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운이 살려둔 자객들이 의금부 옥사에서 심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자결했다는 소식이 강녕전의
훤에게로 날아들었다. 또 다시 하나의 실마리가 끊어져 버린 것이었기에 훤의 분노는
내관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연우가 말 없는 상냥함으로 훤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는 화병으로 다시 쓰러졌을 것이었다. 훤은 연우의 눈동자를 보며 힘들게
미소를 되찾았다.
“그대에게로 가는 길이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오. 마음은 조급한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연우는 훤에게 있어서 위로를 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가 없었던 이전의 삶이란 것은
전혀 없었던 것만 같은 생각에 그녀의 눈동자만 보았다.
위로를 주는 그녀의 말이 훤을 어루만졌다.
“이리 마주하고 있음에도 멀게만 느껴지시옵니까?”
훤은 대답 대신 연우의 옷고름을 슬그머니 쓰다듬으며 외로운 미소를 보였다.
“사내의 욕정을 헤아린다면 그리 무심한 질문을 하진 못할 것이오.”
연우의 붉어진 눈길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지금 이대로 그가 안겠다고만 하면 기꺼이
응해줄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을 참는 것은 연우가 아니라 오직 훤이었다. 사랑하기에
안기고픈 연우의 마음과, 반대로 사랑하기에 참고 있는 훤의 마음으로 인해 죄 없는 연우의
옷고름에만 훤의 손때가 묻고 있었다. 처음 신기가 없다는 것에 들떴던 마음이 이제는
인내의 고통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떨리는 긴 한숨소리가 탄식의 말과 함께 나왔다.
“아아······. 열녀문을 받은 여인의 한이 무엇인지 알 것 같소.”
숙인 연우의 붉은 얼굴에 보기 드문 미소가 떠올랐다. 훤은 결코 엄살이 아니었지만
그녀에겐 농담으로 와 닿았고, 어쩌면 훤은 꽤나 사랑스러운 사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엄 있는 멋진 모습 속에 장난기 가득한 귀여운 모습도 같이 가진,
그래서 더 가슴 설레게 하는 사내. 훤도 연우가 어쩌면 꽤나 새침데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청초한 모습 아래에 숨겨진 그녀의 고집이 밉기보다는 훤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연우의 또 다른 모습에 설레느라 바빠진 훤의 머리는 방금 전까지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었는지 잠시 동안이나마 잊고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운의 무표정한 얼굴 뒤에
감춰진 생각들도 잊고자 했다. 가장 의지하고 있는 신하인 그가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도 잊고자 했다.
미소를 나누던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의금부도사의 급한 알현이 들어왔다. 이제까지 밀지로
전해오던 그의 조사였기에 직접 알현을 요청한 것은 사뭇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조사에서
급진전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직감한 훤은 아쉽지만 연우를 등 뒤의 방으로 보냈다.
그리고 운을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으라고 명한 뒤 그를 불러들였다. 훤은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절을 하고 다가와 앉은 의금부도사의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고,
눈빛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의금부에서 얼마 전 투옥된 자객 두 명이 차례로 자결하였단 소식이 방금 들어왔다.
알고 있겠지?”
“그들의 신원도 아직 오리무중이온데, 참으로 면목 없사옵니다.”
“어차피 너의 일은 따로이 있었으니, 네가 면목 없어 할 필요는 없다. 어찌 되었느냐?”
다급하게 묻는 왕의 물음에도 의금부도사의 입은 무엇이 두려운지 열리지 않고, 불안한 눈동자만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었다. 훤은 장씨도무녀가 비밀을 꽁꽁 싸매고 입을 열지 않는 것에
질려있었기에 그의 침묵에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러잖아도 비밀을 담고 봉한 입들로 인해 신경이 날카롭다. 그런데 너조차 내 앞에서
입을 봉하는 것이냐!”
“그, 그것이 아니옵고······.”
“어제 내가 조사하라고 명했던 것의 결과는 나왔느냐?”
