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25화 (25/47)

#25

“어······어디 있느냐?”

사경을 헤매던 훤이 눈을 뜨자마자 힘겹게 입 밖으로 뱉은 말이었다. 근 하루를 꼬박

정신을 잃은 상태였었다. 상선내관은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아 훤의 입 근처로 귀를

가져갔다. 힘겨운 훤의 말이 다시금 들려왔다.

“연. 아니, 월. 어디에 있느냐?”

훤의 거칠고 뜨거운 입김에 상선내관의 귀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힘들게 애타는 심정을

숨기고 평온하게 말했다.

“연생전에 있사옵니다.”

“여······기는?”

“지리학교수의 의견에 따라 경성전으로 옮겼사옵니다.”

“멀리 있구나······.”

강녕전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마주보고 있는 연생전과 경성전. 이 두 거리조차 훤에게는

멀리 느껴졌다. 그래서 혹시라도 다시 연우를 잃을까 불안했다.

“월의 몸은 괜찮더냐?”

“네, 다행하옵게도.”

“다행이다.······혹여 추운 곳에 두었느냐? 그 아이의 열을 다 내가 가져온 건

아닌지, 난 이렇게 뜨거운데······.”

“상감마마의 성체가 뜨거운 것이옵니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아느냐?”

“언제나처럼 가만히 앉아 있사옵니다.”

“혹여 눈은 좀 붙였다더냐?”

“가엾게도, 꼬박 앉아만 있사옵니다. 상감마마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훤의 얼굴이 월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인지, 몸의 병 때문인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이리 데리고 오면······그 아이에게 혹여 나의 병이······?”

가까이 데리고 오라고 명하려다가 월의 몸에 영향이 가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운 마음이

먼저 앞섰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고통 중에 극히 일부라 하더라도 월에게 가게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이 미어지도록 연우가 보고 싶었다. 훤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발견한

상선내관의 가슴도 아릿해져 자신도 모르게 말을 했다.

“이리 데리고 오겠사옵니다.”

“아니다. 아, 아니, 혹여 라도 모르니 데리고 오되 이 방으로는 들이지 마라.”

상선내관이 물러나자 어의가 다가와 훤을 진맥했다. 하지만 끊어질 듯 약한 맥만 잡혀졌기에

얼굴을 차마 들 수가 없었고,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이런 맥으로

의식을 차리고 힘겹게나마 말이란 것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훤이 있는 경성전으로 연우도 건너왔다. 그리고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방에 앉았다.

훤은 누워서 연우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 쪽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자리에 앉았는지

기척조차 잠잠해졌다. 막상 방문 너머에 연우의 기척이 사라지자 훤의 심장은 연우에 대한

그리움으로 더욱 심하게 고통스러워졌다. 어떻게 해서든 연우를 느껴보리라 애를 써도

이방 저방 골고루 애정을 쏟는 달빛의 방해로, 그리고 이 방만을 밝힌 촛불의 방해로

힘들었다. 문 하나만 열면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옛날 촉촉하게 가슴에 젖어들어 춘밤을

설치게 했던 그 여인이 문 건너에 있었다. 죽어서나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연우가

너무나 보고 싶어 상선내관을 찾았다.

“어떻더냐?”

“아프지는 않다하옵니다. 하지만 가엾어서 차마 볼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니 상감마마께옵서 어서 성체를 일으키시옵소서.”

“······나의 이 모습을 본다면······저 아이의 마음이 더 아프겠지?”

훤은 욕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연우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보다 자신의 그리움을

고통과 함께 삼키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상선, 이 방의 모든 불빛을 없애라.······그리고, 저 방에만 촛불을 켜라.”

상선내관은 의아해 하며 왕의 말에 따라 궁녀들에게 지시했다. 왕의 방에 불이 꺼지자 순간

세상에 어둠만이 있는 듯하더니, 궁녀가 불 한 자락을 건너 방에 밝히자 가로막은 방문에

연우의 서글픈 그림자가 곱디고운 붓으로 그린 듯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졌다. 연우를

그림자로나마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그림자가 아프게 눈에 들어온 또 한 사람이 운이었다.

