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어둠 속에 여전히 의문이 숨겨져 있는 상황에서도 아침은 오고 또한 날은 밝았다.
밤사이 한 숨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이들은 비단 강녕전에 모여 있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염도 마찬가지로 뜬눈으로 새웠다. 청지기가 만류하지 않았다면
야밤에 흙투성이가 된 옷차림으로 이곳 강녕전으로 달려왔을 것이다. 하룻밤을 백년 밤처럼
보내고, 날이 밝을 즈음에 눈이 퀭한 염이 강녕전에 나타나 알현을 요청했다.
마침 모두가 물러가고 눈을 붙이기 위해 누우려던 훤에게 내시가 다가와 귓속말로
그의 알현을 알렸다. 느닷없는 염의 입궐로 훤은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시선은 저절로
연우가 있는 방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도 연우의 일을 눈치 챈 것을 직감했다.
내시가 재차 물었다.
“어찌 하올련지요?”
훤은 대답 대신 방문을 향해 말했다.
“혹여 잠에 든 것이오?”
“상감마마께옵서 아직 들지 않은 곳에 소녀가 어찌 먼저 들어 있으오리까?”
훤의 눈가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이제 더 이상 액받이무녀가 아닌 그녀이기에 같은 시간에
잠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 교태전을 내어 줄 수는 없지만, 옆에 무녀가 아닌
한 여인으로 둘 수 있게 된 만으로도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방문을 열겠소.”
미리 통보하는 것도 미래의 중전에 대한 예우였다. 훤의 말이 끝나자, 방 앞을 지키던
궁녀들에 의해 방문이 스르르 소리 없이 열렸다. 흐트러짐 없이 정갈함 그대로 앉은 연우의
모습이 보이자, 방안에 있던 내관들과 궁녀들이 모두 엎드려 예를 올렸다. 엎드린 이들 중,
누구보다 상선내관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세자시절의 훤을 보필하면서부터
연우란 여인은 그에게도 특별한 존재였다. 왕에게 하나밖에 없는 중전이라면 그에게도
하나밖에 없는 왕비였다. 감격에 겨운 그와는 달리, 더 이상의 슬픔조차 느낄 수 없는
차가운 심장으로 몸을 숙인 이는 운이었다. 운의 차가운 심장의 고통은 연우에게로 가지 않고
훤에게로만 가서 닿았다. 운도 왕이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속눈썹이 그늘져 떨렸다. 이런 흐트러진 마음으론 더 이상 왕의 옆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도 짙어지고 있었다. 훤은 운의 마음을 외면하며 말했다.
“그대의 오라비인 풍천위가 왔소. 만나보고 싶지 않소?”
평소 변함없는 모습만을 보이던 그녀의 손이 화들짝 놀라 잠시 흐트러졌다. 훤이 보고 싶었던
것만큼 보고팠던 이가 오라버니였다. 그리고 이 둘은 합한 것 보다 더 보고팠던 이가 어머니였다.
보고 싶은 마음을 털어내려는 듯 연우의 고개가 세차게 저어졌다. 내어젓는 고개를 따라 눈물도
갈팡질팡하며 흘러내렸다.
“만나선 아니 되옵니다.”
“왜?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이오. 만나고 싶었을 것 아니오? 그리고 사이좋던 남매였는데,
석강이 끝나면 어김없이 그대에게 달려가던 풍천위를 내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오라버니의 물음이 건너온다면 답할 말이 없기 때문이옵니다. 오라버니가 슬프지 않도록
부디 도와주시옵소서. 슬픔은 소녀만이 가지겠사옵니다.”
훤은 위로의 말을 이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망설임 끝에 방문을 닫으라는 손짓을 했다.
방문 뒤로 연우의 모습이 사라지자 훤은 자세를 가다듬고 염을 불러들이라는 명을 했다.
방안에 들어와 큰 절을 올리는 염의 불안한 표정이 이미 연우를 찾으러 왔음을 훤히
내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절을 마치고 앉아서도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훤은 남매의 가운데에 앉아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른 아침에 풍천위가 어쩐 일로 나를 찾아왔소?”
“아, 그것이······. 성후 미령하신 것은 어떠하시옵니까?”
