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22화 (22/47)

#22

종묘대제를 위한 왕의 종묘정전으로의 대가(가장 성대한 왕의 궐 밖 행차) 행차 때문에 경복궁

일대와 한양이 동시에 시끌벅적했다. 왕의 침전도 마찬가지였다. 궁녀가 아닌 내관들이 조심스럽게

훤에게 왕의 최고 예복인 구장복을 입히고 옷고름을 매어주었다. 앞은 양 어깨에 용의 문양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저 하늘을 상징하는 화려한 검은 색만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뒤에서 보면 등에 산의 문양이 있고,

양쪽 소매 끝에 불, 꿩, 종이(宗彛, 호랑이와 원숭이)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내관이 대대(大帶)와 폐슬(蔽膝)을 받들어 훤의 가슴에 둘렸다. 그리고 차례로 패(佩)와 수(綬)를

장식했다. 마지막으로 옥대를 한 뒤 머리에 면류관을 씌었다. 훤은 눈앞을 류(旒, 앞뒤에 옥과 오색구슬

등을 꿰어 늘어뜨린 것)가 가로막는 것이 답답해서 싫었지만 구장복 자체는 좋아했다. 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7살 때, 세자 책봉식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세자 신분으로 처음

칠장복을 입고 면류관을 썼었다. 그런데 책봉의례가 길다보니, 옷은 작은 몸이 감당하기엔 엄청나게

무겁고, 면류관의 류는 눈앞에서 흔들거려 어지러운데 거기다 오줌까지 마려웠다. 온갖 대신들이

즐비하게 모여 있으니 어린 나이여도 상황의 중대함은 알았기에 의젓하게 행동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은 비비 꼬이고 식은땀까지 났었다. 하지만 훤보다 더 식은땀을 흘린 사람은 훤의

낌새를 알아 챈 부왕이었다. 그때의 부왕이 입고 있던 구장복과 같은 것을 현재 훤이 입고 있었다.

훤은 상선내관이 받들어 건네는 청옥으로 된 규(圭)를 양손으로 모아 잡았다. 그러자 뒤에 있던

소매 끝의 문양이 앞으로 드러나 더욱더 화려해졌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강녕전을 나섰다. 훤은 월대를 내려서기 전에 먼 눈길로 성숙청 쪽을 보았다.

제례 준비로 인해 6일 동안 월을 보지 못한 보고픔이 추위보다 더 사무쳤다. 매일 하루에 한 번씩

목욕재계를 하고 주위에 여인을 가까이 두어선 안 되는 법도 때문이었다. 그전에는 여인이 아니라

그저 무녀일 뿐이라 했기에, 이럴 때만 달라지는 사람들의 말에 훤은 쓴 웃음만 나왔다. 그리고

어두운 작은 방에 갇히듯 몸을 숨기고 있을 월이 가엾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궐내에 월을 가둬 두고 그녀를 더욱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닌지, 월을 조금이라도 더 위한다면

궐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건 아닌지 훤은 고민했고 또 그 고민에 당황해 하고 있었다.

왕은 근정전으로 나아갔다. 그 뒤에 다른 날과 달리 검은색 철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옆에 든 운검이

따랐다. 왕이 홍련(紅輦, 왕의 붉은 색 가마)에 오르자 내관이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전후좌우로

가리개를 내리려고 했다. 그래서 훤이 급하게 저지 했다.

“무얼 하는 것이냐? 궐 밖에 백성들이 모이지 않은 것이냐?”

“아니옵니다. 이런 추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신민이 상감마마를 뵈옵고저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사옵니다. 며칠을 달려온 이들도 있다하옵니다.”

“그런데 가리개로 나를 가리다니! 비록 백성들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나 나는 그들을 볼 것이다.

백성들도 나를 보고자 뿌리친 추위가 아니냐.”

“하오나 옥체를······.”

