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18화 (18/47)

#18

막상 염의 집 앞에 도착한 운은 말과 더불어 꼼짝도 하지 않고 오직 대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옷의 어깨와 머리 위, 그리고 붉은 운검 위에 하얀 눈이 쌓이고, 말의 검은 갈기에도 눈이

쌓여 가는데, 눈동자의 움직임 하나 없이 마치 돌로 굳은 석조인간 마냥 말 위에 앉은 채로 있기만 했다.

말의 입과 코에서 뿜어 나오는 김이 아니었다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운의 꾹 다문 입술은 마음속에 있는 의문과, 그리고 드러내선 안 되는 자신의

마음을 가슴속에 쌓아두기라도 하듯 하얀 입김조차 뱉어 내지 않았다. 마침 하인 하나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문을 연 하인의 눈에 들어 온 것은 눈발 속에 있던 시커멓게 큰 형체였다. 순간 눈에 들어온

그것의 위용에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놀란 마음으로 다시 찬찬히 보니

싸늘한 눈으로 자기 쪽을 보고 있는 것은 운검나으리였다. 하인은 벌떡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눈을

털어낼 경황도 없이 운검 앞으로 갔다.

“나, 나으리, 부르셨는데 소인네가 못들은 것입니까? 눈이 소리를 삼킨듯한데 이를 어찌합죠?”

운은 감정의 흐름 없이 말만 내뱉었다.

“아니다. 부르기 전이다.”

운은 말 위에서 훌쩍 땅으로 내려섰다. 운의 흑목화 아래에 흰 눈이 밟혀 푹 패지었다. 하인이

말의 고삐를 잡으려고 하자, 흑마는 냉정하게 그 손길을 뿌리치고 운 쪽으로 두어 발 떼어 붙었다.

운이 직접 고삐를 하인에게 건네고 말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었다. 그러니 고집 센 말은 겨우

하인의 손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눈을 털고 따뜻하게 해주거라.”

“네. 당연하옵죠.”

운이 말과 같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 어린 하인 놈이 부리나케 사랑채의 염에게로 달려가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의빈자가! 운검이 말을 타고 왔습니다.”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염은 깜짝 놀라 사랑방 문을 열었다. 여간 바쁜 일이 아니면 말을 타고

여기로 오진 않는 운이었고, 게다가 이런 눈을 맞으면서까지 올 일이란 것은 그만큼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랑채의 대청에 나가선 염의 눈에 이내 운이 들어왔다.

운은 염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앞으로 걸어왔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운은 염의 놀란 눈을 보고서야 자신의 방문이 뜬금없는 짓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저 지나던 길에 잠시······.”

“아, 우선 안으로······.”

운이 섬돌 위에 올라서 목화를 벗으려 하자 염은 운의 머리와 어깨에 묻어 있는 눈을 털어주었다.

그리고 사랑방으로 들어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도 염의 불안한 눈빛은 거둬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운은 자신이 눈 속을 헤치면서까지 여기 온 타당한 핑계를 대야했다. 열심히

궁리하다가 오늘 왕이 원구단 제천의례를 거행하겠다는 어명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상감마마께옵서 소격서에 일러 원구단에서 제천의례를 주관하라 하시었답니다.”

염의 표정이 걱정으로 일그러졌다.

“어찌 그런······. 그렇게 되면 성균관이나 사림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인데. 어떠한 어심이시기에

그들을 적으로 돌리려 하시는 겁니까? 나 또한 비록 주자학에 심취하여 있긴 하나, 사림세력은

주자학 이외의 것은 모두 미신이라 치부하는 편협 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중국만이 전부이며,

명나라만을 신봉하는 명사대주의자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환웅을 몰아내고 중국의 공자에

절을 올리는······. 하여 조선의 역사서들마저도 중국 중심으로 죄다 고치는 폐단을 일삼고 있고

심지어 단군조선보다 기자조선을 우선으로 하고 있는데, 원구단이라······.”

“아울러 유향소를 원활하게 하라 명하시었습니다.”

“더 더욱이나 모르겠습니다. 사림뿐만이 아니라 외척까지 적으로 돌리시려는 것입니까?”