염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훤을 지나 방문을 뚫고 연우의 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삼키다 넘쳐흐른 연우의 소리 없는 울음이 훤의 등 뒤로 비수처럼 꽂혀들었다.
“좋아졌소. 정경부인의 건강은 어떻소?”
연우가 궁금해 할 것을 대신 물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염은 연우의 느낌을 찾느라 분주하여
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건성으로 답했다.
“네, 건강하옵니다. 무엇보다 상감마마께옵서 강령하시다니 안심이 되옵니다.”
염은 대충 성의 없는 말을 하고서는 앞의 왕의 존재는 무시하고 더욱 심하게 두리번거렸다.
염이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도 방문 뒤에 숨어 있는 연우의 흔적을 느끼기는 역부족이었다.
이성 없이 계속되는 그의 불충에도 훤은 가만히 기다렸다. 염은 왕의 침묵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송구하옵니다. 저······, 혹여 소신에게 숨기는 것이 계시옵니까?”
“풍천위가 궁금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시오.”
“······궁금한 것은 없사온데······.”
“나 또한 숨기는 것은 없소.”
방문 너머에서는 연우가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오라버니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심정이 지금 어떤지 헤아릴 수가 있었다.
연우는 오라버니가 어떻게 변했는지, 아름다운 미소는 그대로인지 방문 틈을 만들어 조금이나마
훔쳐보고 싶었지만 그 욕구조차 잘라내었다. 그리고 방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눈물줄기가
너무나 굵어,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훤은 염의 간절한
눈빛이 마치 연우의 눈빛으로 보여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리 걸음하기 힘들었을 것이오만, 지금 몸이 좋지 못해 누워야겠으니 그만 물러나도록
하시오. 풍천위가 와주어 기쁘오.”
“저······.”
훤은 몸을 돌아 누워버렸다. 서로가 보고파 애끊는 남매를 만나게 해줄 수 없는 자신의
미약함에 화가나 이불마저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우가 울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존경하는 염의 심장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연우의 이름을 돌려주지 못하는 지금은 둘을 만나게 해줄 수가 없었다. 연우가 그의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것처럼 훤도 그 어떤 실마리를 풀어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연우의 시신을
무덤에 넣었던 그 고통의 몇 배가 다시 염을 덮치고 말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 고통에 잠식당해 있을 것이었다. 단지 지금의 고통 뒤에 더 큰 슬픔의 해일이 덮치기
전일뿐이었다. 염은 도움을 구하는 눈길로 운을 보았다. 그의 눈빛은 연우가 있는 곳을
집요하게 묻고 있었다. 하지만 운조차 염에게 그 어떤 답의 눈빛도 되돌려 주지 않았다.
염이 내쫓기듯 강녕전을 나가자, 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우가 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얼굴을 감싸 쥐고 눈물을 참고 있는 연우를 힘껏 끌어안았다.
“내 곧 만나게 해드리리다. 그대의 어머니도 만나게 해드리리다. 곧! 곧!”
훤은 자신의 말에 안도하기는 거녕 더욱더 두려워하는 연우를 느낄 수가 있었다.
“두렵소? 무엇이 그리고 그대를 두렵게 하는 것이오? 무엇이 두려워 그대의 오라비조차
아니 만난다 하는 것이오?”
“버티고선 미래가 두렵고, 운명을 안은 현재가 두렵고,······소녀를 할퀴고 가버린
과거가 두렵사옵니다.”
“그대를 할퀸 과거를 알고 있는 것이오? 그것을 내가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오?”
연우는 고개를 젓지도, 그렇다고 끄덕이지도 않은 채 훤의 품안에 파고들었다.
이미 훤의 품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욕심은 다 채워진 것과 다름없었다.
“상감마마를 한번만 뵈옵고자 하는 욕심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사옵니다. 소녀, 상감마마께오서
어쩌다 한번 찾으시는 작은 방에 있어도 과하다 감읍할 것이오니, 더 이상은······,
부디 더 이상은······.”
“세상의 그 어떤 사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안고프지 않겠소만, 나보다 더 간절한 사내는 없을
것이오. 난 그대를 안고 싶소. 그리고 그대와의 사이에서만 원자를 보고 싶소.
