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운은 월을 안고 강녕전을 나와서야 그토록 눈길로만 탐내던 여인이 자신의 품안에 안겨있음을
깨달았다. 차마 눈길을 아래로 내려 월의 얼굴을 볼 수 없음에 하늘의 풍성한 구름만을
우러러 보았다. 비록 궐의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일 테지만 조만간 저 구름은 궐 밖의
멀리 멀리로 흘러 자유로이 떠다닐 것이었다. 운은 품안에 안고 보니 월의 숨결이 느껴졌고
그 숨결을 훔치고픈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이대로 이렇게 안은 채로 궐 밖의 아무도 없는
곳으로, 왕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품속의 여인을 영원히 안고 있고 싶었다.
단지 바램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자신의 말이 있는 마구간 쪽으로 눈길을 두어봤다.
하지만 입술만 깨물고 월의 얼굴과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잡고 있는 족쇄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운은 성숙청으로 월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성숙청이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누구 없소?”
운의 간결한 외침에 성숙청 뒤 곁에서 설이 걸어 나왔다. 설은 운의 품안에 안긴 월을
발견하자 깜짝 놀라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대체 왜 그런 겁니까?”
설이 흥분하여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운은 단순히 기절시킨 것이라는 말을 할 틈을 찾지
못했다. 한참을 소란 떨던 설은 운이 차갑게 입을 다문 것을 발견하고 슬쩍 쳐다보았다.
염만을 마음에 품고 있던 설이기에 염의 따뜻함과는 정 반대인 운의 차가움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설의 소란이 멈추자 운이 입을 열었다.
“눕혀야겠다. 안내해라.”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이리 주시지요.”
운은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방까지 안고 가겠다는 의사가
전해져 왔다. 머쓱해진 설은 앞장서서 방으로 안내하고는 급히 요를 깔았다. 운은 방안에
들어서서 요 위에 월을 조심스럽게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운의 행동거지를 보고 있던
설은 그를 보던 눈빛을 애잔하게 바꾸었다. 더 없이 차가운 사내였지만 이불을 덮어주는
손끝이 너무도 따뜻해 월을 향한 운의 마음을 알아채고 만 것이었다.
“다른 무녀들은?”
손끝은 따뜻할지 모르겠지만 목소리는 설을 향해서인지 차갑기 그지없었다.
“사독제를 위해 모두 한강에 나가 있습니다.”
운의 인상이 굳어졌다. 분명 왕에게 날아온 것이 살이었기에, 이는 주술을 아는 이의 소행일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각 관령의 무적에 올라 있는 이들은 오늘 모두 사독제에 참여했을 것이었다.
게다가 소격서의 도사나 도류들도 원구단의 제천의례를 준비하기 위해 궐을 비운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살을 날린 이는 무적에 올라 있지 않은 누군가일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더욱
더 범인을 찾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했다. 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지금 상감마마께 살이 날아들어 잠시 기절시킨 것뿐이니 곧 깨어날 것이다.”
“네? 그럼 상감마마께오선?”
“의식을 잃으셨다. 하지만 무녀는 무탈하니 기이하군.”
운이 몸을 돌려 방문을 열려고 하자 설은 뒷모습에 말을 던졌다.
“기이해 하신다기 보다는, 무탈하여 안심하신듯 합니다?”
문을 열려던 운의 손이 멈췄다. 설은 눈길을 월에게 향하고 조용히 말했다.
“구름은 달을 가리는 것일 뿐, 품는 것이 아닙니다.”
시커먼 뒷모습은 움찔하는 기척도 없었다. 대신 운의 차가운 목소리가 설의 심장을 때렸다.
“구름은 달을 가릴 뿐이지만, 비는 품을 수 있다.”
비? 갑자기 비란 단어가 운의 입에서 떠오르자 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 무슨 뜻입니까?”
“의빈께서 네가 설이라고 하더군.”
설은 치마 아래에 숨겨둔 환도를 빼내기 위해 치마를 잡았다. 하지만 운의 다음 말에
동작을 멈추었다.
“환도를 빼어낸 즉시 너의 목은 떨어져 이 방에 뒹굴 것이다. 그리고 환도를 빼낸다면 달이
보슬비임을 네가 증명하는 것이다.”
설은 운의 뒷모습이 던지는 매서움에 환도를 빼내지 못했다.
“누가 또 알고 있습니까? 혹여 상감마마께옵서도? 아니 그보다, 의빈께옵선······?”
“아직은. 달에게도 입 다물고 있어라.”
