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24화 (24/47)

#24

양명군의 집으로 평소 발걸음 하지 않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사랑방에 앉아

양명군의 눈치만 살피는 사람들에게 그는 굳은 표정으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몇 시간을 그러고 있었는지 다들 발이 저려 엉덩이가 조금씩 들썩여질 때쯤에야 양명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추운 길을 헤치면서까지 이리 몰려 온 연유가 무엇이오?”

“아니, 저희들은 새해 인사차······.”

양명군은 한쪽 입 꼬리가 저절로 뒤틀리는 것을 숨기고 웃음으로 말했다.

“고맙소. 상감마마께옵서 쓰러지셨단 소식보다 그대들의 방문이 먼저인 것을 보니 참으로

감동이오. 여기에 몰려든 숫자를 헤아려 보니 오늘 상감마마께서 쓰러지신 건 상당히

심각한 모양이구려.”

“궐에서 흘러나온 소식으로는 좀······. 당연히 상감마마께옵서 강령해지실거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저희로서는 만의 하나에 해당하는 차후의 문제도 생각 안할 수가 없기에······.”

양명군은 웃으며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평소 없던 유비무환이 마구 샘솟는 모양이군. 하긴, 아직 후사도 없는 왕이

사경을 헤맨다는데 어느 신하가 걱정이 안 되겠소. 당연히 상감마마의 성후보다

걱정이 되어야지. 안 그렇소?”

모인 사람들은 눈만 깜빡거리며 당황해했다. 양명군의 인품이란 것은 옛날부터 종잡을 수

없는 위인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지인들 사이에선 의리 있는 세상 제일의 사내란 평이 있는

반면에, 마음대로 살기 위해 재혼도 마다하는 기인으로, 대신들 앞에서는 망나니로 악명이

높았다. 어릴 때, 부왕 앞에서 서책을 집어 던진 사건은 악명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들은 양명군의 심사가 뒤틀린 것을 느꼈기에 적당히 다른 사람 중에 하나라도 자리를

뜨면 따라서 일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 서로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눈치라 먼저

일어서는 자는 없었다. 혹시라도 왕이 죽게 될 경우를 대비해 먼저 일어나 나가 손해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생각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양명군은 얼굴에

웃음을 지우고 옆에 있던 환도를 들며 차분한 음색으로 말했다.

“아직 분명히 살아계시는 상감마마를 두고 왕 자리를 논하시겠다?”

사람들이 뜨끔할 사이, 양명군은 칼집에서 환도를 꺼내 한번 날을 눈길로 쓸어보더니

서안 위에 칼집과 칼을 나란히 놓았다. 사람들은 양명군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양명군은 천천히 손끝으로 칼날을 따라 아래로 쓸면서 말했다.

“멋지게 선 날이 살 떨리게 흥분시키는군. 누구의 목부터 베어줄까? 그 목들을 궐로

가져다 상감마마께 고해드릴 테니. 어환에 계실 동안 역모를 생각한 이들의 목이라 아뢰면

나에게 커다란 재물을 주시지 않겠소? 목 하나당 비단 한필이면 헐값인가?”

“여, 역모라니 어찌 그리 살벌한 말씀을 하십니까! 모두 일어나 가십시다. 허허참!”

한사람이 떨치고 일어나자 하나둘씩 따라 나가버렸다. 그리고 사랑방에 양명군만 홀로

남게 되었다. 한참을 서안 위에 이마를 괴고 있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을 타고

궁궐로 향했다.

양명군이 궐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훤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침전으로 가는 향오문 앞의 군사들은 양명군을 넘어가지 못하게 했다.

양명군에게 있어서 훤은 왕이기도 하지만 피를 나눈 형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은 듯 하여 괜히 쓴 웃음만 나왔다. 걱정한 발걸음이 허탈하기까지 했다.

한편으론 훤의 의식이 있었다면 양명군을 향오문 밖에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기에

지금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향오문 안으로의 진입을 거부당하고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왕의 상태를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는 답 외는 들을 수가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서 가던 양명군의 뒤로 소란한 발소리가 느껴졌다.