그러니, 나의 중전이 반드시 되어주어야겠소!”
흔들림 없는 훤의 목소리에 연우의 두려움은 한층 더 깊어졌다. 어쩌면 하늘늑대별에 덮인
어두움의 원인이 자신의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영원히 무덤 속에서 나와선
안 되는 것인데, 무덤 속에서 나왔어도 죽은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버젓이
살아 경복궁으로 걸어 들어왔기에 벌어지고 있는 혼란은 모두 자신의 탓이라 생각되었다.
훤은 거대한 품으로 연우의 두려움까지 안았다. 연우가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녀의 가족인, 염과 상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그마한 의심이 들었고,
그것은 곧장 그녀와 더불어 훤의 두려움도 되었다.
내쫓기듯 나온 염은 우두커니 월대 아래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강녕전의
위용을 보고 있었다.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 틈에서 염은 홀로 정지된 시간 속에 있는 듯,
다시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추위 속에 하염없이 있었다.
추위에 얼어붙은 마음은 연우가 살아있다는 기쁨도, 만나지 못하는 슬픔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염에게 있어서는 마치 지금이 꿈속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차차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연우의 처지가 지금 어떠하기에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양명군은 말을 타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오직 말의 발굽에만 길을 물었다.
훤과 연우, 염, 그리고 운이 혼란하다면 양명군 또한 이들에 못지않게 혼란했다.
오랜 시간 한양 일대를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고 나서야 말이 지나던 길이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그리고 가슴이 먼저 쓰린 감정을 잡아채는 곳, 정업원(주로 후궁이나 왕족이 기거하던
상류층의 비구니 사찰)이었다. 정업원! 지난 왕들의 살아있는 후궁들이 생매장되어 있는 곳.
왕의 정비는 남아 대비나 왕대비가 되어 전을 하사받아 궐내에 머무르는 것과는 달리,
일개 후궁들은 반 강제로 비구니가 되어 정업원에 갇혀 수절을 감시당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정업원에 양명군의 모친인 희빈박씨도 있었다.
양명군이 온 것을 전해들은 박씨가 작은 탑 앞에 서있던 자신의 아들에게로 다가왔다.
회색의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단정하게 쪽진 머리를 한 자신의 어머니를 보자 양명군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나마 그녀의 머리가 삭발이 아닌 이유는 아직 양명군이 차기
왕의 서열에 있기 때문이었다. 선왕이 살아있을 때의 화려한 차림새의 어머니와 지금의
초라한 모습이 양명군의 가슴에 겹쳐져 선왕에게 버림받은 설움을 새롭게 했다.
박씨가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어찌 기별도 없이 오시었습니까, 양명군?”
“지나던 길이라 기별할 수 없었습니다.”
박씨의 애처로운 손길이 뒤로 젖혀진 아들의 갓을 바로 잡아주며 끈을 매어주었다.
그리고 온화한 부처와도 같은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에게 일부러 흐트러진 모습만을 보이기도 힘드시지요? 이 어미가 그런 양명군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알아주길 바래요.”
“욕을 듣는 것이 그리도 자랑스럽습니까?”
오늘따라 묘하게 서슬이 서있는 말투였다. 박씨의 놀란 손길이 갓끈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양명군의 옷깃을 여며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하게 말했다.
“이 어미가 왜 이곳에 미련 없이 걸어 들어왔는지 똑똑하니까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이 어미는 일찍이 궐 밖에서 홀로 늙어가야 했을 목숨이었지만, 상왕마마의 은덕으로 양명군을
보았습니다. 그 이상의 욕심은 죄입니다. 이 어미는 지금의 상감마마의 강령을 위해
기도하고 있답니다. 양명군, 욕심은 아니 됩니다.”
“어머니는 아십니까? 제가 무엇을 욕심내었었는지? 아마도 모르실 것입니다!”
“······무엇을 욕심내었습니까?”
“과거에 내어보았던 욕심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박씨는 슬픈 눈동자로 호소하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무엇에 웃고, 무엇에 행복하고, 무엇에 가슴 아파했는지, 지난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아는 것이 없었다. 아무리 아들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신의 부덕 탓인지 아들의 마음까지 다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혼자만 감정을
삭이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박씨는 지금도 아들의 슬픈 눈동자가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지
헤아리지 못했다.