그는 어두운 구석에 앉아 고개를 달을 향해 두어버렸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 훤만이

그 그림자를 눈 안에 잡고 있었다.

‘그림자 자태조차 고옵구나······. 저 자태의 주인이 정녕, 정녕······.’

훤의 초췌한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벌떡 일어나 저 방문을 열고 연우를 보고

싶었다. 연우를 안고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힘찬 목소리로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힘을 줘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따금씩 방안을 돌던 공기가

촛불을 농락하고 지나면 촛불이 소름 돋아 흔들려 떨고, 그 촛불 떨림에 연우의 그림자마저

흐느껴 울면 훤의 심장도 그대로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훤은 그림자나마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손끝이 병으로 인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어명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병보다

훤의 그리움이 한층 짙었다. 결국 훤의 손이 들려져 허공중에 뻗어졌다. 비록 손끝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훤의 눈 속에는 연우의 그림자를 쓰다듬는 자신의 손끝이 보였다.

‘그날, 널 처음 만났던 비 오던 밤. 그 방에서 네가 이런 자태로 앉아 있었던 연유가······

그랬구나. 그래서 달을 보았구나. 이런 찢어지는 마음으로 달을 그리도 구슬피 보았구나.

그것도 모르고 난 네게 답하지 않는다 힐책만 하였구나. 이름을 물을 때마다 네가 삼키던

것이 연우란 이름만이 아니었구나. 지금 내 가슴속에 있는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이름과

같이 삼켰더냐.’

훤은 연우가 그동안 어떤 심정으로 자신의 옆에 머물러 있었는지 그 고통의 깊이를 가늠

할 수조차 없었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동안 보아왔던 연우의 모든 표정들이 가슴을

난도질 했다. 연우의 그림자가 조금 움직였다. 그리고 방문의 창호지에 연우의 손바닥이

찍혀졌다. 문 건너에서 어두움만을 보아야 하는 연우도 훤의 기척을 느끼고 싶어

손바닥으로 문을 짚었던 것이었다. 연우의 손바닥을 본 훤의 턱에서 경련이 일었다.

‘너도 내가 보고 싶은 것이냐······. 너에게 죄만 지은 나약한 나 같은 놈을

보고파 해주는 것이냐······.’

훤은 힘이 들어가 지지 않는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핏기조차 없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어날 것이다! 반드시 일어나서 널 이렇게 만든 놈들을 내 손으로 도륙을 내어 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두 번 다시 널 잃지 않을 것이다. 아프게도 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코끝에 있는 솜털 하나라도 아프지 않도록······이 손으로 지켜낼 것이다.’

아주 잠시 동안 다시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연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훤을

흔들어 깨웠다. 다행스럽게도 단아한 연우의 그림자는 변함없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훤의 마음에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심장이 아픈 그림자를 편안하게

뉘어 잠들게 해주고 싶었다. 훤은 손끝으로 상선내관을 불렀다. 왕의 입술 가까이에 귀를

가져가 대자 여전히 잦아지지 않는 거친 호흡으로 말했다.

“저 아이에게······조금이라도 자라고 일러라.”

“천신 또한 그리 일렀는데······. 아마도 잠이 오지 않는듯 하옵니다.”

잠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마음과 똑 같이, 혹여라도 두 번 다시 못 보게

되면 어쩌나 겁이나 잠을 이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훤은 자신의 마음이 가여운 것과

똑같이 그녀의 마음이 가여웠다.

“상선, 저 아이에게 예전에 내가 마신 국화차를······. 잠에 들 수 있도록.”

한참 만에 궁녀가 연우에게 차를 가져다주었다. 연우는 차를 들고 향기를 먼저 마시며

어두운 방 저편을 보았다. 국화향에서 보고파 목이 메인 훤의 향기가 느껴졌고,

그 향기는 찻잔을 잡은 단정한 손끝을 떨리게 만들었다. 향기만 마시고 있는 연우에게

궁녀가 재촉했다.

“이상한 것이 아니다. 상감마마께옵서 내리신 것이니 마셔라.”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독물이든, 양잿물이든 훤이 마시라고 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달게 마실 수 있었다. 단지 마시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너 방의 훤의

느낌을 차향으로 대신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계속되는 궁녀의 재촉에 연우는 하는 수 없이

차를 마셨다. 하지만 그 뒤에도 한참을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가 겨우 옆으로 누워 잠들었다.

