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민화는 달리듯이 걷는 가마꾼의 걸음도 느리게만 느껴져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덩(공주나 옹주가 타던 가마)이 지금 비탈을 올라가는 것이냐? 어찌 이리도 걸음이 느린 것이냐?”
바깥에서 가마꾼과 함께 헐레벌떡 뛰고 있던 민상궁이 헉헉거리며 말했다.
“지금도 많이 흔들려 위험하옵니다. 특히 조심하셔야 함을 모르시옵니까?”
그리고 가마꾼을 향해 호통했다.
“흔들리지 않게 하라지 않았느냐! 잘못하다간 다들 경을 칠 것이다!”
가마꾼들은 누구 말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몰라서 뛰다 걷다 하며 안절부절 했다.
가마 속의 민화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염이 홀연히 자신의 손에서 달아나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무서움이었다. 그날의 무서웠던 주술이 끝난 후
모든 것이 끝났다고만 생각했었다. 이제는 영원히 염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오라비인 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민화에게 있어서는 아버지 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치 왕이 염을 빼앗아
가기라도 하는 듯 숨이 가쁘고 입안이 타들어갔다. 그리고 그를 당장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민화는 민상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랑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깥에서 미리 기척할 사이도 없었다. 그런데 사랑방에 앉아 책을 읽던 염은 요란스러운
민화의 등장에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민화가 입궐하기 전에 인사하려고 들었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마치 껍데기만 있고, 넋은 빼앗긴 사람 마냥. 민화는 자신이
들어온 것도 못 느끼고 앉아만 있는 염에게 바짝 붙어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염은 놀란 눈으로 민화를 보았다.
“아, 다녀오시었습니까?”
“뭣을 그리도 골똘히 생각하시는 것이어요?”
“아무것도·······. 상감마마께오선 강녕하시었습니까?”
“네. 많이······.”
“······혹여 다른 어떤 윤언은 없으시었는지······?”
망설이는 듯한 염의 물음에 민화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가 다른 때와 달라 보여서도
무서웠고, 그의 눈동자가 너무나 슬퍼 보여서도 무서웠다. 그래서 그의 팔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으며 말했다.
“왜 그, 그런 질문을 하시어요?”
“아, 아닙니다. 오랜만의 입궐이신데, 대비마마 곁에 좀 더 계시다 오시지 않고요.”
“서방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있을 수가 없었사와요. 너무너무 보고파서······.
아참! 소첩, 내의원에 들렸다 오는 길이어요.”
염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몸은 민화의 옆에 붙들려 있는데 마음은 저 멀리 북풍과
더불어 떠돌고 있는 듯 힘없이 말했다.
“내의원엔 어인 일로? 의원을 집에 부르시지 않고요?”
민화는 대답 대신 방그레 웃어보였다. 염이 좀 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더 이상의 집중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진해서 그의 신경을 끌어 모았다.
“소첩,······서방님의 아이를 뱃속에 가지었다 하여요.”
민화를 보고 있던 염의 눈동자가 짙은 색을 찾았다. 기쁜 표정을 눈에 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공주. 제가 먼저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전혀 몰랐으니.”
“아니어요! 소첩도 몰랐사와요. 그리고 잉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표시도 없었고,
입덧도 앞으로 차차 할 것이라 하였고, 또······.”
민화는 염의 미소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의 미소가 몸에 닿자, 부끄러움에 몸이 비비꼬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공주, 감사하단 말로 전하기엔 그 뜻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은혜만 입고, 돌려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공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도 이제 아버지를 뵐 면목이 생기었습니다.
장하십니다.”
“안아주시어요.”
염은 깨어질 그릇이라도 품는 듯 조심스럽게 민화를 안았다. 하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은 살아있는 누이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민화의 어깨너머에는 대제학이 연우의
시신을 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옛날 그때, 염이 집으로 돌아와 연우의 방으로 달려갔을 때
눈에 보였던 것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었다. 아무리 주위에서 연우의 시신을 그만 놓으라며
애원하는데도, 그는 연우를 안은 채 ‘아직 따뜻하다. 아직 살아있다.’는 말만 되풀이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염의 눈에도 이미 세상을 떠난 작았던 누이와 세상을
버린 아버지의 마음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죽이고 떠났던 가엾은
누이가 살아있었다. 염은 누이를 안아줄 수 없는 품으로 민화를 끌어안았다. 민화도 염의
품에서 힘껏 끌어안았다. 아무도 이 사람을 자신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생각하면서도
눈물은 모르는 사이에 흘러나왔다. 염의 청렴한, 너무나도 깨끗한 향기가 민화를 안았지만,
그녀의 몸은 영릉향으로 인해 그 향기에 물들어지지 않았다. 독과 악기(惡氣)를 없앤다는
영릉향, 그것이 아무리 짙은 향기를 내뿜어도 민화의 죄를 전부 가릴 수는 없었기에······.
