자,
‘허연우’가 보였다.
“우리 세자가 언제나 품에 안고 다니는 것이라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여인이 아닌,
서찰을 안고 잔다더군. 동궁전에 그리도 어여쁜 궁녀들이 있음에도 말일세. 참으로 이상타 생각했었다네.
그래서 세자의 그러한 행동들이 아직은 이성에 눈을 뜨지 못한 탓이라 여겼더니만······.
내 기이하게 여겨 세자가 잠시 목욕하는 동안 서찰을 훔쳐오라 했는데, 그것들을 읽어보니
세자의 심정을 알 것 같군.”
혜각도사는 언뜻 왕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이
무엇인지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혜각도사! 정녕 허연우란 아이가 미래, 교태전의 주인이란 말인가?”
“외척들의 반발이 걱정되시옵니까?”
왕의 고개가 천천히 저어졌다. 그리고 슬픔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양명군이 처음으로 아들로서 이 아비에게 청한 것이 허연우란 아이일세. 난 양명군의
청을 들어주고 싶다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가엾은 내 아들의 그 청을······.”
왕의 슬픈 눈길이 다시금 훔쳐온 서찰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 새겨진 연우의 심성을
되새겼다. 양명군의 가슴에 있는 여인은 이미 세자에게 닿아 있었고, 세자의 마음 또한 이미
깊어져 있었다. 왕도 처음에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제껏 상처받으며 살아온
양명군을 위해서라도 연우는 양명군에게 주고 싶었다. 그런데 세자의 사주에 있는 유일한 여인이
바로 연우였다. 이것은 연우를 양명군과 이어주면, 세자의 후사(後嗣)는 끊어진다는 뜻이었고,
아울러 미래의 조정이 힘겨울 것이란 뜻이기도 했다. 왕이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세자의
목욕이 끝나간다는 보고와 함께 급한 발걸음으로 내관들이 서찰을 챙겨나갔다. 그러고도 한참을
고민하던 왕이 힘겹게 결심을 내렸는지 중얼거렸다.
“차라리 서찰을 훔쳐보지 말걸. 결국 난 끝까지 우리 양명군에게 죄를 짓는구나······.”
세자빈간택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 혜각도사는 명나라의 백운관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래서 왕의 고민을 마주하고도 불길한 기운을 남겨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혜각도사가 명나라에서 돌아왔을 때는 마침 홍문관대제학이 세상을 뜬 그날이었다.
대제학을 잃은 왕의 상심은 극에 달해 있었다. 미래 왕인 세자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모든 것을 잃고, 그나마 마지막 희망이었던 대제학마저 왕인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떴기에,
왕은 3일 동안 공무를 파하고 거애(擧哀, 머리를 풀고 곡을 하는 것)를 하고 있었다.
“상감마마, 천신 돌아왔사옵니다.”
“상감? 내가 임금이었더냐? 그렇군. 세간에선 우매한 자를 일컬어 임금이라 하나보군.
아니면 무능한 사내를 일컬어 임금이라 하나보군.”
왕의 목소리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의 한탄에 혜각도사의 마음도 울컥 받혀 올라왔다.
“상감마마······.”
“왕을 왕이라 생각하지 않는 신하들 위에 어찌 왕이 존재한다더냐? 마지막 신하를 잃었으니,
난 더 이상 임금도 아니다.”
왕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소리죽인 통곡소리였다.
“내가 죽였다. 내 신하를 내 손으로 죽였다! 대제학의 두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자가 바로 나다!”
혜각도사의 눈에도 왕과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어떤 말로도 왕을 위로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왕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어느덧 정신을 가다듬은 왕이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혜각도사, 부탁이 하나있네.”
“그것이 무엇이든 천신, 성심을 다해 받들겠사옵니다.”
왕은 눈물 맺힌 눈으로 혜각도사를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왕이 아닌 나약한 인간의 고뇌가
담겨있었다.
“아무래도 나의 명도 다해가는 모양이다. 그렇게 되면 강녕전의 주인이 바뀌듯, 교태전의
주인도 바뀌겠지. 부디, 그 교태전에 주인 아닌 자는 들 수 없게 해다오. 교태전의 주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러기 전에는 나 죽어도 죽지 못하고 바람처럼 떠돌 것이야.”
혜각도사의 고개가 저절로 떨어졌다. 그 말의 의미를 알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왕의 부탁이 가여웠다.
그리고 왕이 이때 남긴 부탁이 마지막이 되어버린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대제학의
심장이 썩어간 것과 똑같이 왕도 심장이 썩어 같은 곳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세자와 양명군,
그리고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던 그 순간, 왕은 죽어가는 손을 뻗었다.
한 손은 세자, 또 다른 한 손은 가엾은 자신의 아들 양명군에게로 향했지만, 결국 지켜보는
수많은 신하들의 눈이 두려워, 서장자에게로 가던 손을 거두어 세자의 손을 잡은 손에
겹칠 수밖에 없었다. 아비를 보는 양명군의 원망어린 눈빛을 가슴에 묻고, 차마 잡아주지
못해 더 아린 가슴을 죽음에 묻고, 수많은 비밀과 더불어 그렇게 눈을 감았다. 언제나 왕권을
유린당한 그였지만,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그는 아비가 아닌 왕으로서 눈을 감았다.
차갑게 일은 바람이 양명군의 사랑방에도 부딪혀왔다. 하지만 방안에 앉은 양명군에게는
와 닿지 못하고 어디론가 휩쓸려 가버렸다. 그 바람 소리에 소름끼쳐 한 인간들은 양명군을
제외한 사랑방에 모여든 역모가담자들이었다.
“바, 바람소리가 참으로 을씨년스럽습니다.”