건너 방에서 의식을 힘겹게 잡고 있던 훤은 옆으로 기울어져 잠들어지는 연우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진 그녀를 느낄 수가 있었다. 문을 열라고 명령하기 위해

상선내관을 다시 불렀다. 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연우를 보고픈 마음이 더 먼저 울컥하고

올라왔다. 상선내관은 말하지도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키는 왕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닫힌 문을 천천히 열었다. 서서히 달이 떠오듯 머리끝이 보이고 이내 이마가

보이고 감은 눈과 입술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훤과 가까이 있고 싶어 문에 최대한

붙어, 훤 쪽을 보며 옆으로 잠든 그녀의 마음이 보였다. 긴 세월 그리도 애타게 보고팠던

연우는 훤 앞에 그렇게 설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훤은 손을 뻗었다. 이젠 그림자가 아닌

잠든 연우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손이 닿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샌가 연우가 쑤욱 가까워지더니 손끝에 그녀의 얼굴이 닿았다. 옆에 잠자코

지켜보던 내관들이 더 안타까워 왕의 요를 연우에게로 당겨주었기 때문이었다.

손끝에 닿은 연우는 차가웠다. 훤의 손이 뜨거웠기 때문이었지만 그녀의 차가움만이 느껴져

가슴에는 사나운 회오리바람이 휘몰려 지나갔다. 움직이기 힘들었던 손은 연우의 얼굴

위에서는 힘든 것도 모르고 움직여졌다. 연우를 느끼기 바빴기에 숨이 가쁘고, 고통스런

통증도 느낄 사이가 없었다. 그 순간 연우의 얼굴을 쓰다듬던 훤의 손이 멈춰졌다.

분명 깊이 잠든 연우였는데,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연우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줄도 모르고 잠들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눈물을 흘린 날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이었다. 다음날 일어나 자신이

적신 베갯잇을 발견하고는 스스로를 위로해 주지 못할망정 꾸짖기만 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아픈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고 지나쳐 버렸는지도 몰랐다.

또 어쩌면 눈물을 흘린 날이 더 흔하고 흔해 눈물 흘리지 않고 잠에선 깬 날을 오히려

신기해 했을련지도 몰랐다. 연우가 죽은 나이 겨우 14살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부모와

그리고 그리도 사이좋던 오라비와 생이별하고, 머나먼 타지에서 죽은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훤은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연우를 위로해준 적이 없었음이 괴로웠다.

영영 일으켜 질 것 같지 않았던 훤의 상체가 일으켜졌다. 그리고 힘겹게 다가가 자신의

이마를 연우의 관자놀이에 올렸다. 훤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떨어진 눈물은 연우의

속눈썹에 스며들어 마치 연우의 눈물인듯 그녀의 눈물 줄기를 따라 떨어져 내렸다.

마치 그녀의 슬픈 사연을 따라 읽어가듯 눈물 줄기는 하나가 되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훤의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직 연우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몸을

일으켜 아주 잠시 동안만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누구 하나 이

사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관상감에서도, 그리고 소격서와 성숙청에서

조차 원인을 모르겠다며 고개만 젖고 있었다. 그러니 바쁜 것은 내의원의 어의들이었다.

대비도 더 이상 울며 지낼 수만은 없었다. 자신의 아들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의심을 푸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숙청으로 친히 가서 장씨도무녀를 찾았다.

대비는 성숙청 내부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기에 장씨가 뜰로 나와 그녀를 맞았다.

“여긴 어인 일이시옵니까?”

“잠시 자네와 의논할 일이 있어서이네.”

핼쑥한 얼굴의 대비는 주위에 있는 이들을 멀리로 물리쳤다. 그리고 단 둘이 되어서도

망설이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비는 장씨가 낯설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믿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인지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현재 대비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장씨외엔 달리 아는 사람도 없었다.

“긴히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이리 왔네.”

“하명 하시옵소서.”

“······자네의 명성은 익히 왕대비마마를 통해 알고 있었다. 이리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지만.”