내관은 훤의 고집이 느껴졌기에 스스로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전후에 수십 명의 가마꾼이 홍련을

들고 일어서자 운도 검은색 바탕에 황금색 용 문양이 그려진 용문투구를 머리에 썼다. 그리고 말에

올라타서 검은색 복면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용문투구 앞에 차양가리개가 있어 눈을 감추기 때문에

운검은 머리끝부터 발끝, 심지어 타고 있는 말까지 새까맣게만 보였다. 훤은 운의 말이 홍련의

바로 뒤에 자리를 잡고 서자 혼잣말처럼 운에게 말했다.

“아깝구나. 그 잘난 얼굴을 신민은 구경도 못하니.”

운검은 왕의 말을 못들은 건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 건 건방진 흑마도

마찬가지였다.

행렬이 시작되었다. 맨 앞에는 갑옷과 무기로 완전무장한 수백 명의 군사들이 정렬하여 왕의 위용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그 뒤를 화려한 깃발과 창검들이 따르며 구경나온 백성들에게서 왕에 대해,

또한 나라에 대한 경탄과 경외심을 거둬들였다. 그 다음 왕의 홍련의 앞 뒤로 군악대가 장중한

음악을 연주하며 왕을 호위했다. 왕의 뒤로 양명군과 더불어 종친들이, 염과 더불어 문무백관들이

말을 타고 왕을 수행했고, 마지막으로 무장한 군사 수백 명이 따랐다. 길가에 오돌오돌 떨어가면서

왕의 행렬을 구경나온 백성들은 비록 왕이 가까이 오면 일제히 땅바닥에 엎드려야 했지만, 그 외의

행렬들은 일어나서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1만 명에 달하는 웅장한 행렬의 규모를 통해 자신들의 나라,

즉 왕의 건제함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행렬 이외에도 수백 명의 매복병들이

경복궁과 종묘정전 사이에 곳곳에 숨어 왕을 호위했다.

왕이 경복궁을 벗어남과 동시에 경복궁과 한양 일대는 비상계엄이 발령되었다. 왕이 경복궁에

있을 때는 모든 행정과 궁궐 수비는 왕 중심의 지배권 하에 놓여 있다. 하지만 왕이 이렇게 경복궁을

비우게 되면 궁궐 수비는 유도대신, 유도대장, 수궁대장, 이렇게 세 명의 책임 하에 놓이게 된다.

유도대신은 한양의 행정적 총책을 맡고, 유도대장은 궁성 밖과 한양의 경비를 담당하며 각각 궁궐 밖에서

비상 숙직을 했다. 이 둘은 국왕과 대신들의 협의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수궁대장은 이들과는 달리

왕의 장인인 국구가 담당하는 것이 법규였다. 그리고 수궁대장의 역할은 궐내에 숙직하면서 궁궐

안의 수비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훤이 비운 경복궁은 온전히 파평부원군의 손아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몇 달 전, 온양행궁에 행차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이것이 훤이 가장

싫어하는 법이었고, 반대로 파평부원군은 가장 좋아하는 법이었다.

훤은 축시(새벽1에서 3시 사이)에 시작되는 제례를 기다리기 위해 종묘정전의 어숙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목욕재계를 위해 어목욕청으로 들어가 물에 몸을 담갔다. 종묘정전! 죽은 왕들이

사는 궁궐이었다. 언젠가는 이곳에 훤도 모셔질 것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만 오면 왕임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미약한 자신의 힘을 더욱더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아마도 세종도 그러

했을 것이고, 성종도 그러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비도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훤은 부왕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함께 이곳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것이 마지막인지도

몰랐었다. 하지만 부왕은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음을 무의식중에 느꼈기 때문인지,

아니면 세자와 가까이 있게 되어서 인지 처음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보였었다.

