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상감마마······.”
훤을 찾는 연우의 애끊는 소리가 방문 너머로부터 들어와 훤의 비명 속에 파묻혔다.
또 다시 연우의 목소리가 훤을 붙들었다.
“소녀, 그리 들어도 되옵니까? 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명인지, 울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훤의 목소리가 열리려는 방문을 향해 애원했다.
“아니 되오! 난······그대를 볼 수가 없소.”
“마마······.”
“그대를 그리 만든 자를 잡아 도륙을 낼 것이라 맹세하였었소. 그런데, 그대를 그리 만든
자들이 나의······피붙이였소. 그대의 죽음을 사주하고, 그대를 죽이고,
그대의 억울한 죽음을 덮은 이가 모두 나의 가족이었소. 내가 무슨 낯으로 그댈 볼 수 있겠소!”
바닥에 두 팔을 지탱하고 앉은 훤의 얼굴에서 떨어진 눈물이 바닥에 쌓일 듯 내렸다.
“소녀를 영원히 아니 보실 것이옵니까? 그렇게 또 한 번 소녀를 죽이시려는 것이옵니까?”
말 속에 섞인 연우의 눈물이 훤의 심장을 더욱더 괴롭혔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기엔 스스로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망설이는 훤을 견디지 못한 것은 이번에는 연우였다.
어명을 어기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힘들게 지탱하고 앉은 훤의 등 뒤로
달려가 부축하듯 안았다. 등에 와 닿은 연우의 체온이 훤의 절망도 같이 끌어안았다.
“두려운 것이 무어냐고 하문하시었사옵니까? 소녀가 두려웠던 것은 이것이었사옵니다.
상감마마께옵서 상심하시고, 소녀를 아니 보실까봐 두려웠사옵니다.”
“그대가 이리 된 것이 나 때문이나 마찬가지요.”
“그리 말씀하시오면, 소녀가 살아있음을 스스로 원망하오리다.”
“난 그대에게 가장 멋진 사내이고 싶었소. 그런데 가장 못난 사내였소.”
훤은 자신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은 연우의 팔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부왕의 말이 훤의 심장으로 들려왔다.
‘내가 지키고자 했던 이들을 용서하고, 부디 지켜다오. 정 아니 되겠거든 제일 먼저
이 아비를 용서하지 마라.’
“아바마마······, 아바마마!”
훤의 애타는 부름은 하늘이 아닌 연우의 심장에 울려 퍼졌다. 연우는 부왕이 남긴 목소리와
자신의 눈물 사이에 있는 사랑하는 님의 슬픔과 고뇌를 덜어주고 싶었다.
“소녀, 상감마마의 곁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 있으오리까. 어떤 옷을 입든,
어떤 신분이든, 작은 방에 숨어 살지언정 기쁠 것이옵니다. 이름도 상관없사옵니다.
소녀에겐 상감마마께옵서 이름하신 월이 있지 않으옵니까? 월이라 하여주시옵소서.
······그러니 부디 상감마마의 누이를, 핏줄을 마마의 손으로 벌하지 마옵소서.”
훤은 연우의 팔을 사납게 풀며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보았다. 그리고 연우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두 손으로 그녀의 양쪽 어깨를 아프도록 잡았다.
“난 그대를 사랑하는 한 사내이기도 하지만, 이 나라의 왕이기도 하오. 비록 나 태어나던
날까지 기억하진 못해도, 내 기억에 있는 어린 나는, 지금의 나를 위해 학문을 익혔소.
내가 익혀온 것은 오직 왕으로서의 도리만이 있었고, 그 가운데엔 언제나 백성이 있었소.
왕으로서의 횡포는 배우질 못하였소. 처음 온양에서 만났던 그 밤, 그대가 나에게 그대도
조선의 백성이라 하였소. 백성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도 숨어 살고, 단지 나의 핏줄이라
하여 죄를 지은 이는 행복하게 사는 세상! 그런 조선의 왕을 만들고자, 그 많은 스승이
나를 가르치진 않았소. 그런데 그대는 나에게 그런 조선의 왕이 되라 하는 것이오!”
연우의 눈에 비친 훤은 왕이었다. 인간으로서의 갈등과, 왕으로서의 갈등을 동시에 해야만
하는 불쌍한 사내였다. 그 가엾은 사내에게 애원했다.