“과거일지언정 욕심은 아니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저는 양명(陽明) 즉, 밝은 햇볕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햇볕이 밝아도 해와는 염연히
다른 것 아닙니까? 상왕께오서 정하신 것입니다.”
양명군은 허탈하게 큰 소리로 웃으며 어머니에게서 몸을 돌렸다. 뜰을 지나 정업원의
대문을 나설 때까지 양명군의 허한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한
말의 등에 올라타고선 웃음을 그쳤다. 그리고 젖어드는 눈길로 먼 북쪽 하늘을 보았다.
오직 훤의 아버지이기만 했던, 그리고 단 한순간도 자신에게 아버지였던 적이 없었던
전왕이 죽어 간 곳, 북망산천을······.
양명군은 10살에 양명군으로 봉해졌고, 그해 종학에 입학하였다. 그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
7살에 일성대군으로 봉해지면서 세자책봉례를 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나이였다.
양명군의 영특함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도 그때를 즈음했을 때였다.
종학에서의 수업은 종친들이 모여 있는 것이므로 수업이란 것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때때로 양명군의 삼촌벌인 어린 왕자들끼리 옷을 쥐어뜯고 싸움이 나도 수업을 담당한
박사들이 감당하기엔 그들의 품계가 너무나 높았다. 오직 세자 하나만을 교육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세자시강원과는 천지 차이였던 것이다. 그중 양명군은 특별히 뛰어난 학생으로
박사들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서서히 대신들의 입에도 오르내리게 되었다. 칭찬을 받는
것이 좋았던 이유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미소를 보여준 적이 없는 아버지가 어쩌면
이 소식을 듣고 칭찬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열심히
공부했는지도 모른다.
<소학>을 떼고, <자치통감>까지 마친 후, <대학>을 공부하고 나서야 사정전에서 왕의 앞에
겨우 서게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 앞에 그동안 배운 것을 보이고 칭찬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들떠 잠을 설쳤던 나이가 13살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그리 환한
미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익히 양명군의 영특함을 들었을 것인데도, 영특하다는 자체가
불쾌한 듯, 심지어 양명군 자체가 불쾌한 듯 차가운 인상으로 질문을 던졌다.
“대학을 배운다고 들었다. 글자만 안다고 해서 배운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니, 그 뜻까지
알아야 비로소 배웠다 할 것이다. 물건은 근본과 끝이 있고, 일은 시작이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바를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 이것의 해석을 말해보아라.”
양명군은 아버지의 태도가 내심 서운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기에 또록또록하게 대답했다.
“덕을 밝히는 것은 근본이 되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끝이 되며, 그칠 줄 알면
시초가 되고, 터득할 수 있는 것은 끝이 되는 것이니, 근본과 시초는 먼저 할 것이요,
끝과 마침은 뒤에 할 것이란 뜻입니다.”
“덕을 밝힌다는 것이 무엇이냐?”
“대학에서의 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왕의 근본은 덕을 밝히는 것이고,
이것은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끝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라 생각하옵니다.”
“참으로 건방지구나!”
스스로 대답을 잘했다고 생각할 즈음에 들려온 왕의 호통은 어린 양명군의 머리를 심하게
흩어놓았다. 자신이 혹시나 잘못 답했나 싶어 되짚어 보았지만 틀리게 답한 것은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양명군에게로 왕의 살벌한 호통이 이어졌다.
“너의 위치가 무엇이기에 불충하게도 왕의 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냐! 박사! 감히 일개
왕자군에 불과한 이 아이에게 제왕의 학문인 대학을 자세히 가르치는 저의가 무엇이냐?”
단지 아버지의 칭찬만을 듣고 싶었던 양명군에게 날아온 것은 이렇듯 잔인하게 그의 작은
기대조차 짓밟는 왕의 노여움뿐이었다. 계속되는 왕의 노여움이 잦아들고 환한 미소가
떠오른 것은 뒤이어 동생, 훤이 나타나서였다. 훤은 왕에게 먼저 절을 올리고
형인, 양명군에게도 방긋 웃는 웃음을 보내왔다. 사정전 안의 살벌한 기운을 눈치 챘기에
이를 무마시키고자 더 귀여운 웃음을 보인 것이었다. 양명군은 훤의 뒤로 수많은 스승들이
따라 앉는 것을 보았다. 달랑 한명의 스승만을 대동하고 들어온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차이였다. 더 없이 아버지다운 왕의 목소리가 훤을 향했다.