어숙실 내에 있는 세자재실에 세자인 훤이 머물고, 어재실에 왕이 머물렀다. 조용히 정좌하고 앉아

있던 훤은 기분이 묘해졌다. 평소 자선당과 강령전은 너무나 멀리 있기 때문에 아버지란 존재를

느끼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곳 어숙실에선 몇 발자국만 가면 아버지가 계신 어재실에 들어갈 수

있단 생각에 아버지가 왕이 아닌 혈육으로 무한정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면류관은 벗어두고

칠장복 차림으로 앞의 뜰로 나갔다. 그런데 그곳엔 왕도 면류관을 쓰지 않은 구장복 차림으로 나와

하늘의 별을 보고 있었다.

“아바마마, 추운데 이곳에서 무얼 그리 보시옵니까?”

왕은 다른 날과는 달리 아버지 된 눈으로 세자를 보았다.

“세자야 말로 무엇 하러 나왔느냐?”

훤은 달리 할 말이 없어 하늘의 별을 보며 말했다.

“소자도 하늘의 별을 보러 나왔사옵니다.”

왕은 쓸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우리 세자는 내 앞에서 소자라 칭하는데, 양명은 꼬박꼬박 나에게 소신이라고만 칭하지.

언제부터 그랬을까······. 난 못난 아비야. 그것조차 모르고 있다니. 우리 세자는 몇 살이 되었느냐?”

“올해로 19살이 되었사옵니다.”

“열아홉. 아직도 어리구나. 내가 우리 세자를 위해서 조금은 더 살아야 할 텐데······.”

“아바마마는 강령하시옵니다. 그리 말씀하시지 마옵소서.”

왕은 여전히 쓸쓸한 미소로 훤을 보며 말했다.

“내 아들 세자. 왕도 사람이기에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나도 그러 할 것이다. 그것이 내일일지, 1년 뒤일지,

10년 뒤일지는 모르겠지만.······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소자, 새겨듣겠사옵니다.”

“······미안하다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느니.”

“무슨 뜻이온지 소자 미진하여 알아듣지 못하겠사옵니다.”

“우리 세자를 위해 지켜주고 싶었는데, 이 아비가 무능하여 놓아버리고 말았어. 미안하구나.”

“무엇을 지켜주지 못하셨단 말씀이시옵니까? 그리고 무엇을 놓아버리셨단 말씀이옵니까?”

왕은 자신의 아들이 말하는 요점을 정확하게 받아들여 준 것이 기뻤는지 환하게 웃었다.

“우리 세자는 영리하면서도 현명하단 것을 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언젠가는 나의 이 말의 뜻을

알게 될 것이야. 만약에 그런 날이 오거든, 내 미리 부탁을 하겠느니. 너와 같은 피를 가진 이들!

그들을 용서해 다오.”

훤은 왕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끄러미 왕의 눈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왕은 다정한

손길을 훤의 어깨에 올렸다. 그리고 젖어드는 눈빛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지키고자 했던 이들을 용서하고, 부디 지켜다오. 정 아니 되겠거든 제일 먼저 이 아비를

용서하지 마라.······내 아들 세자야. 왕의 자리란 쓸쓸하단다. 오직 자기 자신 이외는 모두가 언제든

적이 될 수 있고,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적과 결탁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 적이 자신의 핏줄

일 수도 있을 것이야.”

그 당시 기억을 떠올리던 훤의 이마 사이가 심하게 구겨졌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 그저 평소와

같이 왕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상황이 되고 보니 부왕이 했던 말의 뜻이

어쩌면 세자빈 사건을 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억을 악착같이 더듬어

토씨 하나, 표정 하나까지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여전히 무슨 의미인지 파악이 안 되었다.

‘세자를 위해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 만약에 연우낭자였다면, 놓아버렸단 것은 이 사건의 가담자들?

아니, 그건 아닐 것이야. 아바마마는 누구 소행인지 알고 계셨을 듯하니. 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면

용서해주었단 말이 더 맞는 말이었을 터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지켜주고 싶었다는 인물과 놓아버렸다는

인물이 같은 의미가 분명한데, 그렇다는 건?’

훤은 생각에 빠져 물에 일렁거리는 자신의 물그림자를 보았다. 그 속에 부왕이 서글픈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순간 훤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물이 요란하게 출렁이다가 차츰 차분해졌다.