이때 여종이 따뜻한 차를 다반에 내어왔다. 그래서 잠시 말을 멈추고 여종이 물러나가길 기다렸다.

둘은 차를 마시며 침묵했다. 염은 왕의 의중을 생각하느라 침묵했고, 운은 연우에 대해 어떻게

물어봐야 하는지 골몰하느라 침묵했다. 침묵은 염이 먼저 깨뜨렸다.

“분명 제가 다 헤아리지 못하는 어심이 계실 것입니다.”

“반대하시진 않을 것입니까?”

“전 의빈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 어떤 말도 드릴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전 현리(玄理, 노자 장자의 도.

즉, 도교) 또한 즐겨 읽는 몸입니다. 주자학만이 전부라 여기지도 않을 뿐 아니라 원구단을 없애지

않는 것은 명나라에 대한 우리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생각합니다. 허니 전 언제나 상감마마의 뜻을

봉숭합니다.”

이렇게 마무리를 했으니 염의 입에선 더 이상 이 일에 대한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운은 자신의 본래 목적을 슬슬 꺼내야 했다.

“갑자기 생각 난 것인데, 옛날 여종 하나가 검술 연습을 하고 있으면 몰래 훔쳐보곤 하지 않았습니까?”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 아! 우리 연우의 몸종이었던.”

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연우의 이름이 입에 올려지자 이내 참담한 표정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슬픈 표정을 가리려는 듯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그런 염을 상대로 계속 물어야 하는

운의 마음도 복잡했다.

“그 몸종, 현재 어찌 되었습니까?”

“글쎄요······. 그 즈음에 어디론가 팔려간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보이지 않았으니.”

“어디로 팔려갔는지는 모르십니까?”

“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아이를?”

“그냥······. 혹여 이름은 기억하십니까?”

염은 조용히 생각하다가 밖에 눈 내리는 소리에 불현듯 생각났는지 말했다.

“설! 설이라 하였습니다.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제가 그 아이의 이름을 설이라 바꿔주었습니다.”

운은 눈으로 염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염은 빙그레 웃으며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처음 우리 집으로 팔려왔을 때 그 아이의 이름은 아마도 ‘이년’ 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무렇게나

부르다 그 이름이 되어버렸겠지요. 그래서 제가 부르기 민망한 이름을 우리 연우의 옆에 두게

할 수 없었기에 설이란 이름으로 바꾸라 하고 노비문서의 이름도 설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또 다시 연우란 이름에 염의 표정이 슬프게 변했다. 이번엔 염의 표정을 외면하기 위해 운이 차를

마셨다. 물어보아야 했다. 말마다 꼭꼭 ‘우리’란 말을 앞에 붙이는 연우란 존재에 대해,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해 물어보아야 했다. 그렇기에 염의 표정까지 가슴에 느껴선 안 되는 것이었다.

“누이 되시는 분, 의빈자가와 많이 닮았었습니까?”

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미소보다 눈물이 먼저 떨어져 내릴 듯해서 운은 더욱

눈을 다반 위의 찻잔에 고정했다. 염의 떨리는 목소리가 답했다.

“네.······누구나 그리 말하였지요. 일가친척들이 모이면 우리 연우와 저를 모르는 누가 보아도

남매로 아니 볼 수 없을 거라······, 그리 농담을 하곤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언제나 같이 있었기에

말하는 모양새나 표정까지 저를 닮아간다며 선친께서 걱정을 많이 하시었······.”

염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슬픔을 삼키려는 듯 차를 삼켜 가슴속으로 밀어 넣었다. 슬픔을

내리 깐 눈길은 월과 판박이 마냥 똑같았다. 찻잔을 바쳐 든 아름다운 손의 모양새도 똑같았다.

새하얀 피부도 똑같았고, 단정한 귓바퀴의 모양도 똑같았다. 그리고 은은히 풍겨 나오는 품격 있는

난향도 똑같았다.

“의빈자가껜 언제나 난향이 납니다. 혹여 그것도 닮았습니까?”

“그랬었지요. 우리 연우는 꼭 난목욕을 하였습니다. 모친께서 복숭아꽃등을 말려 갈아둔 것이 있는데

그건 아니 쓰고 선친과 제가 쓰기 위해 둔 난초가루를 꺼내 썼지요. 선비의 향이라 그리 하지 말라

하여도······.”