훤이 그에게 내렸던 명령은 전왕이 세자빈허씨의 죽음에 관한 일을 마무리하고 덮었던
그 바로 전날까지의 행보를 조사해오라는 것이었다. 그런 간단한 답조차 미적거리며
하지 않자 훤은 더욱 화가 났다.
“조사를 못한 것이냐?”
“아니옵니다. 각 관청의 기록들을 조사하였고, 또한 전 암기반내관을 만나서 물어도 보았사옵니다.”
“그자가 아직 살아있었단 말이냐?”
“좌 암기반내관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우 암기반내관은 건재하였사옵고,
그의 기억력도 여전하여 날짜까지 정확하게 짚었사옵니다.”
훤의 얼굴이 희망으로 환해졌다. 암기반의 내관이라면 그때의 일을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었고 다른 어떤 기록보다 믿을 수 있는 것이었기에, 조금 전의 절망을 완전히
걷어낼 수 있었다.
“아바마마께옵서 마지막까지 만난 자가 누구이더냐?”
“천신, 그전에 알고픈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을 말이냐?”
의금부도사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키고는 어렵사리 말하기 시작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처음 천신이 조사하였던 것은 세자빈허씨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가에
관한 것이었사옵니다. 하지만 천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 어떤 실마리도 찾을 수가 없었던 차에,
곧 상감마마의 분부로 장례식 당시에 있었던 이상한 점에 대해 조사를 하였사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당시의 상왕마마의 행보에 대해 조사를 하였사옵니다. 천신은 처음에
각각 다른 조사로만 여겼사온데,······아니었던 것이옵니까?”
그가 무언가를 알아낸 것이란 확고한 느낌이 훤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훤의 목구멍으로
침 삼키는 소리가 옆에 앉은 운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말하라! 상왕께서 어떤 자들을 만나시었더냐?”
“모르옵니다.”
“뭐라?”
훤의 조급한 마음이 분노로 올라오려 하자, 그가 얼른 말을 이었다.
“어떤 자들을 만나시었는지 모르오나, 어디를 다니시었는지는 알 수 있었사옵니다.”
훤은 그를 기대에 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눈으로
독촉하고 있었다. 그의 입이 왕의 눈총에 밀려 무겁게 열렸다.
“숙영재에 몇 번 드나드신 연후에 모든 사건의 조사를 거두어 들이셨사옵니다.”
훤은 긴장하고 있던 마음에 힘이 빠졌다. 숙영재는 민화공주가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
기거하던 건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왕이 지나치게 귀애한 탓에 민화의 버릇이 나빠진다는
소리가 나돌 정도였기에 그곳에 자주 드나든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훤이 허탈한 한숨을 내쉬려 하자, 옆의 운이 입을 떼었다.
“그 당시 만기가 많지 않았사옵니까?”
훤의 놀란 눈이 저절로 운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말 그대로 그 당시 상왕은 눈 돌릴 틈 없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귀애하는 민화였다고는 하지만 침전으로
찾아오는 민화를 반길지언정, 친히 숙영재를 찾아갈 만큼 시간으로나 마음으로나 여유가
없었을 것이었다. 의금부도사가 다시 말했다.
“상왕마마께오서 숙영재에 다녀오시었던 날, 밤 세워 시름에 잠기시었다가 다음날 조사를
그만두라 어명하시었다 하옵니다. 의금부의 모든 문건도 그때를 즈음하여 없어졌사옵니다.”
훤은 아직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의 진위를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깊은 생각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숙영재에 다녀오시었다던 그날 밤, 상왕마마의 용안에
낙루를 보이셨다 하옵니다.”
훤은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숙영재에 기거하고 있던 민화 때문에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귀여운 민화의 웃음을 보며 위로받기 위해 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훤은 절대 민화는
상관없을 것이라고 스스로의 마음을 토닥였다. 민화가 세자빈시해사건에 관련될 이유가 없었다.
‘아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것이야. 민화공주는 비록 천방지축이긴 하지만, 심성은 고운
아이다. 누군가를 죽일 아이도 아니지만, 만약에 죽이려 하였다고 해도 그것에 합당한
동기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민화공주에겐 그런 것이 없!’