“우리 세자는 요즘 예학에 뛰어나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짧은 시간에 소학을 마쳤다 들었다.”
“네! 스승들 덕분이옵니다.”
“그래, 소학 중에 우리 세자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무엇이냐?”
“공자의 말 중에, 부모가 나를 완전하게 낳아 주셨으니 자식 된 나도 그 몸을 완전하게
보전하여 부모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이것을 효도(孝道)라고 하는 것이다. 라는 구절이옵니다.”
별 대단한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의 웃음소리가 사정전을 뒤흔들었다.
“하하하. 세상의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효이니, 소학의 많은 내용 중에 그 대목이 가장
좋다하는 우리 세자야 말로 이미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음이야. 공자의 말 중에
또 좋아하는 구절이 있느냐?”
“근본이 상하게 되면 거기에 따라서 가지도 죽게 되니, 먼저 근본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구절도 좋아하옵니다. 소학에 나오는 글들은 모든 이가 익혀서 나쁠 것이 없다 생각되옵니다.”
“하하하. 우리 세자를 잘 가르친 춘방(세자시강원)과 계방(세자익위사)의 관리 모두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갑자기 왕의 말이 중단되었다. 가만히 앉아있던 양명군이 그만 비참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에 놓여있던 대학 서책을 왕을 향해 던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비록 왕에게까지 도달하기엔 그 길이가 턱없이 길어 중도에 떨어져 내렸지만, 사정전에
있던 모든 이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양명군은 일어선 그대로 사정전을 나가버렸다.
그의 뒤로 분노어린 왕의 호통이 줄곧 따라왔다.
“저 발칙한 놈 같으니! 당장 저놈 스승의 곤장을 치도록 하라!”
훤이 뒤따라 달려와 양명군의 팔을 잡지 않았다면 그는 경복궁 밖으로 영원히 달아나 버렸을 것이었다.
“전 형님이 좋습니다.”
대뜸 던지는 훤의 말에 양명군은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동생의 따뜻한 눈을 보았다.
“제가 좋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형님은 아바마마를 꼭 닮아 현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바마마를 닮다니요? 오히려 세자저하께오서······.”
훤은 방긋이 웃어보였다. 둘은 다른 듯 닮은 형제였다. 훤은 양명군의 팔을 여전히 잡은
채로 말했다.
“아바마마께 아무리 화가 나도 저에게까지 화내지는 말아주십시오.”
양명군은 유일하게 동생만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듯 해서, 아버지한테 상처 입은
마음이 위로가 되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양명군은 아바마마와 소자란 단어 대신, 상감마마와 소신이란
단어만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종학의 박사들과 대신들은 양명군이 책을 던진
일만 입에 담았고, 더 이상 그의 영특함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양명군의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만, 홍문관대제학의 집에 출입하면서부터 어느덧
아물어져 갔다. 염과 권력에서 떠나 자유로이 학문을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았고,
운과 검술을 나눌 수 있음이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자신이 갈구하던
아버지의 정을 홍문관대제학에게서 나눠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부성애는 양명군이 원하던 바로 그것이었기에 스승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그를 따랐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되고 싶었다. 처음에 홍문관대제학의 여식인 연우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이러한 마음 때문이었다. 어차피 왕에게서는 정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세자의 아버지에 지나지 않음을 어린 나이에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양명군은 몇 년 동안 염의 집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지만, 연우의 머리털 하나도 구경하지
못했다. 한번쯤은 실수로라도 만날 수 있었을 텐데도 쉽사리 만나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한번만 보여 달라는 청에도 염의 눈썹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양명군이
선택한 방법은 월장이라는 것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지기 전에 인사하고 집을 나가서는
곧장 담을 넘기 시작했다. 그동안 드나들면서 익힌 집의 구조는 눈을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였기에 별당까지 침범해 들어가는 것은 아주 쉬웠다.