그래서 염은 누이의 향을 잊지 않기 위해 아직까지 변함없이 난향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연우 또한 오라비의 향기를 잊지 않기 위해 난향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리라 운은 생각했다.

“참으로 많은 서책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운의 말에 염은 살포시 고개만 끄덕였다. 운이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인 된 몸으로, 그리고 그 나이에 그리 많은 책을 읽는 경우가 거의 없지요?······아마도,······살아있다면

지금쯤 상당한 수준에 이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만.”

“여전히 제 서책에 눈독을 들였겠지요. 살아있다면······.”

“······무덤에는 자주 가십니까?”

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한번 무덤을 찾아가면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무덤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느라 내려오는 때를 놓치곤 했기에 잘 찾아가지 않았다. 아직도 어디선가 연우가 맑은

목소리로 오라버니를 부르는 것 같고, 돌아보면 여전히 미소로 다가올 것만 같기에, 무덤을 볼

때마다 매번 죽어지는 연우를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연우낭자를 세상 뜬 바로 그날 묘혈 안에 넣었다 하였지요?”

“나의 천추의 한이 될 것입니다. 우리 연우를 그리 보낸 죄 많은 오라비라······.”

운은 차마 묻기 미안해서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무겁디무거운 질문을 했다.

“연우낭자가 관에 들어가는 것을 보시었습니까?”

염이 한숨인지, 대답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말을 입 밖으로 내었다.

“네. 염습도 아니 하고, 노잣돈도 아니 넣고······. 우리 연우는 관도 참으로 작더이다.”

“관이 묘혈에 들어가는 것을 직접 보시었습니까?”

염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묘혈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연우는 월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었다. 그 순간 운의 마음이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안심된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놀랐다. 또한 알게 되었다. 안심이 된 이유, 도착하고서도 대문 밖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이유, 그것은 바로 월이 연우가 아니길 바라는 숨어있던 운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연우는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던 여인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곧 중전이 되어야 하는, 운검은 감히

올려다보아서도 안 되는 신분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자인 운검에게 있어서 무녀인 월의 벽보다,

중전인 연우의 벽은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차라리 그저 무녀이기만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어진 염의 말에 운의 몸이 차갑게 굳어졌다.

“우리 연우는 몸도 굳지 않더이다. 죽은지 어느 정도 지나면 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하던데,

선친께서도 세상을 버리셨을 때 그러하였는데 그 아이는 차갑기만 할 뿐 굳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여 청지기(대갓집의 집사)가 혹여 깨어날지 모른다고,······이리도 새하얗게 어여쁜데 아까워

어찌 땅에 묻을 수 있냐며 아니 묻겠다 선친께 아뢰는 것도 보았습니다.”

“몸이 굳어지지 않았다니요?”

목소리의 변화는 없었지만 염도 운의 이상한 놀람이 느껴졌다.

“선친께선 그 아이가 병상에 있을 때 마셨던 탕약 때문이라 하시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염도 말하고 보니 이제야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부친의 죽음을 겪지 않았다면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지만, 두 시신의 상태가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사후경직이란 것을 생각한다면

연우는 거의 살아있었던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숨을 쉬지 않고 맥박이 뛰지 않는 것, 그리고

차가운 것. 딱 이 세 가지만 아니면 잠자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 새롭게 기억이 났다.

하지만 생각은 이상하다는 것 아래에만 그쳤고, 지금 살아 있으리라는 것은 감히 추측도 하지 못했다.

“흙으로 덮고 봉묘를 만드는 것도 보시었습니까?”

“······부끄럽게도 그건 못 보았습니다. 제가 그만 까무러치는 바람에.”

운은 충분히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다. 염과 연우는 다른 남매들과는 달리 사이가 유별날 정도로

좋아보였다. 특히 염의 연우를 귀애하는 마음은 곧잘 양명군의 빈축을 사곤 했을 정도였다.

남매가 있어도 각각 배다른 사이고 더군다나 얼굴도 겨우 알며 지내는 운은 그런 남매애가

부럽기도 했었다.