“아바마마!”
어린 민화가 넘어질 듯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가면 그는 왕의 체통도 내던지고, 몸을 구부정하게
숙인 채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민화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하늘 높이 안아 올렸다.
그러면 민화는 왕을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같은 자식이라도
세자와 양명군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녕전에 들어서도 민화는 방바닥에
앉아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왕의 허벅지가 당연하다시피 되어 있는 민화의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왕은 아무리 상심한 일이 있어도 민화의 얼굴만 보면 기분이 좋아졌고,
방긋 웃는 애교 있는 미소를 보면 어느새 같이 웃고 있었다. 민화는 그렇게 왕의 허벅지에
앉아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왕의 가장 많은 뽀뽀를 받았다.
왕비가 왕의 뽀뽀에 민화의 볼이 닳는다며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민화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민화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민화는 자신이 떠받들어져
살아가는 것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기에
자연스러운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녀는 무엇인가에 욕심을 내어본 적도 없었다.
욕심을 내어보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손에 그 어떤 것이던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셋이 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그리고 열셋이 된 어느 날, 민화에겐 전혀 다른 세상이 열렸다. 염,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비현각에서 서책을 앞으로 나란히 들고 월대 아래로 내려서던 염은 민화의 눈에는 선남이
하늘의 구름에서 내려서는 듯 환상처럼 보였다. 관복을 입기에는 턱없이 어려보이는
사내였지만, 그 어떤 자들보다 관복이 어울렸기에 천신의 아들이 민화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내려온 듯한 순간적인 상상에 빠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민화와 그 뒤의 궁녀들을
발견하고는 몸을 숙이며 등을 돌려 섰다. 공주를 보아서는 안 되는 신하였기 때문이었지만,
민화는 등을 돌려선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염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막상 얼굴을
보자니 부끄럽고, 안 보자니 보고 싶은 마음에 그저 빙글빙글 돌기만 했고, 민화를 따라
궁녀들도 어쩔 줄 몰라 하며 같이 돌았다. 염의 옆과 뒤에선 눈을 들어 그를 보고,
앞에서는 차마 보기 부끄러워 눈을 내려 땅을 보던 긴 시간이 흐르자. 염의 입이 열렸다.
“어지럽사옵니다.”
목소리조차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웠다. 민화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 빙글빙글 돌던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용기 내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눈이
멀어버릴 만큼 아름다웠다. 부끄러움! 민화가 처음으로 느껴본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를
보고 있는 얼굴은 더운 열기가 화르르 뿜어져 나와 새빨갛게 변해져 버렸다. 민화는 자신의
뛰는 가슴에 놀라 뒤에 서 있던 민상궁의 가슴에 안겨들며 심장소리가 파묻혀버릴 만큼
큰소리로 까르르거리며 웃어버렸다. 그리고 민상궁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염의 얼굴을
곁 눈길로 훔쳐보았다.
그 이후부터 민화는 간간히 이상야릇한 표정을 했다. 밥숟가락을 들다가도 멍하니 있기가
일쑤였고, 베실베실 새어나오는 실없는 웃음을 참기도 힘들어졌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염의 모습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민화는 염의 얼굴을 볼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공주의 신분이기에 그가 얼굴을 보아주지 않는 것이란 것을 알고 공주의 옷을 벗었다.
그리고 궁녀들의 눈을 따돌리고 몰래 숙영재를 빠져나가기 위해 생각시 한 명을 협박하여
옷을 빼앗아 입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생각시로 변장한 것도 아니었다. 정수리에 있던 옥으로
깎은 배시댕기와, 금실로 수놓아진 댕기, 그리고 화려한 온혜는 누가 봐도 공주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지만, 민화는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숨어들어간
비현각에서 다시 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말들을 세자에게
하고 있었지만, 비현각에 귀를 붙여 듣고 있던 민화에겐 노랫가락처럼 들려왔다.