찬찬히 다시 살펴보니 부왕의 눈빛과 같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물그림자의 부왕에게 마음속으로 물었다.

‘연우낭자이옵니까? 아바마마가 놓아버렸다는 이가? 놓아버렸다는 의미가 대체 무엇이옵니까?

놓아버렸다는 것은 도망가게 내버려 두었다는 뜻인데, 연우낭자가 도망이라도 했단 말씀이옵니까?’

마음속으로 아무리 물어도 부왕의 눈빛은 답이 없었다. 물속에 있는 부왕의 눈빛에 다시 물었다.

‘지켜야 하는 핏줄들은 또 무어란 말씀이옵니까? 제가 용서해야 하는 핏줄이 혹여 할마마마만이

아니란 말씀이옵니까?’

답이 없는 물속의 눈빛을 일렁이는 물결이 산산조각 내며 흩어 버리고 말았다.

축시가 시작되는 종소리가 보루각에서 시작되어 종각에도 울러 퍼지자, 일렁이는 물결에 산산조각 난

훤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종묘제례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자신의 형인 양명군도 가까이에 있었다.

하지만 제주는 형인 양명군이 아닌 왕인 훤의 몫이었다.

해가 떠 날이 밝아져서야 모든 종묘제례는 끝이 났다. 그리고 환궁을 위한 어가 행렬이 다시 시작되었다.

근 7일간 월을 보지 못한 훤은 어서 강녕전에 들어가자마자 월을 불러 볼 것이란 기대로 마음이 조급했다.

그리고 오늘 정무는 쉬기 때문에 하루 종일 월을 곁에 둘 것이란 생각도 했다. 그래서인지 종묘정전으로

가던 길과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길이 같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길이 훨씬 길게 느껴졌다.

강녕전에 들어서자마자 내관에게 일러 월을 데려오라 명했다. 그러고도 무거운 구장복을 벗지 않았다.

구장복은 왕이 가례를 치를 때 입는 옷이기 때문에 어쩐지 월에게 자신의 차림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운도 투구만 벗은 채로 갑옷 차림 그대로 있어야 했다. 훤이 월을 기다리기가 조급하여

자리에 일어선 채로 서성거리고 있자니 문 밖에서 내관이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상감마마, 중전마마 드셨사옵니다.”

월이라 생각하고 반가웠던 마음에 순식간에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들라 해라.”

문이 열리고 화려한 가체와 당의 차림의 왕비가 들어왔다. 하지만 의복이 아무리 화려해도 혈색은

더 없이 어두워만 보였다.

“어쩐 일이요?”

훤의 차가운 말에 중전은 멈칫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례는 잘 치르셨는지요?”

“어느 때와 다름없었소. 다른 볼일은 없는 것이오?”

“네? 아, 그것이······.”

중전도 이렇게 오고 싶지 않았다. 왕에게 와야 할 일이 생겨도 온갖 핑계를 대면서까지 안 오려고

애를 썼지만, 오늘은 파평부원군의 잔소리에 어쩔 수 없이 올 엄두를 낸 것이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나가라는듯한 왕의 종용을 당하자, 힘들게 생각해둔 대화거리가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교태전에서 뿐만이 아니라 왕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 또한 단 한순간도 왕비였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중전의 눈에 비친 왕 또한 단 한순간도 지아비였던 적이 없었다. 왕비가 나가지 않고 앉아있자

훤은 이대로 있다가는 월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귀찮은 듯 말했다.

“밤 새 제례를 올렸더니 피곤하오.”

“아! 제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사옵니다. 그럼 편히 쉬시옵소서.”

중전은 당황한 마음으로 급하게 일어나 물러나갔다. 나온 방의 문이 등 뒤에 빈틈없이 닫히자 중전은

조용히 서서 슬픈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의 죄업입니다. 그 죄업의 대가가 상감마마의 미움이옵니다. 이 이름뿐인 중전이란 자리는

바로 상감마마의 미움과 맞바꾼 것이니, 제가 어찌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중전이 강녕전에서 나오려는 찰나, 월이 월대의 첫 계단에 막 발을 올리려고 하고 있었다.