“그럼 봉묘를 만드는 것 까지는 누가 보았습니까?”

“선친과 청지기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았다고 들었습니다.”

관을 묘혈 속에 넣어 봉묘까지 만들었다면 절대로 살아날 리가 없었다. 만에 하나 살아있는

자를 생매장 시켰다고 해도 바로 즉시 파내지 않았다면 살아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도술이라도

부리지 않은 한에는. 운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불안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다 마신 찻잔을 손에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도술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술을 부릴 수 있는 자가

월의 옆에 있었다. 조선에서 제일 신력이 높다는 장씨도무녀! 월의 신모였다. 그 이름 높은

도무녀가 이 일의 가운데에 있었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무녀 중에 죽은 것처럼

보이는 약을 먹이고는 굿을 하여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되살리는 것 마냥,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는 술수를 쓰는 간악한 무리가 있다는 것은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방법을 알고 있다면

연우의 죽음도 충분히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에 장씨도무녀도

7년 전, 성숙청에서 사라졌었다는 말을 들었다. 우연치고는 참으로 묘한 연관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월이 연우일거라 여겨졌다. 이번에는 확신에 가까웠다. 그래서 운의 심장은 차갑게

얼어져 버렸다. 염은 자신의 감정을 추슬러 세우고 뒤늦게 미소로 말했다.

“이상한 일입니다. 양명군도 아니고 제운이 우리 연우에 대해 묻다니······.”

“그저 의빈자가를 뵈니 누이와도 닮았었는지 갑자기 궁금하였을 뿐입니다.”

염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옛날 연우가 살아있을 때 양명군이 연우에게 그리도 관심을 보여도

운은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당시엔 연우와 닮았는지 관심도 없던 사내가

이제 와서 궁금해 한다니 이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만 가보아야겠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습니다.”

염도 따라 일어나 운과 같이 밖으로 나갔다. 아직까지 눈발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멀리 중문간행랑채에서 손님이 나가는 것을 본 청지기가 달려 나왔다. 운은 염에게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인사하고 대문으로 갔다. 대문에는 하인이 말을 데려와 운에게 고삐를 넘기고 사라졌다.

대문 밖에 까지 손님을 배웅해야 하는 청지기만이 남자, 운은 조용히 말했다.

“오늘 의빈자가의 누이분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다.”

청지기는 운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 신기하여 휘둥그레 쳐다보았다. 운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자네가 봉묘를 만드는 것 까지 보았다고?”

“네, 그랬습죠.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정경부인(貞敬夫人)께선 자리를 보전하고

누우셨고, 의빈자가께선 실신하시었고, 집안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돌아가신 주인어르신만이

봉묘를 만드는 것을 그저 보기만 하셨는데, 그 속이 어디 사람 속이었겠습니까?”

“봉묘까지 다 만들고 바로 그곳을 내려왔는가?”

“네, 그랬습죠. 전 내려왔다가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봉묘를 둘러보러 갔었지만.”

청지기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때가 생각났는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가슴 아프실까봐 윗분들께는 소인네가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까마귀 떼인지,

들짐승인지 우리 아기씨 봉묘를 파헤치다 말았더라구요. 제가 다시 안 가봤다면 큰일이었을 겁니다.

그리 가신 것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질 노릇인데······.”

파헤치다가 만 것이 아니라 파헤쳤다가 다시 덮던 중이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월은 연우였다. 그리고 지금 중전에 있어야 하는 신분임이 분명했다.

운은 말에 올라 궁궐로 향했다. 흔들리는 운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말은 운이 흔들리지 않게

조심스레 걸었다. 운은 하늘로 얼굴을 들었다. 태양을 가린 구름이 눈을 뿌리는 것일 텐데도

하늘의 구름은 눈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운은 입 안에서 하얀 김을 뽑아 하늘로 올렸다.

하지만 운의 뜨거운 마음을 내팽개치기라도 하듯 입김은 하늘로 오르다 말고 무겁게 땅으로

떨어지며 사라졌다. 운은 눈을 게슴츠레 떠서 하늘을 쏘아보았다. 굵어진 눈발에 체온은 떨어져갔지만

운의 심장의 뜨거움은 그것과는 달리 더 올라만 가고 있음에 원망스러웠다.