순간 훤의 머릿속에 하늘이 찢어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옛날 염에게서 석강을 받고 있을 때
생각시옷을 훔쳐 입고 비현각에 난입하여 소리치며 울던 민화의 모습이, 훤의 심장을
산산조각 내며 떠올랐다. 어쩌면 민화에게 동기란 것이 있었다면 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상왕이 그리도 아끼던 인재였던 염을 의빈으로 간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맞아떨어졌다. 무엇보다 민화는 상왕이 이 모든 일을 덮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훤은 끊어질 것 같은 절망으로 운의 어깨에 기댔다. 그 절망 속에서도 훤은 마지막까지
민화가 아닐 것이란 고집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훤의 절망이 고스란히 연우에게도
전해져 문 너머에 앉은 그녀의 마음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와 똑같은 절망에 젖어들었다.
이때, 내관이 때마침 민화가 강녕전 밖에서 왕의 성후를 여쭙는다고 아뢰었다. 훤은 왜 민화가
입궐했는지까지는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어서 그녀의 입에서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누이에게 사과하게 되기를 빌었다.
“의금부도사는 잠시 물러가 있고, 민화공주는 속히 들라하라!”
감정을 억누른 훤의 목소리에 의금부도사는 여러 의문들을 미처 다 풀어내지 못하고,
일어나 물러나갔다. 그리고 고운 당의 차림으로 환한 얼굴의 민화가 뒤이어 들어왔다.
훤의 분노를 전혀 알지 못하는 민화는 무엇에 신이 났는지 연신 헤벌쭉거리며 절을 올렸다.
오라비의 건강이 걱정되어 온 표정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녀가 몸가짐을 조심하여 자리에 앉자
훤은 감정을 마음속 깊숙하게 깔고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풍천위는 어찌 지내느냐?”
“음······, 잘 지내고 있다고 아뢰어야 하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얼마 전부터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걱정하고 있사옵기에. 하지만 겉으로는 무탈하니······.”
충분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누이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염의 정신이 제대로일 리가
없었다. 민화는 훤이 운에게 기대듯 앉아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눈을 똘망거리고 쳐다보았다.
“앉아계시는 것이 힘드실 만큼 성후 미령하시옵니까? 많이 강령해지시었다 들었사온데······.”
“넌 그런 질문을 하면서도 어찌 입은 여전히 헤벌쭉이냐? 내가 걱정되는 것은 아닌가 보구나.”
“오라버니도 참, 어찌 걱정이 아니 되겠사옵니까? 앗! 전 그만 돌아가야 되옵니다.
서방님께 어서 가야 되옵기에.”
훤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풍천위에게로 가고 싶어 하다니······,
그리도 그가 좋으냐?”
풍천위란 말에 민화의 입이 헤벌쭉 벌어져 귀에 걸릴 정도가 되었다. 표정만으로 답을 들은
셈이었다.
“그의 어디가 그리도 좋으냐?”
“오라버니! 또 저를 놀리시는 것이옵니까? 미워요!”
“민화공주! 그러하면 언제부터 그를 첨앙하였느냐?”
훤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했던 민화는 눈동자만 굴리며 가만히 있었다.
민화를 대신하여 훤이 답했다.
“옛날 네가 생각시옷을 훔쳐 입고 비현각에 나타났을 때, 이미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더냐?”
민화도 두려운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더욱더 입을 다물었다.
“말하라! 그때 이미 마음에 두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훤의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강녕전을 뒤흔들었다. 왕의 큰소리에 놀란 민화는 큰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어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왜 물어보시는 것이옵니까? 그리고 왜 진노하시었사옵니까? 저 무서워서······.”
“그때 넌 풍천위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짓을 하였느냐?”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전 오라버니가 하시는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사옵니다!”
“풍천위의 누이!”
순간 민화의 심장이 지옥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더 커진 눈을 향한
훤의 추궁이 이어졌다.
“그래도 모른다 할 것이냐!”
민화의 고개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세차게 도리질 쳤다. 하지만 이미 눈은 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르옵니다! 몰라요! 전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민화공주! 난 너의 오라비다. 그러니 말해다오.”