월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누가 나오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무의식중에 급히 월대의 계단 옆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월이 몸을 숨긴 찰나에 중전은 월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중전이 월대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궁녀들을 거느리고 양의문을 넘어가는 모습을 월은 숨죽이고 보았다. 한때 만났던

사이였다. 그리고 연우가 세자빈으로 간택 되었을 때, 저 여인도 연우 앞에서 큰 절을 올렸었다.

월은 한참을 몸을 숨기고 있다가 강녕전으로 들어갔다. 월이 아뢰고 방으로 들어서는 것을 훤은

환하게 웃으며 저리에서 일어나 맞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기까지 기다리는 것도 못 참아

월에게 다가갔다. 운은 왕의 옆에 서 있다가 고개를 월의 반대편으로 돌려 자신의 마음을 감추었다.

월은 눈앞에 왕이 성큼 다가오자 얼른 허리를 숙였지만, 이내 훤의 손에 잡혀 고개를 들어야 했다.

훤이 월의 턱을 잡고 눈길을 서로의 시선에 맞추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밝은 햇빛 아래에서 둘은

만나게 되었다.

“네가 이리 생겼었구나.”

훤은 기뻤지만 월은 구장복의 위용에 눌려 가슴이 막막했다. 어쩌면 조금 전 중전을 본 가슴이

더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훤은 월을 구장복으로 감싸 안았다. 이렇게 한다고 해도 월의 신분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밝은 낮에도 입고 있는 하얀 소복을 가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 전

화려한 중전의 의복을 보았기 때문인지 월의 옷에 가슴이 저렸다.

“제례는 잘 치르셨사옵니까?”

“7일이 너무나 길었다.”

“소녀도 같이 기도하였사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였단 말이냐?”

“······무녀로서 종묘사직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였사옵니다.”

“무녀로서라······. 그러하면 올 한 해를 예언해 보아라! 내가 중전에게서 원자라도 볼 것 같으냐,

아니면 조선 땅에 대풍년이라도 들것 같으냐?”

훤은 화풀이를 하는 것인지 월의 가냘픈 몸을 부셔버리려는 듯 힘껏 끌어안았다.

격앙된 훤의 목소리와는 달리 월은 바닥에 깔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자를 보셔야 하옵고, 풍년은 들어야 하옵니다. 새해 들어 파루의 북소리가 여전히 북으로 치는 것을

들었사옵고, 종각에서도 북소리가 올라오는 것을 들었사옵니다. 하오니 올해도 풍년일 것이라

모든 신민이 기뻐하였을 것이고, 또한 상감마마의 성은에 감읍하였을 것이옵니다.”

훤의 눈빛이 차갑게 멈추었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과는 반대로 최대한 따뜻하게 말했다.

“여전히 북소리이지. 예전에는 파루도 종소리였는데, 그렇지?”

“네, 예전에 종각에서 올라오는 파루가 종소리로 들리면 가뭄이 든다하여 걱정하곤 하옵지요.”

“······월아, 종각이 한양 외에도 있더냐?”

월은 자신의 말에서 훤이 무언가를 알아챈 것을 느꼈다. 그래서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단단히 힘을 준

훤의 팔 안에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훤의 머릿속은 재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파루를 알리는 소리는 원래 북으로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가뭄이 들 것이라고 관상감에서

예언을 하게 되면 그 해는 북소리를 종소리로 바꾸는 것이 관례였다. 가뭄은 음의 기운이 부족하여

생기는 것이기에 양의 소리인 북소리 대신에, 음의 소리인 종소리로 음의 기운을 돋우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왕 대에서 자주 발생했고, 훤이 등극하고 나서부터는 단 한 번도 파루를 종소리로

알린 적이 없었다. 이것을 들었다는 것은 월이 살던 곳이 한양 도성 안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훤이