모르긴 몰라도 어려운 말을 공부만 하는 세자오라비에게 해줄 정도라면 그는 대단히 유식한
사람임에 틀림없단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민화의 귀가 더욱더 비현각에 붙는
대화가 들려왔다. 분명 세자와 그 사이에 자신에 대한 것이 거론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안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
“내게도 여동생이 있는데, 민화공주라고······. 본 적은 없겠지만 들은 적은 있을 것이다.”
“아! 한번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바로 앞에서. 면부를 뵈옵진 못하였지만.”
민화는 자신에 대한 염의 평가가 듣고 싶어 상기된 얼굴로 더욱더 비현각에 붙어 섰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세자의 목소리만 들렸다.
“그래? 아무튼 민화공주도 나 보다 세 살 아래인데 어찌나 떼쟁이에다 제멋대로인지.
아는 글자라고는 하늘 천 따지 밖에 모르고. 열세 살 여자나, 열네 살 여자는 거기서 거기 아닌가?”
이것은 민화에겐 자신의 험담으로 인식되었고, 순간 창피함과 오라비에 대한 배신감으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서 다짜고짜 비현각으로 들어가 휘저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숙영재로 끌려온 민화는 중전에게서 엄격한 꾸중을 들었다. 그리고 민상궁이 민화를
대신해서 종아리를 맞아야 했다. 생각시옷을 빼앗아 입고, 숙영재를 몰래 빠져나간 것,
그리고 세자가 수업 중인 비현각에 들어간 것 등의 잘못을 꾸중 받는 중에도 아름다운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없었기에 민화는 줄곧 머릿속에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한동안은 감시하는 눈길이 삼엄하여 비현각에 놀러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머릿속에서 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민화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면적은 점점 넓어져갔고,
그를 생각하며 평소 잘 읽지 않는 서책이라는 것도 가까이 했다. 그리고 또 다시 경계가
풀어진 틈을 타서 생각시 한명을 협박하여 옷을 빌려 입고는 비현각으로 도망쳤다.
이번은 저번과는 달리 비현각에 붙어서 대화는 엿듣지 않았다. 비현각의 월대 아래에 숨어
염이 나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민화는 비현각을 지키고 서있던 세자익위사 관원들에게
숨어있던 것이 발각이 되자 조용히 있으라는 명령을 했고, 옷만 생각시 옷을 입은 공주임을
뻔히 알고 있던 그들은 적어도 세자의 수업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공주의 숨바꼭질을
방해할 이유가 없었기에 못 본 척 해주었다. 그리고 기다린 보람 끝에 염이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염은 월대 아래를 본다거나 하는 헛짓 한번 없이 정갈한 걸음으로
비현각을 벗어났고, 민화는 그 뒤를 쏜살같이 쫓아갔다.
그의 단정한 뒷모습에 이끌려 쫓아가던 민화는 이대로 계속 쫓아만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리나케 뛰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처음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칫했던 염은 이윽고 민화를 조심스럽게 내려 보았고, 곧 자신의
앞을 막아선 여인이 공주임을 알아차렸다. 민화는 염의 눈길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부끄러움에
옷고름만 잡았다. 염은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눈을 아래로 향하고 말했다.
“공주아기시께오서 소인에게 어쩐 용무이시옵니까?”
민화는 부끄러워하던 표정을 멈추고 큰 눈을 껌벅거리며 염을 보았다. 용무! 왜 숨어서
염을 기다렸는지, 왜 따라왔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막아섰는지 민화 자신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염을 보고 있던 민화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
“난 공주가 아니라 생각시다. 옷을 보면 모르겠느냐? 그러니 나를 보아라.”
염은 빙그레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공주의 말투로 호령하면서 공주가 아니라는 소녀가
귀여웠다. 공주가 왜 이러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떤 놀이 중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염은 놀이일망정 공주에 대한 예는 갖추느라 눈을 들어 민화를 봐주지는 않았다.
민화는 허리를 숙인 채 눈을 내리 깐 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짙고 긴 속눈썹이 자꾸만
민화를 유혹했다.
“예, 예쁘다······.”
자신도 모르게 말을 흘려버렸지만, 민화는 말을 한 것도 모른 채 계속 염을 보았다.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전부 다······.”
그런데 어느새 민화의 손끝은 염의 속눈썹에 다다라 있었다. 염 보다 민화가 더 놀랬다.