“무엇을 말입니까? 비를 알고 있는 구름을, 아니면 비를 품고 있는 구름을?”
운은 둘 다를 뜻하듯 대답하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사독제를 끝낸 무녀들이 돌아온 것은 해가 완전히 저문 저녁이었다. 지친 몸으로 궐내에
들어선 그녀들은 스산한 분위기를 먼저 느꼈다. 장씨는 당황한 얼굴로 뛰다시피 하여 월의
방으로 들어갔다. 월은 어두운 방안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장씨가 방문을 닫고 월에게
다가가 앉아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이윽고 장씨는 월이 품에 품고 있는 것을 보았다.
품안에 있는 것은 연우가 세자에게서 정표로 받았던 봉잠이었다. 옆에 걱정 어린 눈으로 있는
설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계셨냐?”
“상감마마께옵서 살을 맞으셨다 합니다.”
“언제부터냐고 물었잖아!”
장씨의 외침에 월이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정오쯤에······.”
“하필 아무도 없을 때. 아니지, 아무도 없으니 주술을 행하기엔 적기였을 테지.”
“······주술이 확실한 것이옵니까?”
월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장씨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월은 눈빛은 반짝이며 장씨의 눈을
보았지만 말씨는 다소곳하게 말했다.
“모두가 궐을 비운 어제와 오늘, 참으로 조용하였습니다. 소녀는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었기에
알지 못하지만, 상감마마께옵서 비우신 궐을 대신 지키는 이가 있지 않겠사옵니까? 아무래도
온양에 행차하시었을 때 뵈었던 상감마마께옵선 건강하시었기에, 그 뒤 어환이 드셨단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사옵니다. 그러니 그때 궐을 비운 사이, 그리고 이번에 궐을 비운 사이
무언가가 이뤄지건 아닐련지요.”
장씨도 월의 추측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어렴풋하게 잡혀질 듯 했다. 월이 다시 고개를
꺄우뚱 하며 말했다.
“하지만 마마께옵서 궐에 계셨을 때, 그러니까 제가 궐에 입궐한지 한 달 되는 그날에도
살이 든 것을 보면 아닐 것 같기도 하고······.”
“아! 그건 전혀 다른 것이었소. 상감마마를 해치려했던 살이 아니라······. 아무튼
그것은 별개의 것이오. 이제껏 그것을 생각하시었소?”
월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품안에 있던 봉잠을 손에 들고 보면서 말했다.
“설아, 잠시 나가 있어주겠니?”
걱정으로 머뭇거리던 설이 나가자, 월은 무념의 목소리로 말했다.
“왜 신기가 없는 저를 무녀로 만드셨는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신모님, 소녀는 무엇입니까?”
장씨는 놀라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뿐이었다.
“신기가 없다는 건 언제부터 아시었소?”
“5년 전, 잔실이가 신내림을 받을 때부터입니다. 소녀는 그러한 신내림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이상하다 생각하였습니다.”
“무녀가 아닌 줄 알면서 왜 4년 전에 액받이무녀를 하시겠다 하였소?”
“제 목숨을 살려주신 신모님이 하시라 하였기에······.”
장씨의 한쪽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담겨졌다. 그리고 옛날, 세자빈이 간택된 그날에 대비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말들이 바람처럼 장씨의 귓가에 속삭여대고 있었다.
“방금 무어라 하시었습니까?”
“세자빈이 바뀌었으니 없애라고 하였다. 주상이 물샐 틈 없이 호위를 하고 있기에 독살도,
암살도 할 수가 없으니 접근하지 않고 행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자네의 능력뿐이네.”
“쇤네는 왕실의 구복을 위해 있는 것이옵니다. 이미 세자빈이 되시었으니 그분 또한
왕실의 분이십니다.”
“왕실의 구복이라 하였는가? 성숙청의 입지가 그리 좋은 것이 아닐 텐데? 성숙청이 아무리
왕실을 위해 일한다 하여도 유학자들의 끊임없는 혁파요구에 지금은 존폐위기가 아닌가?
그런 성숙청을 내가 더 이상 비호를 해주지 않는다면 어찌 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축출 시켜주마.”
“협박······이십니까?”
“아니, 명령이다!”
“세자빈이십니다.”
“그러니 내가 진즉에 간택되기 전에 죽이라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것도 개념치 마라.
자네가 죽이고 나면 세자빈이 아닐 것이니. 간택되었던 적도 없었던 일로 내가 만들 것이다.
그러니 문제 될 것이 없지 않겠느냐?”