“그러면 우리 오라버니는 어찌하란 말씀이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 오라버니,
······가엾어서 어찌하옵니까? 이 일을 알게 되면, 오라버니는 견딜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대는 그대 오라비만 가엾고, 나는 가엾지 않은 것이오? 그대가 중전이 아니면 다른 여인을
안아야만 하는데, 그런 나는 가엾지 않은 것이오? 그런 그대는 가엾지 않은 것이오!”
“가엾사옵니다. 하지만 누이를 벌하시는 상감마마는 더 가엾사옵니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대 오라비의 행복이 가엾소. 자신의 누이를 죽인 여인을 은혜로
여기며 부부로 살고 있는, 앞으로도 살아갈 나의 스승이 가엾소.”
“그러기에 소녀, 간청 드리옵니다. 우리 오라버니 이대로 모르고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내가 불행할 것이오.”
“소녀의 욕심은 이미 다 채워졌사옵니다. 무엇을 더 소망하오리까.”
“그대의 숨어 산 긴 세월은 억울하지 않소? 얼마나 괴로운 삶이었을지 나는 다 헤아리지도
못하오. 단지 뭇사람들이 그대를 사람이 아니라 한다던 스쳐가는 말조차 지금껏 내 가슴에 밟혀······.”
훤은 올라오는 울음소리를 목구멍 안으로 쑤셔 삼켰다. 그의 고통과 똑같이 연우의 얼굴도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괴로웠기에 그 고통을 오라버니와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이옵니다. 연우란 여인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났는지·······.”
옆에서 속으로만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을 지켜만 보고 있던 운의 눈빛이 무언가를
휘어잡으며 왕을 보았다. 그의 비상한 눈빛을 알아챈 훤이 눈물 맺힌 눈빛으로 그를 휘감았다.
“상감마마! 이상한 것이 있사옵니다. 공주자가는 세자빈허씨를 죽이는 주술에 참여하였다고
하였사옵니다. 하지만 세자빈허씨는 결국엔 주술로 죽은 것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훤의 눈빛도 비상한 눈빛으로 탈바꿈했다. 갑자기 병을 일으킨 것의 원인은 주술이 분명할
것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전 홍문학대제학이 마시게 한 탕약이다!”
훤의 외침에 두 사내의 시선과 더불어 내관들의 시선도 일제히 연우를 향했다.
연우의 어깨를 잡고 있는 훤의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연우는 훤의 눈동자에 차분한 음색으로 말을 심었다.
“아버지의 탕약······. 소녀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어린 연우가 마셨던 것은 썩어
떨어진 아버지의 심장덩어리와 눈물이었던 것과, 그리고 이름 없는 무녀로 다시 눈을 뜬 곳이
무덤의 죽음 속이었던 것뿐이옵니다.”
세상이 온통 뜨거웠다. 심장은 타들어 가 듯 더욱더 뜨거웠다. 수엽 덥수룩한 낯선 사람들이
병을 살핀 뒤 고개를 젓는 것이 멀어지는 의식 속에 간간히 잡혔다. 망연자실한 아버지의
표정이 연우의 눈에 들어오기도 했고, 누워있는 연우보다 더 아파보이는 어머니의 눈빛도
눈에 들어왔다.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달래주고 싶었지만 입술은 아무리
노력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오라버니가 보이지 않아 찾아달란 말도 힘이 없어
하지 못했다. 며칠 동안 앓았는지 알지 못한 시간들이 흘렸다. 의식을 잃었다가 잠시 깨어나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눈에 띄게 초췌해져 가는 부모님의 얼굴에 죄송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일어나지지도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병을 살피러 왔다. 어의라며 왔었던 사람들과는 달랐지만, 관복을 입고
있었다. 아버지와 그, 단둘이 나누는 말소리가 의식만 겨우 있는 연우의 귀로 흘러들어왔다.
“관상감에서 우리 여식의 병을 살피는 연유가 무엇이오?”
“어의께서 병명을 알 수 없다하기에 혹시나 해서 온 것입니다.······아무래도
신병인 것 같습니다.”
“신병이라니? 그것이 무슨 말이오? 신병이라면······이 아이에게 신이라도 내렸단
말씀이오?”
“죄송스럽지만, 개인적인 소견일 뿐입니다. 아직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비밀로
하여드리겠습니다.”
소름끼칠 만큼의 정적이 흘렸다. 연우는 아버지를 불러 그 말의 뜻을 묻고 싶었지만,
눈과 입이 떠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그저 아픈 것보다 더 심각해진 아버지의 절망이었다.