“나의 목숨은 내 것이 아니라 나의 주군의 것인데, 어찌 심장은 따로이 노는 것이냐······.”

염은 운이 헤집고 간 마음을 정돈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청 앞에 서서 떨어지는 눈만 물끄러미 보았다.

이제는 연우의 죽음을 잊어야 하는데도 쉽지가 않았다. 어디선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투둑하고

떨어져 내리는 소리에 눈길이 갔다. 아직도 연우가 장난을 친 것이라 착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어린 연우는 눈 내린 마당을 뛰놀며 눈뭉치를 염에게 던지고 있었다. 눈뭉치를 맞은

어린 염도 눈을 뭉쳤다. 하지만 맞아서 연우가 다치기라고 할까 걱정되어 느슨하게 뭉쳤고,

이것은 언제나 연우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공중에 부스스 흩어져 내렸다. 마당 여기저기에

어린 연우의 발자국이 찍혀졌다. 어린 염의 발자국도 찍혀졌다. 대청 앞에 서 있던 염은 눈 내린

마당에 내려서서 발자국을 찍어보았다. 그때의 발자국보다 분명 커져 있었다.

“연우야, 너의 발이 네게로 왔나보구나. 그때의 너와 나의 작은 발이 합하여 지금의 내 발 크기가

된 것이어니······.”

염은 어린 둘의 발을 합한 발자국을 마당에 천천히 찍어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뽀드득하는

발자국 소리가 연우의 발자국 소리인양 느껴졌다. 그래서 얼굴에선 미소가 머금어졌지만 눈에선

눈물이 고였다가 떨어졌다. 그러고 있자니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염은 또 다시 연우로 착각하고 말았다. 재빨리 돌아보았다. 그런데 눈에 들어온 건 연우가 아니라

민화였다. 염은 눈물 흘린 것이 부끄러워 다시 재빨리 고개를 돌려 눈물을 감추었다. 그렇게

자신에게서 등을 보이며 선 염으로 인해 민화의 가슴은 메어졌다. 미처 눈물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등이 눈과 더불어서 더 없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애꿎은 옷고름만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염은 얼굴에 묻은 눈을 털어내듯 눈물을 닦고 목소리를 평온하게 하여 말했다.

“추운데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었기에 염의 부드러운 목소리도 민화의 메어진 가슴을 풀어 내리진 못했다.

일이 있어야만 여기 올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왔을 뿐이기에 오기 온 이유를

물으면 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더 고개만 떨구었다. 게다가 오늘밤은 부부합방의 약속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해서 눈이 펑펑 내리면 어떻게 되는 건지 묻고 싶기도 했다. 몇 안 되는

합방일이 날씨 때문에 물 건너 갈 판이었다. 이건 민화에게 있어선 천재지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서방님은 아니 추우시어요?”

염은 그제야 몸을 돌려 민화를 보았다. 눈물로 콧등과 눈시울이 빨개진 건 추위 때문으로 보였다.

“옷이 얇아 보입니다. 공주께서 추우시겠습니다.”

민화는 염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용기 내어 고개를 들었다. 염의 부드러운 표정이 눈앞에 있었다.

더 이상 빨리 뛸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심장이 쿵쿵 거리며 심하다 싶을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눈이 소리를 흡수하지 않았다면 염에게 자신의 뛰는 심장소리가 들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소첩, 춥사와요.”

이렇게 말하면 염이 따뜻하게 안아 줄 것 같았다. 그런데 염은 이런 경우에도 융통성이란 것은 없었다.

“그렇게 보입니다. 코가 새빨간 것이. 이리 계시지 말고 내당으로 들어가십시오.”

“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조금 전까지는 그러했지만 이젠 서방님과 같이 있으니 춥지

않사와요.”

“아닙니다. 많이 추워 보이십니다. 대체 민상궁은 어디 있는 겁니까?”

염은 진심으로 민화의 몸이 걱정되었던 것인데, 민화는 염이 자신을 빨리 내당으로 보내려고 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풀이 죽어 겨우 말했다.

“사랑방에 들어가면 아니 되어요? 같이······.”