“하오나 사람의 목숨을 앗는 주술에는······.”
“그때 말하였던 조건을 또 들먹이는가? 마지막 조건 중 불가능하다고 했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여인의 초경이 묻은 개짐(생리대)! 그 조건이 채워졌다면?”
“······”
“허연우란 아이를 자네의 주술로 죽여라!”
장씨는 평생 털어내지 못한 그 말들을 뿌리치려고 그 당시에도 감아버렸던 주름진 눈을
또 다시 감았다. 월이 과거의 말을 떨치고 현재의 말을 귓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하면 소녀가 다시 묻겠습니다. 신모님은 어이하여 무녀도 아닌 저를 액받이무녀로
지정하시었습니까?”
장씨는 눈을 감은 채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액받이무녀는 상감마마와 더 없이 깊은 인연이어도 절대 만날 수 없는 사이. 하여 두 분을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고 싶었소.”
‘그렇게 내 죄를 영원히 묻어버리고 싶었소.’
“그런데 왜 이제는 만나게 해주셨습니까?”
“······염병할, 만나게 해주고 싶어져 버렸으니까.”
‘정을 주지 않으려 이름 하지 않았건만, 어느새 나에게 세자빈이 되어 계셨으니까.’
“왜 저에게 신기가 들었다 하여 속이셨습니까?”
“속이지 않았다면 아가씨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 아니오. 무녀의 몸으로는 가문에
누가 될 것이니 스스로 걸어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소.”
장씨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고결한 연우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 눈동자는 알고 있었다. 세자빈에게 살수를 던진 이가 장씨임을!
“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모른 척 하고 있었소?”
“신모님이 저를 살리셨기에······.”
“그 반대임을 알고 계시잖소?”
월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살리시었습니다. 신모님이 그리 하지 않았다면 소녀는 오래전 흙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신딸이 아닌 존재가 신모님 곁에 있다간, 이미 소녀를 죽이라 사주한 이들의
눈에 발각되었을 터, 하여 그 눈들을 속이기 위해 소녀를 무적에 올리셨단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단지 소녀가 미진하여 이러한 것을 이해하고 납득하기까지가 오래 걸렸습니다.
그 사이 미련하게도 원망도 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신을 죽인 이를 원망하여서 죄송하다니, 장씨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그동안 마음속에 폭풍이 칠 정도로 어지러웠을 텐데도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은 연우란 존재였다.
“참으로 무서운 여인이었구려. 그 사실을 알고도 그리 평온하게 내 옆에 있었다니.
난 설이 년에게 목이 달아날 것이라 각오하고 있었건만. 하하하.”
장씨의 빈 웃음이 방안을 메웠다. 차차 헛 울던 웃음도 사라지고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왜 지금에서야 내게 내색을 하는 것이오?”
“저 자신이 원망스러워서입니다. 왜 저는 액받이무녀조차 아닌 것입니까?
차라리 제가 진짜였더라면, 상감마마께옵서 그리도······.”
평온한 표정을 가르고 굵은 눈물이 흘러 봉잠 위로 떨어져 내렸다. 자신의 눈앞에서
처참하리만큼 슬픈 눈동자를 하다 입술에 핏기조차 버리고, 쓰러져 주저앉던 훤의 모습이
되풀이 되고 또 되풀이되어 지금까지 월의 눈앞에 펼쳐졌다. 자신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다면
훤이 그리 고통스럽게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훤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자신을
견딜 수가 없어 아픈 입술을 깨물었다. 무녀가 아님을 알았음에도 액받이무녀의 자리에
계속 있었던 것은 월의 욕심이었다. 어차피 오라비 곁에 돌아갈 수 없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죽음을 사주한 이들이 알게 되면 장씨뿐만이 아니라, 겨우 목숨을 건진
오라비까지 자칫 화를 입을 수도 있었기에 세상에서 죽은 이로 살아가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차피 훤과 만날 수 없다면 가짜 액받이무녀일 망정 있고 싶었다.
보잘 것 없는 인연이라고 하더라도, 훤이 영원히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가더라도
실낱같은 인연의 끈이나마 닿아있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욕심이 지금의 화를 부른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의 존재가 왕에게 주는 것이라고는 심려와 슬픔, 혼란뿐이었다.
월이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장씨의 무릎에 엎드려 흐느꼈다.
“제발, 소녀를 가짜가 아닌 진짜 무녀로 만들어 주시오소서. 상감마마를 위해 소녀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오소서. 가장 강력한 주술은 인간의 마음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소녀의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 것입니까?”