어린 연우는 신병이 있는 여인을 처녀단자에 올리고, 세자빈으로 간택하게 만든 집안의
죄를 알지 못했다. 그저 평범한 병보다 더 무거운 죄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아마도 이 대화는 아버지만이 알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감히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상의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며칠이 지나 이번에는 어느 여인이 찾아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장씨도무녀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도무녀라 하였소? 왕실을 위해 있는 자네가 여긴 어인 일이오?”
“제 신기가 이리로 인도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은 피해온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신기가 인도하였다니?”
절망어린 아버지의 목소리 뒤로 한참동안 침묵하고 앉아있던 장씨의 입에선 매서운
답만이 흘러나왔다.
“신기로 인한 병이 맞습니다. 어찌하실 것입니까?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이대로 계속
고통을 받을 것이고, 신내림을 받는다면 무녀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대제학영감뿐만이 아니라 자제분, 그리고 일가친척 모두 사약을 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니오! 그럴 리가 없소! 이 아인 그저 평범한 아이오. 게다가 친척 누구도 신병을 앓은
사람이 없는데······.”
사약이란 말에 연우의 힘겨운 의식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버지의 어두운 등이 보였고,
그리고 장씨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떠진 연우의 눈에 당황했는지 장씨의 고개가 무의식적으로
숙여졌다. 자신도 모르게 숙여진 고개에 스스로 더 놀란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힘겹게라도 웃어주려는 연우의 눈에서 얼른 고개를 돌리며 급하게 말했다.
“특이하긴 하지만, 큰 그릇이다 보니 큰 신이 내리고 싶은 모양입니다. 떼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제 말을 믿지 못하는 듯 하니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지요.
곧 다시 오겠습니다.”
장씨가 물러가고 난 뒤로 아버지의 시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장씨의 말을 믿지 않았는지,
아니면 믿기 싫었는지 다른 의원에게도 연우의 병을 물어보았다. 그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라고만 했다. 그래서 차차 아버지의 의심도 신병 쪽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절망도 굳어져갔다. 가문을 위해, 왕을 위해, 세자를 위해, 그리고 조선의
종묘사직을 위해 연우는 살아선 안 되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몇 번
다녀간 것 같았지만 의식이 없었기에 누군지,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의 결정은 그 사이에 내려진 듯 했다. 연우는 그 결정이 가문을 위해
내려졌음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평소와 다른 날이었다. 언제나 탕약을 달이던 사람은 어머니였다. 방 밖에 쪼그리고 앉아
몇 시간이고 약을 달이던 어머니의 그림자가 그날은 아버지의 그림자로 바꿔져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 그리고 영원히 세자저하를 못보고
죽는 다는 생각이 연우의 의식을 두들겨 깨웠다. 의식조차 없던 몸을 일으켜 힘겹게
서안에 기대 앉았다. 연적에 있던 물을 벼루에 붓고 먹을 갈려고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주위에 설을 찾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힘없는 손으로 먹을 갈 수밖에 없었다. 먹이 움직여질 때마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저 궐에서 얻어온 것으로만 여겼던 맛있는 검은 엿이 세자가 준 것이란 것을 알고 놀랐던
가슴이 떠올랐고, 끊임 없이 건네져 오던 서책들에 어리둥절했던 것도 떠올랐다.
그리고 처음 받았던 세자의 서찰에 적힌 시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답시를 보낸 그날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태양의
황금빛에 물든 보슬비를 맞았던 것도 떠올랐고, 그 다음 퇴궐하여 오는 오라버니의 빈손에
낙담했던 것도 떠올랐다. 왜 바로 서찰을 보내주지 않았는지 만나면 물어보리라 했던 꿈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내당의 여인이 그런 시를 보내어 정숙하지 못하다며 실망한 것은
아닌지 내내 불안했던 시간이 흐른 뒤, 손에 건네져 온 세자의 서찰에 눈물마저 핑 돌았던
것이 꿈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세자라는 분도 자신과 똑같이 이름이란 것이 있는 사람이란
것에 미소를 지었었다. 혹시나 또 서찰이 안 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답장의 마지막
구절에 상추의 잎이 몇 개더냐는 뜬금없는 질문을 넣었었다. 질문 때문에라도 답장을
안 줄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계속되었던 그 뒤의 행복들은 이제 한낱
상상과도 같은 덧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찰에서 주고받던 말보다 더 많은 말들을
만나면 나눌 것이라 아껴두었었고, 눈앞에 그 꿈이 닿았던 순간에 처참하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연우는 마지막 서찰을 힘겹게 적었다. 끝끝내 얼굴도 보지 못하고 마지막 인사를
남겨야 하는 것에 슬픔이 실리지 않도록, 최대한 담담히 쓰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서찰을 봉하고는 서안 서랍에 넣었다. 오라버니가 어쩌면 찾아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세자의 정표인 봉잠을 저고리 안의 가슴에
숨겨 넣었다.
