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강녕전에는 관상감의 세 교수와 혜각도사, 장씨도무녀가 마주보고 앉아서 부적을 확인하고
있었다. 방안 곳곳을 밝힌 촛불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과 똑같이 그들의 눈동자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훤은 연우를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방에 숨기듯 두었다.
마치 강녕전이 교태전을 뒤에 두고 보호하듯 서 있는 것처럼 훤도 자신의 뒤에 연우를 둔 것이었다.
그리고 차마 운의 눈길은 닿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닿아지지 못해 돌린 옆얼굴이
그녀를 느끼는 것조차 싫은 마음이 있었다. 운의 스산한 옆얼굴을 보는 것도 운을 아끼는
마음과 더불어 훤을 괴롭히고 있었다. 훤은 애써 머리를 털고 눈앞에 앉은 이들의 눈동자의
떨림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기력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훤의 건강이 비록
조금은 나아졌다고는 하나, 이따금씩 앉아있는 몸이 휙휙 꺾이곤 했지만, 그들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신경전은 뚜렷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부적이 무엇인가?”
훤의 물음에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비밀,
그것으로 인해 각자가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데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었던 것이다. 훤조차
어긋나게 만드는 비밀들의 실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우선 이것부터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르긴 해도 그 부적은 나를 해치려는 것이 분명한데······. 나에겐 액받이무녀가 있다.
헌데 어찌 그 여인은 두고 내가 아픈 것이냐? 누가 먼저 설명할 것이냐?”
혜각도사가 먼저 몸을 엎드려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것보다는 우선 이 부적들이 어떻게 어소(御所, 왕이 있는 곳)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부터 살피시어야 하옵니다.”
“그 또한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내가 궐을 비운 사이겠지. 아! 그렇게 생각하면
합궁일에 교태전에서 쓰러졌던 것을 보면 아닌 것도 같고. 그날은 그럼 궐 밖에서 누군가가
주술을 부린 것인가?”
혜각도사가 멈칫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지리학교수가 몸을 엎으려 말했다.
“궐 밖에서 부리는 주술은 절대 경복궁 내에 영향을 미칠 수 없사옵니다. 분명 그날의 주술은
다른 것과는 다른 것이 확실한 것이라 생각되옵고, 또한 온양행궁에 다니어 오신 이후와
이번의 일도 각기 다른 기운이옵니다. 하여 관상감의 천신들이 살의 본질을 지금까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옵니다.”
“그 말은 세 주술이 모두 다른 자의 소행이란 말이냐?”
“그 또한 알 수가 없음이옵니다.”
훤은 갑갑한 심정으로 장씨를 보았다. 입을 다문 채 어떠한 표정도 없는 날카로운 눈매.
그녀는 무언가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감추어야 할
비밀들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 분명했다. 훤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번득이며 스치는 생각을 잡았다.
“잠깐! 지리학교수 들어라. 방금 궐 밖에서 부리는 주술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하였는가?
그것이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이옵니다. 이곳 경복궁은 곳곳에 해악한 주술들이 범접할 수 없도록 지키는
것들이 있사옵니다. 근정전의 사신과 십이지신, 서수의 상들도 그러한 예이옵니다.
또한 경북궁의 구조가 정통적인 오문삼조식(중국과 우리나라의 궁궐구조의 원칙)에서
조금씩 어긋나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광화문 앞의 육조거리(육조와 중요관서들이
마주보고 선 가장 큰 길. 오늘날의 세종로)를 통해 주술이 들어오는 것을 남쪽으로 황토현이란
작은 언덕이 막아주게 되어 있사옵고, 동시에 젊은 어미의 젖산인 백악산이 어미가 자식을
보호하듯 뒤에서 막아주고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그날 궐내에서 누군가가 주술을 부렸단 뜻인데, 그날의 궐내 명단을 조사해
보면 원흉을 찾을 수 있을 것 아니냐? 그것과 오늘 자객이 깨어나면 그들을 심문하여
대조를 하면 되겠다!”
훤의 가슴에 빛이 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빛이 미처 번지기도 전에 어둡게 만드는
이가 있었으니, 이가 혜각도사였다.
“상감마마! 천신을 죽여주시옵소서!”
훤은 장씨를 보던 눈빛을 혜각도사에게로 돌렸다.
“그날의 살수는 천신이 보낸 것이었사옵니다.”
훤을 비롯해서 침전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혜각도사는
상왕의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고 또한 훤이 믿고 있는 측근 중의 한명이었다. 그렇기에
역모와 다름없는 그의 발언에 모두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훤도 처음엔 충격을
받았지만 차차 의아해지고, 끝내는 이것이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까지 도달했다.