“설이냐?”
마지막 담을 넘어 별당의 작은 뜰에 발을 내리자마자 들려온 여인의 조용한 목소리였다.
양명군은 목소리의 주인이 연우임을 확신했다. 그가 연우를 찾아볼 필요도 없이 발자국 소리에
그녀가 먼저 기척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연우는 방안에 앉아 여종이라 생각해서 방문을
열고 뜰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여종이 아니라 낯선 남정네가 월장을 한 것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놀란 그녀는 급하게 방문을 닫으려고 했고, 닫히는 문에 더 놀란 양명군은
재빨리 닫히는 방문을 잡았다.
“잠깐! 난 이상한 사람이 아니외다!”
“월장한 사람이 이상하지 않다면 어느 누굴 이상한 사람이라 한다더이까?”
“난 이 나라의 왕자인 양명군이오!”
“왕이라 한들 이러한 것은 예가 아닙니다.”
양명군은 순간 웃음이 나왔다. 말투가 염의 판박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연우의 호기심이 일어났다.
“어찌하여 그리 웃으십니까?”
“어여쁜 여인의 얼굴에 청렴한 선비의 말투가 너무나 잘 어울리기에 웃은 것이오.
염의 누이가 확실한 것 같소.”
양명군은 여전히 방문을 강제로 잡은 상태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식으로 인사하오리다. 난 양명군이오.”
“내당의 여인에게 통성명을 하자는 말씀이옵니까?”
“······아니 될 일이긴 하오만······. 알겠소. 나만 밝히는 것으로 만족하고,
내 그대 이름이 허 연우란 것은 모르는 것으로 하겠소이다.”
갑자기 닫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연우의 손이 방문을 놓았다. 양명군은 연우의 눈길이
자신의 뒤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온전히 드러난 그녀의 모습에 넋이 나가, 등 뒤에서 그를 노려보는 염의 뜨거운 불길은
미처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염이 양명군의 팔을 죄인 잡듯이 잡았다.
그리고 양명군을 질질 끌고 나가는 순간에도 그의 눈동자는 연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다음부터 어떻게 해서든 연우의 얼굴을 보고자 수시로 월장하는 양명군과, 이를 막고자하는
염의 끊임없는 술래잡기가 시작되었고 가끔씩 목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양명군의 월장을
대제학까지 나서서 말려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깊어지는 마음은 더더욱
말릴 수 없는 일이었다. 불행히도 이 당시 이미 연우와 훤 사이에 서찰이 오고가고 있을 때였다.
양명군은 자신의 혼기가 훨씬 지나있음을 알고 있었다. 세자를 외척과 혼인시키지 않으려는
왕의 고심 때문에 세자의 혼기가 늦어지고 있었고, 또한 자신의 혼기까지 더불어 늦어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왕이 양명군의 혼기 따위는 생각조차 안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도 딱히 결혼이란 것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연우를 알고 나서부터는 달라졌다.
무언가 뒤쫓기는 듯한 불안함이 줄곧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도 연우를 만나고 난 이후부터였다.
양명군은 이러한 정체 모를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그동안 따로 만난 적이 없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강녕전에 있던 왕은 사정전에서 보던 왕과는 조금 달라보였지만,
무뚝뚝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양명군이 이곳에 어쩐 일이냐?”
오랜만이라는 말이나, 다른 안부인사 없이 첫 말부터가 이유를 묻는 말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서운함에 몸서리를 치며 입을 다물어 버렸겠지만, 이번에 찾은 용건은
이런 정도는 넘길 수 있게 했다.
“소신, 상감마마께 내알(은밀한 청)드릴 것이 있어 들었사옵니다.”
양명군이 청을 드리러 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놀랐는지 왕의 인상은 한동안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입을 열었다.
“말해보아라.”
“소신의 가례에 대해 듣고 싶사옵니다.”
왕의 의아한 표정을 보며 양명군은 다시 말했다.
“소신, 언제가 되어도 상관이 없사오나 반드시 안사람으로 해주시길 바라는 여인이 있사옵니다.
부디 소신의 작은 소원을 들어주시옵소서.”