아버지가 탕약을 가지고 들어왔을 때의 연우는 모든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다른 날과
다름없이 자리에 누워있었다. 탕약을 서안 위에 올리면서 갈다만 듯한 벼루가 보였지만,
슬픔에 덮인 눈은 그것을 넣어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연우가 잠에서 깨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손길로 연우를 깨웠다. 연우는 갓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떠 아버지를 보았다.
이미 많은 눈물을 흘린 듯 아버지의 눈과 얼굴은 부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우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에선 쉴 새 없이 또 눈물이 흘러나왔다. 연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고, 아버지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연우의 눈을 피해 탕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약이 아직 뜨겁구나. 식혀서······.”
그의 떨리는 손이 숟가락을 잡아 탕약을 천천히 저었다. 연우는 누워 오라버니와 닮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연우에게로 스며들었다.
“연우야, 아버지가 그동안 많이 미안했다. 너에게 미안한 것 밖에 기억나지 않는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그리 종아리를 때리지도 않았을 텐데······.
읽고 싶어 하던 책 읽게 하고, 하고 싶어 하던 것 다 하게 해줄 걸······,
앞으로도 많은 세월이 남은 줄로만 알았단다, 어리석게도.”
이미 다 식어 더 이상 김도 올라오지 않는 탕약을 아버지는 계속해서 젓고만 있었다.
더 이상 식을 것이 없게 된 탕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던 아버지는 연우를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기대게 한 뒤, 탕약그릇을 들었다. 탕약을 한 숟가락 든 아버지의
떨리는 손은 연우의 입으로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힘겨운 연우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서 주세요. 병······낫고 싶어요.”
아버지의 눈물이 비오듯 연우의 이마로, 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한 숟가락씩 연우의
입에 탕약을, 자신의 썩어 떨어진 심장을 떠 넣었다. 연우는 아버지가 속상하시지 않게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이 아버지를 더욱더 괴롭히는 줄도 몰랐다.
“약이 쓰느냐?”
“써요, 많이······.”
아버지의 썩은 심장이 너무나도 썼고, 아버지의 눈물이 너무나도 짰다. 그래서 쓰고 짠맛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약을 다 마신 연우를 아버지는 꼬옥 끌어안았다.
“우리 연우, 아버지가 안고 있자. 잠들 때까지······.”
“네,······아버지께······오라버니 향기가 나서 좋아요.”
아버지는 끌어안은 연우의 가슴에 딱딱한 것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얼른 품에서
떼어내 보니, 못 보던 봉잠이 삐죽하게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연우는 아버지께 들킨 것이
불안하여 두 손으로 봉잠을 숨겼다.
“이것을 품에 가지고 자고 싶어요.······그렇게 하게 해주세요.”
“연우야······.”
아버지는 알게 되었다. 딸이 자신을 죽이는 약임을 알면서도 웃는 얼굴로 받아 마신 것이란 사실을.
뒤이어 아버지의 찢어지는 절규가 방안을 뒤덮었다.
“연우야, 연우야, 연우야, 연우야······.”
끊임없이 연우를 부르는 아버지의 통곡소리가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뚜렷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평생 불러야 할 이름을 이날 다 불러보려는 것이었는지 연우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 들어가는 연우를 계속 따라왔고, 아버지의 품속이었기에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연우의 심장이 멈추는 순간 아버지의 심장도 더 이상의 삶의 의지를 잃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자신의 내어 쉬는 숨소리조차 우렁차게 들리는 그곳이 어딘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더 이상 아버지의 품이 아닌 관 속이었다.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연우를 덮쳤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관 뚜껑이 열리고
낯익은 설이 연우를 끌어안았지만, 여전히 연우는 관 속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위에 장씨가 있었고, 낯선 남자 셋이 더 있었지만, 겁에 질린 연우의 눈에는 설 이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오랜 세월이 흐를 동안 연우는 관 속의
공포에서 살아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