“아, 그럼 우선 급하게 사랑방에 들어 몸을 녹입시다.”

이렇게 민화는 참으로 힘겹게 사랑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방에 들어간 순간 민화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안에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화의 뒤를 따라

들어온 염도 깜짝 놀랐다. 안에는 소리 소문도 없이 양명군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여긴 어찌 들어오셨습니까?”

“월장하였네. 내가 월장에는 일가견이 있지 않은가?”

양명군은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심상찮아 보였다. 양명군은 민화를 보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내외간에 정이 두텁기도 하구나. 비록 눈이 내려 어둡긴 하나 아직 대낮인건 분명한데

이리 붙어있으니.”

민화는 속도 모르는 소리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염이 옆에 있어서 꾹 참았다.

양명군은 이번엔 염을 보며 말했다.

“우리 집 안으로 소인배 몇 마리가 걸음을 하였다네. 하여 이리 피신을 온 것이야. 오늘밤 여기에

숨어 있으면 아니 되겠는가?”

염은 운이 말해준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인 뒤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민화는 그런 것을 모르기 때문에 양명군의 오늘밤 기숙하겠단 말이 그렇게 분통터질 수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밤 합방은 완전히 깨어진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건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재지변이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양명군을 쏘아보았다. 염이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민화에게 말했다.

“여기 양명군이 오셨단 것을 비밀로 하여주십시오. 아랫것들에게도 조심하시고.”

아무래도 많이 심각한 모양이었다. 민화는 궁에서 태어나 궁에서 자란 공주였다. 그렇기에 이런

살얼음 같은 분위기는 피부가 먼저 알게 되었다. 분명 상감마마와 관련해 조정에 위태로운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민화는 더욱더 양명군이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의빈에게

쪼르르 달려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혹시나 염에게 좋지 않은 불똥이라도 튈까 싶어 민화는 미리

마음이 불안해졌다. 양명군은 방안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다반을 보았다.

“내외간이 같이 마신 것인가?”

“아, 아닙니다, 방금 제운이 다녀갔습니다. 마주치지 못하였습니까?”

“참으로 아깝군.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그를 보았을 것인데.”

염은 민화에게 그만 내당으로 건너가라는 눈짓을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민화는 사랑방을

나가야 했다. 민화가 나가고 나자 염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제운의 말로는 원구단에서 제천의례를 거행하라 어명을 내리셨다 하였습니다.”

“명나라에 대한 자신감이지. 그리고 조선이 그 위의 왕조들을 이었다는 정통성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하고. 조선이 명나라에 대해 사대를 하게 된 것도 정통성 부재로 인한 것이었으니, 날 때부터

적통으로서의 정통성을 지닌 금상(현재의 왕)은 그러한 바탕에서 나온 제후의 예는 우습기 그지없을

수밖에. 단지 사대사상에 젖은 신하들이 상감마마의 뜻을 따라 줄지가 걱정이야. 당장 간신배가

내게 아첨 넣으러 온 것을 보면 이번 사태는 심각한 것 같더군.”

양명군! 비록 서자이긴 하지만 왕의 형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후사도 없는 왕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신하들이 잘못되게 만들기라도 한다면 다음 왕좌는 제일 먼저 양명군의 차례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신하들이 발길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 왕이 위험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걱정 어린 염의 표정을 본 양명군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상감마마의 성명(聖明, 임금의 밝은 지혜)은 익히 알고 계시지 않은가? 난 괜찮을 것이라 생각한다네.

오히려 걱정해야 하는 놈은 파평부원군일세, 그려. 그동안 숨겨왔던 칼을 정식으로 꺼내 겨눈 격이니.

내 오늘밤에 이곳에 거했다가 눈이 그치면 내일 오전 깨에 저잣거리에 나가 의복 풀어 헤치고

술에 취해 잠들어, 오가는 신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겠네. 아주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얼어 죽기 전에 사람을 보내주게나. 하하하.”

염은 양명군을 부드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양명군은 소리는 웃고 있었지만 표정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영특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숨기려 애를 쓰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도 이번에는 왕의

선포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귓불의 세환귀고리를 자꾸만 만져대는 버릇, 그것은 그가 극심하게

불안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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