왕은 양명군의 작은 소원이라는 것이 귀여웠던지, 그리고 정말 소박한 청이라고 생각했는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느 집안의 처녀냐?”
양명군은 왕의 미소에 어리둥절했지만 가슴 한구석에서는 감격으로 아려왔다. 말도 안 되는
청이라 내쳐질 것을 각오하고 왔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양명군은 작은 기대를 가지고 말했다.
“홍문관대제학의 여식인 허 연우란 여인입니다. 아름답고 서책 또한 많이 읽은 여인으로
인품이 오라비인 허 염 문학과 똑 닮았사옵고, 또······.”
“그 여인에 대한 칭찬으로 밤을 샐 것이냐?”
양명군은 웃고 있는 왕의 표정에서 안심을 했다. 홍문관대제학의 여식이라면 왕도 흔쾌히
승낙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왕의 승낙이 내려졌다.
“알았다. 내 세자의 가례가 끝나면 생각해보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동안의 양명군의 맺힌 한이 녹아내린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날 느낀 감격이 부서진 것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세자의 가례를 위한 가례도감의 설치에 가장 기뻐했던 이는 바로 양명군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월장은 자제하고 있었고, 혼자만의 비밀에 들떠있었다. 왕의 약조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에 그에게 있어서 연우는 이미 자신의 아내가 된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 기쁨은 비현각에서 세자를 만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갓 목욕을 마쳤는지 젖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무언가를 찾고 있던 세자에게 인사를 걸었던 그 순간, 세자 또한
연우를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염의 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집요하게
물어보던 세자의 눈은 이미 사랑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급하게 왕에게로 달려갔다.
다시 한 번 약조를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양명군은 강녕전 뜰에서 왕이 집무를 끝내고 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 뒤에 나타난 왕은 다른 그 어떤 때보다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왕의 뒤를 따라 강녕전 안으로 들어가는 양명군의 발걸음은 애처로울 만큼
떨고 있었다. 방에 앉자마자 양명군의 다급한 입이 먼저 열렸다.
“상감마마, 소신에게 하신 약조를 기억하고 계시지요?”
“약조라니? 내가 너에게 무엇을 약조하였단 말이냐?”
왕의 차가운 목소리가 양명군의 불안함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양명군은 다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과 홍문관대제학의 여식과의 가례······.”
“그 일이라면 난 너에게 약조한 적이 없다.”
“네? 하지만 분명······.”
“생각해보마고 했었지, 성사시켜주겠다 하지는 않았잖느냐?”
양명군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왕에 대한,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은 막을 수가 없었다.
비단 지금의 억울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가슴에 쌓여있던 한이 한꺼번에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던 것이었다. 왕은 양명군의 눈물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사내의 그릇이란 것이 왕이 되어야 할 자가 있고 신하가 되어야 할 자가 있는 것처럼,
여인 또한 그러하다. 중전이 되어야 할 그릇과 군부인(왕자군의 처)이 되어야 할 그릇 중에,
애석하게도 홍문관대제학의 여식은 중전의 그릇이라 이리 된 것뿐이니 원망은 하지 말라.”
양명군은 터져 나오는 울분과 비명을 꼭꼭 씹어 삼켜야만 했다. 왕이 되어야 할 그릇과
신하가 되어야 할 그릇은 누가 정하는 것이며, 중전이 되어야 할 그릇과 군부인이 되어야
할 그릇은 또 누가 정하는 것이냐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 말까지 씹어서 삼켰다.
말에 올라탄 채로 하염없이 북망산천을 보고 있던 양명군은 그 당시 내어지르지 못했던
울분을 또다시 삼켰다. 염과 운, 심지어 어머니까지 알지 못하는 양명군의 비밀이었다.
오직 전왕만이 알고 있었지만, 그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양명군이 내민 손은
잡아주지 않고 훤의 손만을 꼭 쥔 채 가버리고 말았다. 양명군은 또다시 말의 발굽에만
길을 물으며 씁쓸하게 웃음 띤 입으로 중얼거렸다.
“아바마마. 금상에게서 중전이 되지 못한 연우낭자를 빼앗고, 용상마저 빼앗아 궁원제향에
제주가 되어 아바마마의 신주 앞에 술을 올리게 되면,······소자는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