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33화 (33/47)

#33

강녕전의 왕 앞에 앉은 장씨는 고개만 방바닥에 붙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그것은 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어두운 달빛의 개수만 세는 듯 닫힌 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장씨는 보이지 않는 건너 방에 있는 연우의 흔적과, 짧은 한숨조차 내뱉지 못하고 삼키고

있는 왕의 느낌으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죄 또한 왕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묻겠다. 도무녀는 답하라. 내가 너에게 상을 내려야 하는 것이냐, 아니면 벌을 내려야

하는 것이냐?”

엄숙하지만, 차가운 기색은 없는 왕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장씨는 답하지 못했다.

“둘 다 해당하는 것이냐?”

이번에도 답하지 못했다.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물어보고 있는 왕이었다. 앉아서도

천리를 내다보는 능력을 지닌 왕다운 왕이었다. 궐에 앉아만 있어야 하는 왕이란 존재가

지녀야할 가장 중요한 능력이었고, 훤은 그 능력을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앞에 몸을 숙이고 앉아 있는 죄 많은 몸일망정 스스로 영광스러움을

말하고 있었다.

“대비전이 성숙청에 미치는 힘을 본다면 도무녀는 감히 거역하지는 못했을 터이니,

옛날 대비의 주도 아래 행하여진 세자빈 시살에서 저주의 주술을 주관한 자는 분명

너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다시 살린 것이냐?”

“쇤네가 날린 것은 분명 살수였사옵니다. 단지 세자빈마노하의 마음이 지극한 것을 몰랐기에,

그리고 이미 이어져 있었던 인연인줄 몰랐기에 주술이 듣지 않았을 뿐이옵니다.

하오니, 죽여주시옵소서.”

“네 말이 진정 사실이라면, 죽여도 곱게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이 몸을 갈갈이 찢어 조선팔도에 뿔뿔이 흩어버리시어도 한없사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만 죽음에 한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장씨에게서 풍기는 태도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죽음 앞에 태연한 자가 그 당시엔 어이하여 대비전의 말에 굴복하였는가?”

“유학의 중심 앞에 언제 어느 때 철폐될지도 모르는 성숙청이옵니다. 그 칼바람이 쇤네의

대에서 휘둘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욕심이었사옵니다. 성숙청이 비록 왕실의 구복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미명 아래에 있사오나, 나약한 백성의 마음을 가뭄 때는 희망을 주고,

홍수 때는 어루만지며 왕과 백성을 하나로 잇고 있사옵니다. 그렇기에 조선의 땅에,

그리고 조선의 하늘에 더 이상 음악과 춤을 바칠 수 없게 되는 것이 두려웠사옵니다.”

“그렇다면 전 홍문관대제학을 찾아가 세자빈허씨가 신병이 들었다 거짓을 말한 관상감의

관료도 공범이었느냐?”

“상감마마! 이 몸을 찢어 죽여도 쇤네는 할 말이 없사옵니다. 하오나 그들까지 더러운

한통속으로 넣지 마시옵소서.”

이번의 장씨의 말은 원통한 듯 완강했다. 진실로 그들의 의도와 죽음은 외척들과는

상관없는 듯해서 훤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주술이 있고 난 이후에 그 사건의 음모를 알게 되었겠구나. 하지만 돌이키자니

더욱 세자빈의 생명이 위험해질 것이고. 그대로 세자빈이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그들은

너와 상의한 끝에 세자빈을 안전한 곳으로 빼돌린 것이다. 맞느냐?”

장씨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노력이 헛된 일이 아님을 알아주는

왕의 성명에 눈물 한줄기만 흘러나왔다. 훤도 장씨의 답과는 상관없이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죽은 지리학교수가 네가 있어야 할 곳과 휴지역들을 미리 정해둔 것이었겠구나.

풍수와는 상관없는 네가 지금의 관상감 교수들 모르게 있었다 하여 의아해 여기었더랬다.”

이번에도 장씨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어도 훤의 추측이 제대로 된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자결을 하였는가?”

“비밀은 단 한명이라도 덜 아는 것이 새어나가지 않는 것이라 하여, 또한······.”

뒷말을 잇지 못하는 장씨가 차마 말 못하는 진실을 훤은 알아차렸다.