놀란 것은 다른 것에 있었다. 그것은 월이 실수로 흘린 언어습관이었다. ‘종각에서 올라오는’ 이라는

표현은 특정 구역에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바로 고관대작들이 모여 사는 북촌! 종각을 가운데 두고

남쪽으로는 일반 서민이나 중인, 당하관들이 주로 살고 있었기에 그들은 ‘종각에서 내려오는’이란

표현들을 썼다. 하지만 북쪽에는 대부분이 당상관 이상의 고관대작들이 모여 살았고, 그들은 ‘종각에서

올라오는’이란 표현이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다. 훤은 월의 정체를 정리해보았다. 월은 적어도 6년

이전까지는 한양의 북촌에 살던 당상관 이상의 고관대작의 여식으로 많은 책을 읽은 여인이었다.

훤은 이 조건에 부합하는 여인 중에서 단 한명만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연우였다.

훤은 월을 자신의 품에서 거칠게 떼어내어 다시 얼굴을 보았다. 낯이 익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에서야 닮은 이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얼굴도 모르는 연우와 서찰을 주고받으며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수천 번도 더 얼굴을 만들어보았던 자신의 정비인 연우와 너무도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훤의 머릿속으로 취로정에서의 일과, 온양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번개처럼 들어와 박혔다.

월의 말들과 표정들도 연우가 되어 심장으로 박혀들었다. 그래서인지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고통스러웠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던 월의 눈이 새파랗게 놀란 것도 보였다. 하지만 월이 본 것은

훤의 입술이었다. 새파랗게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식은땀도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훤이 가슴을 쥐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상감마마!”

월의 놀란 외침에 내관들이 놀라서 달려왔다. 훤도 단순히 놀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몸에 살(殺)이

날아왔음을 깨달았다. 훤은 바들바들 떨리는 팔을 뻗어 남아 있는 힘을 자아내어 힘껏 월을 밀었다.

“내······, 내 옆에······오지 마라!”

하지만 월은 언제나 물러나던 평소와 반대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더욱 앞으로 다가와 왕을 끌어안았다.

왕을 안은 팔도 떨리고 있었다. 상선내관도 새파랗게 질려 왕의 면류관을 벗겼다. 훤은 정신이

아득해 지는 순간에도 자신의 액받이인 월의 몸만이 걱정되었다.

“무엄하다! 노······놓아라. 네게 나의 살이······, 아니 된다. 물러나라. 최대한······나에게서······.”

“아니 되옵니다. 마마! 정신차리시옵소서. 마마!”

월의 울부짖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 애달픈 소리에 이끌려 정신이 힘겹게 돌아오려 했다.

어의가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왕을 끌어안고 있던 월을 밀쳐내고 왕의 손목을 잡아 진맥했다.

그 뒤를 명과학교수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왕이 아닌 액받이무녀를 보고 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네가 어찌 멀쩡한 것이냐! 무녀가 맞는 것이냐?”

아득한 정신 가운데서도 훤은 그 말을 주워들었다. 하지만 고통 때문에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훤이 말했다.

“운아! 월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라!”

운이 움직이자 명과학교수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 되옵니다! 그나마도 곁에 두어야 하옵니다!”

명과학교수 뿐만이 아니라 월도 왕에게 매달렸다.

“마마! 있을 것이옵니다. 있어라 하시옵소서.”

운의 손끝이 월의 뒷목덜미를 내리쳤다. 이윽고 월이 힘없이 쓰러졌다. 운은 정신을 잃은 월을

번쩍 안아들었다. 상선내관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무얼 하시는 게요, 운검! 진정 상감마마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운검이 아니오!

당장 그 무녀를 내려놓으시오!”

“소인은 상감마마의 어명만을 받잡습니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운의 말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왕을 배신한 운은 그대로 월을 안고

강녕전 밖으로 나갔다. 왕이 아닌 오직 월을 위해 한 행동이었기에 명백하게 왕을 배신한 마음이었다.

훤은 어지러운 운의 마음까지 읽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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