“무녀란 것이 하기 싫다하여 그만둘 수 없는 것처럼, 하고 싶다하여 할 수도 없는 것이오.”
“그렇다면, 어찌하면 상감마마를 살릴 수 있으오리까. 어찌하면 고통스럽지 않게 하여
드리리까. 필요하다면 소녀의 피를 뽑아 쓰옵소서. 마지막 한 톨까지 기꺼이 바칠 것이옵니다.
소녀의 살점이 필요하다시면, 기꺼이 뜯어드릴 것이옵니다. 소녀의 뼈를 조각조각내어
갈아 드릴 것이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저로 인해 고통스런 상감마마께 더 이상의 고통은
없도록, 부디······.”
장씨의 깊은 한숨이 숨결이 되어 월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이 또한 자신이 저지른 죄였기에
월의 어깨를 토닥여 줄 수가 없었다.
“요상하오. 이번 일은 정말 요상하오.”
강녕전에서 혼수상태에 있던 훤의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그 옆에 대비가 자신의
아들을 눈물로 지키고 있었다. 힘겹게 눈을 뜬 왕에게로 일제히 몰려들었다.
“주상, 정신을 치리시오. 이 어미를 보아서라도. 주상!”
훤은 힘겨운 듯 입술을 움직여 작은 소리를 뱉어냈다.
“의······금부 판·····사를 불러오라. 지금······당장.”
정신이 들자마자 한 말치고는 이상하여 대비는 아들의 어깨를 잡아 다시 물었다.
“주상, 방금 무어라 하시었습니까? 이 어미가 보이시는 것입니까?”
“어마마마, 의금부 판······사를······.”
대비는 얼굴에 눈물이 범벅된 상태로 내관들에게 명했다.
“무얼 하시는 게요! 당장 의금부 판사를 대령토록 하시오!”
“하오나 상감마마께오선 의식이 불분명 하시어······.”
“내 아들은 멀쩡하오! 그러니 어서 그자를 데려오시오!”
상경내관이 선전관에게 말을 전하러 강녕전을 나갔다. 대비는 아들이 혹시라도 다시 의식을
잃을까봐 물을 적신 수건으로 식은땀에 젖은 얼굴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주상, 정신을 잃으시면 아니 됩니다. 이 어미 목소리를 잘 듣고 저의 목소리를 따라 이리
깨어 나오시오.”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의식이 눈물어린 대비의 목소리가 이끌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힘겨운 입술을 움직였다.
“서안을······, 어서······.”
대비는 아들이 지금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었다가
돌아온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해 보였다. 갑자기 의금부 판사를 찾지 않나,
서안을 찾지 않나, 대비는 걱정으로 더 큰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아들이 정상임을 믿고 싶었다.
“주상께서 명하시었다. 서안을 가져오너라!”
대비의 명령에 내관들이 재빨리 서안을 가지고 들어왔다. 훤은 대비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겨우 일어났다. 떨리는 손으로 먹을 들었다. 상선내관이 먹을 잡는 훤의 손앞을 막으며 말했다.
“상감마마, 천신이 먹을 갈아드리겠사옵니다.”
훤은 그 손을 뿌리쳤다.
“어마마마,······잠시 ······떨어져 주십시오. 그리고 다들 내 곁에서 물러나라.”
훤은 모두를 물리친 뒤, 손수 연적에 담긴 물을 벼루에 붓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힘없는 손으로
고집스레 먹을 갈고 있는 모습을 보며 분명 정상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비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바들바들 떨면서 먹을 갈던 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연우의 가녀린 모습이 훤의 눈앞에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봉서를 쓸 때 이렇게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힘겹게 먹을 갈았을 모습이 안쓰러워 눈물이 나왔다.
지금 자신이 아픈 것 보다 더 아팠다. 평소보다 훨씬 오랫동안 힘겹게 먹을 간 훤은 붓으로
먹을 찍어 종이에 올렸다. 다 갈았다고 생각했던 먹이 물만 가득하게 종이에 번져 나왔다.
훤은 자신을 힐책하듯 입술을 깨물었다. 연우도 분명 지금처럼 이랬을 것이었다. 이토록이나
힘겹게 쓴 봉서를 미처 다 읽어주지 못했던 그때의 자신이 더 없이 미웠다.
훤은 마지막 힘을 자아내어 의금부 도사에게 글을 썼다.