재빨리 되돌아보니 의금부판사와 상선내관, 그리고 군사 두 명이 어디론가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다른 사람도 그렇지만 특히 상선내관의 혼비백산한 표정이 마음에 걸려 양명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오면 훤의 병세를 물어보리라 생각하고 멀찌감치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상선내관이 가장 잘 대답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숙청으로 들이닥친 의금부 관원들은 이내 월의 방으로 들어갔다. 월과 장씨는 깜짝 놀라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월은 얼른 봉잠을 접어둔 이불 사이에 숨겼다.

“이 무슨 짓들입니까?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장씨의 호통에 잠시 움찔하던 판사는 밀려나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상감마마를 작금의 상태에 이르게 한 죄를 물어 액받이무녀를 감금하라는 어명이오!”

월이 놀란 눈으로 상선내관의 발목을 잡고 올려다보았다.

“깨어나신 것이옵니까? 이제 괜찮으신 것이옵니까?”

자신을 감금하라는 어명인데도 그 말은 들리지 않은 듯, 오직 상감마마만을 걱정하여

얼굴 가득 희망의 빛으로 묻는 월이 상선내관의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기다려도 왕의

상태를 말해주지 않자, 월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따라 나섰다.

오히려 장씨가 월을 대신해 물었다.

“어디로 데리고 가시는 겁니까? 적어도 저에게는 말씀을 해주셔야 합니다!”

“침전에 감금하라는 어명이셨소. 그럼.”

장씨는 다행이다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향오문 멀리에서 물러나 상선내관을 기다리고 있던 양명군은 나갈 때와 달리 여인 한명이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둠의 방해로 사람을 구분하긴 힘들었지만 궐내에서 소복을 입은

여인은 독특한 경우이기에 저절로 눈길이 머물렀다. 처음엔 자박자박 다소곳한 걸음걸이에

눈길이 머물렀고, 두 번째는 곳곳에 세워둔 횃불에 비친 미색이 인간 같지 않아 눈길이

머물렀다. 그리고 마지막엔 어디선가 본 듯 낯이 익어서 눈길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들 일행에게로 다가가던 양명군의 발자국은 어디서 본 얼굴인지 골몰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어둠 안에 서있던 양명군을 발견하지 못한 그들이 향오문을

넘어 갈 때 쯤, 로의 불길에 잡힌 그녀의 얼굴이 뚜렷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서 있던 양명군의 다리가 휘청 꺾였다가 제자리에 섰다. 하지만 마음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설마······, 여, 연우낭자?”

양명군은 이내 머리를 세차게 도리질 쳤다.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7년이나 지난 세월동안 자신의 기억이 흩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양명군은 연우를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었기에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본 것이 귀신이 아님을 확인해 보기 위해 향오문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다가갔다.

“방금 들어간 여인이 누군가?”

“잘 모르겠사옵니다.”

“잘 모르는 여인을 어찌 향오문 안으로 출입시킨단 말인가!”

“잘 모르겠사옵니다. 소인들은 이 말 외엔 할 수가 없사옵니다.”

“산 사람인가?”

“네?”

“살아있는 인간인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군사들은 양명군이 여인의 미색에 놀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들도 처음 월을 보고 ‘성숙청의 무녀는 역시나 다르구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양명군은 다시 한 번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군사들의 저지로 돌아서야만 했다.

어쩌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조급한 마음으로 염의 집을 향해

말을 모는 것 외엔 없었다.

양명군은 의빈의 집 안으로 까지 말을 타고 달려 들어왔다. 그리고 하인이 말고삐를

잡아주기도 전에 말에서 훌쩍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랑채로 들이닥쳤다.

하인이 염에게 먼저 양명군이 왔음을 알릴 경황도 없었다.

염은 왕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후로 사랑방에 앉아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고

정좌하여 앉아 있었다. 신하된 도리로 어찌 입안에 물 한 모금이라도 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염이 이러고 있으니 민화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오라비인 왕 때문이 아니라 서방님인

염을 따라서 아무것도 안 먹고 안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왕이 쾌차하길 빌었다.