“상왕을 속이는 것 또한 불충이기에 그리하였구나. 그들의 죽음의 진실을 아옵셨을

아바마마께옵서도 통탄하시었을 것이야.······조선의 충신은 청요직(淸要職)의 기록에

있는 인물들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도 있구나. 그것을 왕이 모르고,

백성이 모르고, 후세가 모를 뿐이다.”

훤은 진심으로 그들의 명복을 기도했다. 비밀을 묻기 위해, 종묘사직을 위한 일이 왕을 위하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하였을 고민을 위해, 그리고 결국 왕은 알지 못하는

불충한 죄를 스스로에게 내렸을 그들의 충심에 감사하는 고개를 숙였다. 오랜 침묵 끝에

훤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전 홍문관대제학도 진짜 신기가 든 것인 줄로만 알고 여식에게 약을 먹였겠구나.

그것이 살리는 약인 줄로는 모르고. 그에겐 진실을 말하지 그랬느냐? 그랬다면 그는 그리

고통스럽게 살다 일찍 죽지 않았을 것인데·······. 살아 여식을 다시 볼 수 있었을 것인데······.”

“그는 충신이라 오히려 진실을 말하면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리한 것이옵니다.

그는 단순히 고통스럽지 않고,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신기를 죽음 뒤엔 사라지게 하는

약제인 줄로만 알았사옵니다.”

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의 생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왕이 염을 의빈으로

간택하는 대신 대제학이 길게 살아 훤을 도와주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왕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슬픔 속에 살다, 슬픔에 심장을 잠식당해 죽어갔다. 그의 슬펐던 표정들이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금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왕에게 민화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었다면, 대제학에게 있어서 연우도 똑같은 무게였을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손수 딸의

입에 독약을 넣을 수밖에 없도록 몰고 간 잔인한 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제 그의 한을

풀어주어야 했다. 백성의 슬픔을 걷어야 하고, 충신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해야 하고,

자신의 사랑을 위로받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슬퍼하며 갈등할 시간이 없었다. 외척들이

언제 어디서 칼보다 더 위험한 것을 들이 댈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훤이 고개를

들어 장씨를 보며 웅장한 왕의 목소리로 말했다.

“부적을 쓴 자를 아직 알아내지 못했느냐? 적어도 무당이 아니겠느냐?”

“상감마마께옵서 쓰러지진 그날, 조선팔도의 모든 무적에 있는 자들은 사독제를 위해

각 4군데의 강으로 모였었사옵니다. 한강의 사독제에도 성숙청의 무녀들뿐만이 아니라,

일손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한양의 도성 내에 있는 각심절본무당(한양의 서쪽영역을 담당하던

무당으로 주로 도성 내의 나라굿을 담당), 구파발본무당(서쪽영역을 담당하던 무당으로

주로 제당에서 하는 나라굿을 담당), 노들본무당(남쪽을 담당하면서, 지역으로서의 한양 땅을

수호하던 무당으로, 왕실에서 명하는 굿중에서 지방으로 가서 하는 굿도 담당) 등등 아무도

빠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옵니다.”

장씨는 말을 마치고 다시 한 번 그날을 기억해 보았다. 차례로 도무녀 앞에 자신들을

밝히며 고개를 숙이던 그들 중 빠진 이들은 없었고, 그 아래 무녀들도 모두 대동하고

왔노라 고했었다.

“부적이라 하면 그날 당일에 쓰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사주를 알아야 부적을

쓸 것인데, 액받이무녀의 사주를 아는 이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닐 터인데.”

“관상감의 세 교수 이외에는 아는 자들이 없사옵니다.”

“결국은······어느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인가?”

훤은 관상감의 교수들은 아니란 판단을 내렸다. 그들은 오히려 외척들과 연계된 부적 쓴

자들보다 모든 상황을 나중에 안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현재로선 이들을 제외한

성숙청 내부인물들이나, 아니면 관상감의 내부인물들 모두 용의선상에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숙청 외의 무녀들도 예외란 없었다. 사독제에 참여하기 전, 부적을 써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도무녀는 그만 물러가라.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너에게도 자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장씨는 연우를 중전으로 모시고, 비로써 죄 많은 몸뚱이를 땅 속에 뉘일 수 있다면 그만한

왕의 은혜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진심으로 몸을 숙였다.