겁에 질린 표정으로 도리질만 치던 민화는 결국 바닥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민화와 함께 훤도 겁에 질려 소리 없이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지? 넌 아무 상관없는 것이지? 아니라고 말하라. 부디 넌 끝까지 모른다고 말하라!”
“엉엉! 서방님에게는 비밀로 하여주시옵소서. 오라버니께서 저를 벌하시어도 좋사옵니다.
염라대왕한테 일러도 좋사옵니다. 하지만 서방님에게만은 제발······, 제발!”
훤의 몸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갔다. 옆에서 운이 부축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져 버렸을
것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훤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민화의
대성통곡하는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소리로 등 뒤에서 연우가 눈물을 참는
소리가 울려왔다. 훤은 넋이 나간채로 입만 움직여 말을 뽑아냈다.
“왜······, 왜 그랬느냐? 왜 네가 세자빈허씨의 시살에 관여하였느냐?”
“서방님을······가질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었기에······.”
“연우낭자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어도 아바마마께 간청하였다면 풍천위와도.”
“아니 된다 하시었사옵니다! 아바마마께오서 서방님은 간사지재(여러 세대를 통하여 썩 드물게
나타나는 뛰어난 인재)이니 절대 의빈이 되어선 아니 된다 하시었사옵니다! 제가 며칠 동안
곡기마저 끊고 간청하였사온데, 그래도 아니 된다 하시었기에······, 엉엉!”
“할마마마께서 널 꼬드긴 것이냐? 넌 할마마마가 시키는 대로 한 것이냐?”
바닥에 엎드린 채 통곡하고 있는 민화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마침 제가 초경을 시작하였사온데,······저의 소원이 담긴 개짐만 있으면 서방님의
누이를 죽일 수 있고, 그러면 아바마마는 서방님과의 혼례를 올려주실 수밖에 없을 거라
하시었기에······, 서방님의 누이가 죽기를 비는 주술에 참여하였사옵니다.”
머릿속에서 넋이 나간 상태에서도 훤은 그때의 상황이 이해가 되고 있었다. 상왕에게 있어서
염은 훤을 위해 아껴둔 인재였다. 훗날 훤이 왕이 되었을 때 그 옆을 보좌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리해서까지 세자시강원의 문학으로 제수를 하였고, 미래의 왕과 미래의 신하가
우정을 쌓을 수 있도록 미리 터를 마련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염의 뒤를 버티고 있던
홍문관대제학과 사림세력은 외척세력에 밀린 힘의 균형을 이뤄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외척들에게 있어서 염이라는 나이 어린 사내는 미래를 위협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준비하고 있던 상왕의 계산에서 어긋났던 것이 민화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귀애하는 딸이라고 해도 그는 염을 의빈으로 들이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욱더 날개를 달아주려던 것이 연우의 세자빈간택이었을 것이다.
세자빈의 오라비에게 주어지는 막대한 권한을 다른 누구도 아닌 염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염이 아니라 아들인 훤과 조정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욕심 하나
없이 순수하게 염만을 원하는 민화의 사랑은 궁지에 몰린 외척들의 수장인 왕대비윤씨에게
있어선 더없는 기회였을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연우를 죽이는 일은 단지 세자빈의
자리만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사림세력의 조정 진입의 물꼬를 막는 것이었다.