그러기 전에는 신하의 도리를 따지는 염과의 합방은 꿈도 꿀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왕이 일어나기를 빌고 있던 염이었기에 새파랗게 질린 양명군이 방에 들이닥쳤을 때는

왕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심장이 멎었다.

“상감마마께옵서 어찌 되시었습니까?”

“나도 못 뵈었네. 그보다 자네, 연우낭자······.”

염이 놀란 눈으로 양명군을 보자 그는 얼른 입을 다물고, 엉덩이가 방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시 일어나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큰일이 난 것이 분명하지요?”

양명군은 다시 방바닥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연우낭자 말일세.”

연우란 이름에 염의 표정이 서글프게 바뀌었지만 양명군은 다른 날과는 달리 그런 표정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양명군은 앉아서도 똥마려운 강아지 마냥 좌불안석하며 귓불의

세환귀고리만 만지작거렸다.

“연우낭자, 연우낭자 말일세. 그러니까 자네 누이.”

딴말 없이 연우란 이름만 되풀이해서 말해대는 양명군 때문에 성격 느긋한 염마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우리 연우는 왜 물으십니까?”

“그때, 장례식 분명 치른 것이 맞지? 분명히 땅에 묻었다고······.”

“양명군 답지 않게 그 일은 왜 들추십니까? 얼마 전에 제운도 느닷없이 달려와서 같은

말을 묻더니······.”

양명군의 눈이 확신으로 뚜렷해졌다.

“제운이 말인가? 그 운검이? 그럼 그때 눈 오던 날 다녀갔다던?”

“네, 그날. 그런데 도대체 자꾸 우리 연우 일은 왜 물으십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양명군은 조금 전에 연우와 꼭 닮은 여인을 보았다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리고 양명군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되는 일이었다.

연우는 분명히 땅 속에 묻었다. 그것은 양명군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살아있는 것을 설명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단순히 닮은 여인으로 보는 것이

제대로 된 이성을 가진 인간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제운, 그리고 석연찮은 장례절차.

양명군은 더 확실한 증거인 장례절차보다 제운이 연우를 입에 담은 것이 더 확실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그가 지금 와서 연우를 떠올릴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우선 제운을

만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 만날 수가 없었다. 양명군은 자기 스스로도 머리에 떠오른

의문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 간다는 인사도 없이 홀연히 사랑방을 나가버렸다.

염은 회오리바람이 방안을 휩쓸고 간 느낌이었다. 후다닥 들어와서는 우왕좌왕하다가 휭

하니 가버린 양명군이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지금 혼란에 빠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지금 와서 연우를 말한 제운과 새파랗게 질린

양명군을 통해 어렴풋하게 연우와 관련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양명군이 염에게로 달려와 소동을 부리고 있을 동안, 왕대비전에는 파평부원군이 들어있었다.

주위에 사람을 물리치고 오직 두 사람만이 마주 앉아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리 찾아온 것이요, 부원군?”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얼마 전에 청을 드린 성숙청의 액받이무녀 말이옵니다.”

“내가 알아내서 준 것이 잘못되기라도 하였소? 난 그런 천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소.

지금 우리 주상이 쓰러져 마음이 좋질 못한데. 얼른 강령해지시어 원자를 보아야 우리가

한시름 덜 터인데.”

파평부원군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오히려 그 반대이옵니다.”

“······무슨 뜻이오?······설마, 지금 주상이 쓰러지신 것이 그대 소행이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주상이 미령하신 성후가 모두? 하지만 성숙청의 장씨도무녀는 절대

왕실에 살을 날린 여인이 아니오. 하여 액받이무녀에 관한 것도 그녀를 통하지 않고 다른

이를 통해 알아봐 준 것이오.”

“살을 날릴 수 있는 이가 조선팔도에 장씨도무녀 하나뿐이옵니까?”

“그렇다면 정녕 자네가 주상을?”

가만히 대답 없이 긍정을 하고 있는 파평부원군에게로 왕대비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지금 제정신이오! 감히 주상의 성체에 살을 던지다니. 이것은 역모 중의 역모!