훤은 장씨를 물러가게 한 뒤에도 오랫동안 달빛만 세고 있었다. 간간히 고개를 돌려 연우가

있는 방문에 눈길을 두어보긴 했지만, 이내 죄인 된 마음으로 눈길을 거두어 왔다.

그리고 골똘히 옆에 앉은 운을 쳐다보았다. 운은 왕을 보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훤은 그의 감은 눈 속에 담긴 번민을 헤아리고도 남았다. 그 번민은 이미 정리가 되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해 있을 것이었다. 그가 선택할 것은 분명 왕의 곁을 떠나는 것이란

것도 훤은 알고 있었다. 야장의로 갈아입고 이불 속에 들어서도 생각에 잠긴 채 뒤척이느라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날이 밝으면, 어쩌면 운이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이라 말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더한 죄를 품고도 곁에 있는 자들이 있는데, 운은 사랑을 품은 죄로 곁을

떠날 것이란 생각에 그가 더욱 아까웠다. 사내로서 그를 질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이지만,

왕으로서 그는 절대 놓쳐선 안 되는 신하였고, 또한 세상에 유일한 벗이었다.

운이 마음 속 결론을 낸 것처럼 훤도 고민할 사이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적들은 왕에게 고민할 시간 따윈 주지 않은 채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것이기에.

뜬눈으로 밤을 샌 훤은 파루의 북이 울기도 전에 자리에 일어나 몸을 씻었다.

무언가 어제 밤과는 달리 기운이 넘치는 듯해서 주위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그런데 몸은 많이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곤룡포를 물리친 뒤, 야장의 차림 그대로 있었다.

여느 때였다면, 아직 편전에 납시면 안 된다는 내관들과 어서 빨리 편전에 나가야 한다며

곤룡포를 달라 호통 치는 왕 사이에 실랑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은 나아진 건강에도

불구하고 왕은 편전에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불안한 상황이라, 건강해진

모습을 대신들 눈에 보여서 하루라도 빨리 민심을 다스려야 하는데도 왕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움직이질 않았다.

훤이 초조반를 끝낸 뒤, 자리에 정좌하고 서안 앞에 앉자마자 운이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 운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훤이 말했다.

“운아! 잠시 너의 본가에 다녀와야겠다.”

운의 몸이 멈칫했다. 그런 사이 훤은 종이에 무언가를 쓰더니 봉서로 봉했다. 그리고 또 다른

서찰도 써서 봉서로 봉했다. 그렇게 두 개의 봉서를 운에게 내밀며 훤이 말했다.

“혹여 나에게 하고픈 말이 있거든, 다녀와서 하도록 해라. 이쪽의 봉서는 정경부인박씨에게

전하고, 나머지는······양명군에게 전하고 오너라. 단 양명군의 집안으로 들어갈 땐

어느 누구의 눈에 띠지 않게 극비리에 다녀와야 할 것이야.”

정경부인박씨라면 운에게 성을 준 남자의 정실이었다. 그리고 운을 키워준 분이기도 했다.

흔들리는 운의 기운을 알아차린 훤은 조용한 어조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렇게 밤사이 잠 못 자고 본가에 가면, 너의 모친이 가슴 아파하겠구나. 오랜만에 본가에

가는 것이니 양명군에게 먼저 들렸다가 본가에서 하룻밤이라도 쉬고 오너라.”

훤의 말뜻은 운검이 자리를 비우면 사람들 눈에 크게 띄기 때문에 운검의 본가에 가는 것을

크게 보이게 하고, 양명군의 집에 들르는 것은 보이지 않게 덮으라는 것이었다.

운은 어명이기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봉서를 품속에 넣은 뒤 물러나갔다.

운이 사라지자 훤은 서안을 밀치며 연우를 찾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표정으로

건너 방에서 나왔다. 왕 앞에 절을 하려는 연우를 훤은 냉큼 달려와 번쩍 안아 들었다.

“꺅!”

들릴 듯 말 듯한 외마디 비명 소리가 연우의 입에서 나오자, 훤은 의아한 듯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대도 그런 인간적인 소리를 낼 줄 아는 것이오?”

“갑자기 놀라게 하시니······.”

훤은 붉어진 그녀의 표정을 보며 큰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은 채로 방안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내관들과 연우는 훤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만 둥그레져

볼 수밖에 없었다.

“상감마마, 편전에는 아니 나가시옵니까?”