“생각이 나는군. 그날 교수들이 말했던, 살은 살인데 살과는 다르다는 묘한 말의 뜻을!
혜각도사! 너는 나를 죽이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이유를 말하라. 혹여 나를 위한 일시적인
살이었느냐?”
“상감마마를 윗잡는 살임과 동시에, 나아가 종묘사직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것이었사옵니다.
천신을 죽여주시옵소서.”
훤은 혜각도사의 말을 파악했다. 그날 살을 받아 아팠기에 왔던 기적! 그것은 월, 즉 연우와의
재회였다. 혜각도사가 다시 말했다.
“한번 끊어진 인연은 돌이킬 수 없듯이, 한번 이어진 인연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것이옵니다.
이어져선 안 되는 인연이 이어져 버리면, 그 전에 끊어진 인연을 두 번 다시 이을 수 없는
것이 되옵기에 그리한 것이옵니다.”
훤은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원래 하늘이 정한 인연은 연우였지만, 인간이 이 인연을
끊어내고 인연이 아닌 중전윤씨와 이어 놓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날 중전윤씨와의 합방이
이뤄져 버렸다면, 인간이 저질러 놓은 인연이 기정사실화 되어버려 두 번 다시는 연우와의
인연이 닿지 못했을 것이란 뜻이었다.
“고맙구나, 혜각도사.”
이번엔 왕의 말에 사람들이 놀랐다. 참수를 시켜도 시원찮을 마당에 감사의 인사라니.
둘 사이에 오고 간 깊은 뜻을 알아들은 이는 운과 장씨 뿐이었다. 그리고 혜각도사도
다른 의미로 놀랐다. 왕의 말을 통해 월이 연우임을 알고 있단 뜻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슴에 안심과 행복, 두려움이 동시에 꿈틀거렸다. 훤은 비밀 하나를 걷어낸 기분으로
말했다.
“그날의 주술을 뺀다면, 나머지 둘은 모두 내가 궐을 비운 사이에 일어났다는 의미다!
내가 궐을 비운 사이에 침전에 누가 들어왔는가? 아니, 누가 들어올 수 있는가?”
궐내에 머무는 사람들은 그 수가 부지기수였다. 그중 침전에 들어올 수 있는 이는 궁녀와
내관들이었다. 그리고 중전과 대비, 왕대비도 가능했다.
“할마마마?”
낮게 중얼거리는 훤의 말을 장씨가 냉큼 받았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성숙청은 왕대비마마의 명을 받은 적이 있사온데, 어서 원자아기시를
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사옵니다. 상감마마께옵서 어환에 계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옵니다.”
“난 너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내가 죽으면 안 될지 모르나, 아파서 누워있는 것은 할마마마께
덕이 되기 때문이다.”
“하오나 원자아기시를 보시는 것이 더 덕이 되옵니다.”
이번에는 입 다물고 있던 명과학교수가 감정을 꾹꾹 눌러 삼키듯이 말했다.
“이 부적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주술이 담겨있사옵니다. 살아나신 것이 기적일 따름입니다.”
훤의 머릿속이 더욱 헝클어졌다. 죽이려 하였다니, 그렇다는 것은 절대 왕대비와는 상관없는
일이란 뜻이었다. 혜각도사는 명과학교수의 말에 부적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부적에
새겨진 기호들을 풀어보더니 갑자기 놀란 눈을 장씨에게로 돌렸다. 왕과 교수들의 눈길이
따라 움직이자,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훤의 의구심을
따돌리지는 못했다.
“말하라! 무엇을 알아낸 것인가?”
가지런히 바닥을 짚고 있는 혜각도사의 주름진 두 손등에 핏줄이 투둑투둑 올라왔다.
“이것은······상감마마를 향한 부적이 아닌 듯 보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명 왕이 아팠는데, 왕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그의 말은 궤변처럼 느껴졌다. 명과학교수가 다시 부적을 확인했다. 이내 그의 눈빛이
혜각도사와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장씨를 보았다. 훤은 그들의 눈빛에 조급해져서 마음이 타들어갔다.
“무엇인가? 명과학교수가 답하라!”
“······상감마마가 아닌, 액받이무녀를 죽이고자하는 부적이옵니다. 헌데 어찌······?”