깜짝 놀란 민화는 손을 등 뒤로 급히 숨겼다. 그의 속눈썹이 닿았던 손끝에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염은 나이에 비해 워낙에 어려보이는 공주였기에 그녀의 행동에 신경 쓸 겨를 없이,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만 생각했다. 계속 자신의 뒤를 쫓아왔으리란 것은 상상도 못했기에
놀이 중에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송구하오나, 공주아기시의 놀이동무는 어디에 있사옵니까?”
“어? 놀이동무라니? 그런 건 모른다.”
염은 공주가 길을 잃은 것이라는 생각을 확정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민화는 염의 머릿속을 전혀 모른 채 부끄러워하며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열일곱이옵니다.”
“와! 그럼 부인은 있느냐?”
“아직 미취한 몸이옵니다.”
“와! 와! 그럼 정혼한 여인은 있느냐?”
“아직 없사옵니다.”
“와! 와! 와! 아참!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이름말이다.”
“······허 염이라 하옵니다.”
“염······, 햐! 참참! 넌 세자오라버니와 무얼 하느냐? 매일 같이 공부하던데
오라버니의 글동무인 것이냐?”
“비슷하옵니다.”
민화는 신이 나서 염에게 질문을 퍼부었고, 그는 대책 없이 질문에 답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말했지만, 나도 천자문을 다 읽었다. 그리고 요즘엔 <열녀전>을 읽고 있는데······.”
민화는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자신과는 달리 난처해하며 단답만 하는 그의 모습에 말을
멈추었다. 어쩐지 정숙한 여인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인 것이 민망하기도 했다.
“난 정숙한 여인이다. 난······. 나를 좀 보아라.”
염은 여전히 난처한 미소만 보였다. 그리고 민화를 향해 눈길을 올리지도 않았다.
염은 길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공주를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민화는 아무 것도 모르고 줄래줄래 염의 뒤를
따라 걸었다. 민화가 뒤따라오는지 모르고 걷던 것과는 달리, 보폭을 짧게 해서 천천히
걸으며 간간히 공주가 따라오는지 살피는 염을 보며, 민화는 새어나오는 행복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비록 그를 상대로 즐거운 대화는 할 수 없었지만, 이제껏 놀았던
그 어떤 재미난 놀이보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즐거웠다. 아무 것도 안하고 이렇게 계속
걷기만 하는 것도 즐거웠다. 그런데 그의 말없는 뒷모습을 보며 걷는 길은 아주 짧게 끝이 났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왔던 곳은 비현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 뜰에는
공주를 찾으러 온 궁녀들이 있었다. 그들이 사색이 되어 민화에게 달려오자 염은 공주에게
허리를 깊숙하게 숙여 인사한 뒤, 비현각을 나가버렸다. 민화는 궁녀들에게 붙잡힌 채
그렇게 가버리는 염을 원망어린 눈길로 계속 좇았지만 그는 눈길을 느끼지도 못했다.
숙영재로 돌아온 민화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염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발그레한
미소를 만들어 내었다. 가까이서 본 그의 모습은 한층 더 아름다웠고, 걷는 걸음새와
움직이는 자태, 말하는 어투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점잖았던 것도 마음이 설레게 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멈춰지지 않았고, 오히려 주위 가득 염으로만 채워 놓았다.
하지만 설렌 것도 잠시, 저녁이 되자 걱정스런 얼굴의 왕이 숙영재로 찾아왔다.
민화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왕의 허벅지에 앉지 않았다. 이제는 조금 성숙한 여인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왕을 앞에 두고 염을 생각하느라 히죽거리는 민화에게 왕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민화공주, 오늘 또 생각시 차림으로 비현각에 갔었더냐?”
“네? 그랬긴 하지만 세자 오라버니의 예학을 방해하진 않았사옵니다.”
“그래, 세자를 보러간 것이 아니라면 누구를 보러간 것이더냐?”
다른 날과는 달리 심각한 아버지의 표정에 민화는 우물쭈물 거렸다. 염을 보러간 것이
그렇게나 잘못된 것인지는 몰랐기에 아버지의 심각함을 헤아리지 못했다.
“저번에도 비현각에 뛰어들어 문학을 붙잡고 곤혹스럽게 하였다 들었다. 그리고 오늘도
숨어 있다가 그를 뒤따라 갔었다더구나. 혹여 내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라도 있느냐?”
민화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문학이라니요?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세자의 스승 말이다, 허 염!”
“아! 그 사람이 세자 오라버니의 스승이옵니까? 글동무가 아니라? 우와!”