연우의 조심스런 물음에 훤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대가 없는 편전엔 나가기 싫소. 아프다 하며 그대를 안고 이곳에 계속 있을 것이오.”

“아니 되옵니다. 내려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우의 아랫입술은 훤의 이에 물려버렸다. 비록 살짝 문 것이라고는 해도

입술이란 곳이 워낙에 여린 곳이라 제법 아팠다. 무엇보다 갑작스런 일이라 연우의 눈동자는

놀라서 커질 대로 커졌다.

“어찌 된 입술이 내가 싫어하는 말만 내뱉는단 말이오. 참으로 미운 입이 아닐 수 없소.

아니 된단 말은 이제 지겨우니 하지 마시오.”

그리고 이번에는 입술이 아니라 귓불을 깨물었다. 연우가 당황하며 말했다.

“귀란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사옵니다.”

“대신 내 말을 잘 듣지 않잖소. 미워도 이렇게까지 미운 귀는 없었소.”

괜한 핑계에 불과했다. 안아 들어 얼굴을 가까이 하고보니 눈앞에 어른거리는 연우의

입술을 참을 수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일을 저질렀던 것이고, 하얀 솜털 박힌 귓불도

그래서 깨물어 버렸던 것이다. 훤은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연우를 안은 채로 쪼그려 앉았다가

힘껏 일어났다.

“어차피 지금 편전에 나가보았자 그대가 보고 싶어 월대를 내려서기도 전에 가던 길 돌아

올 것이 분명한데, 곤룡포 갖춰 입는 것이 더 귀찮소. 숫자나 헤아리시오.”

뜬금없는 말에 연우는 또 다시 의아해졌다.

“네? 숫자라니 무슨 뜻이옵니까?”

“내가 방금 한번 앉았다 일어서지 않았소? 그러니 하나란 수를 세란 말이오.”

훤은 다시 앉았다가 일어섰다. 그러면서 둘을 헤아렸다. 연우도 얼떨결에 둘을 세었다.

그리고 그 세는 수는 점점 불어갔다. 내관들은 훤이 땀까지 뻘뻘 흘리며 연우를 안고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끊임없이 하는 것을 보고 급하게 내의원을 밖에 대기 시켰다. 언제나 그렇지만

의중을 알 수가 없는 왕이었다. 아무 생각 없어서 편전에 나가지 않는 것도 아닐 것이고,

저리 여인을 안고 힘들게 움직이지도 않을 것이었다. 상선내관이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상감마마! 아직은 옥체를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상에 계셨사온데,

그리 힘들게 움직이시오면······.”

“그러니 어서 힘을 길러야 하지 않겠느냐? 난 앞으로도 계속 아픈 몸이다. 다들 그리 알려라.

내가 건강해지면 그들은 또 다시 숨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내가 아픈 것은 미끼다.

스스로 그들의 야욕을 드러낼 때까지! 영차!”

왕은 지금 나름대로 운동이란 것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체력을 어서 원상복귀

시키기 위해, 그리고 바깥사람들이 모르게 하기 위해 방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었다.

연우는 훤이 힘들지 않게 그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원래도 뜨거웠던 그의 몸이 서서히

더 뜨거워져 가고 있음을 연우의 몸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만큼 점점 지쳐가고 있기도 했다.

지쳐가는 것이 민망했던 훤은 또 농담을 던졌다.

“몸에 힘이 솟구치길 바랐더니 이 힘이란 것이 한 곳으로 몰려버린 것 같소. 그대를 안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긴 하지만.”

연우는 이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훤은 덜덜 떨리는 두 다리로 한 번 더 앉았다 일어서서는

자신을 깊이 있는 눈동자로 보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사내만이 알 수 있는 고충을 말하는 것이오.”

그제야 말의 뜻을 헤아린 연우가 붉어진 눈길을 돌리기도 전에 훤이 말을 이었다.

“내 그대에게 궁금한 것이 있소. 어렸을 때,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혹여 큰소리로

웃어본 적 있소?”

“소녀의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모친은 손바닥으로 조용히 방바닥을 치곤 하였사옵니다.”

“방바닥을?”

“네, 여자의 웃음소리는 방바닥에 나지막하게 깔려야 한다며······.”

“하하하. 난 그대의 웃음소리가 듣고 싶은데. 큰 웃음소리라면 더 더욱이나 환영이오.

하지만 울기도 많이 하였을 것이오. 툭하면 종아리를 맞는단 말을 들었소.”