훤의 분노가 방안 공기를 뒤흔들며 울러 퍼졌다. 그 공기의 뜨거움은 뒤의 방에 앉아 있던
연우의 감정과 하나가 되었다. 훤이 느낀 분노는 자신이 아닌 연우를 죽이려 한 자들에
대한 것이었고, 연우의 분노는 자신이 받아서 죽어야 했던 것이 훤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에
대한 분노였다. 명과학교수의 눈빛은 장씨를 더욱더 찔러대었다. 그가 내뿜지 못하고 삼키는
말들을 훤은 내어지르게 하고 싶었다.
“명과학교수! 도무녀에게 하고픈 말이 있거든 지금 여기서 하라! 내가 없다 여기거라.”
“······액받이무녀라는 그 성숙청의 수종무녀가 진짜 무녀인 것이오?”
훤의 의문을 대신 말해준 셈이었다. 이 말을 들은 옆에 있던 천문학교수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이, 이보시오. 섣부른 말은 삼가시오. 이번의 일은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궐에 들어와서는 상감마마의 어환이 확연이 나아지지 않았소이까? 이는 명백한 증거요.
장씨도무녀의 신딸인데, 감히 의심을 할 수 있겠소?”
“그것이 함정이었소! 감히 장씨도무녀의 신딸이니 당연히 신력이 뛰어날 것이란 선입견!
이것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장씨도무녀이기에 신기가 없는 여인을 무녀로 쉽게 둔갑시킬 수
있는 것이오.”
“신기가 없는 여인이렷다? 분명 그러하렷다? 그러면 이제 그 여인을 내가 안아도 그대들이
반대할 수 없단 뜻이렷다?”
이 심각한 대화중에 뜬금없는 왕의 환희에 찬 말이 방안 공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훤도 들떠서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 때문에 머쓱해졌다. 지금은 연우를 안을 수 있다는
사실보다 신기란 것이 없다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훤은 목소리를 위엄 있게 바꾸어 말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느니. 그 부적이 액받이무녀를 죽이려했다는데 내가 아픈 것이
어찌 된 것이며, 이전에 신기가 없는데도 나의 건강이 좋아진 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모두의 시선이 장씨에게로 쏠렸다. 이것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 사람은 장씨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대신 혜각도사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한양은 원래가 도읍지로 두기엔 불완전한 곳. 턱없이 약한 동쪽 지세는 적장자로서
세자에 책봉된 분들을 단명케 하거나, 왕권을 이어받기 힘들게 하는 폐단을 안고 있사옵니다.
하여 도성의 4대문의 이름을 정할 때 남대문을 숭례문, 서대문을 돈의문, 북문을 숙청문.
이렇게 각각 3글자로 정하였지만 유독 동대문만 4글자, 흥인지문이라 명하였사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보완이 힘들었던 것이 바로 국왕의 성후, 그 중 특히 취약한 것이
적장자로 임금에 오르신 국왕의 성후였사옵니다. 한양 땅에 도읍을 정하면 적장자가 왕이
되기 힘들 것이고, 된다 하여도 단명할 것이란 예언도 있었기에, 이러한 불완전한 도읍지를
보완하기 위해 둔 또 다른 궁궐이 호중(충청남북도)땅의 온양행궁이었사옵니다.
차가운 한양의 기운을 따뜻하게 만드는 온양!”
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군. 한양 가까이에 좋은 온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생에 한번 찾기도 힘든 곳에
온천욕을 위한 행궁을 둔 것이 이상하다 했더니만. 온양행궁이 그러한 이유로 작지만 완벽한
궁궐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었구나. 그런데 그 말을 왜 하는 것인가?”
훤의 질문에 이번에는 지리학교수가 얼굴이 밝아져서 말했다.
“이제야 알 것 같사옵니다. 도무녀가 왜 온양 근처의 어라산 기슭에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 근처의 휴지역에 액받이무녀를 둔 이유를! 그건, 지금의 액받이무녀에겐 신기가 없기 때문이
분명하옵니다. 지금의 액받이무녀는 비록 신기는 없을지 모르나 상감마마와는 더 없는 합을
가진 사주. 그 합만으로도 상감마마의 기를 윤택하게 만들 수가 있을 정도이옵니다.
그리고 없는 신기를 대신하여 주는 것이 휴지역이었고, 나라의 우환을 밟아 누르는
풍수지역이 바로 어라산 기슭이었던 것이옵니다. 자고로 이곳엔 大장군의 묘가 봉해져야
한다는 예언(현재 이곳엔 이순신장군의 묘소인 현충사가 있음)이 있었사온데,
그것을 도무녀가 대신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명과학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의문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표정이었다.