“영광이옵니다. 쇤네를 찾은 연유가 무엇이옵니까?”

“주상의 이번 어환의 원인을 알 것 같기도 해서······.”

장씨의 눈이 반가움 반, 놀라움 반이 되어 대비를 쳐다보았다. 대비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한숨과 더불어 말했다.

“아무래도 옛날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가 죽은 풍천위의 누이가 원귀가 되어 주상을

괴롭히고 있는 모양이야.”

“네?”

장씨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온몸이 떨렸다. 그래서 대비의 다음말만 숨죽이며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주상께오서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자꾸 그 아이를 말씀하시는 것이······. 그런데

본적도 없는 그 아이를 마치 본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이 더 요상해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세자빈으로 간택되고 가례도 못 올리고 죽은 것만도 억울한데, 처녀귀로

만들어버렸으니 어찌 원귀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자네가 그 원귀를 위로해주게나.”

장씨의 표정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래서 핑계를 대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그렇사옵니까? 쇤네가 미흡하여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사옵니다. 상감마마께옵서

분명 보신 것처럼······?”

“그렇다니까. 그러니 내 생각이 맞을 것이야. 자네가 굿을 하면 주상께서 쾌차하시지

않겠는가?”

“제가 긴밀히 알아보겠사옵니다. 허니 지금은 돌아가 계시오소서.”

대비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조선의 국무인 그녀를 안 믿을 수가 없었다. 대비를

배웅하고 난 장씨는 떨리는 다리로 어떻게 성숙청으로 들어가 앉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왕이 연우를 알아본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그녀의 넋을 뺏고 있었다.

왕이 몸을 일으켜 미음을 들었다는 다행한 소식이 의빈의 집에도 날아들었다. 그래서 염도

미음을 먹었고, 민화도 덩달아 같이 앉아 미음을 먹었다. 염이 한 숟가락 뜨면 자신도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민화는 염이 크게 건강을 해치기 전에 오라비인 훤이 살아나 준

것이 고마웠다. 같이 굶었지만 민화는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미음보다 염의 입으로

들어가는 미음이 더 신경 쓰였다. 사이좋게 미음을 나누고 있던 그들에게 대비전에서

비자(婢子, 별궁·본곁·종친 사이의 문안 편지를 전달하던 여자 종)가 나왔다는 청지기의

보고가 있었다. 민화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라 생각하고 사랑방을 나갔다.

염도 민화와 같은 생각으로 나갔으나, 나왔다는 비자는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 하는

그들에게 청지기가 말했다.

“정경부인께 전할 서찰이라 하여 안채로 갔습니다.”

신씨와 대비는 가끔 서찰을 주고받는 사이이긴 했다. 하지만 왕의 어환으로 정신없는

이때 비자를 보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염은 마당에 내려서서 비자가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는 급히 안채로 들어갔다.

“어머니, 소자입니다.”

그런데 방안에선 대답은 없고 소리죽인 울음소리만 들렸다. 놀란 염은 헐레벌떡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무슨 일입니까? 궐에서 낭보라도?”

신씨는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박고 울고 있었다. 염이 다그쳐 묻자 겨우 울음을 죽이며

말했다.

“우리 연우가······우리 연우가 상감마마를 괴롭힌단다. 세상에. 욱욱.”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염은 신씨의 앞에 놓인 서찰을 읽었다. 내용은 기가 막히게도 왕이 연우를 본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보아, 연우의 원귀가 왕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으니 합심하여 굿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염의 억장도 무너졌다. 신씨는 더욱 울음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우리 착한 연우가 행여 상감마마께 해코지를 하려고. 처녀귀로 죽은 것만으로도 원통한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 두 번 죽이려 들다니. 우리 연우가 왜 자신이 사모한 분을 괴롭혀!

원귀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한번 보자. 우리 연우 나도 한번 보자! 귀신이라도 좋으니

얼굴이라도 한번 보았음······. 가엾은 것.”

“누가 듣습니다. 고정하십시오.”

염은 무너지는 가슴으로 사랑채로 돌아왔다. 민화가 무슨 일인지를 눈으로 묻고 있었지만

답하지 않고 하늘만 보았다. 원망스러워도 원망스럽다고 말할 수없는 민화의 어머니였다.