“부끄럽게 오라버니가 그런 말도 전했더이까? 많이 맞았사옵니다. 맞아 눈물이 맺힌 채로

이내 웃으며 뛰어다니곤 하였지요.”

그때는 울면 속으로 삼키지 않고 바로 굵은 눈물 덩어리를 끊임없이 쏟아내었다.

소리도 내어 울었다. 하지만 웃고 있는 지금보다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그때가 더 행복했었다.

종아리 맞을 일이 전혀 없었던 염도 간혹 종아리를 맞곤 하였는데, 그 모든 원인이

연우 때문이었다. 그러면 연우는 자신이 맞을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더 큰소리로

울었다. 연우가 염의 몫까지 울어버리면, 그는 ‘네가 그리 울면 이 오라버니가 아플 수가

없지 않느냐?’라며 웃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염은 회초리로 부은 종아리를 하고도 단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었다. 연우 대신 맞는 종아리이기에 마음은 더 편안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연우는 어릴 때 가졌던 궁금함 한 토막을 떠올렸다.

“소녀도 궁금한 것 여쭈어도 되올지요?”

훤은 지쳤는지 더 이상 앉았다 일어서는 것을 하지 않고 숨을 고르며 서서 눈으로 물었다.

“저······, 왜 소녀가 시를 보낸 뒤에 서찰이 없었사옵니까?”

훤의 눈이 놀라 둥그레졌다.

“기다렸소?”

훤은 답하지 않고 연우가 자신의 서찰을 기다렸다는 새로운 사실에 기쁘기부터 했다.

이미 오래전에 만나 나누었어야 할 말들을 지금하고 있는 상황이 서글프긴 했지만,

이렇게 다시 살아서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일이었다.

“기다리는 줄 알았다면 서체 연습 따윈 하지 않고 바로 보냈을 것이오. 풍천위가 의외로

의뭉스럽소. 그런 귀 뜸도 않은 것을 보면.”

“소녀는 오라버니가 알게 될까 노심초사 하였는지라, 알게 하지 않았사옵니다.”

“난 그대를 만나면 그대 오라비 험담을 많이 하려 하였소. 그댄 모를 것이오. 내가 봉서를

전해달라고만 하면 보지도 않고 달아나려는 것을 협박까지 해가며 보내었더랬소.”

어린 시절 그때가 생각나 연우는 비로소 환한 미소와 더불어 웃음 띤 말을 했다.

“하루는 퇴궐하여 온 오라버니가 세상 시름을 다 짊어진 듯 보였사옵니다. 연유를 물어보니

눈물만 흘리며 답은 없더니, 한참 만에 내어 놓은 것이 세자저하의 봉서였더이다.”

훤은 연우의 사랑스러운 미소에 가슴이 설레, 그리고 마치 그 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아 큰소리로 웃었다. 염 또한 어린 나이였었다. 세자가 건네는 봉서를 차마

거절은 못하고 가져가서는, 아무에게도 의논도 못한 채 그가 하였을 고민을 생각하니

불쌍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크게 웃던 웃음은 차차 사라졌다. 그리고 연우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현재의 염의 모습과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연우는 오라비가 걱정되어 훤을 보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소녀는 이미 넘치는 행복을 가졌사오니.”

더 이상 뒤의 말을 하게 훤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듣기 싫은 말이 나오는 연우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가로막았다. 짧게 겹쳐졌던 입술이 떨어졌다.

“방금까지의 행복한 마음을 싹 없애는 데에 그대 혀가 가장 큰 역할을 하였으니,

이 정도의 벌로도 모자란 감이 있소.”

또 한 번의 입맞춤이 이어졌다. 이제까지는 차마 느낄 수 없었던 훤의 입술이 이번에는

신비로운 향기로 와 닿았다. 사내의 입안 향기가 달았다. 아마도 양치할 때 썼던

죽염향인 것도 같고, 금가루 향인 것도 같고, 녹차향인 것도 같았지만, 그의 혀끝은 연우의

입 속이 녹아내릴 만큼 단향이 진동했다. 어릴 때 세자가 보내준 줄도 모르고 먹었던 검은

엿보다도 달았다. 연우는 훤의 혀끝 맛에 취해 자신을 안고 있는 그의 팔이 힘에 부쳐

덜덜 떨고 있는 것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은 더욱 느낄 수가 없었다.