“지금 바람소리에 귀를 열어둘 시간이 있느냐?”
양명군의 조용한 목소리는 방안 가득 울려 어느덧 바람소리를 완전히 몰아내었다. 파평부원군의
통솔 아래에 모여든 그들이었지만, 이젠 양명군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양명군의 움직임에
눈길을 모으고 있었다.
“언제 일어나 앉으실지 모르는 왕이다. 일어나 앉는 즉시, 여기 모여 앉은 모두의 목을
베어버릴 선견지명을 지니신! 시간이 촉박함을 모르는가!”
“그러시기엔 증거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궁궐 안을 수비하는 내삼청 이외엔 마땅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하신 왕이십니다.”
“조선의 비상전투력을 능멸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지요. 반대로 저희 측 사병의 힘이 그만큼 막강하단 뜻입니다. 그리고 궐 밖의
군대를 불러들이기까지의 시간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양명군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리고 방안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며 차분히 말했다.
“그대들은 착각을 하고 있군. 상감마마께오서 열아홉 어린 나이에 왕권을 잡으실 때, 가장
먼저 무엇을 잡으셨는지 잊었는가? 그것은 군사권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왕의
손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상감마마 이외에 군사력의 실체를 아는 자가 있느냐? 마땅한 군사력이
없다는 것, 난 그것이 더 두렵다.”
양명군의 말에 모두 숨을 죽였다. 그의 말처럼 왕은 언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상대였다.
쉽게 생각하고 왔던 결과가 지금 이렇게 궁지에 몰려 양명군의 뒤로 숨은 꼴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눈은 저절로 양명군의 입술에 고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입은 단단히 닫힌 채
틈을 보이지 않았다. 침묵만이 자리한 곳에 파평부원군의 목소리가 떠돌았다.
“존재하지 않기에 두려운 것뿐입니다. 상감마마께서 궐을 비우실 때, 수궁대장의 자리에
있는 자가 바로 저, 국구입니다. 그때 면면히 살펴본바, 그 어떤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의 하나, 숨겨놓은 군사력이 있다면 자금의 흐름 또한 있을 것인데,
그 또한 흔적조차 없습니다.”
모두의 얼굴에 안심한 표정이 넘쳐났다. 하지만 곧이어 나온 양명군의 말에 다시 어두워졌다.
“국고의 자금이야 그렇겠지만, 상감마마의 막대한 내탕금은 사정이 다르지.
그 흐름을 어찌 알겠소?”
“그 아무리 내탕금이라 하여도 어느 정도의 윤곽은 있는 법입니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양명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와 더불어 다른 이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순간 바깥에서 또 다시 바람소리가 요란하게 일더니, 하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룁니다! 지금 정업원에서 급히 심부름을 나온 자가 상자를 전해 달라 하였사옵니다.”
정업원이라면 양명군의 모친인 희빈박씨가 보낸 심부름이었다. 평소 없던 기별을 야심한
시각에 보낸 것이었기에, 양명군의 표정은 두려움으로 뒤덮였다.
“가지고 와라!”
방문을 열고 하인이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든 상자를 가지고 들어와 양명군이 앉은 서안에
올려두고 나갔다. 양명군은 조심스런 손길로 상자를 열었다. 그 순간, 그의 손끝과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상자 안에 담겨 있었던 것은 여인의 단정하게 땋은 머리카락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의 주인은 바로 희빈박씨임을 알 수 있었다.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세상의 인연을 잘라내고, 아들 양명군을 잘라내고, 그녀는 비구니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오직 상감마마의 성후만을 기원하며, 아들의 목을 쥐어틀기 위해서 잘라내어 버린 머리카락!
그 의미는 아들을 향해 왕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협박과도 같은 것이었다.
양명군의 떨리는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에 얼굴을 묻어 눈물을 감추었다.
방안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도 싸늘한 아픔에 물들었다. 처절하리만큼 상왕의 냉대 속에 살아온
모자의 슬픔에 동화되었고, 그것은 바로 양명군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이윽고 양명군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머리카락을 옆에 있던 화로에 집어넣었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사람들의 눈이 놀라 허둥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명군의 슬픔에 눌려
놀란 소리는 낼 수조차 없었다. 처음엔 머리카락의 무게에 화로의 불길도 꺼질 듯 하더니,
시간이 흐르자, 차차 머리카락 나는 냄새가 방안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 냄새는 바로 양명군의
심장이 타들어가는 냄새였다. 그렇기에 그 어떤 누구도 코를 막지 못하고 양명군의 핏대 선
눈시울만 바라보았다. 그의 이 사이로 말이 갈려 나왔다.
“이제 희빈박씨는 죽었다. 나의 어미도, 상왕의 첩도 죽고 없다. 한낱 비구니 따위가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양명군은 서안 서랍을 뒤져 작은 서책 하나를 꺼냈다. 그 서책은 일반 서책의 절반 크기에
하얀 백지만이 있는 공책이었다. 그는 표지를 젖히고 제일 첫 장의 오른 쪽에 ‘陽明君(양명군)’
이라 적고 그 아래에 수결을 적었다. 그런 후, 제일 가까이에 앉아있는 파평부원군에게 서책을 건넸다.
“나와 진심으로 함께 할 자, 나와 더불어 자신의 이름도 함께 하라. 비록 지금은 그 서책의
표지에 제목이 비어있으나, 내 즉위하자마자 그곳에는 공신록(功臣錄)이란 제목이 들어갈 것이다.”
그 말은 방안의 모든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모이지 못한 가담자들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그렇게 방안에 뒤덮인 연기와 양명군의 심장이 타들어가는
매캐한 냄새 속에서 그들은 정성껏 자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이어갔고, 방안에 들어오지 못한
바람은 용의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바깥을 서성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