내 이를 두고 볼 줄 아시오! 나부터 용서치 않을 것이오!”

“어차피 왕대비마마께옵선 저희와 한 배를 타시었습니다. 옛날 세자빈간택 당시, 살수를

주도하신 것을 기억 못하시는 것이옵니까? 소인은 왕대비마마께 배운 것이옵고,

이것을 실토해버릴 수도 있사옵니다.”

주먹을 쥔 왕대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 당시 가문을 위해 했던 일이 지금 자신의

손자의 목숨을 쥐어틀게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주상과 중전에게서 원자를 보는 것이 현명한 것이오.”

왕대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파평부원군의 목소리는 마치 실권을 장악한 듯

왕보다 더 당당했다.

“강령해지시면 우리 목이 일시에 달아날 것이옵니다.”

“무엇 때문에? 만의 하나 세자빈 사건이 발각이 난다고 해도 주상의 약점을 우리가 쥐고

있질 않소. 그러니······.”

파평부원군은 얼굴에 싸늘한 미소를 띠우고 품속에 있던 봉서를 꺼내 왕대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또한 살아있지 않을 때나 가능한 일이옵니다.”

“무······슨 뜻이오?”

왕대비를 봉서를 들고 뜯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강녕전의 왕의 궁녀들이 방안에

들이닥쳤다. 왕대비는 급히 봉서를 당의 안으로 감추고는 소리쳤다.

“이 무슨 무례한 짓들인가! 강녕전 궁녀들이 감히 먼저 아뢰지도 않고 방안에 들어오다니!”

왕대비의 호통에도 궁녀들은 일사분란하게 왕대비의 짐을 꾸렸다.

“멈추지 못할까! 어느 안전이라고 나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이냐! 밖에 아무도 없느냐!”

하지만 바깥은 조용했다. 이윽고 대강의 짐을 다 꾸린 궁녀들이 나가고 다른 두 궁녀가

들어와 왕대비의 양쪽 팔을 각각 잡아 일으켰다.

“놔라! 무엄하다!”

왕대비는 궁녀들의 손에 이끌려 바깥으로 나갔다. 오싹하리만큼 매서운 추위 속에

의금부판사를 위시해서 군사들이 왕대비전 뜰에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왕대비의

가마가 놓여있었다.

“판사! 네가 목숨이 아깝지 아니한 것이냐!”

“왕대비마마를 윗자와 상감마마께옵서 친히 어명하신 것이옵니다. 이제부터 온양행궁으로

모실 것이옵니다. 긴 여행이 되실 것이니 성심껏 모시겠사옵니다.”

“난 안 간다, 이것들아!”

하지만 궁녀들은 왕대비를 강제로 가마에 태우고 덮개로 덮었다. 그와 동시에 가마꾼들이

일어나 어두운 밤을 달리기 시작했다. 왕대비의 고함소리가 차츰 멀어지자, 파평부원군이

왕대비전 뜰에 나와 섰다. 그는 야비한 웃음을 흘리며 기분 좋게 중얼거렸다.

“상감마마께옵서 처음으로 내 마음에 쏙 드는 일을 해주셨군. 이제 쓸모없어진 늙은이를

스스로 치워주시다니. 오히려 있으면 방해만 되었을 터······.”

흔들리는 가마에 갇힌 채 고함을 치다 지친 왕대비는 자신의 손에 파평부원군이 준 봉서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두운 가마 안이었지만 바깥에서 따르는 일행들이 들고 뛰는

불빛들에 의지해 힘겹게 내용을 확인했다. 편지 내용에는 허연우의 생년월일과,

액받이무녀의 생년월일이 적혀있었는데 한 글자도 다른 것이 없이 똑같았다.

그리고 끝에 둘은 같은 사람이란 글도 있었다. 왕대비는 분노로 눈을 뒤집으며 봉서를

갈기갈기 찢어 발겼다.

“감히! 감히 부원군이 나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장씨도무녀 그 자도 날 속이다니!”

왕대비의 속이 끓어오르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를 태운 가마는 궁궐과 더욱더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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