민화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털북숭이 늙은이도 아닌데 세자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니,
그가 더욱 근사하게 느껴졌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옵니다!”
얼굴이 발그레해져 말하는 민화를 본 왕은 더욱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대단하지. 대단한 인재고 말고. 우리 공주가 그를 보러 간 것은 아니겠지?”
“보러 가면 아니 되는 것이옵니까? 오라버니를 방해하는 것도 아닌데······.
소녀, 그 사람이 너무 멋있사옵니다. 그런데 소녀가 공주라서 얼굴을 보아주지 않아
속상하옵니다. 그 사람더러 소녀를 보아도 된다고 아바마마께오서 어명하여 주시옵소서.”
왕은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혹시나 공주가 그에게 반해있으면 어쩌나 했던 염려가
현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자선당 쪽으로는 가지 말아라. 그리고 문학을 보러가서도 아니 되느니라.”
“왜······아니 되는 것이옵니까?”
“그는 간사지재다. 그리고 너는 공주다. 그러니 생각을 해서도 아니 되는 것이야.”
민화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은 민화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한숨과 함께 어렵게 말했다.
“우리 공주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서 이해를 못하는 것 같구나. 조선은 말이다,
공주의 지아비는 관직에 나올 수가 없단다. 그렇기에 뛰어난 인재는 의빈으로 가둬두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야.”
“그, 그렇다면 소녀는 못생기고, 팔푼이 같은 사내와 혼인해야 한다는 것이옵니까?”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그는 아니 된단 말이다. 그는 미래의 왕을 위해.”
민화는 눈물을 글썽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소녀는 그런 것 모르옵니다! 그리고 소녀도 그를 생각하려고 애를 쓴 것이 아니옵니다.
가만히 있어도 그가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래서 비현각에 그를 보러간 것뿐이옵니다.
야단하시려거든 온종일 소녀를 따라다니는 그의 모습을 야단하시옵소서.”
“그를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하지 않느냐! 나라고 그가 탐나지 않는 줄 아느냐?
조선 제일의 사내를 우리 공주의 배필로 삼고 싶지 않은 줄 아느냐?
하지만 조선의 법이 그러한데 어쩌겠느냐? 왕은 경국대전을 넘어설 수 없느니라.”
민화는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조선의 법이 무엇인지, 자신의 현실이 무엇인지
다 헤아릴 수 없어도 그를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못난 남편을 둔 불행한
고모님들이 자신의 미래가 될 것만 같아 서글퍼졌다.
“싫어요! 소녀, 싫사옵니다. 공주도 하기 싫사옵니다. 소녀는 앞으로도 그 사람을 보러 갈
것이옵니다. 이제껏 그 사람만큼 멋있는 사람을 본적이 없사옵니다! 잘난 사내는 모두 다른
여인의 것이 되고, 못난 팔푼이를 공주의 지아비로 두는 것이 대체 말이 되옵니까?”
왕은 딸의 고집을 달래느라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꿨다.
“팔푼이가 아니라 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간택을 해줄.”
“엉엉! 싫어요! 고모님들의 지아비가 왜 하나같이 망나니들인지 소녀, 이제야 알 것 같사옵니다.
사치한 허영덩어리들! 소녀 싫사옵니다. 허 염처럼 고아한 선비가 좋사옵니다!”
공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의빈들은 아무리 학문을 갈고닦아도 관직에 나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같이 글은 멀리 하고 주색과 사치만 일삼았다. 처음부터 그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건실한 인물로 간택을 해도 그들에게 처해진 현실이 그렇다 보니 저절로 인간성이
변해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공주나 옹주들이 불행한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왕은 민화를 어린애 달래듯 달래보았다.
“고아한 선비 중에서 간택해 줄 터이니.”
“허 염! 그 사람만이 좋사옵니다! 아바마마, 다른 인재는 얼마든지 있지 않사옵니까?”
“그 같은 이가 의빈이 된다면 그는 불행해질 것이다. 넌 그를 몰라. 그의 시권(과거 답안지)을
보고 난 손이 떨렸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시작인 사람이다. 어제의 학식에 놀라고,
하루만이 지난 오늘의 진보에 놀라게 하는 이가 그다. 그의 외모는 그의 내면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 정도니, 의빈으로 두면 그보다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느냐?”
민화를 포기시키기 위해 하는 왕의 말은 민화를 염에게 더욱더 빠져들게 만들었다.