그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이 맞다면, 휴지역의 결계가 깨어지고 난 뒤에 살을 받으신 것이 이해가 되지만,
그 뒤는? 강령하여 지신 것은 어찌 설명할 것이오?”
명과학교수는 자신이 말한 뒤 스스로 답을 찾았다. 그래서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무녀가 우리를 철저히 속이시었군! 상감마마의 성후가 강령하여 지신 것은 도무녀께서
스스로의 수명을 깎아서 주술을 부릴 수 있는 것인데, 그것에 속았군!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신력이 없는 여인을 액받이무녀로 둔 것이오?”
장씨의 입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심지어 수많은 진실을 담은 자신의 눈조차 감아버렸다.
훤의 무거운 목소리가 관상감의 교수와 가까이에 있는 내관들, 멀리에 있는 궁녀들을 향했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그 여인이 누구인지?”
어리둥절한 눈빛들이 두리번거리며 옆으로 날아다녔다. 혜각도사가 관상감의 교수들에게
해답을 주었다.
“관상감에선 원래 중전의 운명을 받으신 분이 딱 한분만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었소.
아니 그렇소?”
세 교수의 얼굴들이 일제히 창백해졌다. 관상감에서 덮어 둘 수밖에 없는 문제,
지금의 중전윤씨와의 합방에 온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왕의 사주에서
중전은 죽은 허씨 처녀 단 한명 뿐이기 때문이었다. 명과학교수가 갑자기 생각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머릿속에서 풀어보니, 액받이무녀의 사주가 중전의 사주가 맞군! 그런데 이번에
액받이무녀를 향한 살로 인해 어찌 상감마마께옵서 의식을 잃으신 것인지······?”
느닷없이 장씨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감정들이 흘러내리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드디어 무거운 그녀의 입이 열리는 순간이 되었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번의 이 부적은 액받이무녀를 향한 것이었을 뿐, 허씨 처녀를 향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주의 부적을 쓴 자가 단지 신기가 있는 무녀로만 알았기에 잘못 쓰여 진 부적이 비틀어져
상감마마께 날아간 듯 보이옵고, 아마도······무녀를 지키고자 하는 상감마마의 지극하신
성심이 대신하여 스스로에게 불러들였을 가능성도 있사옵니다. 인간의 지극한 마음만큼
강한 주술은 없는 법이니······. 문제는 이번의 일로 부적을 쓴 자가 무녀의 정체를
알았을 것이옵니다.”
“그랬군! 그래서 오늘 자객을 보낸 것이었어. 다시 한 번 더 세자빈 허씨를 죽이기 위해!
난 그자들의 정체를 모르는데 그쪽은 무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니, 위험하다!
그들이 자객이 아닌 살을 쏘게 된다면. 잠깐! 바깥에서 부리는 주술이 경복궁 내에
들어올 수가 없기 때문에 자객을 보낸 것인가? 그렇다는 건 궐내는 주술로부터는 안전하다는 뜻이군.”
훤은 중얼거림을 멈추고 생각에 빠졌다. 이번의 부적은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는 것이
분명했다. 단지 저번처럼 앓아누워 조정에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액받이무녀를 먼저 없애려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다른 상황이 벌어졌기에 연우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부리나케 다시 죽이려 하였을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세자빈허씨를 죽이려 했던 자들과
이번에 연우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자들이 한통속이라는 뜻이었다. 왕대비가 아니라면,
왕이 궐을 비운 사이 강녕전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을 머릿속에서 열심히 생각한 끝에
수궁대장을 떠올렸다. 왕이 궐을 비우면 궐내에서 숙직을 하며 궐을 지키는 임무를 지닌
수궁대장! 즉, 국구 파평부원군이었다. 어쩌면 세자빈허씨를 죽이려던 자들 중의 핵심은
왕대비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중심축에서는 왕대비와 파평부원군의 의견이 달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현재의 왕대비는 외척들에게 따돌려졌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훤은 머리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아 깊은 한숨을 뿜어내어 보았다. 이제까지
훤을 그저 병상에 두어 조정을 유린하려는 의도가 전부였을 파평부원군이 연우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연우의 죽음에 관련된 또 다른 왕족의 정체도 미궁 속에 있었다. 지금 당장 파평부원군을
잡아서 심문을 할 수도 없었다. 명확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그를 잡아들였다가는 혹시나
남아있을 지도 모르는 증거마저 인멸시키게 될지 모르고, 아직 미궁에 있는 또 다른 왕족의
정체가 파묻혀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파평부원군과 그 일파가,
어쩌면 훤의 가족일지도 모르는 그 왕족을 방패로 삼아 살아남을지도 모르는 위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