<세자빈 허씨의 죽음에 대해 다시 조사하라. 특히 장례식은 어찌 치러졌는지를 철저히 조사하라.>
연우의 글보다 훨씬 짧은 글임에도 붓을 잡은 손끝이 휙휙 꺾어질 듯했고, 앉아있는 숨이
끊어질 듯 고통스러웠다. 또 다시 의식이 멀어지려는 듯 혼미해졌다.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훤은 수결을 적었고, 마지막으로 옥새까지 꾹 눌러 찍었다. 훤은 봉서에 넣어 봉합한 뒤
사령을 불렀다.
“이것을 의금부도사에게 ······은밀히 전하라.”
사령이 받아들고 물러가자, 대비가 다가와 훤을 안아 부축했다.
“주상, 도대체 얼마나 중대한 일이시기에 이런 상황에서······.”
“어마마마, 걱정 하시지 마십시오.”
훤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대비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로 말했다.
“어마마마, 연우낭자를 기억하시옵니까?”
“누구?”
“세, 세자빈 간택 때······, 어마마마께오선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여뻤지요?
짙은 속눈썹에 ······새하얀 피부, 녹발(검고 윤택한 아름다운 머릿결)······.”
대비는 놀라서 자신의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렸다. 대비도 연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연우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들이 연우를 말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아들이 그녀의 원혼에 시달려 이리 아픈 것이란 생각으로까지 번졌다.
대비는 두려운 마음으로 훤을 꼬옥 끌어안았다. 혹시나 자신의 가엾은 아들이 미쳤다고
할까봐 옆의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의금부 판사가 강녕전에 들어왔다. 훤은 몸을 가눌 수가 없었기에 자리에 누워 판사를 맞았다.
“상감마마, 찾아계시었습니까?”
훤은 간헐적으로 끊어지는 숨을 헐떡이며,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위엄 있게 말했다.
“내 비록 힘겹긴 하나, 제정신이오. 그러니 잘 들으시오. 지금 당장 왕대비전으로 가서
왕대비를 온양행궁으로 모시도록 하시오.”
뜬금없는 왕의 어명이었기에 다들 의아해했다. 하지만 대비는 자신의 아들이 정신이상으로
몰릴 것을 걱정하여 옆에서 도왔다.
“효성이 지극하신 상감마마시오. 하여 왕대비마마께 병이 미칠까 걱정하시는 것을 어이하여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오! 어명을 반드시 받잡으시오!”
그제야 다들 왕의 지극한 효심에 감읍하여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훤의 의중은 그것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 월을 궐내에 머물게 했다. 궐내의 사람 입이란 것이 얼마나 가벼운지
훤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이렇게 죽음으로 몰려고 작정한 이들이라면 액받이무녀의 존재를
알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고, 연우와 월이 동일 인물임이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연우와 월은 몸은 하나인데 위험은 그 두 배로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한 번 더 연우를 죽이려 들 것이었다. 그래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왕대비부터 연우에게서 떨어진 곳에 일종의 유배를 명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왕대비는 연우의
얼굴을 알고 있기에 가장 조심해야 할 인물이었다.
훤은 다시 침을 한번 삼키고 말했다.
“상선, 의금부판사를 액받이무녀에게로 안내하여 그녀를 감금시켜라. 가장 먼저 행하라.”
이제까지 없는 듯 방안 한구석에서 침묵하고 있던 운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왕을 보았다.
다른 내관도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대비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만 갸웃거렸다.
“나라의 녹을 먹는 이가 자신의 업무를 다하지 못하여 나를 이 지경이 되게 한 죄,
벌을 받아 마땅하다! 내 몸을 일으키는 즉시, 죄를 추궁할 것이니 우선 비밀리에 나의
침전 내에 내 방과는 떨어진 곳에 감금시키도록 해라.”
정신이 다시 혼미해지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조차 힘겨웠기에 자신이 제대로 된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지만, 훤은 숨을 몰아쉬고 난 뒤, 왜 감옥이 아닌 침전에 감금시키라고
하는지 이상히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 힘겨운 입을 다시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자가 있어서 그나마 내가 숨은 건진 것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침전 내에 두어야하며,
이 순간부터 침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녀의 존재를 다른 곳에 발설을 할 시엔
지금 이곳에 있는 모두의 목을 벨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왕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운은 왕의 심중을 알 것 같았다. 왕의 침전!
이곳이 궐내에서 그나마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성숙청은 너무나 외지고 그 근처는 여자들만
있기에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왕은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혹시나 모를 이들의 손으로부터
월을 지키고자 모든 힘을 쏟고 있는 것이었다. 훤은 월이 침전으로 들어오는 것까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