팔과 다리에 힘이 빠져 나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면서도 훤은 끝까지 연우의 입술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연우의 두 팔도 훤의 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끝끝내 바닥에 퍼져 앉고 나서야

훤은 입술을 떼고는 민망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수를 오십 가까이 세지 않았소? 방금 병상에서 일어난 몸으로 이 정도를 한다는 것은

보통 힘으론 불가능 한 것이오. 그 어떤 사내가 나만큼 한단 말이오? 상선! 아니 그런가?”

어릴 때처럼 이런 상황에선 자신의 편을 만드는 훤의 버릇이 나왔다.

“네, 그러 하옵니다. 상감마마. 건강한 사내도 불가능하옵니다.”

상선의 도움말이 이번에는 훤의 기분을 으쓱하게 하지 못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남성의 힘을 말하는데, 내관인 그의 말은 신빙성을 주는데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운이 옆에 없어서 천만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에겐 오십까지의 수는

거뜬하고도 남을 것이기에 그러했다. 그러면서 거칠게 헐떡이는 숨을 연우에게 숨기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젠 다리에 힘이 없어서 일어서지 못하고, 그 힘없는 다리 사이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앉아있어야 하는 민망한 연우를 팔로 안고만 있었다. 훤의 눈앞에 보이는

연우의 옆얼굴, 숙인 고개에 반쯤 내리깐 짙은 속눈썹이 슬퍼보였다.

부끄러운 듯한 표정까지 슬퍼보였다. 이 슬픈 옆모습은 언제나 운이 보고 있었다.

“앞으로는 절대 그대 혼자 무덤 속에 들어가게 하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한날, 한시에

죽어 같은 관속에 들어갈 것이니, 무섭지도 않게 하리다.”

고개 돌린 연우의 얼굴이 미소를 보였다. 미소조차 슬퍼보였다. 과거를 회상하던 조금 전의

미소를 보았기에 지금의 미소는 더욱 훤의 가슴을 휘저었다. 그리고 연우는 자신이 보인

미소에 눈동자를 일그러뜨리는 훤을 보았다. 조금 전의 큰 웃음소리를 들었기에 그의 표정이

연우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무덤 속이라면, 무서울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가 먼저 죽고 난 세상이 더 무서울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그가 먼저 무덤 속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의 시신을 안고 기꺼이 무덤 속에 생매장될 것이리라 생각했다.

“한날, 한시에······, 부디 한날, 한시에······.”

담담히 내뱉으려던 목소리가 눈물이 삼켜진 듯 민망할 정도로 떨리며 나왔다. 그 목소리가

안 되어 보여 훤은 두 손으로 연우의 양 볼을 감싸 쥐고, 목소리가 나온 곳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입을 통해 들어간 따뜻한 기운이 그녀의 시린 가슴에 스며들어

조금이라도 녹을 수 있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연우의 시린 가슴을 미처 다 데우기도 전에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방문 밖에 있던 내관이 작은 소리로 고하는 말이었다.

“상감마마, 대비마마 드셨사옵니다.”

연우와 훤이 동시에 당황하여 떨어졌다. 그리고 이제까지 숨죽이고 몸을 돌려 등을 보이고

있던 내관들과 궁녀들도 일제히 각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훤은 연우를 뒷방에 숨기는 것을

제일 먼저 했다. 그리고 이불 속에 얼른 들어가 누웠다. 그렇게 준비를 끝내자마자 아들을

걱정하느라 핼쑥해진 얼굴로 대비한씨가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연우를 안고 힘든 운동을 한

훤이었다. 그랬기에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고, 볼은 붉어져 있었고, 숨을 가쁘게 뛰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대비의 눈에는 영락없이 아픈 가련한 아들로 보여, 그만 눈물을 쏟았다.

누워 있는 아들의 옆에 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아들의 손은 너무도 뜨거웠고,

바들바들 떨기까지 했다.

“어째서······나아지기는 커녕, 더욱 나빠져 가시는 것입니까, 주상?”

“그, 그것이······. 죄송합니다, 어마마마.”

어머니의 아픈 마음은 알지만 바른대로 말하지 못하는 훤의 마음도 불편했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드십니까?”