민화는 조심스럽게 염의 눈치만 보았다.

민화가 안채로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나자, 청지기가 머뭇거리며 염에게 다가왔다.

“저······, 말씀드리기가 송구스럽지만 아무래도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일이냐?”

“노비 각섬이가 말한 것인데요, 어제 누가 연우아기씨 장례식에 대해 묻더랍니다.”

염의 눈이 또 한 차례 슬픔으로 무너졌다. 청지기는 더욱 머뭇거리며 힘들게 말했다.

“그게······,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관료쯤은 되어 보이더라고 하구요,

여타 장례식과 다른 점에 대해 소상히 캐묻더랍니다. 어린 아기씨의 장례식이니 다를 수도

있구만은.”

“소상히 말해 보거라!”

갑자기 다급하게 묻는 염에게 청지기는 깜짝 놀라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도 그냥 들은 말입니다. 그냥 대충 말해준 것이 끝이랍니다. 얼마 전에 운검나으리도

연우아기씨에 대해 묻더니, 요즘 부쩍 이상합니다.”

“제운이 자네에게도 우리 연우에 대해 물었단 말이냐?”

“네, 주인어른과 말씀 나누었다기에 저도 아무 생각 없이 술술 말해버렸습니다.

제가 혹여 잘못한 것은 아니겠죠?”

염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순간 방금 서찰의 내용 중에 왕이 연우를 본 것 같이 말하더라는

문구가 뇌리에 깊숙하게 스쳤다. 염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청지기를 보았다.

“제운에게 무어라 말해주었느냐?”

“저기, 가슴 아프실까봐 제가 말씀드리지 않은 것을······. 장례가 끝나고 제가

다시 묘를 살피러 갔을 때 연우아기씨의 봉묘를 들짐승인지 모르겠지만 파헤치다 말았었다고.

하지만 분명 깊이 파헤친 것이 아니었고, 바로 제가 다시 손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슬퍼하시지 마십시오.”

염은 복잡한 머리와 무너지는 억장을 동시에 느끼며 사랑방으로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동안 주위에서 일어난 이상한 것들이 염의 머리를 덮쳤고, 어쩐지 연우가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점점 치우쳐졌다. 연우가 살아있다면 오라비인

자신에게 오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세자빈 간택이 있은 이후부터의

이상했던 일들이 염의 머리에 상세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힘겹게 머릿속에서

싸우던 염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창고로 가서 곡괭이를 가지고 나왔다.

청지기가 깜짝 놀라 염의 뒤를 따랐다.

“어딜 가십니까?”

하지만 염은 무서운 눈빛으로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그래서 청지기는 곡괭이를

빼앗듯이 들고 염을 따라 걸었다. 염을 따르던 그의 표정이 차츰 두려움으로 뒤덮였다.

염이 가고 있는 곳, 그곳은 바로 연우의 무덤이었다. 청지기의 표정이 더욱 두려웠던

이유는 자신이 들고 있는 곡괭이가 쓰일 용도였다.

의금부도사가 조사한 연우의 장례식에 대한 자료가 훤의 손에 들어갔다. 훤은 숨 가쁜 몸을

하고서도 힘겹게 내용을 확인했다. 장례식에 대한 여러 정황이 훤의 심중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훤은 아랫고상궁에게 명하여 ‘雨’라고 적힌 화각함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곤룡포를 가져오라고 했다. 해가 떨어져 어두운 저녁에, 그것도 아직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인데 옷을 갖춰 입겠다고 하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왕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왕의 몸을 씻기고 옷을 입혔다. 훤은 익선관까지 갖춰 쓰고는 화각함을 열어

연우의 서찰이 아닌, 안에 있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에 붉은 비단으로

감싼 무언가를 꺼내 옷소매에 넣었다.

“부축을 해다오.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러니 월도 밖으로 나오라 일러라.”

“마마, 아직은 아니 되옵니다. 일어설 수도 없지 않사옵니까?”

“그러니 부축을 하라 않느냐!”

문 건너 방에서 월은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겨우 훤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월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훤이 양 옆에 내관들의 부축을 받고 강녕전을 나오니 연우가 월대 아래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초췌한 훤의 얼굴에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표정만은 깨끗이 비우고 왕의 앞에 섰다.