세자빈이 죽고, 염과 홍문학대제학이 걸어야 할 길은 죽음이었을 것이었기에 상왕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살리려고 했을 것이고, 그들과의 타협점이 살려두되 의빈으로 염의 날개를
꺾는 것이었다. 상왕은 이 모든 음모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척들을 처결하자면
자신의 어미인 왕대비윤씨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민화까지 엮여들어 가야했고,
결국 상왕은 눈물을 흘리며 이 모든 일을 덮지 않을 수 없었다. 외척들은 그렇게 안전하게
상왕의 약점인 민화를 방패막이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
이루어졌다. 공교롭게도 홍문관대제학은 상왕보다 먼저 죽어주었고, 염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금고를 당한 상황이고, 사림세력들은 초야로 숨어들어 가버렸다. 그들의 의도와 다르게
진행된 것이 있다면 훤이란 존재뿐이었다. 외척들의 비호 아래에만 있었다고 생각했을 훤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 훤은 그 당시 상왕이 자신의 사랑과 민화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이란 것은 짐작했지만, 또 다른 자식인 양명군의 사랑까지 그를
괴롭혔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뚜렷하게 알게 된 것은 그 당시 연우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기에 외척들에게서 이겼다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철저하게 그들의 음모에 패배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훤은 마지막의 종묘정전에서 보았던 부왕을 떠올렸다. 외척에게 왕권을 유린당하고 거죽만
남아있던 상왕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들에게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 당부하던 상왕의
비탄을 떠올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연우가 살아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미리 왕대비윤씨와 민화를 용서해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었다.
“네가······, 네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아느냐?”
민화는 울음을 멈추고 비탄에 잠긴 목소리로 묻는 훤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소리는 잦아들어
있었지만 눈물은 더욱 굵어져서 얼굴을 타고 떨어지고 있었다. 민화가 훤의 절망스런
눈빛을 보며 말했다.
“똑같은 눈빛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말씀을 아바마마도 제게 하시었사옵니다.
그때의 저는 모른다고만 답하였지요. 왜냐하면 정말 몰랐으니까······. 그 후 서방님의
눈물을 보았사옵니다. 누이가 가고 없는 별당에 홀로 앉아 피 같은 눈물을 삼키는 서방님을
보고서야, 제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알게 되었사옵니다. 제 손으로 서방님의 인생을
처참하게 부수어 버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서방님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요.”
“이 바보 같은 것아! 아바마마껜 더한 잘못을 지었다! 홍문관대제학에게도 죽을죄를 지은
것이다! 내게도! 연우낭자에게도!”
“전 그때 생각하였던 것이 있었사옵니다. 천당에서 몇 억년의 세월을 보내기 위해 다른
사내의 품에서 몇 십 년을 사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지옥불 속에서 몇 억년의 세월을
보내더라도 서방님의 품속에서 단 며칠을 사는 것이 좋은가! 저는 후자를 택했던 것이고,
그때의 선택을 지금도 후회하지는 않사옵니다. 또 다시 저에게 선택을 하라시면 저는
주저 없이 서방님을 택할 것이기에······. 저의 지옥불 속의 몇 억년이,
다른 이들의 천당에서의 몇 억년 보다 훨씬 행복할 것이옵니다.”
민화의 확고부동한 태도에 훤의 어깨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연우의 어깨도 체념과
더불어 힘없이 떨어졌다. 연우의 눈에선 눈물도 말랐고, 덧없는 미소만이 입가에 떠올랐다.
하지만 훤은 체념하지 않았다.
“너를 벌할 것이다! 아무리 누이라 하더라도! 너를 벌하지 않으면 그 일에 가담한
외척들의 죄도 물을 수 없기에!”
민화는 눈물과 함께 고개도 떨어뜨렸다.
“저를 벌하시는 것은 받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제 뱃속에 있는 풍천위의 씨를 같이
벌하지는 마시오소서.”
“뭐? 방금 무어라 한 것이냐?”
“오늘 입궐한 것은 오라버니를 뵈옵는 것과 겸사겸사로 내의원에 다니러 온 것이옵니다.
있어야 할 환경(環經, 왕족의 달거리)이 없어 민상궁이 혹여 모른다 하여······.
진맥을 받았사온데, 태기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옵니다.”
훤의 표정엔 아무 것도 담겨진 것이 없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헤아릴
머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민화는 씩씩하게 눈물을 닦았다. 갑자기 염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염을 잃을 것만 같아 불안해서 어서 그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불안한 눈을 두리번거리며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나가버렸다. 그렇게 가고 없는 민화의 자리엔 울분을 토해내는 훤의 비명만이
가득 채워졌고, 운은 아픈 희망을 가지고 연우가 있는 방의 문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