왕은 숙영재의 궁녀들에게 앞으로 오늘과 같은 일이 또 있으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어명을 남기고 가버렸다.
그 이후 민화는 삼엄한 경계 때문에 더 이상 자선당 쪽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궁녀뿐만이
아니라 곳곳의 군사들도 공주가 나타나면 길을 비켜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만큼 보고픔도
점점 더 커져갔다. 아무도 편들어 주지 않는 공주의 그리움을 위로해주는 사람은 대비윤씨가
전부였다. 그래서 민화는 그녀에게 상심한 마음을 자주 털어놓았고, 염을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이 죄가 아니란 것을 위로받았다. 염에 대한 마음이 참을 수 없게 된 것은 이 이후였다.
이제 마주칠 수조차 없는 염을 마음에 담고 터덜터덜 강녕전으로 오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께 한번만 더 애원해 보기 위해서였는데, 강녕전의 뜰에 염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관리들과 같이 있던 그의 아름다움은 단연 월등하게 눈에 들어왔고, 그 전에 보았을 때
보다 훨씬 멋있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충격처럼 와 닿았다.
비록 민화를 발견하고 웃은 것이 아니라 옆의 다른 관리에게 웃어준 것이었지만 민화의
심장은 경기에 소스라쳤고, 다리엔 힘이 풀려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만날 것이란 사전
각오가 없이 갑자기 보게 된 것이었기에, 심장과 다리도 각자 상의 없이 움직여진 것이었다.
깜짝 놀란 것은 민상궁과 궁녀들이었다. 자신들이 살기위해서는 왕의 눈에 띄기 전에
부리나케 민화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했다.
민화는 왕에 대한 단식투쟁까지 해보았지만, 왕의 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공주가 몇 번 본 것만으로 마음이 깊어진 것이었기에 이대로 버티면 곧 시들해질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세자의 가례를 위한 세자빈간택이 진행되었다.
처음에 이런 것엔 관심도 없었던 민화에게 특별한 의식이 된 것은, 세자빈 후보에 염의
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부터였다. 세자빈으로 염의 누이가 간택된 그날, 민화는
그곳으로 나가지 않았다. 공주이기에 간택된 세자빈으로부터 큰절을 받아야 했지만,
달거리를 시작하는 바람에 나가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나가기 싫었다. 염은 의빈이 되어선
안 되고, 그의 누이는 세자빈이 되어도 되는 불평등에 철없는 화가 났고, 완전히 염과는
맺어지지 못할 것이란 절망도 민화를 슬픔으로 몰아붙였다. 그런 민화에게 간택이 끝난
그날 즉시 속삭여온 대비윤씨의 말은 민화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 일을 진행시키면 사태는
어떻게 변하고 자신이 외척들에게 어떻게 이용당하게 될 것이란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단지 민화의 귀에는 염의 누이나 세자빈의 죽음을 주술 하는 것이란 말보다, 염과 맺어질 수
있다는 것이 더 크게 들어왔다. 그리고 그 주술로 인해 그때의 염의 환한 웃음은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이란 것은 알지 못했고,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의 슬픈 눈동자만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양명군이 한양 일대를 방황하다가 집에 도착하자, 그의 하인이 안절부절 하며 다가왔다.
양명군은 그의 이상함을 느끼고 집 안으로 차가운 눈길을 던졌다.
“무슨 일이냐? 누가 집 안에 들어 있는 것이냐?”
하인은 양명군의 손에서 말고삐를 받아들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송구하오나, 파평부원군이 계속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놈이 진정 실성을 한 게냐? 그따위 놈을 나의 집에 들이다니!”
“소인네가 아무리 들어오지 말라 하는데도 부득부득 집 안으로 들어오는지라 말릴 수가
없었사옵니다.”
양명군은 화난 손길로 주던 말고삐를 다시 빼앗아 들었다.
“내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까지 그자를 내쫓지 않는다면 네놈 목이 성하지 못할 것이다!”
하인의 눈이 도와달라는 눈빛을 했다. 일개 하인인 주제에 국구를 내쫓는다는 것은 양명군에게
목이 달아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빛에 상관없이 양명군은 말에
훌쩍 올라탄 뒤, 사라져 버렸다. 파평부원군이 자신을 찾는 것! 그것은 다른 소인배들이
자신을 찾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양명군은 미칠 것만 같은 가슴으로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며 말을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