“월아, 오랜만이다.”

“소녀가 미진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가까이 와서 날 부축해라.”

훤은 다가선 연우에게 몸을 기대듯 한 팔로 힘껏 끌어안았다. 한동안 왕이 몸을 기댄

것인지 아니면 안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렸다. 서서히 왕의 발이 떨어졌다.

내관 두 명이 부축해도 힘겨웠던 훤이었는데, 어떤 기적이 온 것인지 연우 혼자 부축해도

신기하게도 걸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연우에게 힘을 덜 들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훤은 침전을 벗어나 편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두를 기다리라고 명하고 연우에게만

의지하여 천추전 안으로 들어갔다. 운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처음에는 안 된다며 말렸지만,

가누기조차 힘든 몸으로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었기에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한편으론

두 사람을 같이 있게 해주고픈 마음도 있었다. 천추전으로 들어선 훤은 신기하게도

혼자 두 다리로 설 수 있었다.

“이상하다. 너와 단둘이 있고 보니 몸이 절로 좋아지나 보구나.”

“정말 괜찮으시옵니까?”

훤은 연우를 더욱 끌어안으며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창백한 안색이 연우의 가슴을

슬프게 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아느냐?”

“모르옵니다.”

“저곳이 보이느냐?”

연우는 훤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곳엔 왕의 서안이 놓여 있었고, 용이 조각된

용평상이 있었다. 훤이 왕으로서 위엄을 갖춰 앉는 곳이었다.

“아니, 내가 보란 것은 용평상이 아니라 그 뒤의 <일월오악도>가 그려진 병풍이다.”

연우는 일월오악도를 보았다. 왕이 다스리는 국토를 상징하는 다섯 개의 큰 산이 그려져

있었고, 왕을 상징하는 붉은 해와 왕비를 상징하는 하얀 달이 같은 하늘에 그려져 있었다.

훤은 연우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붉은 해와 하얀 달. 왕과 왕비를 말한다. 난 예전, 세자시절 저 병풍에 담긴 뜻을

여인의 비녀로 만들어 달라 조각장에게 명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마음에 품은

그 여인에게 주고 싶어서.”

훤의 품안에 안겨있던 연우의 몸이 두려움으로 경직되었다. 하지만 뒤에서 연우를 안고

있는 훤의 표정을 살필 수 없는 것이 더 두려웠다. 훤은 팔의 소매에 넣어두었던

작은 상자 속에 있던 것을 천천히 꺼냈다. 연우가 가지고 있던 봉잠과 똑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분명 침전에 감금되기 전에 자신이 가진 봉잠은

접은 이불 사이에 넣어두었었다. 혼란한 연우의 귓가를 훤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것과 똑 같은 것을 본 적 있소?”

어투까지 달라진 것에 놀란 연우는 훤을 밀쳐 내고 돌아서서 뒷걸음을 했다.

“이것은 가례시에 적의와 함께 착용하는 쌍봉잠이오. 몰랐소? 하나는 내가 가지고,

하나는 내가 마음에 품은 여인에게 보냈소.”

“가, 갑자기 무슨 뜻이온지, 소녀 알아듣지 못하겠사옵니다. 그리고 하대를 하시옵소서.

비천한 이 몸에게 어, 어찌하여 공대를 하시옵니까?”

연우는 더욱더 뒷걸음질을 했다. 자꾸만 멀어져 가는 연우를 안타까이 보고 있던 훤은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

“존재하는 만물은 돌아가고 또 돌아가도 다 돌아가지 못하니, 다 돌아갔는가 하고 보면

아직 다 돌아가지 않았네,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끝까지 가도 돌아감은 끝나지 않는 것,

묻노니 그대는 어디로 돌아갈 건가.”(화담 서경덕의 <유물> 2연)

처음 만난 날 연우가 훤이 읊은 1연에 대해 답하듯 들려준 시였다. 뒷걸음을 멈춘 연우에게

훤은 다시 말했다.

“돌려보내려 해도 돌아가지 않고, 잊으려 해도 잊어지지 않고 남아있던 것이

나를 향한 마음이었소, 연우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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