훤이 아파서 죽겠다는 듯한 힘없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대비는 더욱 힘주어 아들의

손을 잡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상, 그 아이 입니까? 억울하게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어도 처녀귀로 눈 감은,

풍천위의 누이가 주상을 괴롭히는 것입니까?”

언뜻 대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훤은 연우의 존재를 들킨 것은 아닌지 지레 깜짝 놀랐다.

“무슨······?”

“그 아이의 원귀가 주상을 괴롭히는 것이지요?”

훤은 대비의 말끝에 연우와 처음 만났던 날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귀신이냐······, 사람이냐······?”

“뭇사람들은 소녀를 일컬어 사람이 아니라 하더이다.”

“그러하면 정녕 귀신이란 말이더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한 맺힌 넋이 바로 소녀이옵니다.”

진짜 원귀인 것 같았다. 그림자가 있는 귀신도 있느냐고 물었던 것은 그 마음을 몰아내고자

했던 마음이었었다. 그래서 서방님을 기다리다 재가 되어버린 원귀처럼 자신의 손이 닿으면

그녀도 재로 변해버릴 것만 같아서, 마지막까지 그녀의 몸에 손끝 한번 스치지 못하고

일어났어야 했다. 정혼자의 손이 닿아야만 재가 되는 원귀, 월을 건드리면 재가 될 것 같은 느낌,

그것은 월의 정혼자는 훤이란 뜻이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처음 만났던 모르는 그 사이에도

월이 연우임을 무의식은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곳에서 원귀처럼 오지 않을 정혼자를

기다렸을 연우의 넋이 훤의 눈에서 눈물을 만들어 내었다. 그 눈물은 연우가 아니라 대비가 보았다.

“그 아이가 맞군요! 내 짐작이 맞았어. 주상, 우리 굿을 합시다. 마침 실력이 따를 자가

없다하는 성숙청의 장씨도무녀가 돌아왔다고 하니, 그에게 명하여 굿을 합시다.”

“······굿이라니요?”

어리둥절해진 훤은 자신이 지금 꾀병 중인 것도 망각했다. 하지만 대비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 아이를 좋은 곳으로 보내는 굿 말입니다.”

“좋은 곳으로? 연우낭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굿이겠지요?”

훤의 눈빛이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순식간에 심각한

표정으로 바꿔놓았다. 훤의 눈빛이 무서웠던지 대비는 우물거리며 훤을 설득했다.

“주상의 건강이 지금까지 나아지지 않으니, 궐내에서 굿을 한다하여도 유생들의 반발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준비는 대비전에서 할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상소는 못할 테지요. 제발, 허락하여 주십시오. 주상, 이 어미에게 효도한다

생각하시고. 굿을 해야 제 마음이 편안할 것 같습니다.”

“하십시오!”

의외로 순순히 허락해주는 훤 때문에 도리어 대비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허락하는 목소리도

대단히 반가운 듯 힘이 있었기에 대비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렇다고 의아한 생각이 연우가

살아서 옆에 있는 사실에까지 미치지는 못하고, 단순히 원귀에 너무 시달려 반가워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대신, 풍천위의 사가엔 굿 하는 사연은 비밀로 하였으면······.”

“아! 이미 같이 굿을 하자는 서찰을 보내었는데······.”

“어떤 내용으로요?”

“아무래도 주상이 그 아이를 본 듯 말씀하시는 것이 원귀가 옆에서 괴롭히는 것 같다는······.”

점점 화가 치미는 훤의 얼굴 때문에 대비의 말은 꼬리가 슬그머니 없어져갔다.

훤은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을 억지로 내려눌렀다. 그 서찰을 받고 오열하였을 신씨부인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염이 결정적로 연우가 살아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는 민화가 꼭 닮은 이가 바로 대비였던 것이다.

“굿 준비 하십시오, 어마마마. 그리고 굿하는 이유는 원귀를 쫓는 것이 아니라,

저의 강령을 위한 것이라 하여 두십시오. 그리고 전 잠시 누워야겠습니다.”

훤은 즉시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서 대비는 아들의 손을 한 번 더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대비가 물러나자마자 훤은 눈을 번쩍 뜨고 이불을 확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히 도무녀를 대령토록 하라! 속히! 어마마마 보다 먼저 가서 데리고 오라!”

화급한 왕의 어명에 내관들의 급한 걸음이 선전관에게 전달되었고,

선전관의 걸음도 급해져 성숙청으로 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